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359화 (359/862)

9화. 차정우 (5)

나도 모르는 사이에.

꿈은 몇 번씩이나 반복되고 있었다.

* * *

“친구. 너무 멍하다. 멍청해 보인다.”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얼굴 때문에 정신이 확 깼다.

“깜짝이야! 야, 좀 깜빡이 켜고 들어오라고.”

“친구 얼굴, 너무 웃긴다.”

“야. 네가 할 말은 아니거든?”

“내가 할 말, 맞다.”

“이 새끼 보소?”

난 순간 울컥한 나머지 반발을 하려다가, 바로 뒤늦게 든 생각에 주춤거렸다.

그동안 이 녀석이 순박하게 나에게 잘해 주긴 했다지만. 일단 피지컬부터가 너무 범접하기 힘든 녀석이었다.

대충 위아래로 봐도 3미터에 다다를 것 같은 무지막지한 체구. 관리자인 이블케 정도는 한 손으로 찍어 누를 수 있을 것 같은 근육. 무엇보다 험상궂은 얼굴까지. 하나하나가 도저히 옆에 다가가기 힘든 포스를 줄줄 풍겨 대고 있었다.

발데비히.

녀석은 자신을 멸종된 옛 거인족의 후예라고 했다. 반거인이라나? 하지만 거인족의 핏줄이 너무 많이 희미해져서 인간도 거인도 아닌 애매한 입장이라면서 농담을 하기도 했다.

누가 그렇게 말한다면 우습지도 않은 농담이라고 그냥 코웃음을 치면서 넘겼을 테지만.

짧지만, 이곳에 머문 요 며칠 동안 ‘탑’이라는 세계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곳인지를 잘 알았기에. 그 말이 농담이 아닌 진실이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발데비히와 만나게 된 건 정말 우연이었다.

A구획의 임무는 쇠 화살이 잔뜩 쏟아지는 통로를 통과하는 것.

평생 방구석에서 공부만 했던 나로서는 너무 살벌하기만 한 장소였다.

이 세계가 반쯤 환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지만. 그래도 이렇게 모든 감각이 생생하기 때문에 가슴이 철렁이는 것까지 막을 수 없었다.

게다가 만약 이게 ‘진짜’ 현실이라면? 한 대라도 잘못 맞았다가는 그대로 저승행이었다.

그래서 그냥 특전인지 뭔지를 써서 탑을 떠날까 하는 생각도 들었었지만.

차마 발걸음은 떼어지지 않았다.

이블케가 호언장담했던 말이 계속 귓가를 맴돌아서였다.

탑의 끝에는 소망이 있다.

소망.

초췌해지신 어머니의 모습이 자꾸만 눈가에 아른거렸던 것이다.

어린 시절 우리 형제들에게 밝은 미소를 지어 주시고, 넓은 품으로 안아 주시던 그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는 소망이. 자꾸만 마음속에서 울렁거렸다.

‘그래. 일단 해 보자.’

그래서 마음을 다잡으면서 전진했다.

우선 내가 처음으로 선택한 무기는 스큐툼.

최대한 방패 뒤에 몸을 숨기면서 천천히 전진하면 어떻게든 될 거란 생각을 했다.

하지만 생각과 현실은 달랐다.

화살이 어디서 날아올지 전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냥 ‘휙’하는 소리가 들리면 곧바로 ‘퍽’하는 소리가 들리니. 그리고 그때마다 스큐툼은 부서질 듯이 크게 들썩였다. 이따금 균형을 잃을 뻔한 적도 많았고, 방패를 들고 있는 왼팔도 수시로 저렸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방향이었다.

정면이나 위아래에서 날아오는 화살이라면 어떻게든 스큐툼으로 막을 수 있었지만. 뒤쪽에서 절묘한 각도로 날아오는 건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결국 어느 정도 전진했을 즈음에 뒤쪽에서 화살이 날아들었고.

나는 전혀 눈치도 못 챈 사이에 왼쪽 정강이를 그대로 꿰뚫리고 말았다.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졌다.

어떻게든 방패를 다시 세워서 몸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너무 고통스러워서 몸을 일으키기가 어려웠다.

그때 들었던 생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나 여기서 죽나?’였고.

다른 하나는 ‘이상하게 이게 왜 익숙하지?’였다.

마치 꿈속에서 똑같은 경험을 한 것 같은 기묘한 데자뷔를 느꼈던 것이다.

그때는 분명히 화살 세례에 무참하게 꿰뚫려서 출혈 과다로 죽었었던 것 같은데.

그러다 눈을 뜨니 알람 시계가 울리는 현실이었고.

문제는 그런 현실을 ‘바로 이전’에 느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런 주마등은 전부 헛것이었다.

죽기 직전에 구해 준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발데비히였다.

그때 보았던 녀석의 모습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자신도 큰 덩치 때문에 화살 과녁이 되면서도. 한 팔로 나를 들쳐 업고, 다른 한 팔로 큰 칼을 마구잡이로 휘둘러 대면서 입구 쪽으로 달려가던 모습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던 함성은 내 가슴을 울렁이게 만들 정도였다. 내게는 둘도 없을 은인이었던 셈이었다.

그러면서도 정작 발데비히의 얼굴을 봤을 때에는 흠칫 놀라긴 했지만.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씁쓸하게 돌아서는 녀석을 보고, 퍼뜩 정신을 차려 붙잡으면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발데비히가 인상만 그럴 뿐, 사실 속은 너무 순수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은 녀석이 내뿜는 기백에 놀라 아무도 접근을 못 하고 있었지만, 아마 진짜 성격을 알고 나면 너도나도 등쳐 먹으려고 달려들 타입이었다.

이런 천연기념물은 보호가 필요하다. 세상이 얼마나 흉흉한데. 나라도 나서서 도와줘야지, 암.

그러고 보면 참 나보다 좋은 사람도 찾기 힘들단 말이야. 물론, 그 대가로 버스(?)를 좀 태워 달라고 할 생각이긴 했지만.

으흐흐!

“친구, 얼굴 음흉해 보인다.”

발데비히가 눈을 가느다랗게 좁히면서 바라봤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헛소리는. 그나저나 어제 네가 말해 준 거 있잖아?”

“운기.”

“어. 그거. 마력 운용이라고 했지? 그 뒤에는 어떻게 하는 거야?”

마력.

내가 살던 지구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었던 형이상학적인 에너지. 하지만 이 탑에 들어온 플레이어들은 누구나 기본기로 수련하고 있었다.

그래서 입문이라도 하기 위해 발데비히에게 특훈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게 없으면 A구획은 절대 통과하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안 된다.”

발데비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친구, 아직 초보다. ‘축적’도, ‘운기’도 안 된다. 그런데 ‘발현’ 단계를 가르쳐 주는 건 뱁새가 황새 쫓아가는…….”

“응? 되는데?”

“……미친.”

나는 손을 활짝 펼쳤다. 손바닥 위로 새하얀 아지랑이 같은 것이 스멀스멀 올라오면서 꽈배기처럼 배배 꼬였다.

“친구, 나 속였다.”

“뭘?”

“마력, 알고 있었다.”

“아냐. 정말로. 몰랐다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쉽게 하나?”

“내가 좀 뭐든지 잘하긴 해.”

“…….”

발데비히는 미심쩍어하는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야! 내 몸이 쓰레기라고 말한 건 너였거든?”

발데비히는 어제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던지 입을 꾹 다물었다.

마력을 가르쳐 달라는 말에 손발을 이리저리 짚어 보더니 ‘친구, 몸 정말 쓰레기다. 이대로면 그냥 죽을 거다.’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해 놓고서는. 그거 때문에 내 여린 마음이 얼마나 다쳤는지 아니?

그런데 이 마력이란 것도, 사실 우려했던 것과 다르게 한번 느끼기 시작하니 다루는 건 아주 쉬웠다. 느끼는 것도 하루만 투자하니 금방 되었고.

발데비히는 분명히 재능이 없으면 마력을 느끼는 데에만 꼬박 몇 년씩 걸릴지 모르고, 다루는 데에는 시간이 그보다 배는 필요로 할 거라고 했었는데.

이게 그렇게 어려운 건가?

발데비히는 여전히 내가 못 미더운지, 이것저것을 가르쳐 주었다.

마력 운용의 다음 단계인 발현부터, 부여, 안착, 조작, 강화, 성질 변환까지.

한 단계 한 단계 전부 재미있었다. 여태 모르고 있던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 것 같은 느낌. 나는 더 가르쳐 달라고 계속 발데비히를 졸라 댔다.

그러다 보니 단 하루 사이에 마력의 기초 작용은 전부 습득할 수 있었다.

“……말도 안 된다. 이건. 여기까지 나도 10년 걸렸다. 그런데 친구, 하루 만에 해냈다.”

“말했잖아. 내가 좀 천재라고.”

콧대를 조금 세우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발데비히가 그런 날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친구.”

“왜?”

“재수 없다.”

피식.

나도 웃으면서 대답해 주었다.

“알아. 나도.”

“…….”

“근데 어쩌겠니? 내가 너무 잘난 것을.”

“친구.”

“또 왜?”

“이걸로 좀 패도 되나?”

발데비히는 말없이 큰 칼을 높이 들었다.

* * *

언제부턴가 나와 발데비히는 튜토리얼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마력의 ‘마’자도 모르는 등신과 할 줄 아는 건 칼 휘두르는 것밖에 없는 반거인 쪼다의 기묘한 조합. 남들 눈에는 덤 앤 더머로 보이려나?

매번 나는 앞서서 방패를 세우고, 발데비히는 뒤에서 우렁차게 칼을 휘둘러 화살을 쳐 내면서 길을 조금씩 길을 개척하고 있는 중이었다.

거북이걸음처럼 느리고, 실력 좋은 다른 플레이어들이 보기엔 비웃음만 날 진전이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매번 시도할 때마다 착실하게 거리를 늘려 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번에는 중간 지대까지 가 보자며 의기투합을 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우리 둘에게 처음으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정말, 저 어어엉말 예쁜 여자아이였다. TV 속 아이돌 같은 내 또래의 아이.

“후훗. 너희들이 걔네들이니? 홀쭉이와 튼튼이.”

“…….”

“…….”

뭐냐, 그 구린 작명은.

“마침 나도 파티를 구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보다시피 내가 가녀리기도, 예쁘기도 해서, 다들 음흉하게만 바라보지 뭐니? 할 줄 아는 건 마법밖엔 없긴 한데. 어때? 요 앞까지만 같이 손잡아 보는 건?”

얘도 중증 환자네.

마음에 들어.

나는 발데비히와 말없이 눈빛을 주고받았다. 발데비히는 나더러 알아서 결정하라는 듯 눈짓을 했다.

언제부턴가 우리 파티의 의사 결정은 내가 내리고 있었다. 둔한 발데비히와 다르게 내가 그나마 조금 더 생각이나 판단력이 빠른 덕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A구획을 통과하려면 탐색이나 추적 같은 기초 마법이 필요했던 참이었다.

발데비히가 아무리 감각이 예민하다고 해도, 트랩을 전부 사전에 포착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으니. 게다가 몇몇 트랩은 직접 마법을 날려서 부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마법사의 존재가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문제는 얘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냐는 건데.

그래도 일단 A구획을 통과할 때까지만 손을 잡고, 판단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싶었다.

“나는 차정우, 얘는 발데비히. 너는?”

“비에라 듄.”

그녀가 화사하게 웃으면서 인사했다.

“최초이자 최후의 마녀야.”

* * *

나, 발데비히, 비에라 듄.

이 셋으로 시작된 기묘한 조합은 의외로 손발이 잘 맞았다. 목표였던 중간 지대를 넘어, A구획을 곧바로 통과할 수 있었으니까. 그것도 비교적 수월하게.

비록 허수아비들이 가득한 보스 룸을 통과할 때 많이 애를 먹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도착한 B구획은 우리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던져 주었다. 임시 파티는 어느새 끈끈한 동료애로 묶여 있었다.

그리고.

나는 결정을 내렸다.

[특전 ‘꿈을 꿈꾸는’을 포기하시겠습니까?]

하루에 2번, 지구와 탑을 오고 갈 수 있게 해 주는 특전.

나는 그동안 낮에는 탑을, 밤에는 지구를 오고 갔었다. 두 세계의 시간 축이 다르기 때문에 가능한 생활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시간 소모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지구에 있는 동안에도 튜토리얼 속 시간은 빠르게 소모되고 있었다.

이것을 놓친다면…… 영영 후회할지도 몰랐다.

형에게는 몇 번씩이나 말하고 싶었다.

내가 겪고 있는 상황들을.

이 말도 안 되는, 환상적인 이세계에서의 일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만약 이 일을 이야기한다면. 형이 직접 하겠다고 나설 게 너무 뻔했다. 매번 형에게만 위험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결국.

[특전을 포기하셨습니다. 더 이상 로그인과 로그아웃이 불가능합니다.]

[새로운 특전이 제공됩니다.]

나는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길목을 완전히 차단해 버렸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수능이었는데. 다들 걱정하겠네.’

집에는 편지도 남기지 않았다. 괜히 걱정을 사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이렇게 해야 나도 서둘러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할 것 같았다.

[특전 ‘꿈을 그리는’을 획득했습니다.]

[특전: 꿈을 그리는]

플레이어가 원하는 세상을 꿈에서 그릴 수 있다. 과거, 현재, 미래를 가리지 않으며, 그곳에서 얻은 해답은 현실에서도 얻을 수 있다.

**‘미래의 초대장’을 포기하면서 얻은 특전입니다. 다른 특전으로의 변경이 불가능합니다.

이전 특전과 다르게 무슨 내용인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었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이제 배수진을 쳤다는 것.

원하는 것을 얻기 전까지는 지구로 돌아갈 수 없었다.

‘소망.’

거기다 탑에는 엘릭서라는 신비의 묘약이 있다고 했다. 비록 탑의 끝에 오르지 못하더라도, 엘릭서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전부 끝나는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만통’이라는 사기적인 내 특성과 재능을 확인했다. 지금은 비록 타 플레이어들보다 실력이 낮을지 몰라도, 얼마든지 위로 올라갈 자신이 있었다.

‘반년.’

주먹을 꽉 쥐면서 다짐했다.

‘그 안에 엘릭서를 구해 보고, 안 되면 돌아가자.’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또 흘렀다.

단 세 명이서 시작했던 팀 아르티야는 9명, 그러다 12명으로 이뤄진 클랜이 되었다.

리언트.

바할.

아이테르.

베이럭.

레온하르트.

그 외에도 사디, 호스트, 쿤 흐르, 잔느까지.

창설된 지 1년도 되지 않아 거대 클랜으로 급부상을 하였고, 나는 랭킹 9위에 안착하는 기염을 토했다.

역대 최고로 빠른 성장을 이룬 케이스라나?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내 속은 자꾸만 타들어 갔다. 반년이면 될 줄 알았던 엘릭서는 도저히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되돌아가려 해도 나를 따르는 동료들이 너무 많았다.

무엇보다.

주변에는 적이 많이 있었다.

이들을 뚫고, 과연 얼마나 올라갈 수 있을까?

언제부턴가.

가슴 한편에서는 나도 모르게 회의감이 들고 있었다.

결국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 * *

“그래서 뭐? 올포원에게로 가는 길을 열어 달라고?”

무왕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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