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358화 (358/862)

8화. 차정우 (4)

[오벨리스크에 접속하셨습니다.]

[플레이어의 개인 정보를 확인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게 뭐야?”

시야가 잠깐 어지러워진다 싶더니 나타난 세상.

나는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고 잠시간 멍하니 있어야만 했다.

분명 방금 전까지 내가 있었던 곳은 새하얀 벽으로 가득한 병원 복도였을 텐데.

지금 여긴 온통 시커먼 벽돌로 이뤄진 밀실이었다. 천장에 박힌 돌의 발광(發光)으로 겨우 내부를 확인할 수 있는 협소한 크기의 밀실.

게다가 내 눈앞에는 이상한 홀로그램 같은 것이 둥둥 떠 있었다.

오벨리스크?

플레이어의 개인 정보?

하나같이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는 말들이었다. 영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광경.

병증이 심해지다 못해 이제는 환각까지 보이는 걸까.

“누구 없어요? 누구 없냐구요?”

없냐구요…… 냐구요…… 구요…… 요…….

내가 크게 낸 목소리는 벽돌에 이리저리 부딪치면서 메아리를 요란스럽게 만들어 냈다.

그제야 정신이 퍼뜩 들었다.

이건 둘 중에 하나였다.

내가 정말 미쳤거나.

아니면.

“……현실이든가.”

우리 못난 인성 파탄자 형이라면 여기가 어디냐면서 길길이 날뛰었겠지만.

나는 일단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면서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자 했다.

사실 두 가지 가정 중에서 더 현실적인 판단은 전자였다.

내가 가진 희귀병은 아직 의사들도 제대로 판별하기 어렵다고 할 정도였으니, 그 증상에 뒤늦게 환각이 뒤따른다고 해서 이상할 건 하나도 없었다.

어머니께서 갑자기 쓰러지신 스트레스로 뇌에 어떤 영향이 미쳤어도 이상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만약 이게 진짜 환각이라면, 당장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외부에서 내 증상을 판단하고 어떻게 치료를 해 줄 때까지는.

하지만.

이게 환각이 아닌 현실이라면.

정말, 만약에라도, 말도 안 되는 소리이지만, 어디 TV 영화나 소설 속 내용처럼, 내가 휴대폰을 붙들면서 간절히 바랐던 것처럼, 신적인 어떤 존재가 내 소원을 듣고 무언가를 들어준 것이라면.

그렇다면 어쩔 텐가.

“일단은 해 보자.”

결국 나는 이 현실 같은 환각에 순응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환각이라면 여기에 적응해서 해결할 방법을 모색해야 하고, 현실이라면 다시 어머니와 형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야 했으니.

그때.

[플레이어의 정보 확인이 모두 끝났습니다.]

[플레이어: 차정우]

[접속을 계속하시겠습니까?]

홀로그램 속에 적힌 글자들이 바뀌더니 새로운 내용을 출력했다. 어떻게 보면 안내 문구 같기도, 게임 속에서 흔히 볼 수 있을 메시지 같아 보이기도 했다.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접속을 승인하셨습니다.]

[지금부터 플레이어로서의 각성을 준비합니다. 당신은 현재 타 플레이어들과 다르게 ‘미래의 초대장’을 받고 입장한 플레이어입니다. 수준 차이의 극복을 위해서 아주 잠깐 안내를 진행하겠습니다.]

[우선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 아래 목록에서 원하시는 무기를 한 가지 선택하세요.]

[목록]

1. 도검류

-롱소드

-쇼트 소드

-사브르

……

2. 단검류

3. 창류

4. 타격류

5. 투척류

6. 그 외

목록은 총 6개의 카테고리로 이뤄져 있었다.

그리고 각 카테고리 안에는 수십 개의 무기 목록이 적혀 있었다. 도검류 카테고리 안에는 롱소드, 쇼트 소드, 사브르 따위가, 단검류 안에는 안테니 대거, 배즐러드, 더크 같은 것들이 적혀 있었다.

역시나 하나같이 게임에서나 볼 수 있던 것들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가장 위 칸에 있던 것을 손으로 눌러 보았다.

[롱소드]

칼끝이 뾰족하고 날이 곧은 장검. 가장 기초적인 무기다.

**전체 길이 90센티미터, 폭 3센티미터, 무게 2킬로그램.

[‘롱소드’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주의! 한번 선택한 무기는 반납이 불가능하며, 다른 무기를 선택할 수도 없습니다.]

[계속 진행하시겠습니까?]

나는 재빨리 홀로그램에서 손을 뗐다. 그러자 롱소드를 선택하겠냐던 안내 메시지도 저절로 사라졌다.

‘여기서 선택을 잘해야 해.’

이게 정말 현실이라면, 만전을 기해야만 했다. 이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광고 문자를 떡 하니 보내 놓고서 ‘Yes’를 누르자마자 이상한 밀실에다 던져 두는 곳이다. 절대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지금 선택한 무기는 ‘생존’과 가장 직결될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나는 카테고리 목록에 있는 수백 종의 무기들을 꼼꼼하게 체크했다.

중세 시대에서나 사용할 것 같은 무기들투성이었지만, 그중에는 의아하다 싶은 것도 있었다.

[수정구]

마법 시전을 원활하게 도와주는 아티팩트. 백색 성질을 띤다.

‘수정구? 마법?’

마법이란 게 있다고? 하지만 생각해 보면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문자로 사람을 소환하는 곳인데 마법이라고 없을까. 물론, 이것도 어디까지나 이곳이 현실이라는 가정하에서 할 수 있는 생각이었지만.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초대된 플레이어들 중 가장 오랜 시간 동안 목록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신중한 성격은 탑을 오르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업적에 기록됩니다.]

[특성 ‘사색가’를 획득했습니다.]

[어떤 신이 당신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봅니다.]

특성? 신? 메시지는 또 알 수 없는 말을 실컷 떠들어 댔다. 하지만 그게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나중에 사람을 만날 수 있으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오랜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스큐툼’을 선택하였습니다.]

스큐툼.

달리 게임에서 ‘타워 실드’로 유명한 방패였다. 길이 2미터, 두께 80센티, 무게 15킬로그램. 중앙은 나무판자를 여러 겹으로 덧대고, 표면과 위아래 가장자리는 금속으로 압축 및 고정시켜 만들어졌다.

역사에서는 ‘걸어 다니는 거북이 등껍질’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오로지 방어에만 특화된 방패이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운동이라면 젬병이었던 내가 갑자기 이상한 무기를 쥔다고 한들, 어디 흔하게 보던 만화 속처럼 갑자기 각성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 밖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이상, 내 몸을 보호하는 데 집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보다 더 큰 방패를 할까도 싶었지만. 너무 무거워지면 빠르게 움직여야 할 때 쓸모가 없어지기 때문에 이 정도로 선택한 거였다.

빛무리가 터지면서 갑작스레 내 앞에 나타난 스큐툼은 중앙에 요란한 문장이 박혀 있었다.

중앙에 십자가를 두고, 좌우로 날개가 활짝 펼쳐진 모습.

어디서 쓰이는 문장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표면에 남은 갖가지 상처나 흔적들은 이름 모를 누군가의 깊은 시련에 이것이 함께했음을 말해 주었다.

스큐툼 안쪽에는 팔을 단단히 고정시킬 수 있는 혁대가 있었다. 왼팔을 가로로 넣어 단단히 고정시킨 뒤, 자세를 숙여 최대한 스큐툼 안쪽으로 숨으면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그긍-

순간, 여태 꽉 막혀 있었던 한쪽 벽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좌우로 열렸다.

그 너머에는 기다란 통로가 있었다.

이쪽보다 훨씬 밝은 빛이 앞을 훤히 비추고 있었지만, 이동하는 내내 발걸음은 조심스러웠다.

“오효오효. 오효효! 이것 참 너무 신중하다 못해 쫄보라고 해도 영 할 말이 없는 분이시로군요.”

괴상한 웃음소리가 복도를 따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가 점차 커지면서 이쪽으로 뭔가가 다가왔다.

방패 모서리 너머로 살짝 상대를 확인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하고 말았다.

‘뭐야, 저건?’

1미터 50센티도 안 될 것 같은 작은 체구. 우둘투둘한 피부하며, 귓가까지 쭉 찢어진 끔찍한 입술. 뾰족한 송곳니. 괴물이라는 단어가 딱 어울리는 생명체였다.

그런데도 말끔하게 차려입은 턱시도나 한쪽 눈에 쓴 외눈 안경은 곧잘 어울려서 묘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그래도 ‘초대장’을 받고 오셨으면 탑으로부터 그만한 재능을 인정받았다는 뜻이실 텐데. 그렇게까지 너무 돌다리를 두들길 필요는 없답니다.”

괴물은 외눈 안경을 고쳐 쓰면서 씩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제 딴에는 웃는답시고 웃는 것이겠지만, 내게는 너무 흉측해 보였다.

진짜 여기는 환각 세계인 걸까.

“초대장이라니? 그게 뭔데?”

지금 이 괴상망측한 곳에서 유일하게 만난 지성체는 저기 있는 괴물이 전부였다. 그렇다면 우선 여기가 어딘지부터 정확하게 판단해야만 했다.

“이런! 초대장을 기껏 받아 놓으셨으면서도, 그게 어떤 것인지 전혀 자각을 못 하고 계신다면 무용지물이 아닐는지요?”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이곳에 ‘접속’하셨을 때. 받으셨던 것, 없으십니까?”

순간, 스마트폰에 생각이 미쳤다.

오벨리스크의 끝에 오르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던 내용의 광고 문자.

“설마, 이거?”

뒷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녀석에게 보였다.

괴물은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기계 문명이 발달된 곳에서 오신 모양이군요. 일단 그렇습니다.”

[‘미래의 초대장’이 확인되었습니다.]

[관리자, ‘이블케’를 만나는 데 성공했습니다.]

[특전이 제공됩니다.]

이블케? 그게 저 괴물의 이름일까?

“플레이어 차정우 님에게 제공된 특전은…… 오효효! 신기한 것이로군요. ‘꿈을 꿈꾸는’이시라. 보통 나오기 힘든 것인데. 용케 얻으셨습니다.”

[특전: 꿈을 꿈꾸는]

플레이어가 원할 때마다 하루 2번에 한해서 오벨리스크로의 로그인과 로그아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미래의 초대장’의 초대자의 경우, 특전을 포기할 시, 소정의 대가와 함께 새로운 특전이 제공됩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하나부터 열까지, 도통 알 수 없는 것들투성이었다.

“아무래도 궁금한 게 아주 많으신 눈치로군요. 혼란을 겪는 플레이어분들을 바른길로 안내해 드리는 것 또한 관리자로서의 의무. 궁금한 게 있으시면 기탄없이 물어 보십시오. 권한이 닿는 한, 전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오효효!”

* * *

이블케의 설명은 아주 간단했다.

이곳은 탑이다.

여러 세계와 우주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 외차원(外次元).

하루에도 수만 명씩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지성체들이 방문하며, 오르길 갈망한다는 곳.

“탑? 대체 거기에 뭐가 있어서?”

“신(神).”

“신?”

“네. 신. 그 끝에 신이 되는 길이 있답니다.”

“그게 뭔 개뼉다구 같은…….”

신? 그딴 게 있을 리가 있나. 있다면 우리 집안이 여태 그렇게 험한 꼴을 겪지도 않았겠지.

“오효효! 믿고 안 믿고는 차정우 님의 마음이지요. 사실 신이니 악마니 하는 초월을 이룬 것들도 다 허상이 빚어낸 단면들일 뿐이니까 말이지요. 아, 이런 말을 하니 따가운 눈총을 보내는 분들이 계시는군요. 참으로 다들 할 일도 없으시단 말이지요.”

이블케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미친놈인 것 같았다. 슬쩍 녀석과 거리를 벌리면서 고민했다. 정말 이 괴물을 믿어도 되는 걸까.

“하여간. 그런 말을 믿기 힘들다고 하신다면…… 어디 보자. 그래. 이렇게 받아들이면 되실 겁니다. 그 끝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무슨…….”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는 소망 말입니다. 거기 초대장에도 적혀 있지 않던가요?”

다시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오벨리스크의 끝에 오르면 소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나를 이곳으로 불러들인 한 단어.

소원.

“무엇이든지?”

녀석을 보면서 물었다.

이블케는 웃는 낯 그대로 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엇이든지.”

“불가능한 건 없고?”

“자기들을 가리켜 신이니 악마니 하는 것들이 날뛰는 괴상한 곳입니다. 그런 게 있을 리가요. 그리고 영 못 미더우시다면…… 직접 확인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으시겠습니까?”

두근.

확인이라.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이제 어떻게 하면 되지?”

“이 통로를 지나, 목적지까지 도착하시면 됩니다.”

이블케는 옆으로 물러나면서 뒤쪽에 나 있는 복도를 손으로 가리켰다.

불이 꺼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마치 날 집어삼키려는 괴물의 아가리 속처럼. 무섭고, 음험했다.

보통 때였다면 두려운 나머지 뒷걸음질을 쳤을 테지만.

나는 이를 악물었다.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는 소원이 정말 저 끝에 있다면. 편찮으신 어머니가 웃으시는 걸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런 생각도 들었다.

만약 형이었다면?

이런 기회가 주어졌을 때 어떻게 했을까.

당연히 물어보지 않아도, 불에 보듯 뻔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머리부터 들이밀었겠지.

저벅-

그렇게.

나는 어둠 속으로 첫걸음을 내디뎠다. 큰 방패에 잔뜩 의지한 채로.

그리고 그 날.

나는 한 번 죽고 말았다.

* * *

삐비빅, 삐빅-

요란하게 울리는 알람 시계 소리에 눈을 떴다.

눈에 보이는 건, 침 자국이 가득한 책과 펜. 공부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바늘로 쿡쿡 쑤시는 것처럼 머리가 아파도 너무 아팠다. 정신도 멍했다.

이상한 꿈을 꾼 기분.

대체 무슨 꿈을 꾼 걸까. 화살이 수없이 날아오던 것만 기억났다. 살 떨리는 공포에 지금까지도 머리끝이 쭈뼛 서는 것 같았지만, 그런 여운도 금세 사라져 버렸다.

이상한 친구들도 제법 사귀었던 것 같았는데. 키가 3미터는 될 거인 친구나, 자기를 마녀라고 밝힌 예쁜 여자애나.

‘이전’에도 비슷한 꿈을 몇 번씩 꿨었던 듯한데.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난.

대체 무슨 꿈을 꿨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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