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하늘 날개 (7)
“프로토게노이의 아이가 사고를 쳤다지?”
하데스가 한 손으로 턱을 괴면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정말 기분이 좋아서 나온 웃음이 아니었다. 시니컬한 비소였다.
보고를 올리던 람은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다.
“계속 저대로 저들을 내버려 둘 참이십니까?”
하데스가 다시 웃음소리를 냈다. 이번에는 냉소가 아니었다. 정말 재미있어서 웃는 것이었다.
“내버려 두지 않으면?”
“지난 기간 동안 저들은 성역뿐만 아니라, 타르타로스의 곳곳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올림포스에서도 이미 이곳의 전반적인 사정에 대해 알게 되지 않았겠습니까?”
파네스 일행이 포세이돈 등의 가호를 받고 있는 건, 디스 플루토의 부관 급 이상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포세이돈, 데메테르, 헤스티아, 헤라 등의 눈과 귀가 되어 타르타로스 곳곳을 누비고 다니면서, 얼마나 많은 정보가 저쪽으로 넘어갔을지.
파네스 등을 앞세워 전쟁을 돕겠다는 얄팍한 구실을 내세우고는 있지만.
절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기로 한 3형제 간의 결의를 깨뜨리고, 포세이돈이 이렇게 허락도 없이 무례하게 타르타로스를 누비고 다니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하데스는 지난 수백 년 동안 타르타로스의 일이 외부에 새어 나가는 것을 철저하게 통제해 왔다. 정도가 너무 심한 나머지, 페르세포네와도 그동안 연락을 취하지 않았을 정도였으니.
하지만 최근 들어 하데스는 정보 통제에 대해 이렇다 하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냉소적인 모습을 계속 보였었다 해도, 어떻게든 모든 걸 제어하려 했던 것을 감안해 본다면.
오랫동안 그를 옆에서 모셨던 람으로서는 정말이지 속이 뒤집힐 일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하데스가 이제 냉소적인 것을 넘어 염세적인 것으로 비칠 정도였으니까.
책임감이 강하신 분이니 끝까지 칼을 손에서 놓으시지는 않겠지만, 서서히 어깨가 가라앉는 게 보였던 탓이었다.
대체 언제쯤부터였을까.
그래. 그때부터였다.
연우 일행이 페르세포네의 전언을 가져왔을 때.
당시까지만 해도 언제나 단단하던 하데스가 처음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었다.
처음에는 오랜만에 배우자에게서 소식을 받아 심중에 변화가 생긴 것이라고만 생각했지만.
지금 와서 막상 지난날을 되돌아보니 조금 다른 것 같았다.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의도적으로 피해 왔던 게 떠올랐던 탓이었다.
그동안은 정보 통제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랬다고만 생각했었지만. 단순히 그렇다고 하기에 하데스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페르세포네와의 접점을 만들지 않았었다.
올림포스 내, 아니, 98층의 천계를 통틀어 배우자 페르세포네에 대한 하데스의 열렬한 구애와 연정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죽하면 헤라가 툭 하면 이 여자 저 여자에게 집적거리고 다니던 제우스를 하데스와 비교하며 바가지를 긁어 댄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으니.
그랬던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피해 다녔다는 건, 분명히 켕기는 뭔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페르세포네의 전언을 받고 나서는 기뻐하기는커녕, 도리어 가라앉은 모습만 보였으니.
람으로서는 대체 그동안 두 부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
하데스는 플레이어들의 사이에 있었던 분쟁을 듣고도 별다른 감흥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불과 몇 달 전의 그였다면, 군 내 질서를 어지럽힌다면서 큰 징벌을 내렸을 텐데. 지금은 그럴 의욕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티탄, 기가스와의 전쟁은 극한까지 내몰린 상황이다. 그런 와중에 계속 외부의 개입을 차단하면서 고집을 피우는 것도 못할 짓이지. 그러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 터치하지 마라. 조만간 올림포스에서도 어떤 반응을 보일 테니.”
“…….”
“그래도 플레이어들 간의 분쟁이 군 내 사기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건 사실이니…… 여태 그러했던 것처럼 그대가 알아서 정리를 하라.”
람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역시 이번에도 하데스는 개입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확실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랫사람에 대한 신의는 여전히 깊게 남아 있어서, 의심 없이 일을 맡겨 준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사도이자, 부관으로서 한 가지 청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아라.”
“플레이어들의 통제권에 더해 3개 군단에 대한 지휘권을 주셨으면 합니다.”
하데스의 한쪽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갔다. 피곤기가 묻어나는 눈동자에 살짝 흥미가 감돌았다.
“전투라도 치를 셈인가?”
“명령하신 대로 지난 며칠 동안 ‘명부전’과 ‘지천전’의 주변을 면밀하게 살피고 왔습니다. 그리고 주둔 병력이며 경계 상황이 많이 허술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명부전과 지천전은 하데스의 옛 성역들이었다. ‘명왕의 신전’과 함께 13개 신전으로서 타르타로스를 밝히며 티탄과 기가스를 통제하던 곳. 하지만 지금은 티폰의 공세에 빼앗기고 만 장소였다.
람은 지난 며칠 동안 하데스의 명령에 따라, 다른 이들에게 알리지 않고 조용히 두 옛 성역들을 다녀왔었다.
그러고 나서 깨달은 바는 하나.
‘되찾을 수 있다. 얼마든지.’
티탄과 기가스의 공세가 아무리 거칠다고 해도, 그들의 본거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명부전과 지천전에까지 영향력을 투사하기엔 사실상 많이 힘들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두 곳에는 아직도 하데스의 신력이 상당수 남아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최근 들어 명왕의 신전을 공략하기 위해, 티탄과 기가스의 병력은 대부분 ‘거신의 토령’ 쪽에 집결된 상태였다.
가뜩이나 버려지다시피 한 명부전과 지천전에서도 그쪽으로 상당수의 병력이 빠져나갔을 건 불에 보듯 뻔한 일.
람으로서는 당연히 욕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적의 경계가 극도로 낮아진 지금이라면. 안타깝게 잃어버린 두 성역을 회복할 좋은 기회였다.
“키클롭스 아르게스로부터도 ‘횃불’을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성역을 수복하려면 지금이 가장 적기입니다.”
횃불.
정확하게는 신성화(神聖火)를 말하는 것이었다.
태초에 공허만이 가득했던 곳에서 우주를 탄생케 한 큰 폭발과 함께 생겨났다는 불길.
불길은 곧 빛이 되어 공허와 뒤섞이면서 여러 세계와 차원을 차례대로 열었으니.
신은 그런 불길의 잔재에서 스스로 일어난 존재. 당연히 어떻게든 자신들의 근본인 신성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실제로, 신성화를 쟁취한 일족은 우주를 다스리는 막대한 권한을 획득할 수 있었으니.
우라노스에게서 크로노스에게로, 그리고 다시 제우스로 이어지는 주도권 쟁탈전의 이면에는 바로 이런 신성화가 있었다.
최근에는 루시엘이 신성화를 제멋대로 삼키려다가 모든 신과 악마들로부터 공분을 사 몰락을 하기도 했었다.
다만, 최근에는 제우스가 깊은 잠에 들고, 신성화의 화력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약해지면서 올림포스 내에서도 위기감이 생겨나고 있던 중이었다.
하데스가 티탄과 기가스를 제어하기 위해 들였던 신성화가 꺼진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으니.
사실 따지고 보면 티폰이 갑자기 크로노스의 시정을 채취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전반적인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키클롭스의 막내가 람에게 따로 보고를 해 왔다.
꺼진 불길을 다시 피울 수 있게 되었노라고.
그동안 신성화의 원재료인 영혼석을 갖고 있으면서도 불길을 추출할 방법이 없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중이었는데, 다른 형제들이 돌아오면서 방법이 다시 생긴 것이다.
티폰과 기가스가 뿌린 어둠에 잠긴 성역에 다시 횃불을 붙일 수만 있다면.
성역은 다시 성역으로서의 제 기능을 되찾을 것이고, 유실된 하데스의 신력도 되돌아올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의 권속인 디스 플루토도 다시 전력을 끌어올릴 수 있게 되겠지.
본디 권속은 모시는 존재의 격에 따라, 가지는 힘도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법이었으니.
“그러니 허락해 주십시오. 군단을 끌고 성역을 되찾아 오겠습니다. 플레이어들 역시 공적치를 필요로 하고, 포세이돈 등도 타르타로스를 돕겠다는 명분을 대고 있으니 절대 거부하지 못할 겁니다.”
“그 두 곳 사이에는 크로노스의 사체도 놓여 있는데도?”
람은 타르타로스를 이등분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크로노스의 사체를 떠올리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 보이겠습니다.”
이미 협정 따위는 제대로 발동되기도 전에 연우가 이미 깨 버린 지 오래.
다시 전투가 벌어진다고 해도 문제는 없었다.
하데스는 이제야 겨우 전열을 정비하기 시작한 군단을 이렇게 내보내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나와는 다르군.’
람의 불타는 눈빛을 보니 거절을 할 수도 없었다.
의욕을 상실해 가는 그와 다르게, 수하들은 언제부턴가 희망을 찾고 있었다.
그런 불씨를, 자신의 손으로 꺼뜨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마음대로, 하라.”
그렇게.
출정 명령이 떨어졌다.
* * *
하데스의 명령은 비밀리에 전해졌다.
이번 출정을 제안한 람의 계획에 따르면, 이번 일은 절대 외부에 새어 나가서는 안 되었다. 아군도 모르는 사이에 기습적으로, 전격전이 이뤄질 예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출정에 참여하게 된 10, 11, 12군단은 비상 대기령에 따라 각자 병영에서 대기 중이었고.
플레이어들을 따로 모아 둔 13군단 역시 각자가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병영에 모여야만 했다.
아직 하늘 날개를 완성하지 못한 연우로서는 되도록 지하 감옥에 남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퀴네에를 타 내려면 어쩔 수 없지.’
칠흑왕의 형틀 세트를 완성시켜야 하는 연우로서는 어쩔 수 없이 참여를 해야만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이테르와 엘로힘 쪽도 걸리긴 마찬가지고.’
연우는 같은 군단인데도 불구하고, 어느새 크게 두 갈래로 나눠진 병영을 보면서 가볍게 혀를 찼다.
저쪽 갈래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섞여 있었다.
람에게 손이 잘려 나갔던 아이테르와 엘로힘의 파티원들.
녀석들은 이글거리는 눈길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중이었다. 람에게 당하기는 했지만, 그 원인이 연우 일행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녀석들 중에 전문 치유술사가 있어서 잘린 오른손을 다시 붙일 수는 있었지만. 아직 제어가 잘되지 않는지 표정이 좋질 않았다.
만약 수시로 이곳을 들락날락하는 람의 눈빛이 없었더라면, 진즉에 다시 부딪쳤겠지.
물론, 연우 일행은 그들이 노려보건 말건 간에, 아예 대놓고 코웃음을 치면서 무시를 하고 있었다.
파네스 일행의 모함에 대해서 밤새 그게 아니라며 사정을 설명했고, 적지 않은 이들이 그들의 편을 들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연우까지 감옥에서 나와 가세를 한 상태.
더 이상 반감을 참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미 연우도 저들이 다시 시빗거리를 던진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목을 쳐 버려도 된다는 허락까지 받은 상태였다.
그래도 다행인지 불행인지.
13군단 내에서는 아직 이렇다 할 반목은 없었다. 분명 각 군단병이 가진 친분 여하나 이해관계에 따라 파벌은 갈라지고 있었지만, 그보다 디스 플루토로서의 정체성을 더 중시하기 때문이었다.
파네스 일행도 그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이 이상 문젯거리를 만들지 않고 있었다.
물론.
연우는 그게 얼마 가지 않으리란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기회만 엿보고 있는 거겠지.’
연우는 이쪽을 고요한 눈빛으로 보고 있는 파네스와 아이테르를 보고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저들 딴에는 최대한 들키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하는 행동이겠지만.
‘저렇게 대놓고 포세이돈의 시선을 붙여 두고서야.’
[헤르메스가 이름을 밝히지 않은 신(1, 올림포스)이 당신을 노려본다고 설명합니다.]
[아레스가 이름을 밝히지 않은 신(2, 올림포스)이 당신을 지켜본다고 낄낄거리며 언질을 줍니다.]
……
채널링으로 연결된 신과 악마들이 자신을 노려보는 누군가가 있다고 언질을 주는데, 몰라서는 바보가 아닐까.
물론, 인과율이라는 시스템의 통제 때문에 대놓고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우회를 해서 누군지 힌트 정도는 충분히 줄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들의 고자질이 없어도, 연우는 그 어떤 플레이어들보다 많은 채널링을 보유하고 있었다. 아니, 그 정도를 넘어 서버 클라우드까지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당연히 다른 플레이어가 가진 채널링을 일부 엿보는 거야 문제도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포세이돈이 더 많은 신들을 이끌고 자신을 찾아왔다. 그리고 시빗거리를 조장하기까지 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찌 모를까.
연우는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른쪽 날개야 이동하는 와중에 완성하면 그만. 그보다 완성된 하늘 날개를 써먹을 장소를 찾아야 했었는데, 마침 무대가 마련된 것이다.
더군다나.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 온 셈이었으니.
아이테르는 어차피 동생의 몫이었고, 자신은 대신에 다른 것을 가져가면 그만이었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연우는 일용할 양식-신의 인자-를 가득 떠먹여 줄 포세이돈이 있는 곳으로,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