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차정우 (7)
“분명해. 이건 멤버들 중에 범인이 있는 게 확실해.”
비에라 듄은 비밀리에 내 몸을 여기저기 점검해 보더니 인상을 딱딱하게 굳혔다.
여러 검사 결과, 전부 위급을 뜻하는 붉은색이 떴다.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서, 아주 은밀하게, 내 특성인 만통을 속일 만큼 천천히 스며들어 중독시켰다는 뜻이었다.
아르티야는 아주 폐쇄적인 클랜이다.
열두 명의 인원으로 시작해 거대 클랜이 되고 나서도 받아들인 인원은 아주 극소수. 지인의 추천을 받거나, 희망자가 있더라도 소속 인원들의 거수투표가 없으면 절대 가입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전쟁을 치를 때마다 머릿수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할지라도, 단합력이나 서로에 대한 신뢰는 두말할 것이 없었다.
오히려 클랜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걸 거리끼지 않는 이도 있었다.
사디가 그렇게 눈을 감았으니까. 적의 함정에 빠져 위기에 처했을 때, 스스로 자원해서 적의 이목을 끌어 다른 클랜원들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었다.
그때 잠깐 부상으로 기절했던 쿤 흐르가 눈을 뜨고 나서 느꼈을 감정이 어떤 것인지는 불에 보듯 뻔했다.
그런데.
암살 시도라?
게다가 이렇게 내 입으로 말하긴 뭣했지만, 나는 클랜의 리더이자 중심이었다.
그런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독에 당해 왔단 사실이 클랜 내에 알려진다면, 분명 클랜원들 사이에 불신이 생길 것이다.
가뜩이나 쿤 흐르의 탈퇴로 모두의 머리가 어지러운 판국인데. 여기에다 기름을 끼얹을 수는 없었다.
“비에라.”
“응.”
나는 윗옷을 다시 걸치면서 말했다.
“이 사실, 다른 놈들에게는 말하지 마. 물어도, 그냥 요 며칠 무리해서 그런 거라고만 둘러대 줘.”
“하지만……!”
“부탁할게. 지금은 혼란을 더 키우고 싶지 않아서 그래. 그리고 중독 사실도 알았으니 이제부터 천천히 치료하면 되는 거고.”
“……넌 진짜.”
비에라 듄은 답답하다는 듯이 날 바라봤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이었지만, 곧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알았어. 하여간 평소에는 여우 같으면서도 이런 부분에서는 곰 같다니까. 그런 점이 좋은 거지만.”
비에라 듄은 실실 웃으면서 슬쩍 내게 안겨 왔다. 똑같이 한 팔로 그녀를 안으면서 나도 모르게 그만 웃고 말았다. 곰이라. 어쩌면 그런 면은 형을 닮고 싶다는 마음에 나도 모르게 체득이 된 건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렇게 아직 의식을 차리고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쓰러질 때는 분명 속절없이 죽는다고만 생각했으니까.
아니, 실제로 ‘죽었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게 단순한 ‘우려’였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면서.
나는 더 바짝 그녀를 끌어안았다. 우리는 한참 동안이나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 지금은 이 순간이 너무나 좋았다.
그게 독인지도 모르고.
* * *
아주 잠깐 주어졌던 평화는 다시 금방 깨지고 말았다.
“큰일이야!”
레온하르트가 다급하게 가져온 소식은 다시 클랜에다 폭탄을 던지고 말았다.
“친구, 무슨 일?”
“쿤 흐르, 그 미친 새끼가……!”
레온하르트는 너무 다급하게 달려온 나머지 숨이 차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순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들었다.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이던 쿤 흐르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지막에는 분명 뭔가를 결심한 듯한 비장한 표정이었다. 왜 미처 그럴 거란 생각을 못 했을까?
나는 레온하르트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동료들에게 서둘러 명령을 내렸다.
“발데비히, 드래곤 킬러 챙겨! 비에라, 당장 운용 가능한 키메라가 몇인지 확인하고. 바할, 리언트 전력 확인해. 서둘러, 어서!”
클랜원들도 다 같은 생각이 들었던지 다급하게 뛰었다. 하지만 아무도 머릿속에 든 불안감을 입에 담지 않았다. 자칫 말이 씨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저 쿤 흐르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혈국이 구축한 임시 진영에 도착했을 때.
“…….”
“…….”
우리는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서 있어야만 했다.
드높게 선 장대 위.
분노로 잔뜩 일그러진 쿤 흐르의 머리가 걸려 있었다. 그 아래로 아직 메마르지 않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파각-
어긋나기 시작했던 내 심장이, 조금씩 부서지고 있었다.
* * *
그때부터였을까. 클랜원들은 언제부턴가 말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전쟁이 있으면 다 같이 전략 회의를 하고, 적에 대해서 논의를 나눴지만. 그 외에 서로가 개인사를 이야기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어졌다.
그저 싸움이 있으면 싸우고, 휴식이 있으면 휴식을 취한다는 생각만 가지고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모두가 힘들었고, 지쳐 가는 중이었다.
발데비히와 레온하르트가 축 처진 분위기를 어떻게든 되살리려고 노력했지만, 다들 쓴웃음만 지을 뿐 기쁨에 찬 웃음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나 역시 어떻게든 클랜을 제대로 이끌고 싶었지만, 금방 치료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마독이 심장을 침범하면서 그러기가 힘들어졌다.
당장 발작을 억지로 누르고, 전쟁에 집중할 생각밖에 못 하니 주변을 돌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크게 걱정을 하지 않았던 건, 이런 분위기는 얼마 가지 않아 언젠가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올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오히려 그런 근거 없는 믿음이 클랜원들을 더 지치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고.
결국 칼날 위를 걷는 것처럼 살벌했던 분위기가 폭발하고 말았다.
바할을 기점으로.
“……레드 드래곤으로 넘어갔다. 이거지?”
툭 하고 던진 말에 클랜원들은 서로 눈치만 보기 바쁠 뿐 아무 말도 없었다.
그만큼 충격적이었으니까.
아무리 최근 들어 서로 말이 없어졌다고 해도, 어제까지만 해도 다 같이 어깨를 나란히 하던 동료가 아무 말도 없이 적의 진영으로 전향하고 말았다.
동요가 없을 수가 없었다. 문제는 여태껏 그럴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변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처음이 어려웠을 뿐, 그다음은 너무나 쉬웠다.
아이테르가 떠났다. 적이 내건 돈에 눈이 먼 호스트가 전장 한복판에서 내 암살을 꾀하다가 목이 달아났고, 베이럭은 내게 독을 심어 주고 웃으면서 유유히 떠났다. 덕분에 겨우 진정되어 가던 마독이 더 크게 발작해 드래곤 하트가 완전히 망가졌다.
발데비히가 어느 날 아무 말 없이 실종되었고, 리언트가 몰래 함정을 파 내 심장에다 칼을 박았다.
레온하르트는 나날이 예민해지는 나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결국 견디지 못하고 시의 바다에 들어가고 말았다.
여태 나에게 호의를 보여 주었던 다른 여러 클랜들도 등을 돌렸다. 내가 도움을 주었던 곳들, 내게 충성을 맹세했던 곳들, 나와 우정을 다짐했던 곳들…….
내가 화려하게 빛날 때에는 다들 나의 날개를 자처했지만, 어둠 속으로 추락할 때에는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취급했다.
나는 처절하게 저항했다. 어째서 다들 떠나는가. 어째서 다들 등을 지는가. 어째서, 어째서?
신뢰는 불신으로, 배반으로 되돌아왔다.
그 와중에 나는 몇 번이나 죽어야 했고.
몇 번이나 되살아났다.
어떻게든 엘릭서를 손에 넣어야 한다는 일념이, 겨우겨우 내 명을 지탱시킨 것이다.
그러다 언젠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비에라 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나의 사랑하는 연인. 나의 모든 것. 너만 있으면 세상이 전부 나를 버려도 괜찮으리라.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되뇌였……!
퍽!
“내가 사랑하는 자기는 언제나 저 하늘의 별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그런 자기였다고. 거만하고, 오만한 것 같아도 속은 따스했던 그런 자기. 그런데…… 이렇게 추하게 망가진 몰골은 보기 싫어. 그냥. 화려했던 자기만 기억할래. 괜찮지?”
리언트가 내 심장에다 박았던 칼보다 더 아픈 칼날이 겨우 봉해 놓았던 상처를 다시 들쑤셨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아픈 것은 믿었던 연인의 독설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내 몸을 수렁으로 빠뜨린 마독이 누구의 손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사랑해, 자기.”
비에라 듄은 내 귓가에 그렇게 속삭이고 모습을 감추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있었다.
* * *
“하지만…….”
“가.”
슬프게 날 바라보는 눈빛. 저 시야에 잡힌 내 얼굴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을까, 짜증을 내고 있을까. 그것도 아니면. 슬픔에 허덕이고 있을까.
“다시는 얼굴 비치지 마. 다시는.”
아난타.
이렇게까지 망가진 내 곁을 끝까지 지켜 주려 한 고마운 여인. 날 짝사랑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동안 계속 그녀를 거부해 왔다. 비에라 듄과의 감정이 내게는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바보였던 것이다, 나는. 사람도 제대로 볼 줄 모르는 바보.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지금은 더 그녀를 내쳐야만 했다. 난 이제 더 이상 가망이 없었다. 주변 상황은 더 암울했다. 그런 수렁으로 저 아름답고 착한 사람을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아난타는 몇 번씩이나 발걸음을 멈추고 주저하며 나를 바라봤다. 하고 싶은 말이 가득한 얼굴. 안타까움에 가득 찬 눈빛이었다. 그러다 그녀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면서 단단해진 눈빛으로 말했다.
“어떻게든.”
그 목소리에 실린 힘이, 독하게 나서고자 했던 내 심장을 찌르르 울렸다. 이미 망가진 지 오래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여전히 조금씩 기능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떻게든 지킬게.”
그렇게 전혀 뜻을 알 수 없는 말을 훌쩍 던지고. 아난타는 모습을 감추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주저앉았다.
소리 없이, 오열을 터뜨렸다.
몇 번이나 외치고 싶었다.
내 옆에 있어 달라고. 너무나 외롭다고. 이곳은 춥다고. 힘들다고. 괴롭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스스로를 억눌러야만 했다.
-어떻게든 지킬게.
하지만 아난타가 남긴 말이 다시 날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녀가 지키겠다고 한 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게도 지켜야 할 게 있었다.
품속으로 손을 넣었다. 한 손에 착 감기는 유리병. 그 속에 담긴 푸른 액체가 보석처럼 빛나며 찰랑였다.
엘릭서.
어머니의 병을 치료해 줄 묘약.
레드 드래곤이 있는 76층을 억지로 돌파하고, 77층에서 올포원에게서 양도받은 약이었다.
-여기까지 온 것이 이걸로 네 번째인가? 시간은. 그래. 이전보다 훨씬 가까워졌구나. 하지만 그게 전부야. 달라진 게 거의 없어. 역시 영혼에 새겨진 숙운의 틀은 달라지지 않는 것인가?
올포원은 여전히 어둠과 안개 속에 가려진 채였지만, 그래도 기특하다는 듯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굴레 속에 갇혀, 몇 번이고 악몽을 꾸는 아이야. 부디 이 악몽에서 헤어 나와, 언젠가 너의 길을 볼 수 있기를.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그 말이, 나를 응원하는 말이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모두가 날 버린 상황에서도, 응원을 해 주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올포원은 수고했다면서 내 손에 엘릭서를 쥐여 주었다. 달라고 부탁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모두 다 이해하고 있다는 듯이. 그리고 다시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 수많은 별자리로 반짝이는 은하수를 올려다보았다.
그를 따라 보았던 밤하늘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하늘의 정중앙을 가로지르는 은하수와, 그 주변으로 마구 반짝대는 아름다운 별들. 그 광경에 압도되어 나는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기억은 나지 않지만, 눈물을 흘렸었던 것 같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에 눈가가 너무 축축했으니까.
그리고 나는 다시 클랜 하우스가 있는 50층의 히든 스테이지로 되돌아왔다.
레드 드래곤의 포위망을 뚫고, 여름여왕을 상대하면서 이미 몸은 수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지고 말았지만.
그래도 올포원이 해 준 응원과 은하수를 보며 잠시나마 맛보았던 환희가 나를 다시 움직이게 만들었다.
엘릭서를 만지는 내내, 몇 번이고 마셔 볼까 하는 충동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엘릭서로도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털었다. 처음 탑을 올랐을 때의 각오를 잊지 않고자 했다. 어떻게든 어머니께 이걸 전해 드리겠다는 각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되돌아갈 수 있을까?
지구로 가기 위해서는 리타이어를 해야만 했다. 다시는 탑을 공략할 수 없게 되겠지만, 어차피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이었기에 별다른 미련은 없었다.
다만, 문제는 76층에서의 변란을 눈치채고 날 뒤쫓아 온 이들로 인해, 어느새 50층이 여러 적들로 가득 차 버렸다는 점이었다.
리타이어를 하기 위해서는 저들의 포위망을 뚫어야 한다. 하지만 내게는 그럴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만 저들을 뚫고 지구로 가서 어머니께 엘릭서를 드릴 수 있을까?
한참 동안이나 고민 속에 잠겨 있었다.
[어떤 신이 당신을 가만히 관찰합니다.]
그러다 난데없이 떠오른 메시지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튜토리얼 때부터 지금까지, 잊을 만하다 싶으면 간간이 나타나는 시선. 녀석은 늘 내게 관심을 보이면서도 여태 신명도 밝히지 않고 죽어라 관찰만 해 대고 있었다.
강해진 지금도 별다른 특징을 찾을 수 없어 정체도, 신위도 유추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내게 영감을 준 건 메시지가 아니었다. 녀석의 행동이었다.
‘굳이 내가 포위망을 뚫어야 할까? 그러다 엘릭서를 잃어버리면 전부 끝이야. 믿을 수 있는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 수 있다면.’
하지만 오로지 적으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딱 한 명이 있었다.
형.
‘하지만 형이 그냥 이곳으로 오게 되면 위험해.’
지구를 떠난 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기에, 그만큼 성격이 변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탑의 세계는 거칠고, 힘들다. 아무리 형이라고 해도 여기까지 오는 데 한참 시간이 걸릴 터였다.
하지만 형이 내가 걸어온 길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98층에 억류된 신과 악마가 하계를 구경하듯이, 형도 똑같이 내가 걸어온 길을 관찰할 수 있다면.
보다 빠른 속도로 여기까지 올 수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하고, 곧바로 회중시계와 영혼석을 꺼냈다.
형과의 추억이 담긴 물건이라면 충분히 내 기억과 사념을 담을 수 있는 저장소(貯藏所)가, 오만의 돌이라면 그 매개체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 정도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래서야 단순한 일기장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
지금부터 만들 물건은 형을 위한 길라잡이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내가 걸었던 길은 실패했던 길. 그런 길을 제시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더 효율적이고 올바른 길을 제시할 수 있어야만 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신이 당신을 지켜봅니다.]
다시 고민에 잠겼다.
[어떤 신이 당신의 결정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있었다.
방법이.
‘특전.’
역시나 오래전에 손에 넣었지만, 사용법을 몰라 여태껏 사용하지 못했던 것.
[어떤 신이 당신이 내린 결정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특전, ‘꿈을 그리는’은 일종의 시뮬레이션이라 할 수 있었다. 동일한 상황과 조건을 가져다 놓고, 변수를 몇 가지 지정하여 최적의 결과를 도출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얻은 답은 현실에도 일부 영향을 미쳐, 유리한 결과를 얻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여태껏 이것을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 몰랐고, 알아낸 후에도 너무 많은 조건을 필요로 했으니까.
아니, 필멸자가 절대 실행할 수 없는 특전이었다. 꿈에서 얻어 낸 결과를 현실에도 적용시킨다는 건, 물리 법칙을 넘어 인과율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뜻. 신과 악마들도 섣불리 손댈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건 대신격이나 주신격의 범위도 넘어서, ‘전지전능’하다는 평가를 받는 우주적인 존재나 시도해 볼 수 있을까 싶은 일이었다.
그러니 그동안 시도조차 못 해 보고 있던 것이었는데.
하지만 한계를 국한시킨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탑의 정보를 복제하여 저장소 안에 작은 탑을 구축하고, 꿈이라는 형태로 계속 시뮬레이션을 반복할 수 있다면.
데이터는 계속 누적되면서 가장 효율적이고 성공적인 최적의 결과를 얻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 결과는 형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테지.
그리고 그 안에서 구축된 세계에서만큼은. 여기서 실패한 나와 달리, 성공한 ‘나’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 순간.
눈이 크게 떠졌다.
‘그렇다면.’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생생하고 현실 같은 세계.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갑자기 덧없게 느껴졌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가진 비밀이 무엇인지 깨달은 것이다.
‘이건 전부 꿈이었구나.’
그동안 간간이 내 머릿속에 단편적으로 떠다니던 기억들이 있었다. 내가 기뻐하고, 슬퍼하고, 외로워했던 수많은 매 순간순간들. 그때는 단순히 꿈이거나, 데자뷔로만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실재한 일이었던 것이다. 최소한 ‘이 세계’에서만큼은.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
‘결국 나는.’
회중시계를 매만지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이런 꿈속에서도, 마지막에 웃은 순간이 단 한 번도 없었구나.’
* * *
“……멍청한 새끼.”
연우는 정우를 한껏 끌어안은 상태에서, 부서진 활자들이 그려 내는 수많은 장면들을 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그곳에서는 여러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거기에 몇몇 공통점이 있었다.
전부 중심에 정우가 있다는 것.
그리고 정우가 여러 이유로 사망한다는 점이었다.
방패에 의지하다가 화살 비를 뚫지 못하고 과다 출혈로 사망하는 정우. 튜토리얼을 앞에 두고 스캐빈저와 다투다 함정에 빠져 사망하는 정우.
올포원과 억지로 다투다 죽는 정우도 있는가 하면, 모든 힘을 잃었을 때에 억지로 영혼석을 취하려다가 마력회로가 폭주하는 정우도 있었다.
이따금 마지막에 이르러 엘릭서를 취하는 경우엔 현실을 깨닫고, 쓸쓸하게 회중시계를 매만지면서 눈을 감곤 했다.
연우는 품에 안긴 자신의 동생을 내려다보았다.
사실 그동안 간간이 그런 의문이 들곤 했었다.
동생이 남긴 일기장 속 히든 피스는 하나하나가 전부 값지고 귀한 것들이었다. 다른 거대 클랜들이 알았다면 곧바로 독식하려 들었을 것들.
대표적으로 바토리의 흡혈검과 올림포스의 보고가 있었다. 어째서 그동안 아무도 취하지 못했을까 싶은 비밀들이었는데.
만약 동생이 꿈을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반복하면서 찾아낸 요소들이었다면 말이 되었다.
결국 연우가 걸었던 길은.
동생이 무수히 반복되는 굴레 속에서 수십 수백 번씩, 아니, 어쩌면 수천 번이 되었을지도 모를 만큼 다치고, 죽으면서 얻어 낸 결과란 뜻이었다.
오로지 형이 자신과 같은 힘든 길을 걷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자신이 얼마든지 다쳐도 괜찮았던 것이다.
그래서.
연우는 동생을 보면서 멍청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새롭게 꿈을 반복한다고 해도, 잔여 기억은 무의식중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영혼도 계속 닳고 닳을 수밖에 없을 텐데. 그런데도 녀석은 끝을 내지 않고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정우는 여전히 눈을 뜰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전히 꿈속에 갇힌 채,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다.
[어떤 신이 슬픈 눈빛으로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연우는 갑자기 떠오른 메시지에 고개를 들었다.
정우가 처음 탑에 입장했을 때부터 줄곧 따라다녔던 메시지. 정우는 죽기 직전까지 누군지 몰랐지만, 연우는 아니었다.
연우와는 너무 강하게 채널링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니까.
“당신은 정우가 여기에 왔을 때부터 이런 미래를 내다봤던 겁니까?”
[어떤 신이 침묵합니다.]
연우가 눈을 가느다랗게 좁혔다.
“아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