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하늘 날개 (13)
처음 기나긴 꿈에서 깼을 때.
정우는 생각했다.
‘다행이다.’
자신의 이런 고생이, 형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어서.
하지만.
그 뒤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기가 진짜 현실이라면.
‘내가 여기에 있는 것처럼.’
어딘가에.
‘녀석들도 있지 않을까?’
* * *
정우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아이테르를 보면서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진짜 웃음이 아니었다.
실소.
어이가 없어서 웃는.
‘만나게 되면 화가 날 줄 알았는데.’
정우는 자신이 수없이 겪었던 특전들을 떠올렸다.
특전을 반복한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배드 엔딩을 반복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중에 후반부까지 닿았던 것들 대부분은 어김없이 동료들의 배신으로 일단락이 되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매번 겪어야 했다는 뜻이었다.
물론, 그중에는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배신이었다. 사유도 항상 똑같았다. 욕심. 탐욕. 제안.
그리고 그건 진짜 그가 겪은 현실에서도 똑같았다.
지금 돌이켜 보면. 아르티야가 해체를 하게 된 주된 원인 중 하나는 자신이었다.
지쳐 가는 동료들을 외면하고, 엘릭서를 구하기 위해 계속 우직하게 상위 층계로 올라가자고 다독였다.
그 와중에 주변의 여러 클랜으로부터 견제를 당하기도 했었지만, 늘 무시를 했었다.
그런 과정에서 쌓인 억울함과 분노, 짜증, 오해들이 겹겹이 쌓여 그 사달이 난 것이다.
배신으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은 특전을 되돌아봐도 대부분 독선적인 자신의 성격이 발단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들의 잘못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사디는 마지막까지 동료들을 걱정했었다. 쿤 흐르는 연인을 위해 눈물을 흘릴 줄 알았다. 잔느는 지쳐 가는 그를 어떻게든 응원해 주려 하다가 죽었다.
모두가 그들과 같은 결정을 내린 건 아니란 뜻이었다.
바할. 리언트. 베이럭. 아이테르. 그리고 비에라 듄.
그들은 현실에서나 특전에서나 언제나 똑같은 결정을 내렸고.
그의 심장에다 칼을 박았을 때에는 웃고 있었다.
그렇기에.
정우는 그들을 이해하려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또한, 그렇기에.
정우는 그들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묻고 싶었다.
왜 그랬느냐고.
어째서 너희들은 어느 상황에서도 똑같은 결정을 내리느냐고.
같이 웃고, 떠들고, 눈물을 흘리던, 동료애를 외치던 지난날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단번에 벗어던지고, 돌아설 수 있었느냐고.
그래서.
그 결과로 행복했느냐고.
하지만 바할과 리언트는 이미 연우의 손에 죽고 없었고. 베이럭은 상위 층계로 올라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라고 했다. 비에라 듄은 대지모신을 잡아먹고 이상한 신 노릇을 하는 중이라 어떻게 물어볼 길이 없었다.
그래도 하늘이 도우려는 걸까.
여기에 아이테르가 있었으니. 드디어 물어볼 길이 생겼다.
[하늘 날개]
화아악-
정우가 입은 은색 갑주 뒤로 새하얀 날개가 높이 일어섰다. 그에게 헤븐윙이라는 별칭을 가져다주었던 시그니처 스킬.
콰콰콰-
정우를 따라 퍼져 나간 돌풍에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던 어둠이 잘게 떨었다.
연우가 완성하고 있는 하늘 날개와 다르게, 정우의 하늘 날개는 용의 인자가 품은 가능성을 극성으로 깨우치게 한다.
드래고닉 블러드가 감각을 한껏 깨우고, 프레셔가 사방을 짓눌렀다. 그리고 퍼져 나오는 드래곤 피어는 이곳이 자신의 영역이라며 한껏 위세를 부렸다.
이 날개를 펼치고 있는 동안 만큼은 그가 바로 주인공이었다.
쾅!
정우는 공간을 거세게 박찼다.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어둠이 위아래로 크게 출렁일 정도였다.
쐐애액-
허공을 가로지르나 싶더니 그대로 매서운 파공성과 함께 아이테르에게로 육박했다.
아이테르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죽은 자가 되돌아온 말도 안 되는 기현상을 겪어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우선 몸을 보호하는 게 급선무였다.
〈백광(帛光)〉. 손뼉을 마주치면서 손바닥을 뒤집어 위로 쳐올렸다. 두 사람 사이로 두꺼운 빛의 장막이 깔리면서 정우의 접근을 차단했다.
아니, 차단하고자 했다.
콰쾅!
원래대로라면 결계만큼이나 단단한 내구성을 자랑해야 하지만. 빛의 장막은 하늘 날개를 몸에다 두르고 쇄도해 온 몸통 박치기에 그대로 박살이 나 버렸다.
유리창이 깨지듯이, 수백 개의 파편이 우수수 쏟아지는 아래에서.
정우는 하늘 날개를 옆으로 치우면서 몸을 크게 우측으로 돌렸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엄청난 두께와 길이를 자랑하는 장검이 들려 있었다.
입고 있는 갑주만큼이나 은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검, 드래곤 슬레이어.
[드래곤 슬레이어]
분류: 양손 장검
등급: A+ (* 원본: EX)
설명: 고룡 칼라투스가 제공한 늑골을 명장 드워프 헤노바가 깎아 만든 검. 드래곤 본으로 이뤄진 만큼 대단한 내구성과 효율 높은 마력 전도율을 자랑하며, 요소요소마다 오리하르콘으로 만든 구슬이 박혀 증폭 효과까지 더한다.
현재 마도전핵이 더해져 강화된 상태다.
* 용잡이
용종의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품은 존재와 조우했을 경우, 자연스럽게 지배와 복종을 이끌어 낼 수 있게 된다.
* 용의 시선
피해를 입힌 대상에게 높은 확률로 체력과 마력을 갈취한다. 갈취당한 대상은 용의 시선에 노출된 것처럼 공포 상태에 잠기게 되며, 이때 공포는 상대의 면역력과 내성을 모두 무시한다.
* 용언 수식
검면을 따라 갖가지 마법 수식을 새겨 넣을 수 있다. 이때 새겨진 마법은 용언의 형태로 이뤄져 불발되지 않으며, 발동 시에도 소량의 마력만을 필요로 한다.
드래곤 슬레이어는 무구로서의 성능뿐만 아니라, 마법 도구로서의 옵션도 아주 뛰어났다.
엄청난 내구성은 어떤 무기와 부딪쳐도 절대 부서질 걱정이 없어 상대를 압도하고, 검면에 새겨진 마법들은 소량의 마력만을 소모하면서도 원전(元典)보다 더 뛰어난 효과를 발휘한다.
자체적으로 용언을 품고 있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말 몇 마디로 법칙을 바꾼다는 언령 마법 중에서도 최상 위에 해당하는 마법. 용종이 마나의 축복을 받은 종족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그렇기에 한때 신이나 악마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거기다 마도전핵까지 더해졌으니 위력은 두말할 것도 없는바.
물론, 지금 정우가 들고 있는 드래곤 슬레이어는 진품이 아닌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품, 레플리카(Replica)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우는 드래곤 슬레이어를 오랫동안 사용했던 만큼 기능뿐만 아니라, 세세한 모양이나 무게까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이런 기억을 바탕으로 재조된 레플리카는 등급만 몇 단계 아래로 떨어졌을 뿐, 성능은 아주 뛰어났다.
특히 정우와의 상성이 가장 잘 맞았으니.
효과만 따진다면 웬만한 신물도 견주기 힘들 정도였다.
그리고 그건 드래곤 슬레이어만이 아니었다.
입고 있는 갑옷, 천공주갑(天空紂鉀)과 오거 파워 건틀릿(OPG), 깃털 구름 신발 등등.
그를 상징하는 모든 것들이 똑같이 재현되어, 정우를 살아 있던 시절의 헤븐윙으로 되돌려 놓고 있었다.
정우는 다시는 쥘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무기를 이렇게 되찾게 해 준 대상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고마워, 네메시스.’
『무엇을……. 전 주인, 그대만큼이나 나 역시 이 순간을 바라 왔던 것을.』
[꿈꾸는 미몽]
네메시스의 스킬, 꿈꾸는 미몽은 상대를 환몽과 악몽의 경계선에 가두는 특징을 자랑한다.
그렇기에 원래 실질적인 효과는 네메시스가 특정 범위에 걸쳐 공허를 내리면서 적들을 공황 상태에 빠지게 하는 것이지만.
범위를 좁혀 한 명에게 특정할 경우에는 고유 결계가 열린 것 같은 효과를 만들어 낸다.
대상을 공간의 이면 속에 가두고, 따로 처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정우가 한창 네메시스의 전생, 미리내와 함께 활약할 당시에 자주 써먹던 전법이기도 했다.
비록, 네메시스가 품은 성질이 바뀌면서 배경은 꿈의 경계선이 되었지만.
정우는 오히려 이곳이 좋았다.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꿈의 경계선에서만큼은. 이미지만 제대로 구축할 수 있다면 모든 것들이 가능했으니까.
반쯤 부서진 영혼으로도. 옛날의 모습을 잠깐이라도 되찾을 수 있는 것이다.
-털고 와. 전부.
그리고 이건 형인 연우가 그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 준 무대이기도 했다.
콰쾅!
“컥!”
아이테르가 공격을 버텨 내지 못하고 피를 뿌리면서 뒤로 크게 튕겨 났다.
정우는 다시 한 번 더 하늘 날개를 크게 휘저으면서 녀석을 쫓아 여러 차례 드래곤 슬레이어를 휘둘러 댔다.
〈참격(斬擊)〉. 정우가 적을 상대하면서 자주 써먹던 스킬. 원래는 별다른 효과가 없는 평범한 스킬이었지만, 그가 사용할 때는 달랐다.
파지직, 파직-
검면을 따라 샛노란 스파크가 하나둘씩 튀어 오른다 싶더니.
우르르, 콰콰쾅!
서로 연결된 스파크는 곧 어마어마한 우렛소리를 내면서 벼락을 잇달아 토해 냈다. 〈빛의 파도〉였다.
콰르르-
원래 정우가 처음 탄생시켰던 빛의 파도는 그도 제어하기가 아주 힘들 정도로 대단한 파괴력을 자랑했다.
그래서 동료들은 빛의 파도를 볼 때마다 도망치기 바빴고, 광역 스킬이 아니라 자살기라면서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정우의 플레이어 랭킹이 계속 오르면 오를수록 빛의 파도를 다루는 법도 능숙해지면서 이야기는 달라졌다.
모든 걸 파괴하는 미친 필살기.
그렇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콰콰콰!
“말도 안 돼!”
아이테르는 참격과 함께 날아오는 빛의 파도를 보면서 비명을 질렀다.
이제는 다시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기술이 눈앞에 떡 하니 나타났으니. 놀랄 수밖에.
그래서 아이테르는 이를 악물면서 손을 아래로 내리쳤다.
〈백광(百光)〉. 손가락 끝에 맺힌 빛이 잘게 부서지면서 소낙비처럼 아래로 우수수 쏟아졌다. 참격이 빛의 파편에 부딪치면서 부서졌다.
어둠만이 가득한 세계가 환하게 밝아졌다가, 고열로 뜨겁게 달아오르기도 했다.
그것을 보면서, 정우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백광? 언젠가는 동생에게서 되찾겠다 뭐다 그러더니. 결국엔 잡아먹었구나, 너.”
백광은 아이테르의 아버지가 죄를 지어 일족에게서 내쫓겼을 때, 잃어버렸던 권능이었다. 아이테르는 그것을 가져갔을 쌍둥이 여동생 헤메라를 늘 증오했었고, 언젠가는 되찾아 올 것이라며 입버릇처럼 이야기하곤 했었다.
문제는 그런 말을 정우 앞에서만 했었다는 점이었다.
아르티야를 등지기 직전. 아이테르가 정말 정우를 친한 친구라고 여겼을 때에 했던 말. 정우 외에는 아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이건 환각이야! 환각이라고!”
아이테르의 얼굴은 이제 창백해지다 못해 기괴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산 사람은 되돌아올 수 없다. 그렇다면 이건 환각이었다. 그게 아니면 말이 되지 않았다. 최근 들어 이래저래 스트레스를 많이 받다 보니 정신력이 많이 약해진 게 틀림없었다.
정우는 자꾸만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녀석의 그런 모습이 더 어이없었지만.
“마음대로 생각해. 네 마음대로.”
콰쾅-
다시 한 번 더 휘두른 참격이 아이테르의 백광을 자르고, 녀석의 상반신을 크게 휩쓸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큭!”
아이테르는 가까스로 상체를 뒤로 내빼면서 참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뇌전은 그의 전신을 크게 휩쓸어 몸 곳곳이 터져 나가고 말았다.
이대로는 죽는다.
아이테르의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녀석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면서 수많은 빛으로 산란해, 우선 이 장소부터 탈출하고자 했다.
하지만.
“좀 위험하다 싶으면 꽁무니부터 빼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어째 넌 달라진 게 그리도 없니?”
정우는 비웃음을 던지면서 드래곤 슬레이어를 역수로 쥐어 지면에다 그대로 꽂았다.
우우웅-
순간, 검면을 따라 용언으로 가득한 문자가 가득 올라오더니, 허공을 따라 수많은 마법진이 열매처럼 맺혔다.
[무차별 난사]
만통이라는 특성과 용의 지식이라는 연산 장치를 이용해, 메모라이즈되었던 수많은 마법들을 동시에 개방하는 스킬.
정우가 미리 메모라이즈해 두었던 마법들은 드래곤 슬레이어에 이미 한가득 저장되어 있었고.
그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개방한 순간, 꿈의 경계선에는 마력 폭풍이 쉴 새 없이 휘몰아쳤다.
콰르릉, 콰르, 콰르르-
아이테르는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었다.
가뜩이나 꿈의 경계선이라는 좁은 공간은 감옥이나 다를 바가 없었기에, 그 안쪽으로 마력 폭풍이 들이닥친다면 폭풍우에 휩쓸린 난파선 신세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결국 녀석이 다시 나타났을 때는 전신이 크고 작은 화상 자국과 상처로 가득해져 버린 상태였다.
꺽.
꺽.
이미 폐까지 전부 익어 버렸는지, 거칠게 숨을 몰아쉴 때마다 검은 연기와 함께 탄내가 퍼져 나왔다. 숨도 금방 끊어질 것처럼 헐떡이기 바빴다.
그래도 어떻게든 일어나서 도망치려 발버둥 치는 녀석에게.
퍽!
정우는 조용히 다가가 드래곤 슬레이어로 복부를 내리찍었다. 아이테르는 핀에 고정된 나비처럼 퍼덕이기 바빴다.
“정…… 우야.”
아이테르는 흐리멍덩한 시야로 정우를 담았다. 부상으로 시력을 대부분 상실해 버린 상태였지만. 이것으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것은.
진짜였다.
가짜가 아닌 진짜.
죽었던 친구가 어떻게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그는 지금 당장이 중요했다.
“살려…… 줘.”
아이테르는 힘없는 손길로 정우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제발 살려 달라며. 구해 달라며. 애타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빌다 보면, 살려 줄 것이라고 믿었다. 정우는 그런 친구였으니까.
겉으로는 인성이니 뭐니 놀려 댔지만, 잔정만큼은 많았던 친구였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소중한 친구였는지 이번에 뼈저리게 반성하면서 알게 되지 않았던가.
“우…… 린 친구잖아. 그러…… 니 제발……!”
그러니.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친구가 돌아왔으니, 이번에는 그의 옆을 지켜서 다시는 지난번과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다짐했다.
물론, 쉽지 않으리란 건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준 상처는 너무 컸으니까. 하지만 몇 년 몇십 년이 걸려도 자신의 진심을 보여 준다면. 그런다면 정우도 마음을 열어 줄……!
스걱-
정우는 드래곤 슬레이어를 뽑아 그대로 녀석의 머리를 날렸다. 금붕어처럼 벙긋벙긋 대던 그대로, 아이테르의 머리통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개소리하고 자빠졌네.”
녀석을 만나면 왜 그랬냐고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이로써 확실해졌다. 전혀 들을 필요가 없었다. 녀석의 말을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귀가 썩을 것 같았으니까.
정우는 짜증 섞인 얼굴로 녀석의 머리통을 발로 짓밟았다.
콰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