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차정우 (8)
아테나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
이것은 아테나를 가리키는 가장 유명한 경구였다. 무지를 뜻하는 어둠 속에서 표홀하게 빛나는 빛은 지혜를 의미한다.
전략, 전술, 용맹, 투지, 정의, 지혜, 기예. 그 모든 것들이 여기에 해당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테나는 언제나 수많은 영웅들로부터 숭상을 받아 왔고, 또한 그들을 보호해 왔다.
항간에는 플레이어들이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탑을 오르면 그녀가 그들의 운과 명을 점지한다는 말도 있을 정도였으니.
일반 플레이어들과 다르게 아무 것도 없이, 오로지 ‘초대장’만 받고 입장한 동생에게서 어떤 운과 명을 읽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사실 연우는 그동안 아테나에게 궁금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사실 아테나는 자신을 호의적으로 볼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아이기스라는 접점이 있었다지만, 그것 외에는 그녀의 호감을 살 만한 행동을 전혀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동생에 대한 죄책감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테나는 동생이 가진 운과 명을 읽었고, 그 때문에 언제나 슬픈 시선으로 바라보면서도 정작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러다 뒤늦게 동생의 부름에 연우가 나타났을 때, 그때의 미안함이 남아 있어 뭔가 하나라도 더 도와 주려 했던 것이라면.
말이 된다.
“그런 겁니까?”
연우는 자신의 생각을 온전히 드러내면서 아테나의 시선을 바라보았다.
[아테나가 침묵합니다.]
[아테나가 슬픈 눈을 합니다.]
하지만 아테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아테나가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립니다.]
아마도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입을 다물려는 것이겠지.
하지만 연우는 그녀가 읽은 동생의 운과 명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정확하게는 동생의 운과 명이 아닌, 자신의 운과 명.
‘칠흑왕.’
페르세포네는 칠흑왕을 가리켜 제우스와 포세이돈, 하데스 세대가 극도로 증오하고 두려워하는 자라고 했다. 반면에 아테나나 자신과 같은 세대의 신들은 나쁘게 생각지는 않는다는 말을 했었다. 몇몇은 오히려 그를 경외한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칠흑왕의 후보로 크로노스를 생각했다.
제우스 세대가 실권을 잡은 대전쟁, 티타노마키아가 터졌을 때 쇠락하고 말았던 티탄의 왕, 크로노스라면 충분히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스틱스의 맹세 때문에 칠흑왕에 대해서 언급하지 못한다고 했던 페르세포네의 말과 다르게, 하데스는 크로노스의 이름을 너무 쉽게 언급했었다.
심지어 타르타로스에는 크로노스의 사체도 남아 있었으니. 티탄과 기가스는 크로노스의 시정을 흡수하여 힘을 키우고 있었다. 그렇다면 칠흑왕이 크로노스가 아닐 가능성도 크다는 뜻이었다.
결국 이토록 정체가 애매모호하지만, 칠흑왕이 올림포스에 미치는 영향은 아주 대단했다.
아니, 올림포스를 넘어, 죽음을 다루는 모든 신과 악마들에게도 추앙을 받는 존재의 힘은. 연우에게로 이어지고 있었다.
헤르메스가 칠흑왕에게 호감을 보이듯, 아테나도 칠흑왕에게 어떤 경애를 품고 있을 게 분명한 바.
당연히 동생에게서 칠흑왕과 관련된 어떤 미래를 보았고, 그것이 이어져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라면.
자신이 걷던 길에 아테나가 늘 함께해 주었던 것도 이해가 갔다.
[아테나가 침묵합니다.]
‘그가 대체 무엇이기에?’
연우는 다시 한 번 더 칠흑왕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불어 한편으로는 짜증이 났다. 어쩌면 동생부터 자신에 이르기까지, 마치 누군가가 짜 놓은 각본을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던 탓이었다.
[아테나가 그런 것이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연우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그동안은 자신을 따스하게 어루만져 주었던 그녀에게 감사한 마음이 컸지만.
이제는 그녀를 못 믿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인과율에 칭칭 묶여 98층에 억류된 그녀가 동생이 겪을 운과 명을 막을 방법이 어디 있었겠냐마는.
연우는 그래도 동생을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던 그녀에게 호의를 보일 수가 없었다.
[아테나의 어깨가 힘없이 축 처집니다.]
[헤르메스가 쓰게 웃으면서 그녀를 다독여 줍니다.]
[아가레스가 기분 좋게 킬킬거립니다. 꼴이 좋다면서 삿대질을 하며 비웃습니다.]
[헤르메스가 쌍심지를 켭니다.]
[아가레스가 코웃음을 치면서 그래서 뭐 어쩔 거냐고 시비조로 묻습니다.]
[헤르메스와 아가레스 사이에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릅니다.]
[신의 사회, 〈올림포스〉가 참전을 거부합니다.]
[악마의 사회, 〈르 인페르날〉이 아가레스를 돕지 않겠노라 선언합니다.]
그사이, 헤르메스와 아가레스가 신경전을 벌인다는 메시지가 떠올랐지만 무시했다.
지금은 깊은 잠에 빠진 동생을 깨울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깨워야 할까?
매개체였던 영혼석의 보라색 기운을 전부 빼돌렸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특전은 진행 중이었다.
때마침 어떤 장면 속의 정우가 회중시계를 매만지다가 힘없이 눈을 감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다른 한쪽 구석에서 새로운 정우가 튜토리얼에 입장하고 있었다.
마구 흔들어도, 마력을 흘려도, 동생은 하얀 날개 속에 몸을 웅크린 채 전혀 깰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니.
연우는 조금 짜증 섞인 눈빛으로 동생을 노려보다가, 다시 여러 활자가 만들어 내는 장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결국 이 특전을 깨는 수밖에 없다는 건데.’
어쩔 수 없지.
연우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불의 날개를 활짝 펼쳤다. 하늘 날개와 전혀 다른 붉고 검은 날개가 세상을 환하게 밝혔다. 그 속으로 의념을 쏘았다.
[동기화가 강화됩니다.]
[기존 플레이어(차정우)와 연결됩니다.]
* * *
이제야 겨우 A구획의 입구를 지나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퍼퍼퍽!
들고 있는 방패에 화살이 숱하게 꽂혔다. 조금만 움직인다 싶으면 발동되는 트랩 때문에 이제는 손발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어쩌지? 어쩌면 좋지?
머릿속이 새하였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런 곳인 줄 알았다면 오지 않는 건데.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어머니의 얼굴이 너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를 떠올리니 이가 악다물어졌다. 병실에 조용히 누워 계실 어머니. 당신의 웃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는 열망이 다시 불쑥 들었다.
그래서 다시 마음을 다잡고 전진하려는데.
쉭-
아주 작지만, 뒤쪽에서 뭔가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여태껏 트랩이 앞에서만 발동되어 뒤에도 있을 거란 걸 전혀 예상하지 못해 내 반응은 한참 늦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순간 당황한 가운데.
‘……어?’
나도 모르게 갑자기 몸이 반사적으로 뒤쪽으로 돌아간다 싶더니 오른손이 앞으로 뻗어졌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손 안쪽으로 화살이 빨려 들어왔다. 내 몸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움직이던 그대로 팔을 돌려 화살의 방향을 옆으로 비스듬하게 꺾었다.
까앙!
그건 때마침 반대편에서 날아오던 화살과 허공에서 가볍게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나도 모르게 얼결에 해낸 신기.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오른손을 내려다보다가, 별안간 고개를 뒤로 돌렸다.
분명 누군가가 뒤에서 도와준 것 같았는데. 하지만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익숙한 느낌이었었는데. 착각이었던 걸까.
‘형…….’
여기에 있지도 않은 사람을 생각하며 중얼거리다, 다시 주먹을 꽉 쥐었다. 얼결에 해내긴 했어도 자신감이 생겼다. 더 앞으로 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큐툼을 정자세로 갖추고, 다시 천천히 전진했다. 방금 전까지 후들거리던 다리는 어느새 진정되어 있었다.
하나둘씩.
갑자기 세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놈들이 뒤로 갔어!”
“비에라!”
“아이스 월!”
갑자기 얼음 장벽이 땅거죽을 뚫고 위로 삐죽삐죽 치솟았다.
때문에 사방으로 흩어져 공격을 분산시켰다가, 뒤쪽에 있던 나를 노리려 했던 스캐빈저들은 도리어 얼음 장벽이 만들어 낸 미로에 갇혀 우왕좌왕해야만 했다.
“칵, 퉤!”
나는 다행이란 생각에 가래침을 땅바닥에다 거칠게 내뱉었다. 타이밍이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모든 게 끝장날 수 있었는데.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려 다행이었다.
그런데.
‘누가 말해 준 거지?’
먼지구름 때문에 시야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해 타이밍을 재지 못하던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환청처럼 누군가가 ‘지금’이라고 말해 준 덕분에 늦지 않을 수 있었다.
목소리는…… 낯이 익었다.
형의 목소리였던 것 같았는데.
피식.
그러다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말이라는 걸 알고 헛웃음을 흘렸다. 지구에 있을 형이 어떻게 여기에 있다는 건지.
그래도 형의 목소리를 닮은 환청 덕분에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해하면서.
“개새끼들아, 다 뒈졌어!”
난 검을 움켜쥐고 놈들에게로 달려들었다.
분명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순간순간마다.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내 옆에.
탈퇴하겠다는 쿤 흐르의 폭탄선언에 클랜원들은 가만히 침묵을 지켰다.
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천천히 일어섰다. 클랜원들의 시선이 저절로 따라왔다. 쿤 흐르는 내가 뭘 하려는지 알지 못하고 멀뚱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녀석 앞에 서서 씩 하고 웃어 보이면서.
빠악!
주먹으로 녀석의 머리통을 세게 내리쳤다.
“아아악!”
쿤 흐르는 머리를 쥐어 싸매면서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방금 전까지 비장한 표정을 짓던 녀석의 얼굴엔 어느새 눈물이 글썽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는 눈빛. 거기다 대고 코웃음을 쳤다.
“눈 안 깔아, 새까? 뭘 잘했다고 눈을 부라리긴 부라려?”
“…….”
“닥치고. 형만 믿어. 네 복수는 내가 해 준다.”
“하지만……!”
“씁!”
반발하려는 쿤 흐르의 말허리를 자르고, 눈에 한껏 힘을 줬다.
“형이 해 준다면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들일 것이지, 뭔 잔말이 많아? 닥치고 나만 따라와.”
원래대로라면 몇 번이나 고민을 거듭하고 어렵게 말을 꺼냈을 녀석을 생각해 그냥 보내 주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랬다가는 후회하게 될 거란 생각이 너무 갑자기 들었다.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잠깐 머뭇거릴 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때, 형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너무 쉽게 답이 나왔다.
나는 한쪽 무릎을 꿇어 쿤 흐르와 눈높이를 맞추면서. 복잡할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네 등대가 되어 주마.”
그 순간순간들은, 잘못된 선택을 내려서 두고두고 후회를 했었던 순간들이었다.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왜 당시에는 미처 생각지 못했을까, 나서지 못했을까 싶었던 순간들.
“비에라.”
“왜?”
“너였구나. 나에게 독을 먹였던 게.”
“무슨……!”
콰드득-
“빌어먹을 년.”
그 매 순간들이 모이고 모여.
바뀌었고.
“무왕 아저씨.”
“뭐야, 또? 어제 그렇게 처맞고 더 얻어터지고 싶어서 왔냐?”
“아니. 그냥 이 말은 꼭 해 주고 싶어서.”
“……?”
“거, 사람이 좀 베풀 줄도 알고, 어? 후배한테 배려도 좀 하고. 인성질도 좀 작작하시고.”
“네가 뒈지려고 작정했구나?”
“어차피 이래 죽나 저래 죽나 똑같은데, 뭘요. 에이 씨! 몰라! 죽이려면 죽여! 나도 모르겠다! 배 째요, 배 째!”
바뀐 순간들이 다시 모이고 모여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더라면.
“아난타.”
“……왜?”
힘없이 돌아서는 그녀를 보며 난 엷게 미소를 뗬다.
“고마웠어. 언제나.”
난.
마지막에 웃을 수 있었을까?
파각-
어디선가 그런 소리가 났다.
아니.
지금이라도 웃을 수 있을까?
단단한 유리 벽에 세게 금이 가는 소리.
금은 곧 균열이 되어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뻗쳐 유리 벽을 가득 채웠고.
와장창!
크게 깨지는 소리와 함께 세상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곳곳에 넓게 퍼져 있던 수많은 ‘나’가 하나로 연결되었다. 그 속에서 수많은 생각과 사념과 정보들이 쏟아지면서 순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지만, 곧 내가 어떤 상황인지를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서. 천천히 날 둘러싸고 있던 날개를 걷어 냈다.
그 너머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거울을 본 것처럼 나와 똑같은 얼굴. 하지만 인상이 너무 차가워서 못생긴 얼굴이었다. 역시 내가 저 얼굴보다는 더 잘생겼단 말이지, 암.
“결국 여기까지 왔네, 형.”
그렇게 환하게 웃는 나를 보면서.
형은 무뚝뚝한 표정 그대로 양 팔을 뻗었다. 포옹이라도 하자는 건가. 그런데 저러니까 꼭 로봇 같잖아.
그래도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운지 눈시울이 붉었다. 얼굴 표정과 다르게 참 속이 여린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네.
아무래도 달래 줘야겠다는 생각에 씩 웃으면서 덩달아 안아 주려는데.
빠아악!
“아아악!”
갑자기 형이 내 뒤통수를 거세게 후려쳤다.
골이 마구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