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하늘 날개 (11)
신과 악마는 일종의 법칙이다. 그건 곧 시스템의 ‘일부’라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에, 시련을 내려 주는 차원에서 원하는 대상에게 퀘스트를 부여하는 권한도 있었다.
연우는 이런 퀘스트를 준 존재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아테나.’
[아테나가 우울한 얼굴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정우의 진실을 알고 난 뒤, 아테나는 그에게 말도 걸지 못하고 계속 주변을 뱅글뱅글 맴돌면서 우울한 시선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미안한 걸까, 아니면 다른 말을 더 하고 싶은 걸까.
그녀의 정확한 속내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그들 형제를 많이 걱정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이런 퀘스트도 내어 준 것이다. 포세이돈 등이 그를 노리려는 것을 알고, 조심하라는 의미로.
올림포스와 타르타로스 간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포세이돈은 더 노골적으로 그를 압박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이건 반대로 말하면 그녀와 헤르메스도 얼마든지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뜻. 그러니 그때까지 버티라는 것이다.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포세이돈을 비롯한 윗세대들은 자신이 가진 힘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어떻게든 제지를 가하려는 반면에.
아테나와 헤르메스를 위시한 아랫세대들은 도리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나서고 있으니.
자신을 둘러싼 올림포스 내부의 세대 갈등이라.
대체 칠흑왕이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이제는 궁금하다 못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더 취해야지. 이 힘을.’
칠흑왕의 권능에 대한 갈망은 더욱 깊어졌다.
올림포스의 대신격들도 두려워하는 힘이라면 어떻게든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칸.”
그래서 연우는 옆에 있는 친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칸이 왜 그러느냐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연우는 자잘한 설명 없이 퀘스트 창을 칸에게 공유시켰다. 내용을 살핀 뒤, 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파네스 일행 쪽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되돌아와 연우를 보았다.
도일을 구하기 위해서 미후왕의 후예들을 한창 사냥하고 다녔을 때의 모습.
평소 웃음기가 많은 그였지만, 적을 앞에 두었을 때는 그렇게 여유롭지 못했다.
“뭘 하면 되지?”
연우의 입술이 달싹였다. 설명을 듣는 내내 칸의 고개가 몇 번씩이나 끄덕여졌다.
* * *
-그 아이를 살펴보아라.
티탄 이아페토스는 저 멀리, 건방지게도 감히 그들에게 맞서기 위해 군영을 갖추는 디스 플루토를 보면서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한때, 크로노스를 봉양하며 티탄 족을 이끌던 대신으로서의 영광도 없이, 이딴 곳에 끌려온 것만 해도 그로서는 불쾌한 일이건만.
일군을 이끌고 ‘거신의 토령’을 나서기 직전, 티폰이 그를 붙잡고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던 탓이었다.
-그 아이라면……?
-있지 않은가. 신살을 이뤘던.
-아스트라이오스를 잡은, 그 플레이어 말인가?
-그래. 신과 악마와 용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그러면서 그들의 가능성도 동시에 품고 있는. 끔찍한 혼종인 것 같으면서도 순혈을 고수하는. 그 아이.
티폰은 그들의 형제였던 아스트라이오스뿐만 아니라, 다른 세 성역에 머물고 있었을 티탄까지 모두 잡았을 게 분명한 필멸자를 이야기하면서도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그 말은…… 놈을 죽이지 말라는 뜻인가?
이아페토스는 티폰의 생각을 도저히 알 수가 없어 눈을 가늘게 좁혀야만 했다.
힘이 부족해 어쩔 수 없이 티폰을 따르긴 해도, 그는 자신이 티탄을 이끌던 영도자였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하려는 일에 누군가 토를 다는 것을 불쾌해했고, 그것은 티폰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티폰은 포악하면서도 속을 알 수 없는 자였다.
-누가 그러던가. 죽이지 말라고.
-하면……?
-그냥 한번 지켜보란 뜻이다. 별로다 싶으면 죽이고. 괜찮다 싶으면 잡아먹고. 조금 버겁다 싶어지면 도망치고.
도망이라니!
이아페토스는 그 말을 듣고 울컥하고 말았다.
비록 지금은 타르타로스에 처박히면서 옛날의 격을 대부분 상실하고 말았지만.
그래도 그는 아스트라이오스나 토에 같은 덜떨어진 것들과 비교를 해서는 안 되는 지고한 신분이었다.
티탄의 12주신.
오늘날의 올림포스에는 제우스를 비롯한 헤라, 포세이돈, 데메테르 등의 12주신이 있어 영광을 자랑한다지만.
녀석들이 집권하기 전에는 그가 크로노스와 함께 열두 자리 중 일좌(一座)를 차지하며 하계를 굽어다 봤었다.
그리고 98층을 이루는 숱한 사회 중 한 집단에 불과한 지금의 올림포스와 다르게, 그들이 지배하던 시절에는 천계에서 누구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독보적인 위세를 구가하기도 했었다.
그런 옛 영광을 기억하는 그로서는 ‘도망’을 운운하는 티폰의 말에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건 자신을 모욕하는 행위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속내일 뿐. 결코 밖으로 드러낼 수가 없었다.
그는 당시와 다르게 영락해 버릴 대로 영락해 버린 상태였고, 주도권은 티폰에게 있었다.
그리고 티폰도 그런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하는 그를 보면서 비웃음을 던졌다.
모욕을 당하고도 덤빌 엄두도 내지 못하는 신이, 네가 멍청하다고 운운하는 저급한 것들과 뭐가 다르냐는 듯이.
-여하튼. 명심해라. 기둥이 열리는 것은 도리어 우리가 바라던 일임을. 결국 가이아의 은총은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우리가 있을 곳은 이런 갑갑한 타르타로스가 아니라.
티폰은 언제나 그들에게 했던 말을 똑같이 되풀이했다.
-올림포스라는 사실을, 잊지 마라.
빛의 기둥.
저것은 그들에게 여러모로 치욕의 역사를 돌이키게 하는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타르타로스에 구금된 신세였던 그들의 신격을 짓누르던 족쇄. 저것을 떨쳐 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던가.
하지만 이제 그것은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줄 계단이었다.
올림포스에서 타르타로스로 내려올 수 있다는 건, 반대로 타르타로스에서 올림포스로 올라갈 수도 있다는 뜻.
티폰을 위시한 티탄과 기가스가 바라는 건, 단순히 이런 쓰레기 같은 타르타로스의 지배권이 아니었다.
천계!
신과 악마들이 즐비한 98층으로 올라가, 평화 협정이다 뭐다 하면서 편 가르기에만 바쁜 신과 악마들을 모두 잡아먹고 탑을 독차지하는 게 그들의 목표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게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평화에 찌든 저들과 다르게, 그들은 지난 수천 년 동안 타르타로스에서 숱한 고생을 해야 했고.
또한, 그들에게는 크로노스의 ‘죽음’이 가호처럼 따르고 있었다.
‘우리들의 형제, 크로노스여. 죽은 그 자리에서도 죽음으로 우리를 돌보아다오.’
이아페토스는 그들의 등 뒤에 산맥처럼 우뚝 솟아 있는 크로노스의 사체 쪽으로 작게 기도를 올렸다.
전장에 나설 때 티탄들끼리 거행하는 작은 의식이었다. 한때는 자신과 피를 나눈 혈육이었지만, 지금은 신들의 신이 된 존재를 향한.
그리고 그 순간.
파앗-
이아페토스는 하늘을 가로지르는 어떤 힘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붉은빛으로 가득한 하늘을, 검붉은 궤적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어떤 외침과 함께.
“커져라, 여의!”
검붉은 궤적은 정확하게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무엇이든 꿰뚫을 것 같은 기세.
이아페토스의 인상이 잔뜩 일그러졌다. 아스트라이오스를 단박에 처치했던 바로 그 궤적이었다!
그는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노린다는 사실이 못내 불쾌했다.
잔뜩 구겨진 얼굴로 손에 바짝 힘을 주었다. 그러자 검은 기운이 피부를 타고 흘러와 손을 가득 물들였다.
체내에 상당한 양이 축적된 크로노스의 시정, 흔히 그들이 거신력(巨神力)이라고 부르는 힘이었다.
이것을 개방하는 동안에는 상실했던 격을 일부 되찾는 게 가능했다.
쾅!
이아페토스는 손을 앞으로 뻗어 검붉은 궤적과 그대로 정면에서 충돌했다.
손끝이 욱신거렸다. 이아페토스의 얼굴이 더 크게 구겨졌다. 올림포스의 것들만큼이나 시건방지던 제천대성의 무기를 다룬다더니, 그 때문일까? 생각보다 강했다.
이아페토스는 궤적을 아예 부술 생각을 포기하고, 거신력을 더 크게 담아 궤적을 하늘 위로 크게 튕겨 올렸다.
그러자 여의봉은 곧 하늘로 치솟았다.
구름이 갈라졌다.
하늘에 뻥 하고 구멍이 뚫린 듯, 그 너머의 더 짙고 어두운 하늘이 훤히 드러났다.
그리고.
“내려라!”
다시 한 번 더 외쳐진 진언과 함께, 갑자기 붉은 하늘에 어울리지 않는 짙은 먹구름이 몰리더니.
우르르, 콰쾅!
콰르르-
갑자기 검붉은 불벼락이 떨어졌다.
하나하나가 수십 수백 개의 불벼락을 잔뜩 응집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그 커다란 것들은 소낙비처럼 연달아 무수히 쏟아졌다.
한순간, 어둡던 세상이 환하게 밝아졌다. 싸늘했던 공기는 불벼락이 뿜어낸 열기로 금세 뜨겁게 달아올라 숨이 턱턱 막힐 정도였다.
웬만한 하급 신격들도 대거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힘!
이아페토스의 낯이 잔뜩 일그러졌다. 신의 눈에는, 저 불벼락 속에 담긴 구성 요소들이 똑똑히 보였다.
“적수 지정에 폭발 확산, 저주 감염? 무슨 권능들이 이리도……! 거기다 아수라의 왕 중 왕의 권능까지? 이것들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이아페토스는 불벼락을 이루는 수많은 권능들을 읽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체 어떻게 한낱 인간 따위에게 저토록 많은 권능이 주어진 것인지 이해할 수도 없었을뿐더러, 또 그런 짓을 저지른 5천여 명의 신과 악마들이 미쳤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
저 불벼락은 한번 떨어진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한번 떨어지고 나면 불똥이 그만큼 큰 폭발을 일으키고, 벼락은 또 다른 벼락과 이어지면서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든다. 거기다 전염병처럼 피어나는 비마질다라의 혈화는 어떤 참상을 일으킬지 불에 보듯 뻔했다.
아마 이곳에 끌고 온 권속들의 태반이 쓸려 나갈 테지.
그들 하나하나가 이아페토스에게는 힘이었다. 이제야 막 올림포스로 올라갈 기회를 노리고 있는 그로서는 여기서 힘을 잃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이아페토스는 여태 억누르고 있던 격을 한껏 개방했다. 거신력이 깨어나면서 그의 신체를 한껏 크게 부풀렸다.
단숨에 그가 있던 자리로, 빛의 기둥만큼이나 커다란 검은 거신이 강림했다.
크어어어-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는 거신은 하늘을 향해 손을 우악스럽게 뻗었다. 불벼락을 쏟아 내는 먹구름을 모두 찢어발길 요량으로.
콰르르릉-
먹구름이 저항하려는 듯, 불벼락을 마구 쏟아내며 이아페토스를 한껏 밀어내려 했지만.
콰콰쾅!
이아페토스는 불벼락이 전신을 몇 번씩이나 가로질러도 아랑곳하지 않고 먹구름을 단단히 붙잡았다.
두꺼운 피부 표면을 따라 피의 꽃이 멍울처럼 피어나 빠른 속도로 전신을 뒤덮어 갔지만.
그는 눈썹 한번 꿈틀거리지 않았다. 그리고 먹구름을 그대로 좌우로 찢었다.
갈 곳을 잃은 불벼락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여의봉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어…… 디냐……?』
이아페토스는 진언을 크게 흘리면서 여의봉의 주인을 찾아 시선을 돌렸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선명하게 느껴지던 기운이 사라지고 없었다. 대체 어디로 간 걸까?
그 순간.
쿵!
이아페토스는 자신도 모르게 한쪽 무릎을 지면에다 찍고 있었다. 덩치가 덩치이니만큼, 산자락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여서 지면이 그대로 내려앉아 먼지구름이 높게 치솟았다.
『무슨……!』
이아페토스는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 아킬레스건이 잘려 나간 자리로, 검은 그림자 같은 괴상한 것들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뭐긴 뭐야? 사냥꾼들이지. 살다 살다가 이렇게 큰 표적도 다 만나 보네?」
샤논이 이아페토스를 보면서 차갑게 웃고 있었다. 이아페토스에 비하면 날파리에 불과한 크기였지만, 〈볼케이노〉를 휘감으며 휘두르는 검격은 그의 발목을 크게 자르고 지나가기 충분했다.
『감히……!』
이아페토스는 샤논을 잡기 위해 아래쪽으로 손길을 뻗었다. 쾅. 지면에 거대한 손자국이 남았지만, 그사이 샤논은 빠르게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에 이번에는 목덜 미가 화끈해졌다.
쿠쿵!
한령이 어느새 공간을 열고 나타나 한껏 크게 칼을 후려치고 있었다.
크어엉. 이아페토스의 입에서 울음소리가 나왔다. 워낙에 큰 탓에 타르타로스 전체가 크게 울릴 정도였다.
하지만 공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강풍이 불어닥친다 싶더니 레베카가 칼바람이 되어 휘몰아치고 있었고, 어느새 하늘 위로 공간이 크게 열리면서 부의 두 눈이 나타나 마법으로 이아페토스를 어떻게든 옥죄려 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칸과 도일이 아래에서 이아페토스의 이목을 잡아당겼고, 갈리어드가 브라함의 도움을 받아 화살을 잇달아 쏘아 댔다. 크로이츠와 빅토리아의 공세도 더해지는 가운데.
콰콰콰-
“카인을 따라라!”
“어떻게든 도와라! 이아페토스를 잡을 수 있다! 티탄의 주신을 거꾸러뜨릴 유일한 기회다!”
이아페토스가 등장했다는 사실에 바짝 긴장했던 디스 플루토들도, 연우를 따라 다시 전진하면서 두 개의 분대로 나뉘어 외곽은 이아페토스의 권속들을 막고, 안쪽은 연우 일행을 엄호했다.
『감히……! 감히……!』
이아페토스는 몇 번이고 절규를 내뱉으면서 디스 플루토를 내치고자 했다.
그 와중에 상당수가 큰 피해를 입긴 했지만, 디스 플루토는 여태껏 티탄들을 상대했던 대로 착실하게 뒤로 물러나면서 이아페토스를 상대했고.
연우 일행은 녀석의 이목을 끌기 위해 계속 사각지대를 교묘하게 노리면서 착실하게 체력을 깎아 나갔다.
그렇게 모두의 얼굴에 ‘할 수 있다’는 환희가 어린 순간.
팟-
연우가 어느새 블링크를 사용해 나타나 이아페토스의 정수리에다 불의 파도를 작렬시키고 있었다.
내려치는 지점은 용신안이 가리키는 대로 결이 잔뜩 응집된 혈(穴), 거신력의 핵심이 되는 부분이었다.
이대로 찔린다면 거신의 형체가 무너질 수 있었다.
콰르릉, 콰르르-
그렇게 비그리드가 이아페토스의 혈에 박히려는 순간.
꾸어어엉!
갑자기 이아페토스가 거친 울음소리를 터뜨리더니, 체내에 응집되어 있던 거신력을 외부로 강하게 방출시켰다.
거신력이 돌풍이 되어 대기를 뜨겁게 달구고, 그대로 충격파를 형성하면서 사방팔방으로 뻗쳐 나갔다.
대기가 그대로 떠밀려 났다.
그 속에는.
연우를 비롯한 디스 플루토의 병력들 대부분이 섞여 있었다.
* * *
그리고 그 순간.
『움직여라.』
파네스의 명령에 따라, 숨죽이고 있던 엘로힘의 파티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