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366화 (366/862)

16화. 하늘 날개 (4)

『이젠 연산 장치도 안정화되었으니까, OS 구축만 남았네.』

“그게 가장 어려운 작업이지.”

『어렵다기보다는 엿 같겠지.』

정우는 가볍게 혀를 찼다. 그 역시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신과 악마 같은 초월자들이 얼마나 오만한 족속들인지.

타협과 굴종 없이 너무 오만해서 절대 뜻을 굽힐 줄 모르고, 오로지 자신의 신화만을 추구하는 삶.

어떻게 ‘사회’를 구축하고 있는지도 의문이 들 정도인 그들이, 한낱 필멸자가 자신들의 힘을 통제한다고 할 때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정우는 아마 그들이라면 불쾌감도 느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어이없어하거나,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식으로 코웃음만 치지 않을까.

그러니 협조를 바라는 건, 절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권능을 내려 준 신과 악마들의 경우, 연우를 사도로 삼고자 하는 게 주목적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방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정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래도 쉽지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새로운 하늘 날개를 만드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을, 연우가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가 가장 궁금했다.

『방법은 좀 생각해 봤어?』

“대충은.”

『오. 어떤 건데?』

“아마 너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데.”

정우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자꾸 그런 식으로 의뭉스럽게 넘어갈래?』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슬쩍 상대를 떠보면서 필요한 것만 쏙쏙 빼 가는 짓은 똑같았다. 그걸 자기 돕겠답시고 나서는 동생에게도 똑같이 하고 있으니.

연우는 가볍게 피식 웃고 말았다. 툭하면 티격태격하던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한편으로는 문득 어머니가 이 모습을 보셨다면 어떠셨을까 하는 생각도 속이 쓰리기도 했다.

“그래도 일단 먼저 말해 봐. 나도 참고할 테니까.”

『……하! 난 우선 분류가 가장 급선무라고 생각해.』

현재 연우가 받아들인 권능의 수는 총 5천여 개.

그마저도 계속 추가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래저래 소문을 듣고, 혹은 ‘신살’ 이벤트를 확인하고 계속 찾아오는 모양이었다.

그러다 보니 권능들이 너무 중구난방으로 뒤섞여 있었다.

권능이란, 초월자들이 걸어온 신명과 신화가 고스란히 담긴 업(業)의 표면 형태.

당연히 같은 사회이거나 신위를 지녔다고 해도, 속은 다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하나가 너무 독립적이었다.

그래서 정우는 공통분모가 될 만한 커다란 ‘틀’을 여러 개 만들어, 여기에 맞춰 권능들을 정리해야 하는 게 가장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그건 나도 비슷한 생각이야. 그럼 공통분모는 어떻게 짜려고?”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물었다.

정우가 대답했다.

『날개는 좌우로 나뉘어 있잖아? 이걸 기준으로 삼는 거야. 왼쪽은 신, 오른쪽은 악마들로.』

이건 연우가 보기에도 괜찮은 생각이었다.

“그리고 거기서도 하위분류를 만들고?”

『어. 분류를 정확하게 어떻게 나눌지는 의논을 해 봐야겠지만. 가장 무난한 건, 각 사회별로 묶는 거지.』

신과 악마들은 개인주의적인 성향에도 불구하고, 홀로 돌아다니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신화를 공유하고 있는 자들을 중심으로 집단 체제를 구축하여, 함께 힘을 낸다.

정우는 바로 이 점에 착안해, 크게 신과 악마를 나누고, 각각 사회별로 권능을 묶으면 통제가 훨씬 순조롭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해 둔다면, 권능 간에 벌어지는 충돌도 어느 정도 유화될 수 있을 테니.

하지만.

“아니. 괜찮긴 하지만 조금, 아니, 많이 위험해.”

연우는 곰곰이 생각을 해 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우는 밤새 고민했던 게 괜히 묵살된 것 같아 조금 언짢았다.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투덜거렸다.

『왜?』

“그래서는 인자의 불균형만 가져 올 테니까.”

정우는 그게 무슨 말이냐며 투덜거리려다가, 뒤늦게 말뜻을 알아챘다.

『아. 그걸 생각 못 했네.』

현재 채널링이 연결된 신과 악마들의 비율은 대략 3:7.

악마 쪽이 월등하게 많았다.

연우가 여태 걸어온 길이 악마 쪽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개인 스테이터스 창에 나타난 성향이 ‘악’에 가까운 것도 한몫을 단단히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날개를 구분 짓는다면 괜한 불균형만 가져올 수 있었다.

연우가 보유한 세 인자 중에서, 마의 인자가 더 월등하게 발달하게 될 테니까.

『그럼 권능의 가짓수를 조절한다면? 5:5 비율로 맞추면 되지 않을까?』

[소수의 신들이 괜찮은 생각이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소수의 악마들이 그게 무슨 말이냐며 역정을 냅니다.]

[뒤늦게 채널링에 참여한 악마들이 조바심을 느낍니다.]

[격이 낮은 악마들이 당신의 동생을 노려봅니다.]

[아가레스가 불쾌감을 느낀 악마들을 보며 손가락질을 하면서 비웃습니다.]

정우는 악마들의 시선에 노골적으로 경멸감이 섞인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냥 무시했다.

하지만 연우는 이번에도 정우의 의견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각 초월자들의 격이 다 달라서 단순히 비율을 맞춘다고 해도, 무게가 다를 수밖에 없어. 게다가 밸런스 문제를 어떻게 조절한다고 해도, 육체가 망가질 가능성도 크고.”

만약 정우의 말대로 날개를 구분 짓는다면. 육체는 크게 두 쪽으로 나뉘어 좌측에서는 신의 인자가, 우측에서는 마의 인자가 더 발전할 가능성도 컸다. 겨우 맞춰 놓은 삼각 균형이 망가지는 것이다.

『젠장. 너무 어렵네.』

정우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마신룡체라는 육체가 다뤄지는 것 자체가 처음인 데다가, 당장 그가 가진 자료가 많질 않으니 당최 가닥을 잡기가 힘들었다.

『그럼 형은 어떻게 할 생각인데?』

“키워드를 설정해서 카테고리를 나누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다.”

『키워드?』

“어. 지금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신과 악마들의 신위를 구분 짓는 거지. 좌측은 ‘죽음’, 우측은 ‘전쟁’으로.”

‘죽음’과 관련된 신과 악마들은 연우가 칠흑왕의 후계로 여겨질 때부터 깊은 관심을 보이는 중이다.

이와 다르게, ‘전쟁’과 관련된 신과 악마들은 연우가 여태 걸어 온 길, 즉, 업을 바탕으로 호의를 보이고 있었다. 자신들의 신화를 엿본 것이다.

즉.

좌측에는 칠흑왕의 권능을.

우측에는 자신의 업을 새겨 넣은 날개를 만드는 것이다.

[모든 죽음의 신들이 당신의 선택에 기꺼워합니다.]

[모든 죽음의 악마들이 당신이 하려는 일에 깊은 관심을 드러냅니다.]

[모든 전쟁의 신들이 새로운 발상을 궁금해합니다.]

[모든 전쟁의 악마들이 다른 신위의 신과 악마들을 보며 비웃음을 던집니다.]

[아가레스가 조금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봅니다.]

[아가레스가 메시지 전달을 시도합니다.]

[아직 제한 시간이 종료되지 않아 불발됩니다.]

[아가레스가 성가시다면서 길길이 날띕니다.]

[아가레스의 접속이 제한됩니다.]

[아가레스의 접속이 제한됩니다.]

『두 카테고리로 권능들을 묶겠다고? 거기에 못 드는 것들은? 다 버리게?』

가령, 별다른 말은 없었어도 처음부터 연우에게 깊은 호의를 드러낸 악마, 혼돈의 경우.

‘사흉(四凶)’이라는 이름으로 악명이 자자하다지만, 실상 따지고 보면 그는 죽음이나 전쟁과 깊은 관련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말한 것만 따진다면, 그 모든 것들을 버리겠다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담아야지. 어떻게든.”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신화의 근본이 뭔지 알아?”

『……갑자기 또 무슨 생뚱맞은 말을 하려고.』

“‘투쟁’이다.”

정우는 묘한 기분에 잠겼다.

“투쟁은 자신을 이기는 극기일 수도 있고, 세상과 맞서 싸우는 전쟁일 수도 있지. 혹은 운명을 거스르는 것일 수도 있고.”

『그런 식으로 따지면…… 확실히 ‘죽음’이나 ‘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게 크게 없긴 하겠네.』

정우는 그제야 연우가 어떤 의미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쉽게 말해서, 각 권능이 갖고 있는 특징들을 최대한 넓게 잡겠다?』

“그래. 그리고 그런 커다란 카테고리 안에다 다시 세부적인 카테 고리를 계속 잡아 나가면서 권능들을 정리하는 거지.”

정우는 가볍게 혀를 찼다. 말장난처럼 보여도, 사실상 이보다 효율적인 작업도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자칫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는 신과 악마들의 균형을 원하는 대로 잡을 수도 있을 테고, 중구난방으로 뒤섞인 권능들도 여러 개의 크고 작은 틀 안에 세세히 정리될 테니까.

『권능의 주인들이 좋아하려나.』

“해야지. 어떻게든.”

연우는 고개를 위로 들어 계속 눈가를 어지럽히는 메시지를 빠르게 파악했다.

[혼돈이 침묵합니다.]

[비마질다라가 재미있는 생각이라며 웃음을 터뜨립니다.]

[케르눈노스가 자신이 어디로 분류될지에 대해 깊게 고심합니다. 다른 카테고리 키워드가 없을 것인지 묻습니다.]

……

[네르갈이 팔짱을 끼며 가만히 살펴보기로 합니다.]

[아레스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립니다.]

[아그니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 엎어 버리겠노라고 공언합니다.]

……

메시지의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죽음이나 전쟁을 신위로 삼고 있는 신과 악마들은 대게 호응하는 분위기였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은 불쾌감을 느낀 것이다.

몇몇은 채널링을 강화시켜 연우를 압박하려는 모양새도 보였다.

하지만.

이런 반응들도 이미 예상했던바.

연우는 무시하고 그냥 계속 진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이 두 가지 키워드는 그도 어떻게 양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죽음’은 칠흑왕의 형틀 세트를 갖고 있는 동안에는 절대 버릴 수 없는 것이었고.

‘전쟁’은 그가 여태껏 쌓았고, 앞으로도 쌓아 갈 ‘업’에 가장 필요한 요소였다.

‘언젠가 업을 신화로 바꾸기 위해서는…… 절대 포기할 수 없어.’

연우는 단순히 상위 층계를 공략하고, 복수만 한 뒤 멈출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더 높은 곳. 더 먼 곳으로 올라가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하나하나씩, 차근차근히 준비를 해 둬야만 했다.

『형, 혹시……?』

정우는 뒤늦게 연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깨닫고, 놀란 눈이 되었지만.

연우는 조용히 하라는 듯이 검지를 입가에 갖다 댔다. 정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크게 기함하고 말았다.

단순히 마신룡체의 운영 체제라고만 생각했던 새로운 ‘하늘 날개’가 사실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그렇기에.

정우는 더더욱 집중해야만 하겠다고 생각했다.

‘형이 저런 마음을 먹은 건, 어디까지나 나 때문일 테니.’

어깨가 많이 무거워졌다.

* * *

두 개의 날개는 각각 추구하는 키워드가 다른 만큼, 제작도 따로 이뤄졌다.

먼저 제작에 착수한 부분은 왼쪽이었다.

왼쪽 날개에 배당된 카테고리 키워드는 ‘죽음’.

왼쪽 날개를 만드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정우가 하늘 날개가 만들었을 때 사용한 루틴과 프로세스를 그대로 가져와 아트만 시스템에 맞게 뜯어고치고, 추가로 칠흑왕의 권능을 가져온 것이다.

‘칠흑왕의 정체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죽음을 신위로 둔 신과 악마들은 칠흑왕을 끝까지 추종하였지.’

그렇다면 중심축을 칠흑왕의 권능으로 삼아, 다른 권능들을 예속시키려 한다면?

통제가 훨씬 순조로울 테지.

연우는 여기에 착안해 왼쪽 날개를 발동시키는 조건을 칠흑왕의 형틀로 지정해 두고, 최초 명령어를 권능 ‘영혼 수확자’로 삼았다.

그러자.

[스킬, ‘하늘 날개(좌)’의 제작을 시작합니다.]

……

[칠흑왕의 형틀 세트의 옵션, ‘영혼 수확자’를 최초 명령어로 지정하였습니다.]

[카테고리 ‘죽음’이 최초 명령어와 성공적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카테고리 ‘죽음’에 포함된 권능들이 최초 명령어의 영향을 받기 시작합니다.]

[태산부군이 노한 얼굴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네르갈이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크시티가르바가 처음으로 난감한 표정을 짓습니다.]

……

[이자나미가 그분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라고 말합니다.]

[할파스가 짜증 섞인 얼굴로 한숨을 내쉽니다. 어쩔 수 없이 당신의 뜻을 따르기로 합니다.]

[아이쉬마-다이바가 ‘죽음’을 좇겠노라 선언합니다.]

[헬이 상기된 얼굴이 됩니다.]

[모든 죽음의 신들이 선언합니다.]

[메시지: 너의 그릇된 욕망으로, 그분의 힘을 함부로 재단하고 한 데 모으려 하는 시도는 발칙한 짓이나.]

[모든 죽음의 악마들이 이어서 선언합니다.]

[메시지: 이제는 사라져 버린 그분의 힘을 다시 모아 건실한 건설을 이룰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 할까.]

[메시지: 하지만 그분의 위명을 더럽힐 경우, ‘죽음’은 통제를 벗어나, 그대를 집어삼키게 되리란 것을.]

[메시지: 언제까지고 명심해야 할 것이다.]

파아아-

모든 선언 메시지가 끝났을 때.

찰칵, 찰칵-

연우는 자신을 둘러싸던 444개의 채널링이 크게 하나로 통합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확하게는 씨줄이 꼬여 동아줄이 되듯이, 아주 작은 채널링들이 같이 묶이면서 더 큰 단위로 뛰어오르는 느낌이었다.

클라우드? 서버?

이걸 두고 그렇게 표현해도 되지 않을까.

아주 잠깐, 연우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름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었기에 왼쪽 날개를 만드는 데 다시 집중했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444개의 검은 깃털이 가득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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