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378화 (378/862)

3화. 기간토마키아 (3)

“티폰!”

이아페토스가 잔뜩 굳어진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티폰의 엷은 눈동자가 나타났다는 건 자신이 하려는 일에 훼방을 놓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이번 싸움은…… 너의 패배다…… 이아페토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이제 놈을 죽이면 되는……!”

『보이지…… 않는 것이냐…… 아니면…… 못 본 척하는 것이냐……?』

티폰의 눈동자가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갑게 웃었다.

『저 아이를…… 지켜보라고 하지 않았던가……. 저 뒤에 있는…… 치들이 보이지 않는가……?』

이아페토스는 티폰의 동공이 가는 방향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연우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갑자기 나타난 티폰을 상대하기 위해 다시 억지로 기력을 짜내고 있었다.

그의 주변은 어느새 람을 비롯한 디스 플루토가 에워싸고 있었다. 어떤 위협에서는 그를 지켜 내겠다는 듯 결연한 기색으로.

하지만 이아페토스의 눈에는 전혀 다른 것이 보였다.

꽤 많은 숫자의 신과 악마들이 연우의 뒤편에 서 있었다. 물론 천계에 있는 저들이 내려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몇몇은 노여운 시선으로 이아페토스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예를 들어, 아테나나 헤르메스는 대가만 주어진다면 곧바로 내려올 태세였다. 케르눈노스나 비마질다라의 시선도 만만치 않았다.

아테나와 헤르메스는 자신들과 적대 관계인 올림포스의 종자들이니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최고신의 자격을 가지고도 얽매이는 게 싫어 사회를 꾸리지 않고 홀로 다닌다는 케르눈노스나, 같은 악마들조차도 눈 아래로 본다는 투귀(鬪鬼)인 비마질다라는 왜 녀석과 함께하고 있단 말인가.

어디 그뿐이랴.

[아가레스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 저것은 내 것이다.]

[아가레스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 내 것에 함부로 손을 댄다면…… 죽여 주마.]

고고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한다는 동부의 대공, 아가레스는 아예 그를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대체 이 말도 안 되는 광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한단 말인가.

하나하나가 모두 대신격 혹은 대악마에 준한다는 자들이, 저토록 필멸자를 감싸고 돈다는 사실을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여기 있는 플레이어를 죽일 경우. 저 많은 신과 악마들을 적으로 돌리게 될 거라는 사실이었다.

물론, 크게 두렵거나 하지는 않았다.

빛의 기둥이 내려온 이상, 그들도 이제 올림포스로 올라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리고 그러기 위한 준비는 착착 이뤄지고 있었다. 천계에만 도착한다면, 오래전에 잃어버린 신격도 되찾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그리고.

천계를 제패하는 것이 그들의 최종 목표인 이상, 언젠가 저들과도 충돌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지금은 아니었다. 올림포스를 복속시킨 뒤에야 정복 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출 수 있을 테니, 지금은 쓸데없이 다른 적들을 만들 필요가 전혀 없었다.

티폰도 바로 이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이렇게 물러서야 한단 말이냐!’

녀석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조금만 힘주면 쉽게 부러뜨릴 수 있을 목을 훤히 드러내고.

문제는. 녀석이 웃고 있다는 점이었다.

비록 가면을 쓰고 있어서 표정을 제대로 읽을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 너머에 있는 눈꼬리가 살짝 비틀려 있었다.

할 수 있겠냐는 듯.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이.

힘도 전부 소진해서 거칠게 숨을 내뱉는 녀석이 배짱을 부리는 것이다.

결국. 그런 냉소가 이아페토스의 심기를 박박 긁어 놓았고.

“죽인다아!”

『그만두라는 말…… 들리지 않는 것이냐…… 이아페토스……』

이아페토스는 티폰의 말을 흘려 들으며 연우에게로 손길을 내뻗었다.

그 순간, 가면에 가려진 연우의 입술도 크게 비틀렸다.

그때.

콰르르, 콰르르릉!

갑자기 하늘에서부터 새하얀 벼락이 쏟아졌다. 그것은 마치 잘 벼린 칼처럼 아주 날카로웠다. 연우에게 막 닿으려던 오른팔이 잘리면서 허공으로 튀었다.

푸우우-

“크아악!”

가뜩이나 이아페토스는 크로노스의 시정을 대거 상실하면서 육체가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 여기에 용종의 기운이 가득한 공격이 가해지니 영혼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이아페토스는 잘린 오른팔을 붙잡으면서 뒤로 주춤 물러섰다. 피가 뚝뚝 떨어지면서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그 위로.

정우가 새하얀 날개를 화려하게 펼치면서 조용히 착지하고 있었다. 은색으로 빛나는 갑주와 칼날이 위용을 잔뜩 드러내며 시퍼런 예기를 뿌려 댔다.

“늦었어.”

『뭐라는 거야. 이것도 최대한 서둘러 온 거구만.』

정우는 연우의 핀잔을 콧방귀를 뀌며 무시하면서 드래곤 슬레이어를 이아페토스 쪽으로 돌렸다.

『2차전은 저 못생긴 아저씨랑 마저 하면 되는 건가?』

이아페토스를 따라 검은 먹구름 같은 게 조금씩 일렁이고 있었다. 그를 둘러싼 공간이 꿈의 경계선으로 들어서고 있다는 뜻이었다.

원래는 이아페토스가 가진 영압 때문에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만큼 힘을 상실하면서 네메시스의 결계 속으로 말린 것이다.

연우가 여태껏 여유로웠던 것도 전부 이 때문이었다.

정우의 영혼 상태는 분명 불안정하다. 위험한 구석도 많다. 하지만 특정 조건만 주어진다면, 영령(英靈)에 준할 정도로 강한 힘을 발휘한다.

생전에 터득한 격이 있기 때문이었다. 레드 드래곤의 포위망을 뚫고, 여름여왕의 드래곤 하트를 망가뜨릴 정도로 뛰어나던 격. 이때의 힘을 조금만 드러내더라도, 연우는 녀석과의 승패를 장담할 수 없으리라 여겼다.

물론, 현실에 온전한 격을 드러낼 수 있는 시간에는 한계가 있을 테지만.

그 시간이 끝날 때쯤에는 자신도 다시 비그리드를 쥘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현자의 돌은 영혼석의 에너지를 고루 뿌려 대고 있었으니까. 마신룡체도 어느새 수복을 거의 마쳐 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아페토스는 이를 악물었다. 너무 허망하게 오른팔이 잘려 나갔다. 머릿속이 짜증과 분노로 가득 찼지만, 신의 눈은 연우 형제의 변화를 정확하게 읽어 내고 있었다. 연우의 계획도 쉽게 알 것 같았다.

게다가.

『더 이상의 불복종은…… 용서치 않겠다…… 이아페토스…….』

티폰의 마지막 경고가 그의 발을 단단히 묶었다.

그가 처한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다수의 디스 플루토가 어느새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특히 하데스의 사도, 람은 강신(降神)을 준비하고 있는지 그녀를 따라 감도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계속 싸움을 이어 나간다면?

자신의 패배였다.

티탄의 12주신 중 하나였던 자신이, 한낱 필멸자들에게 패배를 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분통을 터뜨린다고 한들, 달라질 것은 없었다.

결국 이아페토스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면서 천천히 뒷걸음질을 쳐야만 했다. 하지만 물러나는 동안에도 그의 시선은 연우에게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다음에. 다음에 만났을 때 네놈의 목은 어떻게든 내가 뜯어 주마.”

그 말과 함께 이아페토스는 공간에 묻혀 완전히 사라졌다. 티폰이 내린 장막 속으로 자취를 감춘 것이다.

하지만 티폰은 바로 사라지지 않았다. 뭔가 못마땅한 듯 살짝 눈살을 찌푸리다가, 곧 동공을 돌려서 연우에게로 고정시켰다. 순간, 눈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너무 즐거워 죽겠다는 듯이.

『아무리…… 이아페토스가 머저리라고 해도…… 대단하군…… 왜 아테나와 헤르메스가…… 끼고 도는지 알겠어…… 왜 포세이돈이 경계를 하고 있는지도…….』

[특성 ‘냉혈’이 근원을 알 수 없는 압박감을 물리칩니다.]

[특성 ‘냉혈’이 근원을 알 수 없는 압박감을 물리칩니다.]

연우는 냉혈 특성을 빌려 티폰이 주는 압박을 물리치면서, 그를 똑같이 노려보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위화감도 들었다. 분명 오랫동안 타르타로스에만 갇혀 있었을 녀석의 말투가, 꼭 올림포스의 상황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과연 칠흑의 후예…… 죽음을 가질 만해……. 하지만…… 한 가지만은 말해 두마……. 칠흑의 힘은…… 그리 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와 함께 할 힘……. 반역자 올림포스와…… 할 힘이 아니지…….』

‘반역자?’

연우는 눈을 크게 뜨며 티폰을 바라봤다. 순간, 그의 머릿속으로 다시 한번 더 예전에 올림포스의 보고에서 봤던 성화가 스쳐 지나갔다.

제우스를 비롯한 여러 신들의 공격에 나락으로 떨어지던 어느 이름 모를 신.

『크로노스는 그의 사도였고…… 우리는 크로노스의 유산을…… 이었으니…… 너 역시……!』

그 순간.

콰르릉!

티폰의 말을 자르듯이 하늘에서부터 어마어마한 압박감이 몰려 왔다.

연우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헤르메스와 아테나의 채널링이 유독 짙어져 있었다.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듯, 티폰을 노려보는 것 같았다.

티폰의 눈꼬리가 더 깊이 휘었다.

『아무래도…… 그대의 수호신들은 내가 더 말을 섞는 것을…… 싫어하는 듯하군. 못다 한 이야기는…… 나중에 자세히 나눌…… 기회가 있겠지…….』

눈꼬리가 점점 엷어졌다.

『그때가 그리…… 멀지 않았을 테니…… 그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마…….』

티폰은 그 말을 남기고 조용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자 좌중을 둘러싸고 있던 압박감도 거짓말처럼 완전히 가셨다.

깊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털썩-

적막을 깨뜨린 것은 다리의 힘을 잃고 제자리에 주저앉는 디스 플루토들이었다.

밤새 이어졌던 성역 탈환에서부터 이아페토스의 신격 해방, 권속들과의 싸움, 티폰의 등장까지. 여태 겪었던 수많은 전투들 중에서 이번이 가장 치열하고 힘들었던 것 같았다.

그 속에는 람도 섞여 있었다. 억지로 하데스의 강신을 시도하면서 마지막 남아 있던 기력도 전부 소진하고 만 것이다.

정우도 어느새 회중시계 속으로 스며들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우는 한참 동안 가만히 앉아 티폰이 던진 말을 계속 곱씹어야만 했다.

‘크로노스가 칠흑왕의 사도였다고?’

그러고 보니 처음 타르타로스에 도착했을 무렵. 연우가 처음 떨어진 곳은 거대한 산맥처럼 누워 있던 크로노스의 사체 주변이었고, 칠흑왕의 형틀은 미친 듯이 떨렸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이아페토스가 흘린 크로노스의 시정은 모조리 칠흑왕의 형틀 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치 그곳이 제자리라는 것처럼.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그런데 만약 이곳에서 운용되는 거신력이니 크로노스의 시정이니 하는 것들이 사실은 칠흑왕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면, 말이 되었다.

포세이돈을 비롯해 데메테르, 헤스티아, 헤라 등이 왜 그렇게 이 힘을 경계하고 있는지도.

‘제우스와 포세이돈 세대는 크로노스를 비롯한 티탄을 거꾸러뜨리고 올림포스를 차지했다. 그럼 당연히 티탄의 배후나 다름없던 칠흑왕을 그토록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해.’

그것이 바로 티타노마키아.

하지만 헤르메스와 아테나의 세대는 다르다. 그들은 티타노마키아를 겪지 못했고, 크로노스의 악명을 들어도 두려워하기보다는 선망의 시선으로 그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스틱스의 맹세로 금제가 걸린 칠흑왕에 대한 것을 알고, 추종하기 시작한 것이라면.

그렇다면 헤르메스와 아테나가 칠흑왕의 후계가 된 연우를 호의적으로 돌보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런 겁니까?”

연우는 자신의 속내를 한껏 드러내면서 고개를 위로 들었다.

하지만.

[헤르메스가 쓰게 웃습니다.]

[아테나가 침묵합니다.]

그들에게서는 이렇다 할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것을.

연우는 무언의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여전히 의문이 남았다.

신이 신을 사도로 둔다는 것도 도무지 상상하지 못한 개념이었는데. 당대 최고신이었던 크로노스를 사도로 둘 정도였다면. 대체 어떤 존재였을지, 이제는 도무지 짐작도 가질 않았다.

‘넌, 뭔가 알고 있지?’

연우는 현자의 돌 속에서 잠자코 있을 마성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돌아온 것은.

키키킥!

뜻 모를 이상한 웃음소리가 전부였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