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371화 (371/862)

21화. 하늘 날개 (9)

침묵은 티탄의 권속들이 죽어 나자빠진 전장을 넘어, 명부전으로 열심히 달려가던 4개 군단과 티탄 쪽에까지 번지고 말았다.

적아를 가릴 것 없이, 사람들은 한동안 자신들이 본 광경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 뭐지? 어떻게 된 거지?’

‘시간이 정지한 건가?’

‘집단 저주? 뭐, 그런 광역 버프인가? 수면에 빠지게 하는?’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괴물의 형상을 띤 티탄의 권속들은 기실 그동안 디스 플루토를 괴롭게 만든 주범이었으니까.

하데스와 군단장들이 어떻게든 티탄과 기가스를 상대한다고 해도, 끊임없이 쏟아지는 권속들은 디스 플루토만으론 상대하기가 까다로운 족속들이었다.

팔다리가 잘려도 달려들고, 머리가 떨어져도 심장이 멈출 때까지 마구 광란을 부리던 놈들. 포악성도 대단해서 매번 전투가 벌어지면 녀석들을 어떻게 해야 상대할 수 있을까 잔뜩 고민을 짊어져야만 했는데.

그런 것들이 전부 줄줄이 쓰러지고 말았다.

별다른 저항도 없이.

깨꼬닥, 하고.

단순히 날갯짓을 크게 한 번 한 게 전부인데 말이다.

현실성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차라리 처음 연우가 나타나 신살을 벌였을 때가 더 실감 났다. 그때도 말도 안 되는 무용을 보여 주긴 했어도, 어쨌든 간에 그의 실력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그런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그런 생각은 티탄 쪽도 마찬가 지였다.

‘뭐야, 저건?’

티탄 토에는 순간 자신이 뭔가 환각에 빠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집단 착란? 공황? 하여간 그런 것들에 잠긴 게 틀림없었다.

웬만한 저주가 아니고서야, 신격이 그런 것에 휘둘린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긴 했지만. 그러지 않고선 저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가 가진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는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데스의 병사들이 기습을 해 온 것이야 그렇다 칠 수 있다. 자신들이 방심했던 것이니. 그리고 이런 경우야 왕왕 있기도 했었고.

생각보다 뛰어난 화력을 자랑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데스의 주요 권속인 군단장들과 사도 람은 티탄-기가스들도 인정하는 강자들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한꺼번에 죽어 버린다고? 대체 어떻게?’

그저 하늘 위로 한 녀석이 나타났을 뿐이었다.

타르타로스의 하늘만큼이나 우중충한 검은 옷과 가면을 쓰고 나타난 플레이어. 녀석의 등 뒤로 한쪽 날개가 활짝 열리자 소란스럽던 전장에 갑자기 깊은 침묵이 흘렀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크게 날뛰던 권속들이 줄줄이 쓰러진 것이다.

더불어 키모와 연결되어 있던 고리들도 일제히 끊어졌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자르고 지나간 것처럼. 더듬어서 다시 연결하려 해도 저쪽 끝이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반발력이 일어나 신격이 크게 흔들리고, 영혼이 찢길 것 같은 고통이 뒤따랐지만.

그는 도저히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만큼 충격이 컸던 것이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끼아아-

쓰러진 권속들 사이에서 음산한 귀곡성이 울려 퍼지더니, 사체 위로 잿빛 아지랑이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아지랑이는 이리저리 뒤엉키면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인간의 얼굴 형상을 띠었다.

영혼. 아니, 망령이었다. 격이 영락할 대로 해 버린 권속들의 망령. 수백 개나 되는 것들이 그대로 뽑혀져 나와 연우에게로 쏠려 들었다.

망령들은 잿빛 안개를 만들면서 연우의 주변을 맴돌다가 그대로 천천히 흡수되었다.

이쯤에 이르자, 토에는 정신이 너무 멍한 나머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죽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영혼까지 다룬다고?

저건 신적인 영역, 그중에서도 대신격 혹은 태고신이나 개념신의 영역일 텐데……!

하지만 연우에게서 풍기는 건 영락없는 플레이어의 격이었으니.

그러다 토에는 하늘에 닿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대하고 시커먼 날개를 보고 몸을 파르르 떨고 말았다.

하나하나가 무척 커다란 권능들이, 무려 666개나 뭉쳐 서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면서 큰 틀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진체(眞體)를 파악한 순간.

“흡!”

토에는 자기도 모르게 헛바람을 크게 삼키고 말았다.

‘죽음’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언제라도 그의 목숨을 앗아가기 위해서.

마치 서슬 퍼런 사신의 낫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중이었다. 티탄이라는 신격이 가지는 영력에 떠밀려 더 가까이 접근하지 못할 뿐, 기회가 엿보인다면 언제라도 앗아갈 것 같았다.

파르르-

불멸을 이뤘다고 자부한 신격에게서도 ‘죽음’을 가져갈 수 있는 어둠의 손길. 날개 너머에 있는 666개의 시선은 못이 박힌 것처럼 그에게 단단히 틀어박혔다.

너무 오랜만에 만난 위기감. 토에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고 말았다.

“……하데스!”

토에는 두려움을 떨쳐 내면서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짰다. 신에게 죽음을 부여하는 힘. 그런 게 가능한 존재는, 타르타로스에서 단 한 명밖에 떠올릴 수 없었다.

“하데스가 나타났나?”

명계의 왕이 여기까지 직접 행차한 것이다.

그래.

한낱 필멸자 따위가 자신쯤 되는 신격을 두렵게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지.

그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어도, 분명 실력 괜찮은 플레이어를 미끼로 내세우고 뒤에서 조종하는 것이다 싶었다.

아마 전쟁 영웅 따위로 둔갑시키려는 수작이겠지. 궁지까지 내몰렸으니 어떻게든 수를 쓰려는 것일 게 분명했다.

죽음이라는 개념을 다룬다는 것은. 애당초 그쯤 되는 존재가 아니면 절대 불가능한 것이니.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토에는 머릿속이 환하게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한결 개운해졌다.

이 순간, 666개의 권능 속에 근원이 서로 다른 권능이 섞여 있다는 사실은 그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죽음이라는 개념을 다루는 방식이 평소 하데스와 많이 다르다는 사실 역시도.

자기 합리화가 그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

으드득!

그리고 토에는 이를 바득 갈았다. 하데스가 직접 여기까지 행차했다면 자신들이 당해 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후퇴만이 정답이었다.

하지만.

쾅-

그런 토에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연우가 갑자기 다시 한 번 더 한쪽 날개로 홰를 치더니 쏜살같이 이쪽으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토에의 인상이 팍 일그러졌다.

하데스가 나타난 게 두려운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낱 플레이어 따위에게 무시를 당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데스의 가호가 있다고 해서 자신이 진짜 하데스가 되기라도 한 줄 아는 것인지.

토에는 이참에 물러날 때 물러나더라도 녀석의 머리통은 잘라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민한 필멸자는 이따금 징치를 해 둬야 신으로서의 위엄도 사는 법이었으니.

그래서 허리춤에 있던 신물을 뽑으려는데.

팟!

날아오던 중에 연우의 신형이 움푹 꺼진다 싶더니, 갑자기 앞쪽 공간이 열리면서 그가 토에의 눈 앞에서 나타났다.

“무슨!”

토에는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단순한 공간 이동인가? 아니면 점멸? 여하튼 공간을 ‘도약’하는 기술은 본래 공간의 설정권을 지닌 주인의 허락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현재 명부전은 티탄의 권역으로 설정된 지 오래. 하데스의 신력이 봉인되고, 토에와 키모의 성역이 되다시피 한 곳이란 뜻이었다.

당연히 성역에서는 여러 법칙을 설정할 수 있는 권한이 주인에게 있을 수밖에 없었고, 말할 필요도 없이 토에와 키모는 명부전에서 그에게 이러한 행위를 허락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야 지금은 이곳이 내 영역이니까.”

연우는 놀란 토에의 얼굴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깨닫고, 피식 웃으면서 충격적인 대답을 던져 주었다.

토에는 그제야 깨달았다.

권속들과의 연결 고리가 끊어지면서 생긴 반발력으로 감각이 교란되어 여태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명부전에 설정된 권역화가 어느새 해제되어 있었다.

정확하게는 해제가 아닌 ‘덮어쓰기’였다.

임시로 이뤄진.

그리고 그것의 정체는…….

‘용……?’

분명 여름여왕과 함께 사멸했어야 할 옛 초월종의 권역, 비나(Binah)였다.

‘아니야. 이건 마? 신? 너무 많은 것들이 담겨 있……!’

대체 이게 뭐야! 토에는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휘리릭-

연우는 이미 몸을 크게 뒤틀면서 녀석의 복부를 정강이로 후려치고 있었다.

[제천-화염륜]

쾅!

“컥!”

토에는 입 밖으로 피를 토해 내면서 크게 뒤로 튕겨 나고 말았다. 충격파가 얼마나 대단한지 공간을 따라 파문이 크게 번져 나갔다. 그 속에는 불길이 뜨겁게 일렁대고 있었다.

그리고 연우는 튕겨 난 토에를 따라 지면을 세게 박찼다. 발자국이 깊게 내려앉으면서 구덩이가 크게 파였고, 그가 달린 자리로 깊은 고랑이 남았다.

파바박-

그때, 연우의 품에서 여의봉의 조각들이 돌개바람을 그리면서 나타나 창대 모양으로 조립되었다.

연우는 오른손으로 창대를 잡고, 왼손으로 비그리드를 뽑아 두 개를 결합시켰다.

찰칵!

츠츠츠-

기분 좋게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칼날을 따라 검은 불길이 크게 차올랐다.

연우는 토에를 따라잡자마자 발을 크게 굴리면서 하체를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리고 상체를 팽이처럼 돌리면서 관성으로 이어지려는 가속도를 회전력으로 바꾸었다.

외뿔부족이 진각(震脚)과 전사경(轉絲勁)이라고 부르는 동작들과 함께, 창을 앞으로 내질렀다.

[팔극검-사일, 파공]

[볼텍스]

콰콰콰-

한 점으로 압축된 불꽃 소용돌이가 잇달아 쏟아졌다.

토에는 어떻게 막을 겨를이 없었다. 가까스로 균형을 잡으려 해도 비그리드가 폭발력이 가득한 검은 불길을 마구 뿌려 대면서 달려오니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성화가 극한으로 압축된 오러이기도 한 불길은 신의 육체에다 계속 상처를 새겨 넣고 있었다. 가르고, 찌르고, 태워 대는 통에 방어기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검은 구비타라]

칼날이 그의 피부를 스칠 때마다 반점처럼 나타나는 피의 꽃은 어느새 흉측하게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아수라의 왕 중 왕의 권능이 이놈에게서 나타난단 말이냐!’

피의 꽃은 마력을 갈취하고, 심력을 마모시킨다. 그건 신이라고 해도 전혀 다를 게 없었다. 그래서 이 권능을 발휘하던 악마가 ‘왕 중 왕’이라는 칭호를 획득했던 것이고, 평화가 찾아온 현재까지도 신들 사이에 흉측한 악명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푸화악!

비그리드가 그의 왼쪽 장딴지를 크게 훑고 지나갔다. 정맥이 끊어지면서 피가 크게 터졌다. 하지만 핏물은 바닥에 쏟아지기도 전에 지글거리는 대기에 증발해 사라졌으니.

혹독한 열기와 늘어나는 상처, 육체를 좀먹어 가는 피의 꽃은 토에를 허덕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를 더 궁지로 몰아넣는 건, 홰를 칠 때마다 서서히 바짝 다가오는 ‘죽음’의 낫이었다.

666개의 권능에서 비롯된 보이지 않는 손길은 어느새 발밑을 지나 목에까지 다다르며, 그의 숨통을 강하게 옥죄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권속들을 강제로 앗아 간 손길의 색이 점차 뚜렷해지고 있었다.

분명 그런 것들은 그에게만 비치는 환각에 불과했지만.

또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기도 했다.

숨통이 턱턱 막혔다. 정신이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아찔했다. 심장 한편에서 빚어진 공포심이 어느새 마음을 가득 메우고, 머릿속을 까맣게 물들였다.

그렇게 되니 몸도 무겁게 착 가라앉았다.

여러 크고 작은 병들이 잇달아 터졌다. 중환, 맹독, 심병(心病) 등등. 근원도 가지각색인 것들. 죽음으로 치닫게 만드는 666개의 다양한 방식들이 실타래처럼 풀려 나와서 토에의 영혼을 바짝 옥죄어 나갔다.

서로가 더 잘났다는 듯이. 666개의 권능들은 자신들의 기량을 마음껏 뽐내면서 더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그러면서도 권능들 간의 충돌은 없었다. 오히려 서로가 보완재 역할을 하며, 톱니바퀴처럼 착실하게 맞물려 돌아가면서 ‘죽음’이라는 커다란 틀을 완성해 나가는 중이었다.

토에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건 하데스의 권능 따위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근원적인 것. 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었다. 개념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들이었다. 흔히 신과 악마들의 신위라고 부르는.

어떻게 이 많은 권능을 한낱 인간 따위가 전부 다 가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자신은 죽음이라는 늪에 빠졌고, 익사 직전까지 다다랐다는 것. 절대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이런 늪을 만든 666개의 권능의 주인들이, 너무나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

자신의 죽음을 보며 아주 즐거워한다는 것.

[네르갈이 폭소를 터뜨립니다.]

[이자나미가 엷은 미소를 띱니다.]

[태산부군이 흡족한 얼굴로 태사의를 두들깁니다.]

[아이쉬마-다이바가 웃습니다.]

[할파스가 웃습니다.]

[헬이 웃습니다.]

……

‘미친…… 것들!’

역시 ‘그’의 후계들이라고 해야 할까. 신이고 악마고 간에 제정신인 놈들이 하나도 없었다. 타인의 죽음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는 것들이라니. 아니, 그러니 죽음을 신위로 둘 수 있는 걸까?

“쿠르륵!”

그 생각을 끝으로, 토에는 결국 죽음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익사했다. 보이지 않는 손길이 마지막으로 영혼을 세게 움켜쥐고, 죽음의 낫이 비그리드가 되어 그 위로 날아들었다.

스걱-

푸화악!

토에의 머리통이 하늘 위로 튀어 올랐다. 핏물이 분수처럼 잔뜩 하늘로 뿜어졌다.

[크시티가르바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타나토스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디스 페이더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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