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360화 (360/862)

10화. 차정우 (6)

사실 무왕의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친분이라고는 ‘왕의 연회’에서 스치듯이 몇 번 본 게 전부. 그러니 이렇게 다짜고짜 마을에 찾아온 것도 사실 상당한 무례였다. 이렇게 만나 준 것만 해도 그로서는 많이 참고 있는 것일 테지.

그런데 갑자기 올포원을 언급했으니 화가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왕이 올포원에 대해 얼마나 깊은 적개심을 지니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올포원은 탑에 있던 모든 용종들을 말살시켰던 자.

나에겐 아버지나 다름없던 고룡 칼라투스가 그렇게 마지막까지 고통스러워했던 것도, 사실 올포원이 남긴 후유증 때문이었다. 지금은 다행히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셨다지만, 그래도 용의 신전에서 마지막으로 눈을 감던 모습은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것이고, 이건 이것. 나로서는 반드시 올포원과 만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수천 년 동안 77층에 박혀 절대 내려오지 않으며, 수많은 플레이어들의 장벽으로 군림해 왔다. 탑의 끝에 닿고자 하는 나의 소망을 꺾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엘릭서밖에 없을 텐데.

문제는 엘릭서를 도저히 구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아홉 왕에 버금간다고 평가를 받아도, 아르티야가 8대 클랜과 자웅을 겨룰 만큼 성장한 상황에서도 엘릭서는 구하기 힘든 묘약이었다.

그 이유는 뒤늦게 알 수 있었다.

‘올포원이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었지.’

어째서 그가 갖고 있는지는 몰랐다. 어쩌다 알아낸 단서도 그가 수백 년 전에 우연히 손에 넣었다는 내용이었을 뿐, 그사이에 사용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도 나로서는 그런 작은 단서마저도 아주 중요했기 때문에, 올포원을 만나기를 갈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올포원을 만나기란 절대 적으로 요원하다는 것.

내가 올포원을 본 건 딱 두 번밖에 없었다.

한 번은 거대 클랜들 간의 반목이 심해져 그레이트 워가 벌어지기 일보 직전, 갑자기 등장해서 상황을 마무리시켰던 때.

당시에는 너무나 압도적이라는 느낌만 받았을 뿐. 아직 용마안이 무르익기 전이었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거대한지를 짐작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다음 차례에서는 달랐다.

오랜 추적 끝에, 영혼석을 몰래 손에 넣었을 때. 오만과 색욕의 돌은 마치 연리지처럼 하나의 세트로 묶여 있었다.

루시엘의 힘을 터득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기쁨에 젖었는데, 공간을 가르며 그가 나타났었다.

그림자를 한껏 몸에 둘러, 자신의 형체를 제대로 드러내지 않은 모습을 하고서.

-또, 너로구나.

그것은 육성을 내지 않았다. 전혀 알 수 없는 언어. 남자인지 여자인지, 아이인지 노인인지도 알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무슨 말을 하는지 저절로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녀석은 나를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익숙하다는 듯이.

-아홉 번이었나, 열 번이었나? 그동안 오지 않고 계속 되돌아가기에 이제는 여기까지 올 힘도 다 떨어졌다고 생각했건만. 그래도 어떻게 오기는 왔구나. 하지만. 그래. 이번에도 운(運)은 어긋났고, 명(命)은 짧다. 전혀 달라지지 않았어. 몇 번이고 실패할 숙운(宿運)이고, 앞으로도 몇 번은 더 실패를 겪어야겠구나.

녀석은 도통 알 수 없는 말만 실컷 떠들어 댔었다. 하지만 내용만 들어서는 분명 불쾌한 내용이었다.

실패. 혹은 운명. 이런 말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단어였으니까.

그래서 짜증이 났었지만, 차마 따지지는 못했다.

용마안 속에 비친 올포원의 ‘존재’는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으니까.

고룡 칼라투스보다 더 크고, 튜토리얼 때부터 내게 따스한 축복을 내려 주던 이름 모를 신보다도 웅장하며, 늘 쓸데없이 속삭여 대던 악마 아가레스보다도 화려하던 영압(靈壁).

스테이지를 가득 채우다 못해, 조금만 힘만 주면 그대로 가볍게 층 자체를 으스러뜨릴 수 있을 것 같은 어마어마한 열량을 품은 영력(靈力).

그리고 하늘과 땅 사이에 오롯이 자신만이 존재하는 듯한 고고한 영격(靈格).

그는 정말 ‘같은’ 필멸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커도 너무 컸다.

그렇게 많은 신과 악마들을 만나 본 건 아니었지만, 단언컨대 어느 누구도 그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세상이 그였고, 그가 세상이었다.

탑을 둘러싼 모든 법칙이 그를 중심으로 운행되고 있었다.

마치 빛나는 항성을 따라 행성과 위성이 뱅글뱅글 돌 듯이. 세계의 중심축은 바로 그였다.

지식을 끝없이 탐구하여 세계의 모든 법칙을 제 것으로 삼고자 하던 모든 용종들의 열망을, 그가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어째서 그 위대한 용종들이 그에게 별다른 해도 입히지 못하고 모두 쓰러졌는지를.

수천 년에 걸쳐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어째서 77층의 위로 올라가지 못했으며.

98층에 억류된 신과 악마들이 어떻게든 빠져나오고자 하계에 힘을 투사했어도, 왜 결국 그에게 붙잡혀 찢겨 나갈 수밖에 없었는 지를.

저런 존재가 중간에 떡 하니 존재한다면.

과연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런 거대한 존재감을 숨기고 있는 그림자 속에 가려진 눈동자가 나를 직시한 순간.

나는 마치 몸과 영혼이 전부 낱낱이 분해되는 듯한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호오! 그래도 발전은 있었구나. 이제 나를 볼 정도는 되는 건가?

짙은 그림자와 안개 속에 숨겨진 ‘눈’은 분명히 웃고 있었다.

-바른 눈은 갖고 있되, 제 길은 보지 못하는 소경. 참으로 슬픈 숙운이지. 그래서 꿈을 계속 꾸는 것일지도. 어둠에 가려진 길을 찾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불빛을 여전히 찾지 못하고 있구나. 안타까운 아이야.

올포원이 던졌던 말 중 ‘꿈’이라는 단어가 유독 마음에 걸렸다.

여태 해석하지 못해서 사용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특전이 떠올랐다. 혹시 올포원은 그것을 엿본 걸까?

-루시엘의 불이 너에게 길을 밝혀 줄 횃불이 되어야 할 텐데. 아직까지는 그저 헛된 바람에 힘 없이 사라질 촛불일 뿐이니. 그것을 키워라. 어떻게든. 계속 같은 방식이면 다시 몇 번이고 이와 똑같이 찾아온다 한들, 다른 방법을 수없이 모색한다 한들, 결국 도돌이표일 것이다. 제자리걸음을 수도 없이 해 봤자, 너만 다칠 뿐이니.

올포원은 딱하다는 듯이 뒷말을 덧붙였다.

-‘그분’의 빛이 너의 길을 밝혀 주시기를 비마.

올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가 할 말만 떠들어 대고 훌쩍 사라졌다.

그때의 일은 여태 다른 누구에게도 언급하지 않고, 내내 마음속에만 묻어 두고 있었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

흔히 알려진 올포원의 3대 스킬은 축지, 불사, 천리안이었다.

하지만 고룡 칼라투스는 몇 가지를 추가로 더 말해 주었다.

‘예지.’

단 한 번 본 것만으로도 대상의 미래뿐만 아니라, 현재와 과거까지 단번에 꿰뚫어 보는 권능.

그런 힘이 있는 자라면, 분명히 허튼소리는 하지 않았을 테니.

하지만 난 여전히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묻고 싶었다.

엘릭서의 행방과 함께.

당신이 그때 주절거린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몇 번씩이나 실패한다고 했던 말은, 대체 어떤 의미인지.

하지만.

올포원이 거주한다는 77층은 내가 올라갈 방법이 없었다. 76층에 자리 잡은 레드 드래곤이 절대 길을 내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름여왕과 나쁘지 않은 사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좋은 관계도 아니었다.

만약 트라우마인 올포원을 건드린다면, 그녀는 주저 없이 브레스부터 쏘아 댈 것이다.

반면에 무왕은 다르다.

그는 77층, 아니, 정확하게는 올포원의 영토에 다다를 수 있는 우회로를 알고 있었다.

문제는.

“올포원이 어떤 존재인지는 알고 있나?”

무왕이 그렇게 해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아니. 넌 모른다. 놈이 어떤 존재인지.”

“…….”

“놈은 탑의 사도. 탑의 법칙, 그 자체다. 그걸 네가 감당할 수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결국 이를 악물고 말았다.

“그럼 끝까지 열어 주실 마음이 없으십니까?”

무왕은 한쪽 입술 끝을 비틀면서 물었다.

“내가 왜? 그럴 의리도, 명분도 없는데? 귀찮게 왜 그래야 하지?”

“그럼…….”

나는 등 뒤로 하늘 날개를 활짝 펼쳤다. 손에는 어느새 드래곤 슬 레이어가 들려 있었다.

“힘으로 열게 하는 수밖에요.”

* * *

“뭐야, 그 얼굴은?”

“몰라. 묻지 마.”

레온하르트 녀석이 손으로 내 얼굴을 가리켰지만, 대충 손으로 가리면서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진짜 시작하자마자 눈탱이부터 날리냐. 덕분에 나는 한쪽 눈만 시퍼런 팬더 신세가 되어 클랜 하우스에 되돌아와야만 했다.

사실 이것도 무왕이 많이 봐준 거겠지만. 그래도 억울했다. 제기랄.

‘뭔가 있긴 있는데.’

무왕과 올포원의 관계.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결국 하나만큼은 확실해졌다.

내가 비집고 들어갈 힘은 없다는 것.

결국 하나밖에 없었다.

내 힘으로 계속 위로 올라가는 것.

그래서 올포원과 만나는 수밖에는.

그렇게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지금까지 달려온 시간만 해도 적지 않은데, 대체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여기서 보내야 하는 걸까? 자식 걱정으로 어머니의 병증이 더 커진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형도 많이 걱정하고 있을 테고.

그렇다고 해서 지구로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랬다가는 자동적으로 ‘탈락’이라고 인식되어 두 번 다시 탑에 들어오지 못할 테니.

“참, 그리고 사디와 쿤 후르가 왔어.”

클랜이 창설하고 가장 뒤늦게 참여했던 멤버들. 현재 아르티야는 많은 견제를 받고 있는 상황. 특히 나를 ‘포식’하고자 하는 식탐황제 때문에 혈국과 전쟁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이것을 타개하기 위해서 동맹군을 찾아 사절로서 각 거대 클랜을 방문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번에는 마군과 시의 바다에 들른다고 했었을 텐데.

마군은 몰라도 시의 바다는 가능성이 높다고 점치고 있었다.

하지만.

“빈손이야.”

레온하르트는 씁쓸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뒷말을 덧붙였다.

“혈국과 협상도 결렬. 널 내놓으란다.”

레온하르트는 뛰어난 검사이면서도 지모(智謀)로도 유명했다. 그런 녀석이 ‘불발’이라고 이야기했다면, 정말 방법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또 전쟁인가.”

나는 의자에 몸을 누이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텐데, 또 전쟁이었다.

두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래서는 탑을 오를 시간만 계속 잡아먹을 텐데. 속이 자꾸만 타들어 갔다.

* * *

“저, 클랜 탈퇴하겠습니다.”

쿤 흐르가 아침부터 던진 폭탄 선언은 아르티야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야, 갑자기 왜 이래? 어제 술 잘만 마셔 놓고.”

“사디 일 때문에 그래? 그럼 조금만 더 고민해 보는 게…….”

“아뇨. 밤새 고심해서 내린 결론입니다. 벌을 내리시겠다면 얼마든지 달게 받겠습니다.”

쿤 흐르는 이미 마음을 굳힌 것 같았다. 아마도 얼마 전에 전사한 사디 때문인 것 같았다. 사디는 녀석과 연인 관계였으니까. 이번 전쟁이 끝나면 둘은 결혼하는 것까지 생각했을 정도로 깊은 사이였다. 전쟁이 그걸 모두 아작 내고 말았지만.

“그래.”

“야! 차정우! 저렇게 보내면……!”

“잘 지내라.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 말고. 그랬다가는 내가 쫓아가서 패 버린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쿤 흐르는 한참 동안이나 고개를 푹 숙이다가 클랜을 떠났다.

다른 클랜원들은 황망한 얼굴이 되었다. 그토록 계속 전쟁이 벌어지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사실 끈끈한 단합력 때문이었으니. 하지만 그중 한 축이 빠져 버린다면 힘이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쿤 흐르는 내 제자를 자처하던 녀석이기도 했기 때문에. 배신감을 더 크게 느끼는 듯했다.

녀석도 마지막까지 죄책감에 젖은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나만큼은 웃으면서 보내 주고자 했다. 죄책감에 젖어야 할 건 녀석이 아니라, 나였으니까.

“자자! 다들 뭘 그렇게 울상이야? 우린 우리 할 일만 잘하면 되는데 뭘.”

우울한 분위기는 싫다. 다 같이 으쌰으쌰 하기 위해서 박수를 치며 일어나려는데.

“……어?”

세상이 뱅글뱅글 돈다 싶더니 나도 모르게 옆으로 기울어지고 말았다. 균형을 잡으려 해도 이상하게 다리에 힘이 실리지 않았다.

클랜원들이 내 이름을 부르면서 다급하게 달려오는 게 보였지만, 귀에 이명이 울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세상은 여전히 돌고 있었고, 입에서는 무언가가 왈칵 쏟아졌다.

핏덩어리였다.

검은 진물이 가득 섞인.

마독 특유의 악취가 코끝을 찔렀다.

내 심장 안쪽에서부터, 무언가가 어긋나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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