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389화 (389/862)

14화. 기간토마키아 (14)

“하데스?”

“어서.”

하데스는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듯이 연우를 채근했다.

연우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지금 하데스가 하려는 게 무엇인지 어찌 모를까. 그는 눈을 감기 전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넘겨주려 하고 있었다.

왕좌, 권능, 신성…… 여태껏 하데스라는 존재가 쌓았던 신격과 신화를, 전부.

연우는 다시 살 의욕을 되찾고, 타르타로스의 이런 혼란을 수습하라는 의미로 그를 구하고 설득한 것이었지만.

정작 하데스는 스스로가 다시 살아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 나는 물러간 옛 세대다. 과거 칠흑이 저물고, 대지모신이 물러났듯. 이제는 우리가 사명이 다해 다시 그대와 같은 이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질 때인 것이지. 그리고…… 이미 이런 사달을 일으킨 내가 다시 검을 쥔다 한들, 누가 따르기나 할까?”

하데스는 여전히 굳은 눈매를 하고 있는 연우를 보면서 입가에 엷은 미소를 떴다.

여태껏 짓던 냉소나 자조와는 전혀 다른 미소. 연우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낯설면서도 하데스에게 너무 잘 어울렸다.

정말 여태껏 그가 보았던 냉혹한 명계의 왕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 역시 옛날에는 지금처럼 밝게 웃고 다니던 때가 있었을까?

“하지만 새로운 후계가 나타나 구심점이 된다면. 그것은 부활을 위한 신호탄이 충분히 될 수 있겠지.”

하데스는 자신을 이용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어차피 그는 저무는 해. 더 이상 디스 플루토를 지휘해 봤자 패배밖에 남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전면에 나서서 적들을 막아서고, 대신에 후계가 디스 플루토를 새롭게 이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새로운 주인 아래에서 조직 체계를 재정비할 수 있을 테고, 죽은 선왕을 기리며 사기를 드높일 수가 있었다.

하데스는 그런 선왕이 되고자 했다.

그리고 디스 플루토와 명계의 미래를 연우에게 맡기고자 했다. 그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으리라.

“비록 늦기는 했지만. 그래도 마지막은 수하들의 기억 속에 괜찮았던 왕으로 남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나?”

“…….”

하지만 연우는 여전히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다른 방법이 없을까, 하데스를 되살릴 방도가 없을까,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형…….』

정우도 걱정이 되어 그런 연우를 애타게 불렀다.

쾅쾅! 쾅!

그때, 결계가 처음으로 요란하게 울렸다.

그림자의 색이 더 짙어지고 있었다. 결계를 부수기 위한 기가스의 행동이 바빠졌다. 이대로는 금방 무너질 것 같았다.

“어서.”

서두르라는 눈짓에.

“……알겠습니다.”

결국 연우는 한쪽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천천히 머리를 숙이며, 얼굴에 쓰고 있던 가면을 벗었다.

하데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엄숙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검으로 연우의 머리와 양어깨를 순서대로 짚으면서 말했다.

“후계 ###은 명계의 새로운 왕으로서, 그대에게 주어진 권리와 의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천지와 신명께 약조할 수 있는가?”

“약조합니다.”

“후계 ###은 명계의 새로운 왕으로서, 명계의 옛 과업을 이어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이어 나갈 수 있노라, 자신할 수 있는가?”

“자신합니다.”

“좋다. 이로써 ###은 후계직을 벗어나 새로운 명계의 왕이 되었음을 선포한다.”

[하데스의 축복이 내렸습니다.]

[하데스의 가호가 내렸습니다.]

[잠시 중단되었던 계승 작업이 하데스의 권한으로 성공적으로 이뤄졌습니다.]

[축하합니다! 신위 ‘명계의 왕좌’를 계승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칭호 ‘명왕(冥王)’을 획득했습니다.]

[칭호 ‘퀴네에의 주인’을 획득했습니다.]

[칭호 ‘올림포스의 주신’을 획득했습니다.]

……

[모든 능력치가 30만큼 상승했습니다.]

……

[신성의 조각을 획득했습니다.]

[초월성의 단서를 습득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새로운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추가 공적치가 제공됩니다.]

[공적치를 100,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추가 공적치를 200,000만큼 획득했습니다.]

……

[탑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들에게 새로운 명계의 왕이 등극하였다는 사실이 정식 선포되었습니다.]

[이름을 밝히시겠습니까?]

[거부되었습니다. 당신에 대한 정체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탑의 모든 거주민들은 새로운 명계의 왕에 대한 사실을 자각할 것이며, 당신이 위대한 업적을 세울 때마다 새로운 명계의 왕에게 환호 내지는 비판을 던질 것입니다.]

[필멸자로서 신위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지만, 아직 신위를 완전히 소화하기엔 자격이 많이 모자랍니다.]

[현재의 ‘격’에 맞게 신위가 재설정됩니다.]

[권능 ‘명토 선포(冥王宣布)’가 임시 잠금 처리되었습니다.]

[권능 ‘어둠 속의 눈’이 임시 잠금 처리되었습니다.]

……

[신위에 걸맞은 자격을 획득하세요. ‘격’의 상승이 이뤄질수록 잠긴 권능과 신력을 개방할 수 있습니다.]

[현재 상태는 ‘명계의 불완전한 왕’입니다.]

[당신이 앉은 왕좌는 많은 신과 악마들이 탐내는 자리입니다. 앞으로 수많은 경쟁자들이 당신의 자리를 찬탈하기 위해 많은 방해를 할 것입니다.]

[그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계속해서 성장해 왕좌를 지켜 내십시오. 왕좌를 굳건하게 지켜 낼수록, 앞으로 당신이 쌓을 신화의 양도 그만큼 방대해지며 입지도 굳건해질 것입니다.]

[모든 죽음의 신들이 당신이 이룬 성취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모든 죽음의 악마들이 당신이 계승한 자리를 두고 이빨을 드러내며 웃습니다.]

[하늘 날개의 왼쪽 부분(죽음)이 강화되었습니다.]

[소수의 신들이 당신이 앉은 자리에 대해 가당치 않게 생각합니다.]

[다수의 악마들이 당신을 보며 군침을 흘립니다.]

투둑, 툭-

찰칵! 찰칵!

연우는 육체 깊숙한 곳에 내재된 무언가가 점점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영혼이 큰 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따라 여태 영혼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던 것들도 팽팽해졌다가 천천히 끊어졌다.

아주 조금이지만, 갑갑한 뭔가를 벗어던지고 해방된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덩달아 영혼에서 새어 나온 이질적인 기운이 체내로 스며들면서 마력과 뒤섞였다.

[마력의 성질에 암 속성이 추가 되었습니다.]

성화를 품으면서 여태껏 화 속성이 주를 이뤘던 마력의 성질에도 급격한 변질이 일어났다. 명계의 왕이 되었으니 그만큼 변화가 따른 것이다. 어둠이 품은 짙은 냄새가 코끝을 콕콕 두들겼다.

그리고.

띠링-

[서든 퀘스트 ‘엑소더스’가 생성되었습니다.]

[서든 퀘스트 / 엑소더스]

설명: 현재 타르타로스는 세상에 나타난 이래, 단 한 번도 겪지 못했던 누란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죄수로 복역하고 있던 티탄과 기가스는 대지모신 가이아의 비호를 받아 반란을 일으켰고, 타르타로스를 지원하기 위해 내려왔던 올림포스 신들은 발이 묶여 자칫 올림포스로 가는 계단을 빼앗길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옛 신화로만 여겨졌던 새로운 기간토마키아가 발발한 것입니다.

그런 혼란 속에서 당신은 명계의 왕좌라는 어려운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탑의 모든 거주민들에게도 똑같이 선포되었습니다.

명계의 수많은 군사들은 새로운 주인인 당신만을 바라보며, 당신이 어서 이 혼란의 사태를 수습해 주기를 간절히 갈망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그들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시오.

티탄과 기가스의 위협으로부터 신들의 전쟁터인 타르타로스를 무사히 탈출하십시오. 그리고 새로운 거류지를 찾아 전열을 재정비하십시오.

제한 시간: -

제한 조건: 명계의 왕

달성 조건:

1. 새로운 왕으로서 디스 플루토의 신임을 얻으십시오.

2. 티탄과 기가스의 위협으로부터 디스 플루토를 이끌고 타르타로스를 탈출하십시오.

3. 위협에서 벗어나 안전한 거류지를 찾아 베이스 캠프를 설치하고, 훗날을 기약하십시오.

보상:

1. 권능 ‘명토 선포’

2. 디스 플루토 소환

3. 타르타로스 재건 자격

4. 새로운 신성 조각과 초월성의 단서

새롭게 발생한 서든 퀘스트는 하데스가 그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는 임무이자, 왕으로서 가져야만 하는 의무였다.

“많이 힘들겠지만…… 부탁하지.”

하데스는 연우의 어깨를 두들기며 미소를 뗬다.

연우는 굳은 표정으로 잠시 하데스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가면을 얼굴에 썼다.

찰칵-

그리고 다시 불의 날개를 한껏 펼쳐 몸을 띄우면서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이것이 하데스와의 마지막 대면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굳이 작별 인사는 나누지 않았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명계의 선왕으로서, 최후를 맞으려는 하데스의 결정을 존중해 주는 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떠나는 연우를 보면서.

하데스는 생각했다.

나란 놈도 참 많이 우습구나. 지난 수백 년 동안 하루하루 절망에 빠지며 도망치듯이 살아 놓고서, 이제 와 몇 마디 들었다고 이렇게 마음가짐이 달라질 줄이야. 내가 이렇게 귀가 얇았던가?

아니었다.

귀가 얇은 게 아니라, 그만큼 연우가 자신에게 해 주었던 말들이 전부 진실로 와닿았기 때문이었다.

마지막만큼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믿음을 지켜 주라는 말.

명계의 왕이라는 허울만 좋은 의무도. 올림포스의 주신이라는 강요된 자리도 아닌, 믿음이라는 말이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래서 마무리만큼은 멋있게 하고 싶었다.

새로운 왕의 기억 속에 못난 선왕으로 남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쿠쿠쿵!

쾅-

그 순간, 꼿꼿했던 결계가 드디어 부서지면서 검은 그림자가 밀물처럼 들어왔다. 그 위로 기가스들이 사나운 이빨을 들이대며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중요한 신력을 모두 빼앗기고 쭉정이만 남은 하데스 따윈 충분히 잡을 수 있다고 여긴 것이지만.

“이깟 버러지들 따위에게 무시를 당하게 되다니. 참으로 꼴이 우스워졌구나, 하데스.”

콰르르릉!

하데스가 코웃음을 치면서 우측으로 검을 휘두른 순간, 검은 벼락이 떨어지면서 기가스 히폴리토스가 그대로 피떡이 되어 날아가 버렸다.

……!

아직도 저런 힘이 남아 있다고? 남은 기가스와 권속들이 충격에 빠져 경악성을 내지르는 가운데.

“평소에는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던 것들이, 왕의 앞길을 함부로 밟아?”

하데스가 송곳니를 훤히 드러냈다. 마지막 기력을 쥐어짜며 드러낸 기세는 너무나 살벌해서, 어째서 그가 명계의 왕이었는지, 올림포스의 맏형이었는지를 말해 주었다.

“이 뒤로는, 내 허락 없이 어느 누구도 지나지 못할 것이다.”

* * *

“비샤, 너……?”

“미안. 대장.”

람은 자신의 가슴을 비집고 나온 칼날을 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맞은편에는 푸른 머리칼을 한 수하가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언제나 장난기가 많았지만, 전투에 몰입하면 누구보다 진지하고 동료들을 아꼈던 녀석이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뒤에서 기습을 해 올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녀석을 따라 감도는 기운이 티폰이 품고 있던 것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

티탄과 기가스의 손길은…… 올림포스만이 아니라, 디스 플루토에도 뻗쳐 있었구나.

“너무 앞이 보이질 않아서.”

비샤가 던진 변명 아닌 변명도 이해는 되었다. 하루가 다르게 성역을 빼앗기고 군세도 기울고 있으니. 막막하고, 답답했겠지.

미래가 보이지 않는 깜깜한 상황 속에서, 티폰이 손길을 뻗어온다면. 아마 거절하기 힘들지 않을까.

그리고 비샤와 같은 선택을 한 군사가 몇이나 될지, 짐작도 할 수 없어 어지러웠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전쟁에 목을 매달 게 아니라, 수하들을 더 챙겨 줄 걸 그랬다.

이미 심장이 뚫린 이상, 늦은 후회가 되어 버렸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미안해할 필요 없어.”

건너서는 안 될 선이 있었다.

“나도 똑같이 할 거니까.”

촤악-

비샤는 자신이 어떻게 당했는지 전혀 깨달을 새도 없이, 충격파에 그대로 휩쓸려 사라졌다. 람이 설마 중상을 입고도 이런 괴력을 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것이겠지.

헉.

헉.

람은 단내가 나는 숨을 거칠게 내쉬면서 혼란스러운 전장을 둘러봤다.

대지에서는 디스 플루토와 권속들 간의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고, 하늘에서는 올림포스 신들과 티탄-기가스의 성전(聖戰)이 이뤄지는 중이었다.

벼락이 치고, 돌풍이 불고. 불길이 일어났다가, 어둠이 내려앉으면서 모든 것을 지우는 등, 도저히 필멸자나 하급 신격들로서는 꿈에도 그릴 수 없을 격전이었다.

하지만 화려하게 보이는 겉보기와 다르게, 속은 너무 처절했다.

가뜩이나 권속들의 물량 공세에 계속 밀려나던 디스 플루토는 갑작스러운 배반자들의 등장에 내부에서부터 계속 무너지고 있었다.

하늘도 마찬가지.

어느 정도 팽팽한 접전을 이루나 싶었던 순간, 붉은 하늘을 크게 열면서 티폰의 눈이 나타나자 이야기의 양상은 달라졌다.

신벌이 내렸다.

뭔가가 번쩍인다 싶더니, 올림포스 신들 중 상당수가 그대로 쓸려 나갔다.

디케, 테미스, 포토스, 이켈로스……. 그 외에도 많은 이들이 어떻게 막아 볼 새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는 얼굴들도 많았다.

그리고.

올림포스와 타르타로스를 이어 주던 계단, 빛의 기둥이 아랫부분부터 서서히 검게 물들고 있었다.

빛의 기둥이 어둠으로 바뀌는 순간, 티탄과 기가스가 그토록 바라던 천계 침공도 성공적으로 이뤄질 테지.

그리고 이미 그 계획은 성공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이 순간, 타르타로스의 주인은 티폰이었다.

『올림포스를…… 우리의 손에 두어라……!』

아테나와 헤르메스가 다급하게 움직였다. 그들과 사이가 좋지 않던 포세이돈도 지금만큼은 한뜻이 되어 더 거센 폭풍우를 일으켰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녀석들이 기둥으로 가지 못하게 해야 해!”

“제기…… 랄! 하데스! 대체 뭘 하고 자빠져 있는 것이냐!”

빛의 기둥을 보호하려는 올림포스 신들과 그걸 찬탈하기 위해 공성전을 시도하는 티탄-기가스.

문제는 빛의 기둥이 물들수록, 티탄과 기가스도 오래전에 잃어 버렸던 신격을 되찾아 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타르타로스에 갇히면서 생겼던 제약이 서서히 풀려나고 있는 것이다. 가이아의 개입도 그만큼 거 세졌다.

『이제…… 하늘이 열릴 것이니…… 대지의…… 위대한 어머니시여…… 당신의 자식들을 굽어살피소서……!』

티폰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말마따나 이제 올림포스 침공은 정말 얼마 남지 않아 보였다.

그 광경을 보면서. 람은 도저히 쓰러질 수 없었다. 이미 몇 번이고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큰 부상이었지만. 도저히 이대로는 원통해서 쓰러질 수 없었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지켜야만 했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하데스와의 채널링도 끊어진 지금. 그녀는 가지고 있던 권능도 신력도 모두 상실한 상태였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원래 갖고 있던 몸뚱이뿐.

이런 몸으로. 대체 어떻게 하면 이 난관을 뒤집을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디스 플루토는 계속 죽어 가고 있었다. 이대로는 전멸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람은 억지로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든 수하들과 동료들을 한 명이라도 더 지키기 위해서. 혹시나 자신의 보잘것없는 힘이 도움이 될까 싶어서.

하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빙글 돈다 싶더니 그대로 주저앉는 것을 느꼈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는 상태였다. 창을 지팡이 삼아 겨우 상체만 일으킬 수 있었지만, 머리가 너무 무거웠다.

아아.

정말 이대로 끝나야만 하는 걸까.

지난 노력들이 모두 물거품이 되어, 동료들과 함께 웃고 울고 했던 모든 것들을 날려야만 하는 걸까. 이토록 허망하게.

‘하데스시여, 제발.’

그렇게. 무거운 눈꺼풀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정신이 내려앉으려던 그때.

기적이 나타났다.

『꿈이…… 저문다.』

어디선가 아스라이 들리는 목소리.

그리고 희미해지는 시야 너머로, 검고 붉은 세 쌍의 불길이 날개처럼 세상을 크게 가로지르는 것이 언뜻 보였다.

그것이. 여태껏 벌였던 전투에서 항상 승리를 가져다주었던 상징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왔구나. 드디어.”

람은 마지막에 웃으면서 잠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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