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388화 (388/862)

13화. 기간토마키아 (13)

페르세포네의 그림자가 고치에 다다랐을 때에는 이미 영괴가 하데스를 전부 삼키고 빠르게 물러나고 있었다.

“감히!”

페르세포네의 얼굴은 이제 무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만큼 화가 단단히 났다는 뜻이었다.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겨우 잡아 둔 하데스까지 훔쳐 가려 한다. 아직 성역의 신력을 모두 흡수하지 못한 것을 생각했을 때,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페르세포네가 손날을 거칠게 휘둘렀다. 그림자가 해일처럼 거칠게 일어나 출렁거렸다.

하지만 연우는 이번에도 그보다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하늘 날개(임시)]

투쟁의 날개와 죽음의 날개가 동시에 활짝 펼쳐지면서.

콰콰쾅!

연우와 페르세포네 사이에 거친 폭발이 일어나 그림자를 모두 날려 버렸다. 아주 잠깐이지만, 하늘 날개를 양쪽 모두 펼치고 있는 동안 연우는 웬만한 신들과 겨루어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폭발은 신전을 가득 뒤덮으면서 대리석 바닥과 기둥을 모두 박살 냈다. 우르르, 신전이 그대로 폭삭 주저앉았다.

안쪽에서 팽창한 그림자가 무너진 신전 잔해를 모두 치웠다. 페르세포네는 이미 연우가 달아난 것을 깨닫고 포효를 터뜨렸다.

“잡아! 잡으란 말이야아!”

그녀의 히스테리와 함께, 그림자 속에 남아 있던 눈들이 거죽을 뚫고 나오면서 연우의 뒤를 바짝 추격했다.

* * *

연우는 힘을 비축하기 위해서 하늘 날개를 거두고, 불의 날개를 활짝 펼치면서 앞으로 내달렸다.

그의 품에는 하데스가 안겨 있었다. 죽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파리한 안색이었지만.

‘아직 살아 있어.’

숨은 붙어 있었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하기에는 힘들었다.

숨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너무 얕았다. 신력도 너무 많이 빨려 안이 텅 비었다. 무엇보다 신체(神體)를 이루고 있는 신격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이대로 뒀다가는 하데스라는 존재가 사멸할지도 몰랐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아테나나 헤르메스에게 데려갈까 싶었지만, 올림포스와 티탄기가스가 전쟁을 벌이는 지금 상황에서 그런 짓을 했다가는 적들의 이목을 사기 쉬웠다.

적들이 바라는 건 하데스를 완전히 집어삼켜서 성역을 빼앗는 것.

그리고.

‘아마도 올림포스로 향하는 계단, 빛의 기둥을 빼앗는 것이겠지.’

티탄과 기가스는 언제나 타르타로스를 탈출해서 올림포스로 올라가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올림포스의 신들이 직접 내려와 계단이 연결된 지금이야말로 녀석들이 노리기에 가장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그러니 연우로서는 어떻게든 하데스를 지켜야만 했다.

흐트러지려는 신격을 막고, 신력을 회복시켜 줘야만 했다. 문제는. 플레이어인 연우는 도저히 그 방법을 모른다는 점이었다.

정우도 마찬가지. 그렇게 수많은 특전을 반복했었어도, 신이나 악마와 인연을 맺은 적은 손에 꼽힐 정도였으니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애당초 초월자에 대해서 알려진 것도 거의 없다시피 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자신을 둘러싼 채널링을 올려다봤지만.

[아가레스가 입맛을 다시며 당신의 품을 바라봅니다.]

[태산부군이 신중한 표정으로 당신을 지켜봅니다.]

[비마질다라가 간만에 벌어진 신들의 전쟁에 크게 웃음을 터뜨립니다.]

……

[소수의 신들이 대지모신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시합니다.]

신이나 악마 중 어느 누구도 연우가 하려는 일에 도움을 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상황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는 자들이 대부분이었고, 대지모신에 대해 걱정하는 자들은 극소수였다.

올림포스와 경쟁자라 할 수 있는 그들에게 있어 이런 커다란 이벤트는 그들이 소속된 사회의 영향력을 키울 수 있는 기회일 테니.

결국 이번 일은 연우가 혼자서 해결해야만 했다.

그렇게 머리가 복잡하게 헝클어지는데.

‘그런데…… 대체 왜 이런 꼴이 된 거지?’

문득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하데스는 올림포스를 대표하는 주신. 아무리 페르세포네가 가이아의 사도라고 해도, 이렇게 쉽게 당할 수는 없었다. 그는 그동안 티폰을 비롯한 티탄과 기가스를 홀로 감당하기까지 했으니까.

거기다 자신의 최후를 직감하고, 페르세포네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면 더더욱 말이 되질 않을 텐데.

‘설마……?’

연우가 어떤 생각에 미치던 그때.

파르르. 하데스의 눈꺼풀이 살짝 떨리더니 엷게 떠졌다. 하데스는 정신이 어지러운 듯 미간을 작게 찌푸리다가, 곧 연우를 보고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만나는군.”

하데스는 가볍게 혀를 차다가 연우의 뒤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저 먼 곳에서부터. 거대한 그림자가 연우를 잡기 위해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선두에는 해괴한 모습을 한 기가스, 히폴리토스와 폴리보테스가 언뜻 보였다.

“날, 구한 건가?”

하데스는 금방 상황을 눈치채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는 다시 눈을 뜰 일이 없을 줄로만 알았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렇게 되고 말았다.

“그렇군. 실패하고 말았군.”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데스는 자신이 물려주려 했던 명계의 왕좌가 연우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이유쯤이야 간단하다.

이곳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죽음의 신과 악마들. 연우에 대해 뭔가를 논의하면서 왕좌를 계속 미루도록 시스템에 손을 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망할 올포원.

애당초 그가 신격을 틀어막고 있어서야, 신위도 제대로 계승되지 않을 테지.

즉, 안배가 어긋나 버린 것이다.

“어째서입니까?”

그러다 하데스는 다짜고짜 던지는 연우의 질문에 영문을 몰라 미간을 더 세게 찌푸렸다. 신격이 흐트러지려 하고 있었다. 신력을 너무 빼앗겨서 그런지 몸이 여기 저기서 악다구니를 질러 댔다.

“무엇을?”

“어째서 자살을 하려 하셨냐는 겁니다.”

“…….”

하데스는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 침묵이 흘렀다.

올림포스의 주신인 그가 페르세포네에게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당한 이유. 명왕의 신전에 티탄과 기가스가 별 어렵지 않게 나타날 수 있었던 이유.

하데스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페르세포네에게 자신의 목을 내어 주려 했었다.

그 사실이, 연우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했다.

“당신이 페르세포네에게 죄책감을 갖고 있다는 건 압니다. 당신의 신화는 하계에서도 유명하니까요.”

“…….”

“하지만 이딴 짓은 여태 당신을 믿고 따르던 이들에 대한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하데스가 자신의 마음이 편해지고자 한 행동은 많은 이들을 불행으로 내모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와 자잘한 신경전을 벌이긴 했어도 결국 그를 돕고자 하는 마음에 내려왔던 올림포스. 그를 믿고 따르면서 수백 년 동안 전쟁을 멈추지 않았던 디스 플루토. 그를 믿고 의지하던 명계의 주민들. 그리고 그에게 호의를 보였던 연우까지.

하데스를 믿고 따르던 이들로서는 졸지에 날벼락을 맞게 된 셈이었으니까.

“제게 특전으로 명계의 왕좌를 넘기려 하셨던 건, 그래도 뒤에 남을 이들을 위한 안배, 그런 것이었습니까?”

물론, 하데스도 그냥 죽으려 하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연우에게 계승되려다가 불발되었던 특전, 명계의 왕.

하데스는 왕좌를 넘겨서 연우로 하여금 디스 플루토를 수습케 하고, 무사히 타르타로스를 탈출할 수 있도록 하려 했을 것이다.

천계로 올라가고자 하는 티탄과 기가스는 올림포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 어느 정도 방치한 것일 테고. 아테나와 헤르메스가 있으니 언젠가 막을 수 있으리라 여겼을 것이다.

이 외에 여기저기에 수하들을 위해 마련해 둔 것들이 많을 테지. 언젠가 자신이 없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기만은 기만이었다.

“나는. 원래, 아주 오래전부터 도망만 다녔었다.”

하데스는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 웃음은 자조에 가까웠다.

“겉으로는 모든 걸 위한 척하고, 책임감 있는 척해도. 결국 어려운 일을 맞닥뜨리면 피하고, 숨고, 도망치기에 급급했지.”

“…….”

“크로노스와 싸울 때에도, 막냇 동생을 제위에 앉히겠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면서 가장 뒤로 빠졌었고. 올림포스를 구축할 때에도 골치 아픈 게 싫어 명계를 맡겠다며 등을 졌었다.”

하데스는 언제나 도망자 신세였다. 남들이 봤을 때에는 화려하고 멋들어진 왕좌에 앉아 만인을 다스리는 것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그는 언제나 세상사로부터 한 발자국 떨어져 있었고, 방관하기만 했다.

페르세포네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름다운 그녀에게 반해 강압적으로 혼인을 체결했다.

그녀가 낯선 곳으로 와서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못 본 척 외면했고, 별다른 노력도 없이 속으로 자신을 바라봐 주기를 갈망했다.

그러다 페르세포네가 가이아와 손을 잡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도, 똑같이 도망쳤다.

그녀를 설득한다거나 하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저 타르타로스로 도망쳐서 티탄과 기가스만 어떻게든 처치하고자 했다. 페르세포네가 등을 진 원인은 전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불구하고.

그리고 지금.

하데스는 페르세포네를 사랑한다 말하면서도 다시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모든 게 복잡하게 헝클어진 이곳이 싫어서.

“그 말은 사고는 쳐도 책임은 지기 싫다는 말씀이지 않습니까?”

하데스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후, 연우는 싸늘하게 말했다.

하데스의 자조가 더 커졌다.

“어찌 보면 그런 셈이지.”

“당신은. 당신을 믿는 그 많은 사람들을 계속 그렇게 등질 생각이십니까?”

“…….”

하데스는 한동안 계속 말이 없었다.

그러다.

쿠쿠쿵-

계속 연우와의 간격을 좁혀 나가는 기가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무너진 건물 잔해 너머로 여전히 처절한 사투를 벌이고 있는 디스 플루토와 올림포스 신들이 보였다.

한순간, 하데스는 생각이 많아진 얼굴이 되었다. 갖가지 감정들이 그의 얼굴에 교차하고 있었다.

그러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은 이미 반투명해진 상태였다. 격은 흔들리고, 신력은 물 새듯이 줄줄 새는 중이었다.

이대로는 얼마 가지 못할 게 분명했다.

연우는 그런 하데스를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세상을 굽어다 보던 절대적인 존재였건만. 지금은 왜 이렇게 위태롭게만 보이는 걸까.

“그대는……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지?”

“책임지십시오.”

가면 속, 연우의 눈이 불타올랐다.

“당신이 저지른 것들을.”

하데스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듯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이내 꾹 다물면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지. 잠시 날 내려 줄 수 있겠나?”

“하지만.”

“저놈들이 걱정이라면 걱정 마. 아무리 쭉정이 신세가 되었어도.”

하데스는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가볍게 손을 털었다.

“아직은 그래도 쓸 만하니까.”

쾅!

기가스와 페르세포네의 그림자는 달려오다 말고 갑자기 도중에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쾅쾅쾅!

녀석들은 어서 이것을 치우라면서 요란하게 두들겨댔다. 하지만 결계는 꿈쩍도 않았다. 녀석들이 지르는 괴상한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하데스는 연우의 품에서 조용히 내려왔다.

잠시 균형을 잡지 못해 비틀거렸다. 연우가 도와주려고 했지만, 괜찮다는 듯이 손을 뻗어 그를 제지하며 우뚝 섰다. 그 순간에는 마치 명계의 왕이 다시 되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자 했던 그의 심경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그가 뭔가를 하려 한다는 것.

“이미 격이 흐트러졌으니 내가 되살아날 방도 따윈 없다.”

“그럼……!”

연우가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하데스는 손을 뻗어 말을 도중에 막았다.

“하지만 후계를 확실하게 잡아 둔다면. 그리고 제대로 공표를 한다면 혼란은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지.”

스르릉-

하데스는 허리춤에서 자신의 검을 조용히 꺼냈다.

특전은 올포원이 막아 둔 시스템의 제약 때문에 실행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특전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진 모든 권능까지 내어 주어서 격을 강제로 상승시키는 것이다.

그런다면 이곳을 주시하며 뭔가를 재고 있는 신과 악마들도 별다른 제지를 하지 못할 테지. 올포원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초월자가 필멸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준 전례는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따지고 보면, 하데스로서는 어차피 ‘그’에게서 받은 것을 ‘그’에게로 되돌려 주는 것뿐이니. 전혀 나쁠 것이 없었다.

그리고 훗날, 연우가 탈각과 초월을 차례로 이뤘을 때. 신성을 제대로 깨우쳤을 때, 지금 그를 따라갈 디스 플루토도 언젠가는 다시 화려하게 꽃을 틔울 수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선양(禪讓)을 시작하겠다. 후계인 ###은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려 선왕에게 예를 갖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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