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374화 (374/862)

24화. 하늘 날개 (12)

‘지금이 가장 적기야.’

파네스는 파티원들을 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앞을 주시하는 그녀의 눈빛이 표독스럽게 빛났다.

지금 이 순간에도 포세이돈 등은 계속 그녀를 채근하고 있었다.

[포세이돈이 어서 퀘스트를 이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데메테르가 당신과 일행에게 더 강한 가호를 선물합니다.]

[헤스티아가 고요한 눈으로 바라봅니다.]

[헤라가 짜증 섞인 시선으로 당신을 지켜봅니다.]

서든 퀘스트, 사살.

이것이 처음 뜬 순간, 그녀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타르타로스에 온 가장 큰 이유는 포세이돈을 대신해서 연우를 찾기 위해서였고, 그다음에는 데메테르·헤스티아·헤라를 대신해서 그가 올림포스에 위협이 될 만한 존재인가를 판단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처음에만 하더라도, 신탁의 본뜻을 알았을 때에는 ‘왜 그래야 하지?’라는 생각을 가졌었다.

일족의 염원을 이뤄 주겠다는 약속을 받긴 했다지만. 그래도 신적인 존재들이, 그것도 올림포스라는 거대 사회를 이끈다는 대신격들이 플레이어 한 명을 제재하기 위해 직접 나선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기회만 주어진다면 직접 자신이 나서서 목을 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자신은 두 개의 가문을 이은 혈손. 아홉 왕을 제외한다면 어느 누구도 자신을 당해 내지 못하리라는 자신이 있었다.

아니, 네 신격들의 가호가 더해진다면, 아홉 왕도 따라잡을 수 있을 거란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밤새 여러 번의 전장을 전전하다 보니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저건 위험해.’

‘대체 어떻게 인간이 신능을 다룰 수 있는 거지?’

연우가 다루는 힘은 분명히 절대 필멸자에게 허락되지 않은 힘이었다.

아니, 제대로 다루기만 한다면, 올림포스의 신격들조차도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을 힘.

그제야 왜 포세이돈 등이 연우를 계속 눈여겨보고, 틈만 나면 그를 죽이기 위해 안달이 났었는지를 알 것 같았다.

‘올림포스는 분명히 카인이 이대로 더 성장하는 것을 묵인할 수 없는 거겠지.’

1층에서부터 34층까지, 한 개의 층계를 제외한 모든 명예의 전당의 기록을 갈아 치우기도 했던 돌풍의 주역.

벌써부터 저만한 힘을 가졌는데, 랭커의 기준이라는 50층에 다다랐을 때에는 어떤 모습을 보일지. 짐작도 가질 않았다.

그래서.

파네스는 크게 질투했다.

피도 깨끗하지 못한 저급한 인간 태생 따위가, 자신도 이루지 못한 업적을 기록하다니.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게다가 줄곧 녀석을 따라다니는 저 많은 초월자들의 시선은 또 무엇인가.

자신은 이 4명 대신들의 주목을 받기 위해서 그토록 전전긍긍하며 피눈물 나는 노력들을 해야만 했었는데. 저 안일하게만 보이는 인간은 그것을 너무 어렵지 않게 이뤄 내고 있었다.

아니, 따지고 보면 포세이돈 등이 그녀에게 관심을 주는 것도, 전부 연우로 인한 것이었으니. 엄연히 따지자면 자신의 공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것이, 너무나 싫었다.

한낱 인간 따위가.

우연히 얻은 힘과 관심으로 기고만장해져서는……!

녀석이 가진 힘은 여태껏 그녀가 걸어온 길을 부정하는 것. 그래서 파네스는 그런 것들을 모두 지워 버리고자 했다.

녀석을 어서 죽이라고 외쳐 대는 포세이돈 등의 칼잡이가 되고자 했다.

그래.

따지자면.

‘열등감.’

아마 그렇게 표현해야 할지도 몰랐다.

언제나 엘리트로만 살아왔던 그녀에게는 절대 허락되지 않아야 할 감정.

그렇다면 서둘러 치워야 했다.

그리고.

지금이 유일한 기회였다.

팟-

파밧-

이아페토스가 갑자기 방출한 열풍으로 인해 한창 공세가 이어지고 있던 디스 플루토의 진영은 완전히 깨지고 말았다. 그건 이아페토스의 권속들도 마찬가지. 전장 자체가 박살이 난 것이다.

하지만 이아페토스는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열풍을 계속 잇달아 방출해 대고 있었으니.

그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제대로 일어날 수조차 없었다. 일어난다고 해도 지면이 뒤집히면서 쏟아지는 돌무더기에 그대로 치여 피떡이 되고 말았다.

대기도 뜨겁게 달아올라 화상을 입거나, 기관지가 그대로 타 버려 절명하는 자들도 속출했다. 허공에는 강풍을 버티지 못하고 같이 휩쓸린 자들도 많았다.

우르르. 대기가 떨리고, 공간이 울렸다. 세상이 이대로 무너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충격이었다.

그런 엄청난 혼란 속에서.

유일하게 강풍에 휩쓸리지 않은 존재들이 아이테르를 비롯한 파네스의 파티원들이었다.

[포세이돈의 가호, ‘폭풍우를 거스르다’가 파티에 더해집니다.]

[데메테르의 축복, ‘진원(震源) 저항’이 파티에 더해집니다.]

……

강풍을 거스를 수 있도록 4대신의 가호와 축복이 쉬지 않고 쏟아지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퀘스트 한정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덕분에 그들은 평소에 낼 수 있는 힘보다 훨씬 많은 힘을 자랑할 수 있었다.

분명 파네스가 알기로는 이 정도라면 4대신들로서도 상당한 인과율의 반발을 감내해야 할 게 분명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떠먹여 준다는데 거부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표적의 위치도 이미 정확하게 파악해 둔 상태.

연우는 이아페토스의 열풍과 정면에서 부딪쳤다. 아마 사경을 헤매고 있거나, 그에 준하는 부상을 입었을 게 분명하다. 파티원들이 그런 연우를 암습해 손발을 잘라 놓으면, 마지막에 파네스가 개입해서 목을 치는 게 계획의 순서였다.

그리고 별반 어렵지 않게 이뤄질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런데.

‘뭐지?’

파네스는 파티원들에게서 이렇다 할 연락이 오질 않자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이번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건, 빠른 히트 앤 런이다.

모두가 정신이 없는 틈을 타서 기습적으로 연우를 제거해야만 아군의 눈에 발각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여태 모습을 비치지 않으니.

시야를 확보하고 싶어도 열풍이 쓸어온 먼지구름이 너무 두터워 파악하기도 힘들었다. 감각도 도중에 가로막혀서 안쪽을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일순, 마음 한편에서 불안한 감정이 들던 그때.

크어어어!

이아페토스가 다시 고개를 들어 포효했다. 처음 등장했을 때보다 크기가 3분의 2정도로 축소되었지만, 그래도 기세는 여전히 줄어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여태껏 쌓인 화를 전부 털어놓겠다는 듯, 이전보다 더 강렬한 열풍과 강풍을 발산했다.

콰콰콰-

지면이 깎일 대로 깎이면서 사방이 모래 폭풍으로 어지러워지는 가운데.

‘피 냄새?’

파네스의 예민한 코는 비릿한 냄새를 맡고 말았다. 디스 플루토가 쓸려 나가면서 사방에 풍기는 게 피 냄새라지만. 이건 조금 달랐다.

미미하지만 신혈이 섞인 냄새. 아군의 냄새가 분명했다.

[포세이돈이 무엇을 하냐며 버럭 역정을 냅니다.]

[데메테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찡그립니다.]

[헤스티아가 당신에 대한 기대를 접습니다.]

[헤라가 당신에 대한 기대를 접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지는 메시지에 파네스도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움직이려는데.

“가…… 주.”

갑자기 모래 폭풍을 뚫고,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로시디스. 그녀가 각별히 아끼는 집사. 그녀의 오른팔이었다. 그런데 그가 지금 전신이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헐떡대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도망…… 치십시오.”

로시디스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언가에 강하게 치여 그대로 터지고 말았다. 한때 로시디스였던 육편들이 산산이 부서져 흩어지는 가운데.

저벅-

그 사이로, 검을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남자가 조용한 발걸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알아본 파네스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넌……?”

“너희들은 어떻게든 내 손으로 잡고 싶었지. 쥐새끼들아.”

칸은 온통 피칠갑을 한 채 흉측한 송곳니를 훤히 드러내면서 으르렁거렸다.

언뜻 보면 로시디스와 비슷한 몰골이었지만, 파네스는 칸이 뒤집어쓴 피가 전부 파티원들의 것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어떻게……?”

파네스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충격으로 인해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분명 조용히 움직였을 텐데. 대체 어떻게 들킨 거지? 아니, 그보다 저토록 강한 열풍에 휩쓸렸는데, 어떻게 저 녀석은 온전하게 있을 수 있는 거지?

칸이 선술을 부릴 수 있고, 숙련도만 따진다면 탑에서 최고라는 것을 모르는 그녀로서는.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칸은 그녀의 의문 따위에는 대답해 줄 이유가 전혀 없다는 듯, 강하게 지면을 박찼다.

가뜩이나 그는 툭 하면 시빗거리를 만들고, 일행들의 명예를 깎으려 했던 파네스 일행에 대한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밀었던 상황.

그런 와중에 녀석들이 먼저 판을 깔아 주었으니,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더구나 지금 그의 손에 잡힌 블러드 소드는 놈들의 피를 잔뜩 머금으면서 강화될 대로 강화된 상태였다.

[블러드 소드]

등급: S

숙련도: 75.1%

설명: 적으로 지정된 대상의 피를 흡수하면 흡수할수록 공격력과 공격 속도가 최대 350%까지 상승한다.

여기에 선술까지 더해진다면 공격력은 다시 몇 곱절로 늘어나니.

지금 이 순간, 칸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촤아악-

칸이 빠르게 움직이면서 블러드 소드를 크게 휘둘렀다. 파네스가 흠칫 놀라며 몸을 크게 뒤틀었다. 포세이돈의 가호가 더해지면서 권능, 〈폭풍우〉가 전개되었다.

쾅!

* * *

“씨발…… 여기가 대체 어디야?”

아이테르는 인상을 찡그리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분명 파티원들과 함께 연우를 잡으러 움직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언뜻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상한 곳에 있었다.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는 곳이었다.

강풍이나 열풍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깜깜한 어둠 속. 웃긴 건 자신의 몸만은 빛으로 비춘 것처럼 생생하게 보인다는 점이었다.

결국 아이테르는 무작정 앞으로 걷기만 했다. 계속 걷다 보면 무언가라도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

만약 이게 특정 대상에게만 주는 저주라면 이런 저주를 건 자가 어떤 행동을 보일 것이고, 그게 아니라 무작위적인 저주였다면 곧 해제될 거란 생각에서였다.

정신 계통의 환각이라면 신혈이 금세 씻어 줄 테니 걱정은 없었다.

누가 도와주러 올 거란 생각은…… 애당초 할 수도 없었다.

“젠장.”

그런 생각이 드니, 자기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나왔다.

억울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의 신세가 너무 처량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엘로힘에도 마군에도 들지 못하는 삶. 아버지처럼 멍청하게 살지 않겠노라, 위대한 삶을 살겠노라, 그렇게 다짐했지만 돌아오는 건 배신자라는 낙인과 명예를 모른다는 손가락질뿐. 그리고 지금 자신의 꼴은 길을 잃은 청승맞고 비루한 개였다.

그래.

그 말이 너무 잘 맞았다.

아무리 생각할수록 자신은 개가 맞았다.

아니, 개만도 못한 신세지.

개는 그래도 충성을 바치면 주인에게 버림이라도 받지 않을 테니. 예쁨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어느 누구에게도 예쁨을 받지 못했다. 누울 곳도, 기댈 곳도 없었다.

“하하, 하! 씨발.”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곤 했다.

만약.

정말 만약에 아르티야를 등지지 않았더라면.

정우를…… 버리지 않았더라면.

지금, 자신의 신세는 많이 달랐을까?

“나라고 이러고 싶었겠냐고.”

아이테르는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래도 밖으로 내보이기 싫었다. 자신의 얼굴을. 표정을.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았다고!”

영웅이 되고 싶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환호를 받고, 인정을 받고 싶었다. 등을 맞대는 동료가 있기를 바랐다.

단지 그것만 바랐을 뿐인데.

최소한 아르티야에 있을 때는 그런 게 너무 쉽게 보였다. 하지만 울타리를 나왔을 때에는 찬바람만 쌩쌩 불었다.

여전히 환호해 줄 줄 알았던 사람들은 거짓말처럼 침묵했고, 인정해 줄 줄 알았던 시선들은 냉소로 돌아왔다.

그게 너무 쓸쓸했다.

언젠가 스스로에게 물었을 때, 아르티야를 나온 것에 대해서 후회를 절대 하지 않는다고 대답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었다.

스스로에 대한 거짓말.

후회하고 있었다.

너무 크게.

그때가 그리웠다.

아무런 걱정 없이 크게 웃을 수 있고. 등을 맞댈 수 있고.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던. 환호를 받고, 인정을 받던. 영웅이라고 추앙되던 그때로.

“……정우야, 미안하다. 정말.”

어째서 그런 소중한 것들은 잃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건지. 시간을 거스를 수 있다면 옛날의 자신을 발로 걷어차고 싶었다.

손가락 틈 사이로 눈물이 뚝뚝 흘렀다.

그때.

“끝까지 넌 똑같구나.”

너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환청인 걸까.

“네가 후회하는 건, 그냥 그때가 좋았구나 하는 게 전부야. 지금이 너무 힘드니까, 좀 더 편한 길을 찾고 싶은 것뿐이지. 반성하는 척, 후회하는 척하면서.”

환청이 아니었다.

아이테르는 얼굴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일견 두려움에 젖은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구냐!”

“그래. 넌 그런 놈에 불과했어.”

“누구냐고!”

정우의 목소리였다.

그것도 산 자가 말하는 듯 생생한 목소리.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이테르 앞쪽으로, 어둠이 갈라지면서 누군가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성스러운 하얀 갑주와 날개를 두른, 검은 머리칼과 눈을 가진 사내가.

아이테르의 기억 속 그대로.

“넌……!”

그 모습이 환각이 아니란 것을 깨달은 아이테르의 눈이 커졌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런 네놈 따위를 진짜 친구라고 생각했던 내가 멍청했던 거지.”

하지만 기억 속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옛 친구는 한 가지만큼은 달랐다.

그때는 늘 웃고 있었지만.

지금은 무표정한 얼굴과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니 그 멍청했던 과거를 지우고 싶다, 아이테르.”

정우가 으르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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