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385화 (385/862)

10화. 기간토마키아 (10)

대지모신(Earth Mother).

예부터 대지모신을 가리키는 이름은 아주 다양했다.

가이아, 이슈타르, 헤바트, 티아메트, 비라주, 유미르, 여와, 마고…… 그리고 비에라 듄.

여러 신화에서 불리는 이름이 각각 달랐고, 그만큼 대지모신은 신과 악마의 사회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예부터 다양한 영향력을 끼쳐 왔다.

그것은 대지모신이 ‘천계’라는 틀이 완성되기도 전에, 아니, 우주가 제대로 구현되기도 전에 이미 존재했던 개념적인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대지모신은 아무것도 없이 무(無)에 가까웠던 세상을 창조하는 데 큰 몫을 해 왔다.

산을 짓고, 들을 깎으며, 강을 흐르게 했다. 그리고 생명을 잉태해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무대를 가득 채웠다.

어찌 보면 대지모신은 창조신으로서의 기능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대지모신은 되레 그런 자신의 창조물로부터 배척을 받게 되었으니.

언제부턴가 우주와 세계가 그녀의 손을 떠나 굴러가기 시작했다.

기존에 있던 우주는 계속 확장을 거듭하면서 여러 별을 낳았다. 여러 우주가 부딪친 자리에서는 폭발과 함께 작은 우주들이 자라나 세계를 이루고, 다시 여러 세계가 겹겹이 싸여 차원을 구성했다.

무한하게 확장된 여러 세계에서는 수많은 영웅들이 태어나고, 개중에는 신화를 토대로 신성을 획득해서 탈각과 초월을 이룬 자들도 속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신, 악마, 용종, 거인 따위로 부르면서 ‘초월자’라고 불리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보다 위로 올라가고자 했다.

대지모신은 그게 못내 불쾌했다.

개념적인 존재로서, 이렇다 할 자아를 품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는 여전히 우주와 세계가 자신의 자식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 대지모신이 보기에, 초월자들이 하려는 행위는 자신에 대한 도전이었다.

아직 어리디어린 것들이 주제도 모르고 속박과 통제를 벗어나려는 것이다.

자유? 모든 것을 포용하는 그녀의 머릿속에 그런 단어는 들어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개념적인 존재인 대지모신은 의지만 있을 뿐, 자아는 없기에 직접 움직일 수가 없는바.

그래서 대지모신은 자신을 대신해 못난 자식들에게 벌을 내려 줄 화신을 구성했고.

화신은 여러 마물과 괴귀들을 한껏 쏟아 내면서 초월자들과 기나긴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흔히 신화에서 보이는 거대 존재와의 전쟁이 바로 그것이었다.

가이아가 쏟아 낸 기간테스와 전쟁을 벌이는 〈올림포스〉, 거인 유미르를 죽여 산과 들을 만든 〈아스가르드〉, 포악한 용 티아메트를 사냥하고자 한 〈딜문〉, 처음으로 손을 잡아 여와를 봉인시키며 전면에 나서고자 한 〈천교〉와 〈절교〉, 대지모신에게서 권능을 강탈해 격을 이룬 〈르 인페르 날〉 등.

동시다발적으로 각각의 우주와 세계에서 대지모신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거대한 신화가 되어 하나의 체계(System)를 이루게 되었으니.

하나면 모를까, 대지모신은 결국 여러 항쟁을 극복하지 못하고 쫓겨나듯이 도망쳐야만 했다.

비로소 여러 우주와 차원이 자유를 얻어 낸 순간이었다.

그리고 초월자들은 전쟁을 바탕으로 다져진 조직을 가다듬으면서 세계 위에 군림했다.

비록 얼마 가지 않아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어떤 존재가 나타나 그들을 이딴 ‘천계’라는 세계에 가둬 버리긴 했다지만.

그래도 포세이돈은 당시의 영광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었다.

무한한 세계를 제 손에 넣고 마구잡이로 휘두르던 시절을.

물론, 대지모신이 완전히 박멸된 것은 아니었기에. 전쟁은 그 뒤로도 주기적으로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

포세이돈의 눈에 그런 대지모신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비쳐졌다.

비록 착각이라는 듯이 그런 느낌은 바로 사라지긴 했다지만.

그래도 등골을 타고 흐르는 오싹한 공포는 쉽게 지워지질 않았다.

그런 느낌은 칠흑이었던 ‘그’의 사도, 크로노스와 전쟁을 치를 때 이후로 처음으로 느껴 본 것이었다.

짝!

하지만 포세이돈의 그런 생각은 갑자기 들린 박수 소리에 깨졌다.

“자, 그만.”

데메테르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지르면서 나타났다.

“페르세포네, 이만하면 어떻겠니?”

“알겠어요, 어머니.”

페르세포네는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의 부탁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만하면 충분히 포세이돈에게 주제도 깨닫게 해 주었겠다 싶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포세이돈을 칭칭 감고 있던 그림자가 조용히 풀려났다.

털썩-

포세이돈은 제자리에 앉아 켁켁거리며 숨을 골랐다. 그러면서 페르세포네를 분노한 시선으로 노려봤다.

데메테르는 싸늘하게 식은 분위기를 만회하고자, 다시 한 번 더 박수를 치면서 말했다.

“수백 년 만에 남편과 아내가 만났으니 나누고 싶은 이야기도 많을 텐데. 부부의 시간이라도 갖게 해 주도록 하죠. 내일부터는 기나긴, 새로운 기간토마키아가 벌어질 테니.”

데메테르는 침묵을 지키고 있는 하데스에게 눈빛을 보내면서 자리를 파했다.

하지만 하데스의 표정은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 * *

그렇게 혼란스럽던 회의가 끝난 뒤.

회의장에는 하데스와 페르세포네만이 남아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갖가지 화려한 음료나 음식들이 휑하게만 보였다.

뚜벅, 뚜벅, 페르세포네는 뒷짐을 지고 간만에 찾은 명왕의 신전을 일일이 둘러보면서 화사하게 웃었다.

“이곳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곳이 없군요. 역시나 당신다워요.”

“…….”

하지만 하데스는 여전히 제자리에 앉아 묵묵히 그녀를 지켜보고만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페르세포네는 조금 뚱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오랜만에 아내를 만났는데, 하실 말씀이 그리도 없으신가요?”

순간, 하데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지난 수백 년간 하루에도 몇 번씩이고 듣고 싶었던 목소리. 아주 오래전, 삭막하기만 하던 그에게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르쳐 준 목소리이기도 했다.

“그동안…… 잘 지내었소?”

하데스의 목소리는 잘게 떨렸다.

“잘 지내었을 것 같나요? 지아비가 오랫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는데, 마음을 편하게 놓고 있을 아내가 몇이나 될까요?”

하데스는 순간 정말 그게 사실이냐며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러시었소? 미안하오.”

충동을 억지로 눌렀다.

눈가가 슬프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페르세포네는 예나 지금이나 별 말 없이 과묵하기만 한 남편을 보면서 조용히 피식 웃었다.

그리고.

담담하게 하데스를 바라보았다. 어느샌가 얼굴에는 봄의 따스한 햇살처럼 훈훈하던 미소는 온데 간데없이 사라지고, 겨울의 싸늘함만이 감돌았다.

“그 날. 제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보셨던 건가요?”

“…….”

하데스는 입을 꾹 다물면서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머릿속은 수백 년 전에 있었던 일을 재생하고 있었다. 그가 명부를 떠나던 날. 타르타로스로 완전히 넘어왔던 날의 일이었다.

-모든 것은…… 위대한 어머니의 뜻대로.

그건 정말 우연이었다.

타르타로스에 변고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 부랴부랴 내려갔다가, 성역을 두고 공방전을 벌이던 중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 명부로 돌아왔을 때.

페르세포네는 부부의 침실에서 홀로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아 어디론가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혹시 자신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건가 싶어, 드디어 아내가 자신에게 마음을 여는 건가 싶어 잠시간 기뻐했었지만.

하데스는 그게 곧 자신에 대한 기원이 아닌, 다른 어떤 존재를 향한 신앙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신이 보내는 신앙이라니. 그리고 이에 화답하듯이 돌아온 신력을 느끼고, 깨달을 수 있었다.

페르세포네가 누구를 모시기 시작했는지를.

그리고.

티탄과 기가스가 일으킨 반란이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도.

“역시 보셨었나 보네요. 혹시나 했었지만…… 숨긴다고 숨겼었는데 어떻게 그런 실수를 한 건지.”

저벅, 저벅. 페르세포네가 천천히 이곳으로 다가왔다. 물통에 잉크가 방울방울 떨어진 것처럼, 그림자가 확 번지면서 실내 바닥을 까맣게 물들였다.

하데스는 그걸 보면서 생각했다. 저 색은 꼭 자신을 보는 것 같다고.

그날, 페르세포네의 정체를 깨닫고 난 뒤 숱하게 고민했다.

이대로 그녀를 뒀다가는 정말 타르타로스는 물론, 에레보스를 포함한 모든 명계가 위험해질 수 있었다.

티탄과 기가스를 타르타로스에 가둔 이유가 가이아에게서 강제로 떼어 놓기 위해서였는데.

여기에 페르세포네가 가이아의 사도가 되어 끊어진 줄을 잇는 중간 고리가 되어 버렸다면, 그보다 위험한 것도 없었으니까.

자칫 명계를 넘어 천계로, 올림포스를 비롯한 98층 전체가 다시 가이아의 위협에 직면할 수 있었다.

과거 올림포스를 비롯한 여러 초월자들이 막고자 했던 사태가 도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당장 페르세포네를 죽여야만 했다.

아직 가이아의 힘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으니, 마음먹으면 충분히 해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데스는 차마 그러질 못했다. 검집에 손을 가져갔지만, 도저히 뽑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손으로 아내를 죽인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가뜩이나 자신의 짝사랑으로, 마음에도 없던 결혼 생활을 해야만 했던 아내였다. 그런 그녀에게 다시 상처를 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페르세포네가 일어날 새도 없이, 티탄과 기가스의 반란을 사전에 진압해 버리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타르타로스로의 출입을 차단한다면, 페르세포네도 어떻게 손을 쓸 수 없었다.

결국 결정을 내린 하데스는 타르타로스로 발길을 돌렸고, 이렇게 수백 년이 훌쩍 지나고 말았다.

그동안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반란을 진압하기는커녕 성역은 자꾸만 빼앗기기만 했고, 가이아의 또 다른 사도인 티폰은 크로노스의 힘까지 섭취하면서 결국 하데스의 영향력을 넘어서기까지 했다.

하데스에게서 서서히 감정이 사라지고, 냉소와 자조만이 남은 것도 바로 그때부터였다.

이렇게 시간을 끈다고 한들,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결국 올림포스와의 연결도 다시 이어진 이때.

결국 페르세포네도 내려왔다.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던 순간이, 계속 미뤄 두기만 했던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다 알고 계시었으면서. 어째서 여태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하지 않았던 건가요?”

페르세포네는 하데스에게 다가가면서 질문을 던졌다. 그건 지난 시간 동안 도저히 풀 수가 없었던 수수께끼였다.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면 남편이 자신의 비밀을 알아낸 건 확실한데. 어째서 그 사실을 올림포스에 말하지 않았냐는 것이다. 그랬다면 애당초 티탄과 기가스의 반란도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그런데.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이오.”

담담한 고백에 페르세포네의 걸음도 잠시 멈칫거렸다.

하데스의 눈빛은 조용한 목소리와 다르게 열렬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저 눈.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다. 처음 자신과 마주쳤을 때 했던 눈빛. 당시에 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때 자신의 운명이 달라질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는 거절할 새도 없이, 납치를 당하듯 명계로 끌려와 강제 결혼을 해야만 했다.

주변에 숱하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전부 거부를 당했다. 어느 누구도 명계의 왕과 척을 지고 싶지 않아 했고, 신으로 태어났다면 원래 연애결혼 따윈 못하는 것이라며 오히려 잘 되었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페르세포네는 그것이 못내 한이었다. 꽃다운 나이에 꽃처럼 피어나지도 못하고, 어머니의 곁을 떠나 낯선 곳에 버려져야만 했던 자신.

남편은 그런 자신을 달래려, 마음을 돌리려 어떻게든 이것저것을 하고자 했지만.

한번 어긋나 버린 마음은 결코 돌아올 길이 없었고, 결국 여기까지 다다르고 말았다.

지금 그녀에게는 힘이 있었다.

타르타로스에 있었던 수많은 희생과 티탄들의 죽음은 제물이 되어, 페르세포네에게 더 많은 대지 모신의 힘을 가져다주었으니.

화아악!

그림자가 높게 일어나면서 하데스를 꽁꽁 묶었다.

하데스는 죽음이 턱밑까지 다가왔는데도 불구하고, 저항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페르세포네에게 맡겨 버렸다. 오래전에 그가 그녀의 운명을 강제로 취했듯이, 이번에는 그녀가 그럴 차례였다.

“못난 사람 같으니.”

페르세포네는 다시 걸음을 옮겨 자리로 다가가 조용히 하데스의 귓가에 입을 갖다 대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는데.”

푹-

어느샌가 페르세포네의 손에서 튀어나온 단검이 하데스의 심장을 찔렀다.

붉은 피가 그림자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하데스를 흡수함과 동시에 명왕의 신전을 덮어 가던 그림자가 일제히 붉게 변하면서.

『드디어…… 길이 열렸구나…….』

『아아…… 위대한 어머니시여…… 당신의 딸이…… 여왕이 길을 열었나이다…… 당신을…… 곧 뵈러 가겠습니다…….』

수없이 많은 눈들이 열렸다. 그리고 그 눈의 주인들인 티탄과 기가스가 일제히 그림자를 찢으면서 밖으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기간토마키아의 시작이었다.

* * *

그리고 그 시각.

화아아!

“……뭐지?”

연우는 갑자기 목에 감고 있던 칠흑왕의 격노가 부르르 떨리면서 검은빛을 토해 내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띠링-

[조건이 성립되어 숨겨진 특전이 제공됩니다.]

[특전: 명계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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