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381화 (381/862)

6화. 기간토마키아 (6)

철컹, 철컹-

쇠사슬이 잇달아 이어지면서 목을 따라 검은 띠가 둘러졌다.

두께가 조금 두꺼워 어떻게 보면 죄수들이 차는 항쇄 같기도, 혹은 목걸이 같기도 한 띠.

[‘칠흑왕의 격노’를 획득하였습니다.]

연우는 손으로 묵직한 무게를 느끼면서 정보창을 확인했다.

[칠흑왕의 격노]

분류: 머리 방어구

등급: ???

설명: ???

**이 아티팩트는 ‘유니크’입니다. 탑에서도 오로지 단 한 개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주인에게 완전히 귀속됩니다. 타인으로의 거래나 양도가 불가능합니다.

**현재 아무런 정보도 파악할 수 없습니다. 일정한 자격이나 조건을 갖춰야만 권한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역시 또 이렇군.’

칠흑왕의 비탄을 얻었을 때와 똑같았다. 아직 자격과 조건이 되질 않아 정보를 확인할 수 없다는 내용.

다만, 비탄이 해제될 때에는 잠에 잠깐 들었다가 그냥 눈을 뜨니 하루아침에 풀렸던 게 전부였었지만. 이번에도 그런 행운이 따를 거란 보장은 없었다.

“이것이 퀴네에라고?”

그때, 헤노바가 곰방대를 입에 물면서 다가와 짧은 팔로 연우의 항쇄를 가볍게 두들겼다.

텅, 텅-

묵직해 보이는 겉모습과 다르게 제법 맑은 소리가 났다.

헤노바의 눈이 가늘게 좁아졌다. 탑에서도 손꼽히는 명장인 그는 이것이 심상치 않은 재질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후우. 가볍게 날숨으로 연기를 내뱉으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키클롭스들이여. 이건.”

『신진철이로군.』

『죄수를, 그것도 격이 상당히 지고한 존재를 속박하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다. 한데, 이거…… 왜 이리 낯이 익은 거지?』

헤노바의 그림자가 쭉 길어지더니 키클롭스 브론테스와 스테로페스가 나타나 고심에 잠긴 눈빛으로 항쇄를 바라봤다.

그들은 최근에 헤노바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디스 플루토의 병기들을 수리하고, 그와 기술을 공유하고 있는 중이었다. 연우가 설명을 덧붙였다.

“지금은 칠흑왕의 격노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격노?”

헤노바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가볍게 쯧 하고 혀를 찼다.

“절망, 비탄에 이어서 격노라고? 원주인이 애가 타긴 많이 탔었나 보군. 이거 보통 물건이 아닐…….”

헤노바는 말을 잇다 말고 도중에 끊어야 했다. 브론테스와 스테로페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은 걸 본 것이다.

『칠흑?』

『그렇군. 그래서……!』

브론테스와 스테로페스는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건 어떻게 보면 두려움에 젖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혹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를 푼 희열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이 다시 연우를 봤을 때, 하나밖에 없는 눈은 깊게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후예라면. 그래. 그래도 한때 신격이었던 우리를 이렇게 종속시켰던 것도 이해가 되는구나. 그래서 그런 것이었어…….』

『과거에 저지른 것들이, 이렇게 죽어서 돌아와 우리에게 족쇄를 채우는 모양입니다.』

『그런 모양이야.』

깊은 탄식을 나누는 두 사람을 보면서, 연우가 물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자네가 착용하고 있는 형틀…… 사실은 우리가 만든 걸세. 정확하게는 보조 역할을 한 게 전부였지만.』

가면 속, 연우의 두 눈이 커졌다. 헤노바를 비롯한 다른 일행들은 도저히 이야기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어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신화 속에서, 전쟁에 나서는 올림포스의 3주신에게 무기를 제작해 바쳤다는 세 대장장이 신이 ‘보조 역할’을 한 형틀이라면. 이건 그저 평범한 신물이니 대신물이니 하는 범주에 담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어째서 여태 바로 알아보지 못한 건지.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일이었다지만…… 세월이 지난 만큼 그 물건도 많이 닳아서 그런 것인가.』

브론테스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씁쓸했다.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그 세 개의 형틀은 우리 형제들의 스승이셨던 #### 님이 제우스의…….』

브론테스는 말을 잇다 말고 눈살을 찌푸렸다.

『####……. 역시. 언급조차 안 되는군.』

연우가 자신의 이름을 시스템에 등록하지 않아 블라인드 처리되듯이. 브론테스가 언급한 스승이라는 존재의 이름도 블라인드가 되어 인식이 되질 않았다.

연우의 눈이 이질적으로 반짝였다.

“스틱스의 맹세입니까?”

『비슷하다네. 제우스께서 작정하시고 잠금장치를 걸어 놓으신 모양이야. 언급이 가능한 정도가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자네가 말하는 칠흑왕이라는 분을 구속하던 형틀은 제우스의 의뢰를 받아 직접 제작하셨다네. 당시에 타르타로스와 에레보스에 있던 모든 신진철을 뽑아다 사용했으니…… 어마어마했었지.』

브론테스의 하나밖에 없는 눈동 자가 가늘게 좁혀졌다.

『그게 이런 작은 사이즈로 줄어들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만.』

“당시의 상황이나 내막을 제가 알 수 있겠습니까?”

품속의 회중시계도 잘게 떨렸다. 칠흑왕의 비밀을 풀고 권능을 되찾을수록 정우를 부활시키는 길이 가까워질 수 있었다.

하지만.

『한번 맺어진 스틱스의 맹세는.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는다는 것, 잘 알지 않나.』

연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시스템의 어떤 기능보다도 앞서는 칠흑왕의 권능이라지만. 한계는 있기 마련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발 물러서야만 하는 걸까.

『다만.』

“……?”

『이 정도는 말해 줄 수 있지. 칠흑이 나락 속에 구속되는 일로 인해 올림포스는 위계가 크게 변동하였다는 것. 프로토게노이가 왜 영락했고, 티탄과 기가스는 왜 지저에 처박혔는지…… 그걸 알아보면 될 거야.』

파직, 파지직!

순간, 브론테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영체를 따라 커다란 스파크가 튀었다.

『으음. 역시 이 정도도 시스템의 제재를 받을 수밖에 없나.』

브론테스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영체가 흐트러지고 있었다. 더 이상 언급을 하게 되면 스틱스의 맹세에 따라 영육이 부서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연우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 말은 곧, 기가스가 언질을 주었던 대로 티타노마키아나 기간토마키아가 칠흑왕과 모종의 관련이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다만.

‘프로토게노이도 관련이 있다고?’

아이테르나 파네스를 비롯한 옛 신족의 후예들이?

칠흑왕의 흔적이 엘로힘과도 연결될지 모른다는 사실이, 연우에게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뭐, 아는 거 없어?’

연우는 회중시계를 손으로 매만졌다. 손끝을 따라 정우의 의념이 전해졌다.

『딱히 짐작 가는 건 없어. 최소한 내가 벌인 특전 속에서도 비슷한 건 없었고. 오히려 당황스러운 건 나라고.』

연우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결국 엘로힘을 터는 수밖에는 없나.’

다시 스테이지를 오를 필요가 생긴 셈이었다.

그때, 대화를 줄곧 가만히 듣고만 있던 크로이츠가 눈을 반짝거렸다.

“타르타로스를 나갈 생각이라면, 언제부터 오를 생각이시오?”

하루라도 빨리 연대장과 연우를 만나게 해 주고 싶었던 그로서는 몸이 달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그가 보았던 연우는 반드시 아군으로 삼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그런 것을 떠나 도와주고 싶고, 그가 걷는 길을 옆에서 따라다니고 싶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비록 연우가 걷는 길에 8대 클랜과의 충돌이 있을 건 불에 보듯 뻔한 일이었지만. 그래서 환상연대도 자칫 위험해질 수 있었지만, 그보다 먼저 크로이츠는 연우가 걷는 길의 끝이 무엇인지가 궁금했다.

칸과 도일 등도 궁금하다는 듯이 연우를 바라봤다. 이미 올림포스와의 계단은 연결만 하면 되는 상황. 퀴네에도 받았으니 자신들의 임무도 끝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봉선 의식이 끝나면 곧바로.”

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러다 위험하지 않을까? 올림포스 신들이 다 내려오면, 포세이돈이 어떻게든 널 잡아 죽이려고 할 텐데.”

포세이돈, 헤스티아, 헤라, 데메테르. 그들이 어떻게든 연우를 잡으려 들 테지만.

연우는 오히려 코웃음을 쳤다.

“또 인자나 갖다 주려면 그러라고 해.”

이곳은 하데스의 영역. 아무리 놈들이 막장이라고 해도 제 성질을 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성질을 낸다고 해도, 다른 신들이 가만히 있을 리도 만무하고.

오히려 이참에 포세이돈의 얼굴이나 보고 갈까 하는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연우는 말을 하려다가 도중에 말꼬리를 흐렸다.

저 멀리.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직접 만나서 묻고 싶은 게 많은 존재.

[아테나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정우가 처음 탑의 튜토리얼에 참여했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아테나는 그들 형제를 줄곧 관찰해 오고 있었다. 이것저것 확인하고 싶은 게 많았다.

“페르세포네 님께서도 뵙고 가기를 희망하고 계세요. 고맙다는 인사를 직접 해 주고 싶으시다고. 하데스 님을 도와준 대가로 저희들에게도 따로 보상을 주시겠다는데요?”

여기에 도일의 설명까지 더해지자, 다른 일행들도 알겠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플레이어들 중에 보상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특히 신이 내린 보상이라면 아주 좋을 게 분명했다.

그때.

“두 시간 후부터, 봉선 의식을 시작하겠다.”

람의 목소리가 신전을 따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올림포스와의 계단을 연결하겠다는 선언.

연우 일행은 전부 마시던 술을 내려놓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티폰! 티포오온!”

쿵, 쿵, 쿵-

화려한 복도의 회랑을 따라, 발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쾅!

모두가 반드시 엄숙해야 할 신성한 장소였지만. 이아페토스는 그딴 건 자신과 전혀 관련이 없다는 듯, 복도의 가장 끝에 있는 문을 신경질적으로 열어젖혔다.

“무슨 일이지, 이아페토스?”

실내에는 넓은 대리석 바닥을 따라 커다란 마방진이 그려져 있었다. 복잡한 구조식으로 이뤄진 마방진의 끄트머리에는 촛불들이 쭉 나열되어 어두운 방을 밝히는 중이었다.

티폰은 마방진의 중심에서 조용히 눈을 떴다. 천공을 가르며 나타나던 거대한 눈동자와 다르게, 본체는 정작 일반 사람보다 작고 왜소했다. 얼굴조차도 덥수룩한 머리를 해서 생김새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과연 이 사람이 정말 한때 올림포스를 위협하고, 이제 타르타로스를 차지하다시피 한 기가스의 왕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아이페토스를 더 분노케 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이아페토스는 당장이라도 티폰을 잡아먹을 태세였다.

“네가 나서지 않아 여섯이 죽었다! 여섯이! 나의 형제들이! 하데스, 그 잡것에게 줄줄이 죽어 나가는 와중에도 너와 기가스 놈들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냐!”

이아페토스를 비롯한 티탄은 줄곧 디스 플루토와의 전쟁에서 선봉에 서야만 했다. 말이 좋아 동맹일 뿐이지, 사실 그들은 기가스에 복속되어 있었으니.

그래도 꾹 참았다.

일족들이 죽어 나가고, 권속들을 계속 잃어도. 타르타로스를 탈환하고 올림포스를 침공한다면. 잃은 신격을 복구할 수 있다면 해 볼 만한 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부왕지에서의 전투는 아니었다.

도와주기로 한 티폰과 기가스는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고, 티탄은 결국 소중한 전력의 7할가량을 잃어야만 했다.

그런데도 티폰은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고요한 눈동자로 이아페토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아페토스의 머리 한쪽에서 뭔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성을 잃고 달려들고자 했지만.

“거기까지.”

“이 이상의 접근은 불허한다.”

어느샌가 좌우에서 두 남녀가 나타나 장창을 교차시키며 이아페토스의 접근을 차단했다. 그라티온와 미마스. 티폰의 오른팔과 왼팔로 불리는 수족들이었다.

이아페토스는 비키라는 듯 신력을 일으켜 그들을 뿌리치려 했지만.

“큭!”

그라티온과 미마스가 제지하기도 전에, 갑자기 이아페토스의 그림자가 지면 위로 쭉 올라오더니 제 주인의 몸을 밧줄처럼 꽉꽉 옥죄었다.

쿵-

이아페토스는 너무 허망하게 바닥에다 무릎을 꿇고 말았다. 어떻게든 그림자 밧줄을 찢고 싶었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그림자는 더 세게 그를 구속했다.

“이아페토스, 계획을 잊지 마라. 우리가 있을 곳은 타르타로스가 아닌 올림포스다. 그것을 위해 제우스 놈들의 눈을 가리고, 제물로 신혈(神血)이 필요했다는 것은 너도 잘 알지 않은가? 그래서 너희도 가납한 것이었고.”

“하지만 죽는다고는 하지 않았어!”

“죽은 게 아니다. 크로노스에게로 귀의했을 뿐이지. 여왕이 있는 한, 죽음은 우리에게 되레 축복이라는 것을 왜 아직도 모르나? 머저리 같은 것아.”

티폰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이 곧 신전에 당도한다. 우리는 곧 그녀의 깃발 아래에서 전진할 것이다. 그리고 쟁취하는 거다. 크로노스가 못다 한 것을.”

“……!”

이아페토스는 절규를 내질렀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죽은 형제들이 돌아올 수는 없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티폰의 두 눈은 여전히 고요하기만 했다.

* * *

봉선 의식은 올림포스와 타르타로스를 잇는다는 복잡한 설명과 다르게, 아주 간단했다.

빛의 기둥이 내려앉은 제단에서, 하데스가 하늘을 보며 단 한 마디만을 내뱉었을 뿐이었다.

“열려라.”

되찾은 신력을 가득 담은 진언(眞言).

하지만 그 말은 곧 법칙이 되어 탑을 이루는 시스템을 움직였고, 천계와 하계를 가르던 층계의 제약을 아주 잠깐 해제시켰다.

쿠쿠쿵, 쿠쿵-

마치 오랫동안 잠겨 있던 거대한 문이 열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타르타로스의 붉은 하늘을 가로지르던 은하수가 좌우로 환하게 벌어졌다.

별똥별이 무리를 이루면서 대거 쏟아지는 광경은 삭막하기만 하던 타르타로스에서 유일하게 본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마치 문이 열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연우는 그 모습을 보면서 자신을 둘러싼 여러 개의 채널링 중 몇 가지가 또렷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점차 가까워지는 느낌도 같이 났다. 헤르메스와 아테나. 그리고 아레스와 같은 올림포스 소속의 신들.

그것들의 크기가 자꾸 눈덩이처럼 불어나 어느새 그의 주변을 에워싼다고 생각이 든 순간.

콰아앙!

갑자기 연우 앞으로 커다란 빛의 폭발이 일어났다. 동시에 축축한 습기가 폭풍우처럼 휘몰아쳤다.

주변에 있던 동료들이며 디스 플루토들도 균형을 잃고 와르르 쓰러져 있었다.

연우의 눈앞에는 커다란 삼지창이 뭔가에 단단히 가로막힌 채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연우를 집어삼킬 것처럼 대기가 떨릴 정도의 어마어마한 압박이 전해졌지만.

연우는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담담하게 푸른 머리칼의 사내를 바라봤다.

“네놈……!”

포세이돈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삼지창을 더 세게 밀었지만, 창은 얼마 전진하지 못했다.

연우의 좌우로는 헤르메스와 아테나가 각각 지팡이와 검으로 삼지창을 가로막고 있었다.

연우를 보호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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