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하늘 날개 (8)
“우선, 아직 면식이 없는 이들도 있을 테니 간단하게 자기소개부터 하지.”
람의 주도하에, 13군단의 플레이어들은 가볍게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이름은 팜. 검사입니다.”
“토르닥. 창사요.”
“세이. 궁수입니다. 관측병 역할도 겸하고 있습니다.”
13군단은 사실 따지고 보면 ‘군단’이라고 하기엔 그 수가 너무 적었다.
대개 지상 층계를 공략하다가 자기 수련을 위해 흘러들어 온 자들.
하지만 그렇기에 그들은 하나하나가 강자들이었다.
대부분 위에서도 이름이 알려진 자들.
열 개의 관문을 통과할 정도이니 이미 기량이 검증되기도 했고, 신적인 존재들과 겨루면서 실력이 그만큼 성장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연우도 그들의 이름을 들으면서 용신안으로 실력을 확인하는 한편, 자신의 마력은 필요한 만큼만 드러냈다.
“파네스.”
엘로힘 쪽 파티의 리더는 자신의 이름만 가볍게 밝혔다. 여기 있는 사람 중 자신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으리라 여기는 듯했다.
‘신살을 이뤘다고 했었지.’
듣자 하니 메가에라를 잡았다던가.
신살을 이뤘다는 건, 그만한 실력을 겸비했을 뿐만 아니라 격을 초월할 만한 특별한 재주가 있다는 뜻이었다.
‘포세이돈 등이 강신했나? 아니면 비슷한 무언갈 주었나?’
연우는 파네스가 숨겨 둔 패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녀석을 가호하고 있는 포세이돈 등이 어떤 것을 내린 건 분명한데, 그게 무엇인지 도통 감이 잡히질 않았던 것이다. 파네스가 순수한 실력으로 신살을 이뤘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덕분에 아스트라이오스를 잡은 이벤트의 효과가 반감되긴 했지만.
그래도 연우는 녀석들이 두 번 이상의 요행을 바라기는 힘들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때, 자기소개가 끝난 파네스가 이쪽을 보았다.
어떻게 보면 노려보는 것 같기도. 혹은 통성명의 다음 차례를 말해 주는 것 같기도 한 눈빛.
“카인.”
연우는 녀석의 시선을 맞받아치면서 대답했다.
그때, 파네스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정말 그게 본명이 맞는 건가요?”
“그게 중요하나?”
“중요하죠. 앞으로 등을 맡기게 될 사람인데. 본명조차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카인. 그 이상 말해 줄 건 없어. 이런 걸 믿지 못한다면…… 내가 빠지든가 하지.”
플레이어들의 얼굴에 순간 당황하는 기색이 어렸다.
목표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갑자기 뒤로 빠지겠다는 의사를 밝히니 황당할 수밖에.
쾅!
그때, 람이 들고 있던 창으로 바닥을 세게 내리찍었다. 그녀는 신경질적인 시선으로 연우와 파네스를 번갈아 봤다.
“한 번만 더 아군 사이에서 불필요한 신경전을 벌이면 목을 잘라 버린다고 경고했을 텐데? 정말 그래 주길 원하나?”
연우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고, 파네스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모두 들어라. 너희들이 지지든 볶든 나와는 상관없다. 하지만 전투 중에는 절대 분란 일으키지 마. 지금은 여기에만 집중해라.”
람은 마지막 경고를 던진 뒤, 모든 플레이어들이 고개를 숙이는 것을 확인하고 작전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우리가 확보해야 할 곳은 ‘명부전’이라는 곳이다. 현재 그곳에서 파악된 티탄은 둘. 토에와 키모다.”
토에와 키모는 크로노스의 시정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한 티탄으로 알려져 있었다. 티탄 중에서도 급수가 아주 낮은 신격이란 뜻이었다. 그 외에 명부전에 주둔해 있는 병력은 둘에게 딸린 권속들이 대부분. 나머지는 티폰 아래로 차출된 까닭이었다.
“우리는 11, 12군단과 함께 명부전을 들이칠 예정이다. 비밀리에, 그리고 아주 빠르게.”
“10군단은 어찌 됩니까?”
“그들은 우리가 두 티탄의 발목을 묶는 사이, 후방에서 비밀리에 움직일 것이다.”
람은 거기까지만 설명했을 뿐, 10군단이 정확하게 무엇을 노리는지는 말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성동격서. 세 군단이 주의를 끌어 주는 동안, 10군단은 중앙에 있는 신전을 빠르게 점거하려는 거다.’
연우는 단번에 람의 노림수를 알아챌 수 있었다.
‘횃불을 밝혀서 하데스의 신력을 깨울 생각인가?’
그런 것이라면 아주 괜찮은 작전이었다.
물론.
‘토에와 키모라는 티탄이 호락호락한 놈들이라면.’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분명히 해 볼 만한 작전인 건 사실이었다.
‘어차피 협정은 깨졌으니 지킬 필요는 없을 테고. 그래도 언제 놈들이 다시 전투를 걸어올지 모르는 마당에 이렇게 3할이나 되는 병력을 따로 빼는 것 치고는 조금 약한…… 아니군.’
연우는 생각을 정리하다가, 전투가 여기서 끝나지 않으리라는 걸 눈치챘다.
‘여기를 점거하고 나면, 곧바로 다른 성역으로 가려는 건가? 전격전. 밤새 몇 개의 성역에다 횃불을 밝히는지가 관건인 거군.’
이미 디스 플루토는 궁지까지 밀릴 대로 밀린 상황. 이런 와중에 반격을 꾀할 만한 방법을 찾았으니, 대대적인 반전을 노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처럼 고립되어서는 결국 패배라는 결과만 맞이하게 될 테니.
“그럼 움직인다.”
람의 지시하에.
13군단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명부전은 명왕의 신전에서 가장 가까운 성역 중 한 곳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원체 타르타로스의 규모가 크다 보니, 이동하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더구나 그동안 티탄과 기가스가 풀어 놓은 권속들을 만나지 않기 위해 우회를 하느라 더 많은 시간을 소요해야만 했다.
『타르타로스라. 한 번쯤 와 보고 싶던 곳이긴 한데. 소란스럽네, 이곳은. 여전히.』
정우는 연우의 시야를 공유하면서 가볍게 혀를 찼다. 히든 스테이지인 열 개의 관문을 모두 통과하지는 못했던 그로서는 이곳이 신기하기만 했다.
하지만 딱히 감흥이 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온통 붉은빛으로 가득한 하늘과 다 죽어 가는 대지뿐이었으니. 그런 곳에 계속 오래 머물다가는 정신도 똑같이 피폐해질 것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런데 형.』
‘왜?’
『이제 어떻게 하려고?』
정우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아직 날개는 미완성이잖아. 그런데 괜히 벌써부터 실력을 보일 필요는…….』
‘아니. 그렇게 해야만 해.’
연우가 피식 웃었다.
‘그래야 알아서 고개를 숙이거나, 혹은 뒤통수를 치거나 할 테니.’
『……대체 뭘 어쩔 생각이야?』
정우는 대체 연우가 어떻게 나서려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할 생각이다.’
연우가 피식 웃으면서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자세를 낮추면서 명부전으로 쳐들어갈 타이밍을 재고 있던 군단병들의 시선이 일제히 연우 쪽으로 쏠렸다.
“선봉, 제가 서겠습니다.”
람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러고는 한쪽 입술 끝을 비틀었다.
“신살을 이뤘다고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것 같나 보지? 허튼소리 말고, 대기하고 있어.”
“10군단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면, 그들은 이미 도착했습니다.”
“무슨 말을……!”
람이 버럭 소리를 지르려던 그 때였다.
휘익, 펑-
갑자기 하늘을 따라 푸른 폭죽이 잘게 퍼져 나갔다. 10군단이 목표 지점까지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 신호가 떨어지면 11, 12, 13군단이 공격을 개시하며, 이후 람이 금색 폭죽을 터뜨리면 10군단이 비로소 움직이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람은 대체 10군단이 도착한 걸 어떻게 알았는지, 놀란 눈으로 연우를 돌아봤다.
그녀 역시 일반 플레이어들은 따라잡을 수 없는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지만, 연우는 도무지 말이 안 되었다. 10군단과의 거리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으니까.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하지만 연우는 람의 의문을 풀어 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이, 먼저 지면을 거세게 박차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와아아-
동시에 북쪽과 서쪽에서 일제히 함성 소리가 들렸다. 11군단과 12군단이 움직이는 소리였다.
멍하니 있던 람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목청을 돋워 소리쳤다.
“전원, 돌격!”
플레이어들은 일제히 함성 소리를 내면서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예기치 못한 연우의 움직임에 당황해하는 파네스 일행과 플레이어들 사이에 섞여 움직이는 연우의 일행도 있었다.
크로이츠는 성검 줄피카르를 뽑으면서 중앙에다 승리를 상징하는 터키석을 소환해 일행들에게 막대한 버프를 실었고, 빅토리아는 환하게 빛나는 손으로 허공에다 크게 글자를 새겨 넣었다.
룬 문자가 잘게 부서졌다. 타르타로스가 산 자들에게 내리는 저주를 씻어 내자, 일행들의 움직임이 한결 수월해졌다.
『고맙군.』
갈리어드는 잇달아 터지는 화려한 이펙트의 효과를 한 몸에 받으면서, 어기전성으로 빅토리아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내고 화살을 시위에다 걸었다.
타르타로스에 머무는 동안 좋은 술친구가 된 헤노바가 심심하다며 만들어 준 활, 아트락시아.
하지만 아트락시아의 기능은 결코 ‘심심하다’는 단어로 품평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구하기 힘들다는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활답게, 기능 면에서는 웬만한 신물을 뛰어넘을 정도로 대단했다.
여태껏 좋은 도구는 사냥꾼의 감을 상하게 만든다고만 여겼던 갈리어드의 생각을 단번에 바꿀 정도였으니.
무엇보다. 갈리어드는 활이 자신의 손에 착 달라붙는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실전에서 사용하는 건 분명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오랫동안 길들여 온 장비인 것처럼 너무 잘 맞았다.
‘드워프에게 이렇게 도움을 받을 줄은 생각도 못 했지만.’
기실 엘프와 드워프는 절대 사이가 좋으려야 좋을 수가 없는 사이였지만.
이렇게 도움을 받았으니, 종족의 지난 은원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어차피 그가 그런 것에 크게 휘둘리는 성격도 아니었고.
팟!
갈리어드는 나중에 술친구에게 좋은 술을 대접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지면을 세게 박찼다.
〈순보-어기충소〉
갈리어드는 먼지기둥을 만들어 내면서 단번에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킬로미터 단위의 거리에서도 정확하게 목표를 찾아낸다는 엘프의 눈이, 명부전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명부전은 하데스의 옛 성역이었다고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곳곳이 파괴된 폐허였다. 부서진 성벽하며 죽은 땅까지. 그동안 적들이 얼마나 무방비로 방치해 놓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 너머로 티탄으로 보이는 것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권속들이 성역 밖으로 쏟아지려 하고 있었다. 뒤늦게 이쪽의 등장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어디 한번 해 볼까?’
갈리어드는 연우가 신살을 해낸 것처럼, 자신도 시도나 해 볼까 하는 생각에 가볍게 피식 웃으면서.
“브라함!”
절친한 벗의 이름을 외쳤다.
그러자 아래쪽에 있던 브라함이 품에서 책자를 꺼냈다. 그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작게 투덜거렸다.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해.”
〈목성의 서〉. 수성의 서가 부서진 뒤로, 화성의 서와 함께 추가로 만든 그의 신물. 역시나 아트락시아처럼 헤노바의 손길이 닿아 있기도 한 물건이었다.
화아악!
주문을 가볍게 외자, 브라함의 발밑으로 마법진이 짙게 깔리면서 허공으로 금색 광채가 떠올랐다.
순간, 갈리어드는 몸에 묵직한 힘이 실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이거지. 그는 만족에 찬 웃음을 흘리면서 활대가 한계까지 휘도록 시위를 당겼다가 그대로 놓았다.
〈전신의 총애〉와 〈까만 까마귀의 깃〉.
두 친우가 오랫동안 함께 하면서 만들어 낸 합격술(合擊術)로, 화살 하나하나에 막대한 파괴력을 싣는 게 특징이었다.
콰앙
쾅! 쾅! 콰콰콰-
그리고 그들이 자신감을 가졌던 것만큼, 화살은 엄청난 파괴력을 자랑했다.
화살이 닿을 때마다 가뜩이나 허물어져 가던 성벽은 그대로 터져 나갔고.
그 아래, 다급하게 밖으로 튀어 나가던 티탄의 권속들이 그대로 파묻히고 말았다.
생매장의 위기에서 겨우겨우 빠져나온 티탄의 권속들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였다. 갈리어드가 쉬지 않고 시위를 잡아당기는 통에 어떻게 피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땅거죽이 마구잡이로 뒤집혔다. 권속들이 폭발에 휘말려 속속들이 죽어 가는 가운데.
『꿈이…… 저문다.』
연우의 권속들도 이에 질세라 활동을 개시했다.
가장 먼저 네메시스가 나타나 허공에 녹아들면서 적에게는 막대한 저주를, 아군에게는 축복을 내렸다. 특히 여기저기서 돌개바람이 불면서 티탄 권속들의 발을 묶어 놓았으니. 가뜩이나 무질서하게 밖으로 튀어 나가던 녀석들은 더 길이 막혀 일시 간 병목 현상이 발생하고 말았다.
샤논과 한령은 바로 그 틈을 노렸다. 레베카와 함께 적들을 빠르게 쓸어 가는 칼날은 이전보다 더 정교하고 폭발적이었다.
상공에서는 공간이 비스듬히 벌어지면서 두 개의 눈동자가 활짝 열렸다.
「죽. 어라.」
부는 파우스트의 기억을 되찾아 가며 하루가 다르게 마법 실력이 향상되고 있었다. 가벼운 진언과 함께 허공에 마법진이 잇달아 열리면서 마법들이 소낙비처럼 떨어져 티탄의 권속들을 빠른 속도로 지워 나갔다.
키아아악-
끄악! 끄아악!
계속되는 폭발과 일렁이는 화마가 적들을 무수히 집어삼켰다. 무차별적인 죽음이 계속 이어졌다.
이에 열심히 명부전으로 달려가던 11, 12, 13의 3개 군단은 도중에 멈칫거리면서 멍한 얼굴로 전장을 바라보기 일쑤였다.
그들이 크게 나서지 않아도 빠른 속도로 무너지는 적들을 보고 있노라니. 자신들이 참여하는 게 오히려 방해가 되리라 여겨질 정도였다.
하지만.
아직 재앙은 시작도 되지 않았으니.
“영역 선포.”
어디선가 나지막하게 들린 목소리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리고 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명부전을 둘러싼 세상이 반전되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결계에 에워싸인 것처럼, 티탄의 권속들이 무언가에 단단히 가로막혀 앞으로 달려가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키에에엑!
놈들이 어서 치우라며 구슬픈 목소리로 비명을 질러 댔지만.
그들의 머리 위에는.
연우가 떠 있었다.
검은색 광채로 빛나는 왼쪽 날개를 한껏 펼친 채로.
세 갈래로 나눠진 날개는 하나하나의 크기가 어찌나 큰지, 저대로 하늘에 닿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검은 불길을 아주 크게 피워 대고 있었다.
그리고 날개가 크게 해를 치면서 깃털 속에 숨겨진 666개의 권능을 일제히 깨운 순간.
…….
연우의 권역에는 깊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많던 티탄의 권속들이 일제히 죽어 있었다.
아무런 소리 소문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