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기간토마키아 (11)
[특전을 계승 중입니다.]
[불발되었습니다.]
[특전을 계승 중입니다.]
[불발되었습니다.]
……
[계승 작업이 이뤄지기에 아직 격이 맞질 않아 잠시 중단됩니다.]
[재검토를 시작합니다.]
[당신의 격에 대한 논의가 아직 활발하게 진행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중단되었던 특전은 그 후에 진행 여부가 결정됩니다.]
연우는 아주 잠깐이지만 체내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가 부쩍 고양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태껏 영혼을 억누르고 있던 감옥에서 해방되는 느낌. 진정한 자유를 획득한 듯한 느낌이었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감각이었기에 연우도 부쩍 놀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감각은 곧 ‘불발되었다’는 메시지와 함께 사라졌다.
연우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흔히 탈각(脫殼)이라 부르는, 초월성을 이루는 여러 단계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야 신살만 이뤘을 뿐, 아직 깨달음은 얻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다지만.
그래도 매번 비슷한 일이 있을 때마다 뒤따라오는 메시지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격에 대한 논의?
아스트라이오스를 죽였을 때부터 떴던 메시지는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말만 거듭 되풀이할 뿐이었다.
연우로서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는 단어였다.
만약 저 논의가 긍정적으로 이뤄진다면, 신격이라도 얻을 수 있는 걸까?
하지만 그가 알기로, 탈각은 스스로 이뤄야만 하는 것이었다. 누가 줄 수 있거나 하는 것이 절대 아니었다.
‘아니. 있긴 있지. 신위 계승이라든가.’
하지만 그런 식으로 물려준다고 해서 마냥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스스로 이루지 못한 것은 그만큼 위태롭기 마련이니.
물론.
‘준다는 걸 굳이 거절할 생각은 없지만.’
여하튼 신과 악마들의 논의라는 것은 여전히 연우에게 수수께끼였다.
그리고 여기에 새로운 수수께끼가 더해졌다.
연우는 듣도 보도 못한 특전.
명계의 왕이라고?
그건 분명히 하데스를 가리키는 별칭일 텐데.
왜 그게 자신에게 계승되니 마니 하는 것일까.
퀴네에가 변한 칠흑왕의 격노가 빛나는 걸 봐서는 분명히 하데스가 무언가를 하려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하데스와 헤어지기 직전, 꼭 마지막 인사를 보내는 것처럼 느껴지기는 했었는데. 그것과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탑에 대해 꽤나 해박한 정우의 의견을 묻고 싶었지만, 녀석은 회중시계 속에서 곤히 자고 있는 중이었다. 영체가 아직 많이 위태로운 탓에 자주 이렇게 휴식을 취해 줘야만 했다.
“카인 형? 형!”
연우는 잠깐 고심에 잠겼다가 자신을 거칠게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퍼뜩 차렸다.
도일을 비롯한 여러 일행들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아니다, 조금 정리할 게 있어서. 그래서. 페르세포네가 뭔가 좀 이상했다고?”
“네.”
도일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가 아테나를 만나고 돌아왔을 때. 일행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무거웠다. 페르세포네를 만나고 온 도일이 던진 한마디 때문이었다.
-곧 같이 떠날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데. 그게 무슨 말일까요?
도일은 페르세포네의 사도였고, 그녀가 타르타로스에 나타나는 것에 맞춰 영접을 하러 갔다. 명색이 사도이면서 처음으로 신과 직접 대면하던 순간이었다.
다만, 사도이면서도 페르세포네에 대한 신앙심은 그리 깊지 않았던 도일이었기에. 그는 페르세포네를 만나면서 느낀 이상한 낌새를 놓치지 않았다.
“남편을 도와준 사람들을 만나면 수고를 했다거나, 고생이 많았다거나 그렇게 치하를 하는 게 보통이잖아요? 그런데 꼭……. 아니, 그보다 페르세포네 님과 하데스 님은 부부 사이지 않아요?”
“어땠기에?”
“수백 년 만에, 그것도 애타게 찾던 남편을 만나러 가는 거면 즐거워해야 하는 게 맞는데…… 꼭 뭔가를 다짐하는 것처럼 보이셨어요.”
“다짐?”
“네. 뭐랄까, 이 순간만 기다렸다는 것처럼. 마치 전쟁에 나서는 장수 같다고 해야 하나. 뭐, 하여간 좀 비장했어요. 반가움이나 그런 것과는 거리가 있었어요.”
눈치가 빠른 도일이니 수상한 낌새도 금방 눈치를 챈 것일 테지.
연우도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의 부부 관계가 다른 부부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기에 뭐라고 섣불리 단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다른 일행들도 고심에 잠기는데, 갑자기 칸이 피식 웃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에이. 난 뭐 되게 중요한 일인가 싶었네. 야, 아무리 그래도 부부 사이는 칼로 물 베기랬다. 남녀 관계에 타인이 끼는 거 아니야. 그리고 넌 네 남편이, 아니지, 아내가 수백 년 동안 연락 한번 없이 밖으로 나돌아 다녔어. 그러다 겨우 찾았어. 그럼 즐거울 것 같냐? 아예 쥐 잡듯이 잡겠지.”
“그, 그런가?”
“아니면 이혼이라도 하겠지, 뭐.”
신들도 이혼을 하던가? 일행들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제우스는 아내 두고 바람도 여러 번 폈었다면서? 그런데 이혼이라고 없겠니.”
브라함이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그놈이 아랫도리가 좀 많이 가볍긴 했지.”
“브라함도 그렇다고 하시잖아. 하여간 쓸데없는 거 그만 얘기하고 돌아가자. 이젠 우리가 낄 일도 아니잖아.”
일행들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하데스와 페르세포네가 어떤 관계인들 무슨 상관이랴. 그들은 이제 필요한 것을 모두 얻었고, 되돌아가기만 하면 되는데.
그렇게 떠날 준비를 하려는데.
그때였다.
우우웅-
갑자기 일행들이 있던 대지 위로 희뿌연 무언가가 쓸려 나갔다가 사라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그걸 목격한 사람은 몇 되질 않았다.
일행들은 이제 지긋지긋한 타르타로스를 떠난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디스 플루토는 올림포스의 방문에 여전히 축제를 벌이는 중이었다.
‘신력?’
하지만 연우는 그것이 성역을 따라 퍼져 있던 하데스의 신력이란 것을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성역을 따라…… 신력이 흩어지고 있었다.
연우가 놀란 눈으로 브라함을 돌아봤다. 그 역시 잔뜩 굳은 표정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 둘 다 일행들에게 경고를 내뱉으려는데.
화아아!
갑자기 지면을 따라 검은 그늘이 잔뜩 번지더니, 그 위로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눈들이 일제히 열렸다.
그리고 도일의 눈동자가 뒤집혔다.
“카아악!”
도일은 다짜고짜 바로 옆에 있던 칸에게로 손날을 휘둘렀다. 마치 천적을 만난 맹수처럼. 손톱에서 번져 나온 검은 칼날에는 천마와 페르세포네의 신력이 마구 뒤섞여 있어 위협적이었다.
설마 도일에게 공격을 당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칸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검은 칼날이 목을 긋고 지나가려는 순간, 뒤에 있던 갈리어드가 다급하게 나서서 도일을 지면에다 그대로 처박았다.
쾅!
동시에 빅토리아가 급하게 주문을 외웠다. 속박 주문에 따라, 보이지 않는 사슬이 도일을 칭칭 감았다.
“크르르! 크르!”
도일은 마치 억지로 붙잡힌 짐승처럼 이걸 놓으라며 이리저리 몸을 뒤틀었다. 두 눈이 마기로 일렁거렸다. 얼굴과 팔뚝을 따라 혈관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라 있었다.
칸은 잔뜩 굳은 얼굴로 다가와 도일의 목덜미를 손날로 쳐 기절시켰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갑작스러운 이상 현상. 칸은 지면을 따라 이쪽을 보며 깜빡거리는 눈들을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보았다. 도일의 발작도 이것과 관련이 있을 텐데. 하지만 그의 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수천 개의 눈들이 지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마치 지면을 덮던 그림자 이불을 찢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둘씩 나타난 것들은 하나같이 흉흉한 기세를 자랑하고 있었다.
티탄과 기가스의 권속들. 전쟁터에서나 보던 것들이 일제히 포효를 질렀다.
키키키킥!
크아아!
“무, 뭐야, 이거?”
“이것들이 왜 이곳에……!”
축제를 즐기던 디스 플루토는 갑작스러운 날벼락에 하나같이 경악에 찬 얼굴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권속들이 아니었다. 녀석들은 주인이 내린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서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이 받은 명령은 하나였다. 살아 있는 건 모두 죽일 것. 카아악!
“기습이다! 티탄 놈들이 기습을 해 왔어!”
“전원 대형을 갖춰라!”
“무기! 무기를 어서 가져와!”
디스 플루토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부분 축제를 즐기느라 무기를 숙소에 두고 온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성역에 있어서 방심한 까닭에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다.
“대체……!”
빠르게 무기를 휘두르며 권속들을 처치하던 연우 일행들의 얼굴에도 경악이 스쳤다.
이곳은 하데스의 성역. 특히 그 중에서도 중심지였던 명왕의 신전이었다. 그런 곳에 이런 기습이 가해질 거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성역을 둘러싸던 신력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으니. 거기다 하늘에서는 짙은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면서 거신들을 잇달아 토해 냈다.
크어어어-
『찢어 죽일…… 하데스의 심장부로 드디어 왔다……! 올림포스가…… 저곳에 있다…… 형제들이여…… 지난날의 수모를…… 되갚으라……!』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신들이 일제히 기지개를 켜면서 신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선두에는 부왕지에서도 봤던 12주신의 티탄들뿐만 아니라, 그동안 마주칠 수 없었던 기가스들까지 다양했다.
기가스는 거신을 이룬 티탄과는 외양이 많이 달랐다. 5미터 남짓한 크기에 사자 머리나 뱀의 하반신을 하고 있는 등, 괴물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온갖 마물과 괴귀들을 잉태한 가이아의 자식들다운 흉포한 모습. 문제는 크로노스의 시정까지 체득한 것인지 하나하나의 기세가 티탄들에 못지않다는 점이었다. 아니, 오히려 몇몇 개체는 티탄들을 능가하기도 했다.
올림포스의 신들도 뒤늦게 상황을 눈치채고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놈들이 어떻게 성역까지 들어올 수 있었는지는 당장 중요하지 않았다. 그건 우선 급한 불부터 끄고 나서 알아봐도 충분했다.
“이것들이, 감히!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포세이돈은 삼지창을 높게 들면서 권능을 한껏 풀었다. 쿠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폭풍우가 휘몰아치면서 커다란 덩치를 하고 있는 티탄들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아폴론은 활을 높이 들며 새하얀 빛으로 빛나는 화살을 잇달아 쏟아 냈고, 아르테미스는 쌍검을 뽑으면서 기가스를 상대했다.
아테나, 아레스, 헤르메스, 디오니소스 등을 비롯한 다른 신들도 일제히 신격을 개방하면서 전투를 개시했다.
기간토마키아!
과거 올림포스의 패권을 두고 다투다 쓰러졌던 티탄과 기가스가 일제히 다시 일어나면서 새로운 전쟁을 개시했으니.
명왕의 신전은 순식간에 신들의 격전지로 변모하고 말았다.
“빅토리아, 헤노바와 도일을 데리고 우선 이곳을 벗어나 주세요. 칸과 갈리어드, 크로이츠는 람을 찾아서 디스 플루토의 전열을 수습해 주십시오. 브라함은 저와 같이 신전으로 가시죠.”
연우는 갑작스러운 소란에도 최대한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이렇게 된 이상, 밖으로 통하는 통로도 닫힌 게 분명하다. 지금은 전열을 수습하고 혼란부터 끝내는 게 맞았다.
게다가.
‘놈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 익숙해.’
기가스에게서 풍겨 나는 기운이 결코 낯설지 않았다. 크로노스의 시정만 묻어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원인부터 찾아야 했다.
일행들은 별다른 토를 달지 않고 연우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팟-
동시에 연우는 브라함과 함께 명왕의 신전으로 빠르게 내달렸다.
가장 큰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장소. 자칫 격이 모자란 필멸자가 발을 들였다간 크게 다칠 수도 있는 곳이었지만, 연우는 전혀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브라함도 마찬가지였다.
『형. 이건.』
“어. 맞아.”
그리고 정우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어느새 회중시계 밖으로 나와서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감염된 대지모신’이 당신을 응시합니다.]
정우는 자신의 망막에만 떠오르는 메시지를 보면서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이테르를 죽였을 때부터, 이 메시지는 줄곧 자신의 곁에서 떠날 생각을 않고 있었다. 하지만 형에게는 여태 여기에 대해서 말을 하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렇기에. 연우는 그저 기운의 잔재들만 읽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에라 듄. 그년의 기운이다.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
정확하게는 대지모신의 신력이었지만. 이미 대지모신은 비에라 듄에게 감염되었으니 똑같았다. 문제는 녀석이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하데스의 성역을 가득 뒤덮은 그림자에서는 대지모신의 신력이 너무 짙게 배어 나오고 있었다. 대체 무슨 수를 쓴 걸까. 도저히 알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대지모신-비에라 듄이 누구와 손을 잡은 건지.
‘페르세포네.’
여러모로 이상한 낌새가 많았던 그녀 외에는 이런 짓을 저지를 자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이기도 했다.
알려진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의 신화 속에서. 하데스와 달리, 페르세포네는 언제나 상처만 입었던 존재였으니까. 그녀가 독한 마음을 먹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해도 전혀 무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하데스는 일이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걸까?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최후까지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퀴네에를 받으면서 들었던 생각이 잘못된 게 아니었던 셈이었다.
-인사는 내가 해야겠지. 덕분에 우리 군의 사기도 많이 올랐으니. 그대가 없었으면 타르타로스는 진즉에 무너졌을 것 아닌가.
하데스가 언뜻 비쳤던 미소가 연우의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냉소적으로 보이면서도 수하들을 한껏 아끼던 모습. 그는 절대 이렇게 갈 사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비에라 듄이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는 일이었다.
쐐애애액-
연우는 이를 악물면서 바람길을 한껏 밟았다.
부디 하데스가 무사하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