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기간토마키아 (12)
비에라 듄은 어떻게 대지모신을 집어삼킨 걸까?
대지모신은 자아가 없는 개념적인 존재다. 거대한 데이터가 뭉친 집합체, 클라우드 같은 개념이다. 그 속에서 비에라 듄이 자신의 정신을 바이러스처럼 침투시켜 무한 증식을 했다면 완전한 감염 상태를 이뤄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중간 매개체가 루시엘의 영혼석이라면 이해는 더 쉽다.
루시엘은 천계의 많은 신과 악마들이 공동 전선을 펼치면서까지 잡아내고자 했던 존재. 어떤 곳에서는 천마와 비교될 정도라는 말도 있을 정도였으니.
그런 존재의 조각이라면. 이미 탈각을 눈앞에 두고 있던 비에라 듄과 만났을 때 화려하게 꽃을 피울 만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상해.’
아무리 루시엘의 영혼석이 대단한 가치를 지닌 보물이라 할지라도.
대지모신은 그에 못지않은, 아니, 격만 따진다면 그 위에 있는 존재다.
아무리 자아가 없다고 해도, 욕망은 있었다. 설마 자신이 위험하다는 것도 몰랐을까. 어떤 방어 기제는 있었을 터였다.
그렇다면 비에라 듄이 대지모신과 합일(合一)을 갖출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대지모신도 그것을 바랐을 경우.’
물론, 이런 건 어디까지나 연우의 추측일 뿐. 비에라 듄이 정말 자신의 어머니를 삼킨 것일 수도 있고, 대지모신이 어떤 노림수를 위해 그녀를 받아들인 걸 수도 있다.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는 당사자들만이 알겠지.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연우는 단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적으로 만났다는 것.
그의 두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 * *
신전으로 달리는 내내.
연우는 언제부턴가 자신에게만 길이 계속 열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티탄과 기가스가 침공을 하면서 올림포스의 여러 신들과 전쟁을 벌이는 지금. 성역은 온통 돌풍과 벼락, 불길이 난무하면서 도저히 플레이어가 지나갈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다.
자칫 잘못 휩쓸렸다가는 흔적도 남기지 못할 만큼 거친 격전. 이대로 세상이 무너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연우는 길을 열기 위해 용체 각성부터 하늘 날개까지, 차례대로 힘을 꺼낼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데 길을 지나다 보니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이상하게 계속 격전이 그가 있는 자리만 쏙 피해 일어나고, 기가스의 권속들도 그의 주변으로 모이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명왕의 신전 쪽으로 향하는 길목에 모이질 않았다.
그 순간, 연우는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것은 페르세포네가 그에게 보내는 초대장이라는 것을.
그가 이리로 오는 것을 알고, 편하게 올 수 있도록 권속들에게 길을 열라고 명령을 한 것이다.
그래서 연우는 이를 더 악물었다.
자신에 무언가 바라는 게 있다는 뜻일 테니까. 그리고 자신의 불안이 현실이 됐을 가능성이 그만큼 더 커진 것일 테니까.
그리고 도착했을 때.
“이제야 오셨나요?”
페르세포네는 어둡고 조용한 신전 속에서, 하데스가 앉았을 왕좌에 앉아 연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혹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매력 적이면서도 모든 것을 압도할 것 같은 짙은 패기가 물씬 풍겼다.
몇 달 전,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산뜻한 봄의 정원에서 주던 인상과는 전혀 달랐다.
어둡고, 우울하고, 축축한. 그런 겨울의 모습.
그리고 그녀를 따라 감도는 짙은 기운도 낯설지 않았다.
비에라 듄.
어디선가 낯익은 시선도 느껴지고 있었다.
[‘감염된 대지모신’이 이쪽을 응시합니다.]
처음에는 너무 미약해서 느끼기 힘들었지만, 언제부턴가 짙어지던 외부의 시선. 연우는 그 시선이 자신이 아닌, 회중시계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페르세포네는 그렇게 거대한 존재를 등에 업은 채, 한쪽 다리를 꼬았다.
그러자 왕좌 뒤편으로 천장에 줄줄이 매달려 있던 커다란 고치들이 크게 출렁거렸다. 그림자를 실타래 삼아 무언가를 품고 있는 고치는 대략 보이는 것만 해도 여섯. 연우는 그중 한 곳에서 짙은 신력을 감지할 수 있었다.
“하데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확인하고 싶었다.
페르세포네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고개를 위쪽으로 들었다. 그곳에는 가장 큰 고치가 매달려 흔들리고 있었다.
“그이라면 이렇게 잘 지내고 있죠. 손님이 이렇게 왔으니 깨워 드리고 싶지만, 너무 깊이 잠드셔서요. 안타깝지만 인사는 다음에 나누셔야 할 것 같아요.”
싸늘함이 감도는 냉소. 어딘지 모르게 하데스가 자주 짓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 났다.
페르세포네는 손끝으로 고치를 살짝 매만지다가, 다시 연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보다 저는 당신과 다른, 좀 더 건설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이렇게 초청을 한 것이랍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시겠단 겁니까?”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우선 자리에 앉으시는 건 어떤가요?”
페르세포네가 가볍게 박수를 치자, 연우 앞으로 갑자기 호롱불이 한두 개씩 켜지더니 어느새 커다란 식탁이 나타났다. 먹음직스러운 만찬이 가득한 식탁이었다.
페르세포네는 왕좌에서 천천히 내려와 연우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어서 앉아서 들라며 손짓을 했지만.
“…….”
연우는 가만히 그것을 보다가, 자리에 앉지 않고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고기가 맛있는데. 혼자서만 이렇게 즐기니 아쉽네요.”
페르세포네는 가볍게 스테이크를 썰면서 싱긋 웃었다. 그리고 와인 잔을 들어 가볍게 입술을 축이면서 말을 이었다.
“제가 드릴 말씀은 하나에요. 전향하셨으면 해요.”
연우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회중시계도 조용해졌다.
전향. 자신에게로 오란 뜻이었다.
“밑으로 들어오라는 겁니까?”
“아니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어느 누구도 밑에 두지 않아요. 누구를 이끈다는 것, 무리를 이룬다는 것, 책임을 진다는 것, 저와는 거리가 멀어서요. 저는 손을 잡자고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랍니다.”
손을 잡자. 플레이어들을 벌레처럼 여기는 초월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저는 ###, 당신을 아주 높게 평가하고 있어요. 비록 플레이어인 당신이지만, 당신이 이룬 업적들은 하나같이 놀랄 만한 것들뿐이더군요. 타계의 물건인 현자의 돌부터 시작해서…… 칠흑의 힘까지. 어째서 천계가 당신을 두고 그토록 들썩이는지 알 것 같아요. 아마 천계를 시끄럽게 만든 사람은…….”
페르세포네는 냅킨으로 입술에 묻은 스테이크 소스를 훔치면서 싱긋 웃었다.
“바토리나 파우스트…… 최근에는 나유가 전부였군요.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에요.”
“…….”
“그리고 전 남편과 같은 의견을 갖고 있답니다. 언젠가 신격을 이룬 플레이어가 있다면. 그건 아마도 ###, 당신일 것이라고 말이죠.”
페르세포네는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러니 미래 가치를 높게 사서, 함께 손을 잡는다고 해도 절대 나쁘지 않으리라 봐요. 언젠가 칠흑도 완전히 계승할 테니까요. 어떤가요? 함께 하지 않으시겠어요?”
“…….”
페르세포네는 연우에게로 손길을 뻗었다. 마치 자신의 손을 맞잡으라는 듯이.
연우는 한참 동안 말없이 그녀의 손을 보다가 물었다.
“그건 당신의 뜻입니까, 아니면 그 뒤에 있는 자의 뜻입니까?”
[‘감염된 대지모신’이 이쪽을 응시합니다.]
“그게 중요한가요?”
“중요합니다.”
“전 그분의 화신이자 영육. 그분의 뜻이 곧 나의 뜻이고, 나의 뜻이 곧 그분의 뜻이에요.”
“그렇습니까? 도일이 말한 선물이란 게, 이런 거였나 봅니다.”
“맞아요. 어떤가요? 당신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닐 텐데.”
페르세포네는 거절할 수 있겠냐는 듯이 화사하게 웃었다.
“대지모신의 가호, 곧 올림포스를 함락할 기가스와의 동맹, 그리고 곧 터득할 신격에 대한 보장. 이것만 해도, 앞으로 당신이 성장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될 거예요. 그리고 초월을 이루고 나서도 계속 승승장구할 수 있을 테죠. 천계를 발아래에 둘 수 있는 겁니다.”
연우는 페르세포네의 말을 가만히 듣다가, 시선을 위로 들었다. 페르세포네가 아닌 그 뒤에 있을 존재를 노려보았다.
“하계에는 더 이상 볼 일이 없다면서, 진짜 신이라도 된 것처럼 굴더니. 결국 숨어서 꾸미던 짓이 고작 이따위였던 거냐, 비에라?”
페르세포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연우가 말한 비에라 듄이 누군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 그만하세요.”
“난 뭐 대단한 일을 꾸미나 싶었더니. 결국 똑같군.”
연우는 한쪽 입술 끝을 비틀었다.
페르세포네가 손을 잡자고 이야기하기에 뭔가 그럴싸한 게 있나 싶었었는데.
결국 천계에 올라가서도 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멋대로 뛰어 다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한낱 꼭두각시 인형이 되어 이런 말을 하는 페르세포네도 우습기만 했다.
비에라 듄과 정우 사이의 일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으면서 이딴 제안을 해?
이건 숫제 그들 형제를 우습게 봤다는 뜻밖에는 되지 않았다.
손을 잡자느니, 너를 높게 평가한다느니, 미래 가치를 사겠다느니 하는 소리를 아무리 떠들어 대 봐야 결국 개소리에 불과했다.
놈이 필요한 것은 아마도 자신이 갖고 있는 칠흑왕의 형틀이겠지.
그리고 하데스가 넘긴 명계의 왕좌도 필요했던 게 틀림없었다.
[‘감염된 대지모신’이 이쪽을 응시합니다.]
“그래. 계속 그따위로 살아라. 그리고 더 높이 올라가라. 그래야.”
연우의 냉소가 짙어졌다.
“널 나중에 이 땅으로 끄집어 내렸을 때, 속 시원하지 않겠나?”
“###……!”
페르세포네가 식탁을 치면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연우가 빨랐다.
“영역 선포.”
화아아연우는 페르세포네가 발끈하며 일어서기 직전에 용체 각성을 시도했다.
콰드득-
드래고닉 프레셔가 한껏 사방으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신과 마의 인자도 다량으로 보유한 덕분에 프레셔는 돌풍을 일으키면서 식탁을 부수고, 신전을 뒤흔들었다. 만찬과 음료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허공에서 춤을 췄다.
피부가 뒤집히면서 나타난 용의 비늘은 어두웠다. 마치 공허를 품은 것처럼. 이전보다 훨씬 단단하고 날카롭기까지 했다.
4차 용체 각성이었다.
[4단계 권능이 개방됩니다.]
[권능: 마나 제어]
[마나 제어(Mana Control)]
설명: 고룡 칼라투스는 계약자가 용체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도록 8단계에 걸쳐 권능을 세분화시켰다. 그중 네 번째 단계.
권역(權域) 내에서 용은 언제나 위대하고 지고한 존재로 남아 있다. 그 정도는 아주 막강해서, 마나 스트림(Mana Stream)을 끌어와 법칙을 구현할 정도였다.
* 스트림 컨버터
세상의 이면을 관통하며 흐르는 마나 스트림은 세상 모든 마나의 원천이자 보고로서 위대한 존재들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비역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유일하게 이곳에 접촉할 수 있는 존재가 있었으니, 유일하게 마나의 축복을 받은 용종이다.
3단계에서 이룬 원소 접촉을 바탕으로 마나 스트림에 대한 깊숙한 접근이 가능해지며, 친밀도에 따라 일부를 끌어올 수 있는 능력이 더해진다.
친밀도가 높아질수록 제어할 수 있는 마나의 양이 상승하며, 때에 따라서는 법칙을 일부 구현해서 ‘창조’의 영역에 다가가는 것도 가능해진다.
단, 마나 스트림을 다스릴 시에는 상당한 반발력이 뒤따른다.
* 마나 서플라이
마나에 대한…….
[용의 영역, ‘비나’가 강화되었습니다. 일정 영역에 걸쳐 권능과 속성 마력에 대한 지배를 행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정 시간에 걸쳐 모든 능력치가 일정 수치만큼 증가합니다.]
……
[용종으로 다가가는 단계 중 절반의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누구도 쉽게 이루지 못할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추가 공적치가 제공됩니다.]
[공적치를 10,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추가 공적치를 20,000만큼 획득했습니다.]
……
[‘권역화’가 성공적으로 이뤄졌습니다.]
연우는 마신룡체를 이루고 난 뒤에도 계속 실전을 거듭하며 꾸준히 실력을 키워 나갔고, 드디어 3차 용체가 가진 임계점에 다다르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4차 각성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수월했다.
이미 보유하고 있는 인자의 양이 워낙에 방대한 데다가, 이미 이전에 제천류를 깨달으면서 격의 성장도 이뤄 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4차 용체 각성을 이뤘을 때의 느낌은. ‘아찔하다’였다.
권역 내에 있는 모든 게 자신의 수족처럼 다가왔다. 원체 감각이 예민한 편이기도 했지만, 이건 그 정도를 넘어서 물체가 가진 이면의 영역까지 감지하고, 제어하는 게 가능했다.
마나 스트림.
세상을 구현하는 원재료이자, 진리를 모아 두었다는 이데아(Idea)의 단면과 접촉해 냈기 때문이었다.
“감히 내게 칼을 들이대?”
페르세포네는 인상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한낱 피조물 따위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고 모시는 신을 모욕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감히 자신에게 칼을 들이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내뿜은 살기가 광풍이 되었다. 드래고닉 프레셔와 뒤섞이면서 신전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하지만 그런다고 한들, 아직 격을 이루지 못한 연우의 드래고닉 프레셔가 페르세포네의 기운을 감당할 수 있을 리 만무했고.
바닥을 가득 물들이던 그림자에서 가시 같은 것들이 삐죽삐죽 치솟으면서 연우의 권역을 침범, 그대로 중심에 있는 연우를 찌를 것처럼 위협적으로 굴었다.
하지만.
“누가 너한테 칼을 댄다는 거지? 착각도 지나치는군.”
연우는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냉소를 던졌다.
동시에 연우는 아공간을 열면서 비그리드를 뽑아 용신안이 가리키고 있던 결을 그대로 그었다.
[‘비그리드-???’가 숨겨진 진명, ‘듀렌달’을 개방합니다.]
[전승: 일도양단]
듀렌달은 수많은 성검 중에서도 무척이나 예리해서, 적의 투구를 내리쳤을 때 기수와 말까지 토막 냈을 정도였다는 전승도 지니고 있었다.
덕분에 비그리드에서 발출된 예기는 수없이 돋은 그림자 가시를 지나, 페르세포네의 얼굴 옆쪽으로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페르세포네는 뒤늦게 연우가 노리려던 게 자신이 아니라 뒤에 있던 고치라는 것을 깨닫고, 아차 싶은 얼굴로 뒤돌아보았다.
투둑, 툭-
찌걱!
고치를 이루고 있던 그림자가 갈라지면서. 그 안에 갇혀 있던 하데스가 훤히 드러났다. 그는 마치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고치는 하데스의 신력을 영혼까지 쥐어짜기 위해 만든 일종의 공장이었다. 자칫 이대로 하데스를 빼앗기게 되면 반드시 획득해야 할 명계에 대한 권한을 빼앗길 수 있었다.
페르세포네의 의지에 따라 그림자가 다시 고치를 되찾기 위해 움직였지만.
“보다시피 난 유부녀에게 관심이 없어서.”
그보다 먼저 연우가 앞으로 쭉 뻗은 주먹을 꽉 쥐었다. 어느새 침투를 마친 연우의 그림자가 하데스를 뒤덮어 가고 있었다. 영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