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기간토마키아 (5)
『이딴 짓을 저지르고도 네놈이 무사할 것 같으냐!』
벤티케 때에 이어서 두 번째. 포세이돈의 음성에는 분노가 단단히 어려 있었다.
벌레 취급했던 플레이어에게 두 번이나 자신의 인자를 빼앗긴다는 사실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이제 곧! 올림포스와 타르타로스 간의 계단이 열린다. 그때, 나를 마주하고도 살아날 자신이 있느냔 말이다!』
하지만 연우가 그런 포세이돈의 발악을 들을 리 만무했고.
[‘바토리의 흡혈검’의 스킬 숙련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톱니 이빨은 게걸스럽게 포세이돈의 인자를 모두 집어삼킨 뒤에는 헤스티아의 인자를, 그다음에는 헤라, 데메테르의 순서로 멈추지 않고 먹어 치웠다.
신의 인자를 차례대로 삼키면서 깨달은 점은 신력의 구성 요소도 각자 다르다는 점이었다.
포세이돈이 격랑 치는 파도라면 헤스티아는 열을 따뜻하게 내는 화로 같았다. 헤라는 앙칼졌고, 데메테르는 포근했다.
물론, 어느 정도 신의 인자를 보유한 연우이니 세세하게 구분할 수 있는 차이일 뿐.
인자가 품고 있는 영압은 너무 커서 평범한 플레이어라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주눅이 들 정도였다.
『이렇게 직접 겪어 보니, 포세이돈이 왜 그토록 당신을 경계하는지 알겠군요.』
그리고 마지막 차례에 이르렀을 때. 별다른 말없이 흡수된 헤스티아나 헤라와 다르게, 데메테르는 그에게 짧은 의념을 남기고 있었다.
다만, 포세이돈과 다르게 그 속에서 분노는 느껴지지 않았다.
『헤르메스나 아테나, 그 아이들이 왜 그토록 당신을 감싸고 도는지도요. 천계 전체가 당신에 대한 소문으로 떠들썩한데, 그럴 만해요.』
오히려 착잡함에 가까운 목소리.
『하지만 조심하셔야만 할 거예요.』
데메테르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격란은 이제부터 시작이니. 칠흑을 계승한 당신도 피할 수는 없…….』
데메테르의 목소리는 거기서 끊어졌다. 모든 인자가 빨려 들어온 것이다.
화아아-
연우는 체내에서 빠르게 자리를 잡는 신의 인자들을 한껏 느꼈다. 마신룡체가 가진 가능성이 한결 더 깊어지고 있었다.
다만, 미간은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데메테르가 남긴 말 때문이었다.
격란? 그게 무슨 말일까.
데메테르는 하데스의 아내, 페르세포네의 어머니이기도 한 존재. 단순히 포세이돈의 편이라고 단정하기엔 어려운 존재다. 그러니 방금 던진 메시지는 어떤 의미가 있을 텐데.
연우는 그렇게 잠깐 고민에 잠기다, 갑자기 느껴지는 시선에 정신을 차리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 다시 회중시계 밖으로 나온 건지, 정우가 질린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아니. 대단하다 싶어서.』
“……?”
『아마 세상에 신 등쳐 먹는 사람은 형밖에 없지 않을까?』
“…….”
연우는 정우의 시선을 피해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인성…….』
혼잣말도 들렸지만, 못 들은 척 하면서 몸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그때, 그림자 밖으로 샤논이 얼굴만 쏙 내밀면서 동의한다는 듯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우와 샤논의 시선이 마주쳤다.
둘은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 * *
그 뒤로도,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리고 한번 시작된 디스 플루토의 반격은 메마른 갈대숲을 가로지르는 화마처럼 크게 일어나 타르타로스를 관통했다.
이아페토스 등과의 접전으로 몇 개의 군단이 궤멸에 가까운 상처를 입기도 했다지만, 그런 피해는 사실 디스 플루토에게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
지난 수백 년간 패퇴만 거듭했던 그들로서는. 오히려 지금 주어진 승기가 즐겁기만 했다.
그리고 항상 그 중심에는.
콰아앙-
콰콰콰, 콰르르-
연우가 있었다.
[아레스가 당신의 활약상에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
[세크메트가 탐욕스럽게 입술을 매만집니다. 학살을 기꺼워합니다.]
[케르눈노스가 당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신령(레베카)에게 축복을 내립니다. 새로운 사도직을 고려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연우에게 있어 타르타로스는 최고의 무대나 다름없었다.
하늘 날개는 여전히 미완성이고, 완성하기 위해서는 많은 전투를 겪어야 한다. 그것도 사활이 걸릴 만큼 위험한 전투들을.
하지만 일반 층계에서 지금 연우에게 그만한 위험을 줄 수 있는 곳은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끽해야 60층 이후의 곳들이나 연우에게 경각심을 줄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런 곳들도 대부분 시련이 힘들 뿐, 많은 전투 경험을 줄 수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타르타로스는 달랐다.
이곳은 신격과 신격들이 부딪치는 전장.
심지어 일반 병사들마저도 웬만한 고위 층계의 플레이어들을 발 아래로 볼 정도로 강했다.
당연히 연우에게 이만큼 좋은 장소는 없었고.
체류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하늘 날개도 서서히 높은 완성도를 갖춰 나갔다.
[‘하늘 날개’ 중 왼쪽 날개(키워드: 죽음)가 발동되었습니다.]
[넓은 전장에 걸쳐 죽음이 내려앉았습니다.]
[티탄의 권속6,712가 사망했습니다.]
[티탄의 권속591이 사망했습니다.]
……
[‘하늘 날개’ 중 오른쪽 날개(키 워드: 투쟁)에 새로운 권능이 추가되었습니다.]
[추가된 권능: 이랑진군의 교룡살, 아다드의 에-카르카라]
[비마질다라가 자신이 하사한 권능을 제대로 사용하는 것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아가레스가 자신의 것에 손을 대지 말라며 길길이 날띕니다.]
[모든 신들이 무시합니다.]
[모든 악마들이 무시합니다.]
[아가레스가 뒷목을 붙잡습니다. 이를 바득바득 갑니다.]
[아가레스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 저 꼴 보기 싫은 놈들 좀 치우란 말이다! 저놈들 앞에서 재롱 잔치를 부려서 뭐가 좋단 말이냐!]
[아가레스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 그러니 내 권능과 인자를 더 많이 갖고 갈……!]
[사용자의 권한으로 잠시간 아가레스의 메시지를 차단합니다.]
……
[다수의 신들이 당신을 주목합니다.]
[다수의 악마들이 당신을 보며 입맛을 다십니다.]
[소수의 신들이 당신을 질투합니다. 당신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합니다.]
[소수의 악마들이 자신들의 자리가 위태로워질까 불안해합니다.]
[당신의 격에 대한 논의가 아직도 활발히 논의 중입니다. 합의가 제대로 이뤄지질 않아, 결과가 계속 지연됩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각 날개들의 발현 시간도 점점 길어져 40초대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만큼 질 좋은 영혼도 대거 습득하면서 영괴를 비롯한 권속들도 빠른 성장을 이뤘으니.
[수확한 망령의 수: 312,456]
컬렉션의 크기도 이전에 비해 3배나 늘어난 상태였다. 연우가 다 니는 길에는 망령들이 쉴 새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어느 누구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물론, 이런 연우의 활약상에 티탄과 기가스가 가만히 있는 건 아니었다.
『놈을 죽여라…… 어떻게든……!』
『위대한 크로노스를…… 위하여……!』
옛 티탄 12주신을 비롯한 거신들이 일제히 방어 전선을 구축하면서 팽팽한 접전을 이뤘다.
그러나 하데스도 신력이 돌아온 만큼 맹활약을 벌였으니.
결국 치열한 전투는 엎치락뒤치락하면서 계속 이어지다가.
[여섯 번째 성역, ‘부왕지’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끝내 디스 플루토 쪽의 승세로 거의 돌아섰으니.
여섯 번째 빛기둥이 내려오면서.
드디어.
그토록 바라던 올림포스와의 계단을 생성할 수 있게 되었다.
* * *
“그동안 잘해 주었다.”
여섯 번째 성역을 탈환한 날. 하데스는 피로에 절은 연우를 따로 불렀다.
연우는 오랜 격전으로 전신이 온통 피와 정체를 알 수 없는 고기 조각들로 점철되어 있었다. 기세도 여전히 흉흉해서 신을 배알 하는 자리에 서는 모습이라고 전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데스는 전혀 그런 것을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연우의 그런 모습이 전부 디스 플루토를 도운 결과였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런 것을 떠나서라도, 하데스는 사실 저런 모습을 아주 좋아했다.
젊은 시절에는 티탄과 기가스들을 무찌르고, 나이가 든 후에는 그들을 가두는 수문장 역할을 하는 등, 평생 흉흉한 전장에서만 살아왔던 그였기에. 편한 뒷방에 앉아 있는 모습보다는 저런 모습이 더 흡족했던 것이다.
이따금 젊은 시절의 자신을 보는 것 같은 느낌도 들긴 했다.
그리고.
연우는 자신을 치하하는 하데스를 보면서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오늘이 그 날이라는 것을.
그토록 바라던 순간이었다.
[서든 퀘스트(페르세포네의 오랜 소망)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였습니다.]
[히든 퀘스트(성전 복원)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였습니다.]
[히든 퀘스트(옛 신에 맞선 영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였습니다.]
……
여태껏 타르타로스에 있으면서 알게 모르게 받았던 퀘스트들이 줄줄이 성공하고.
[보상으로…….]
이제는 크게 눈에 차지 않을 보상 목록들을 지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가장 바라던 보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보상으로 하데스의 대신물, ‘퀴네에’를 획득했습니다.]
“처음 약조하였던 대로, 이것을 선물로 주지.”
하데스는 천천히 옥좌에서 걸어 내려와 연우의 손에 검은 투구를 쥐여 주었다.
겉보기에는 전장에서 흔하게 굴러다닐 것처럼 보이는 청동 투구였지만.
연우는 하데스가 이 투구를 쓸 때의 모습을 잘 알고 있었다.
이번 여섯 번째 성역, 부왕지를 탈환하기 위해 벌였던 전투는 정말이지 디스 플루토의 모든 사활을 건 맹전(猛戰)이었다.
옛 티탄 12주신 중 일곱이 나타나 거신의 위용을 한껏 드러냈고, 그만큼 많은 권속들이 대거 쏟아지면서 세상을 집어삼킬 것처럼 굴었다.
디스 플루토의 병사들도 하나같이 지난 수백 년간 이런 전투를 겪어 본 경험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고 할 정도로 치열했던 전투였다.
그런 아수라장 속에서.
하데스는 처음으로 퀴네에를 머리에 쓰고 전장에 섰다.
그리고.
‘모든 게 줄줄이 죽어 나갔지.’
여러 성지를 탈환하면서 신력을 회복하고, 대신물까지 되찾은 하데스는 그야말로 신(神)이었다.
칼을 휘두를 때마다 거신들이 줄줄이 죽어 나갔다.
타르타로스가 몇 번씩이나 부서질 것처럼 크게 떨렸으니. 그 속에서 자잘한 권속 따위가 살아날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데스는 그가 왜 올림포스의 맏형이고, 왜 홀로 타르타로스를 떠맡게 되었는지를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 퀴네에를 쓰고 있는 하데스는 그만큼이나 무서웠고, 강렬했다.
사실상 부왕지의 탈환은 8할 이상을 그가 해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티폰과 다른 기가스들이 나타나지 않은 게 걸리긴 하지만.’
그러니 어떻게 보면 하데스에게는 퀴네에가 절대적으로 필요할 것처럼 보였지만.
하데스는 아무런 미련 없이 연우에게 퀴네에를 쥐여 주었다.
다가온 그를 보며 연우는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전장에서 보여 줬던 엄청난 위압감과 다르게, 막상 이렇게 눈앞에서 마주 보니 신적인 존재라도 키는 자신과 크 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
“이게 없으면 안 되는 것 아니십니까?”
하데스가 피식 웃었다. 전황이 많이 나아졌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입가에서는 여전히 싸늘한 냉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한낱 플레이어가 신을 걱정하는 건가? 웃기는군.”
“그것은…….”
“내가 필요했던 것은 신물이 가지는 상징성이었다. 거기서 비롯되는 신화도 있고. 필요한 건 모두 가졌으니 이건 가져가도 괜찮다.”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었지만, 퀴네에에서 뽑을 건 이미 다 뽑았다는 뜻인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인사는 내가 해야겠지. 덕분에 우리 군의 사기도 많이 올랐으니. 그대가 없었으면 타르타로스는 진즉에 무너졌을 것 아닌가.”
여전히 냉기가 가득한 목소리였지만, 연우는 그 속에 담긴 고마움을 읽을 수 있었다.
연우는 퀴네에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순간, 귀네에와 칠흑왕의 절망이 똑같이 웅웅 하고 떨렸다.
하데스는 아주 잠깐 씁쓸한 눈빛으로 두 가지를 번갈아 보다가, 조용히 물러서서 다시 옥좌에 앉아 턱을 냈다.
“원하는 건 얻었으니 이제 다시 스테이지로 돌아갈 생각이겠지?”
올림포스와 성공적으로 연결된다면, 타르타로스는 이제 정말 신화 속 전장으로 탈바꿈한다. 어디론가 숨은 게 확실한 티폰과 기가스를 찾으러 움직이겠지.
그 속에서 연우와 일행이 더 이상 활약할 무대는 없었다. 신격들이 충돌하는 자리에 플레이어가 끼어서야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 꼴밖에 더 될까.
더구나 올림포스가 마냥 연우에게 아군인 것도 아니었다.
“하긴. 포세이돈, 그놈이 이를 갈면서 그대를 찾고 있겠지. 하여간 힘만 센 머저리가 따로 없어.”
하데스는 옛날의 아집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는 친동생에 못마땅한 평가를 내리면서, 이만 나가 보라는 듯 손을 저었다.
연우는 인사를 하고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하데스의 오늘 인사는 꼭 작별 인사처럼 느껴진다고.
* * *
“카인, 그거……?”
“맞아. 퀴네에다.”
연우는 일행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던 신전 광장으로 돌아왔다.
지난 탈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면서 축배를 한창 즐기고 있어서 그런지 다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주변도 온통 소란스러웠다.
칸은 연우가 손에 들고 있던 퀴네에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드디어 바라던 물건이 손에 들어 왔으니 놀랄 수밖에. 그리고 그것은 이제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내고, 스테이지로 되돌아간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게 보니 확실히 겉보기와는 다릅니다.”
크로이츠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퀴네에를 바라봤다. 그동안 일행들과 함께 사선을 넘나들면서 어느새 그도 이제 동료로 인식되고 있었다.
장인인 빅토리아와 브라함도 어느새 자리를 차지했고, 다른 병사들과 어울리며 놀던 도일과 갈리어드도 돌아와 연우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웅, 우웅-
품속의 회중시계도 잔뜩 기대된다는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연우는 그들의 모든 시선을 한꺼번에 받는 게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곧 크게 숨을 삼키면서 퀴네에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지이이잉-
칠흑왕의 절망과 비탄이 일제히 몸을 떨었다.
그리고.
파스스-
퀴네에가 잘게 부서지면서 작은 입자들이 소용돌이를 그렸다. 그러다 검은 입자들이 하나둘씩 연우의 목 쪽으로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