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390화 (390/862)

15화. 기간토마키아 (15)

처음 연우가 본 것은 엉망이 되다시피 한 전장이었다.

신들이 뒤엉키고, 군사와 권속들이 부딪치는 전장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게 만들었다. 특히 빛의 기둥이 검은색으로 물드는 것을 본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비에라 듄의 노림수는 성공하고 말았다는 것.

당장 저것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하데스의 왕좌를 물려받았다고 할지라도, 연우는 아직 탈각과 초월을 이루지 못한 상태였다. 신격을 갖추지 못한 이상에야, 명계의 왕으로서 낼 수 있는 힘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올림포스를 도와주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하데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퀘스트를 내어 줄 때에도 탈출만 이야기했던 것이었다.

나중에.

전열을 재정비하고, 모든 것을 오롯이 갖췄을 때 다시 타르타로스를 탈환해 달라면서.

그래서 연우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자 했다.

[시차 괴리]

한껏 느려진 세상 속에서.

연우는 빠르게 전황을 살피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먼저 일행들이 있는 곳.

“크로이츠!”

“우선 이곳은 막고 있지만…… 오래 버티지 못할 듯하오! 곧 부서질 것 같소!”

“제길. 이 빌어먹을 것들은 대체 어디서 이렇게 줄줄이 나오는 건지.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 주게.”

“최대한 빨리……! 이대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소.”

크로이츠는 성검 줄피카르를 바닥에다 꽂으면서 축문을 외고 있었다. 그러자 성검의 중앙에 박힌 보석이 토파즈로 바뀌면서 주변에 걸친 대규모 결계를 구축했다.

쿵.

쿵-

권속들이 결계를 부수기 위해 제 몸을 한껏 던져 댔다.

갈리어드는 권속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쉴 새 없이 활시위를 튕기는 한편, 권속들 중에서도 서열이 높은 것들이 발견되면 곧장 그곳을 저격해서 전력을 계속 깎아 나갔다.

그런 와중에 가장 바쁘게 움직이는 이가 칸이었다.

칸은 결계의 안팎을 쉴 새 없이 드나들면서 선술을 연거푸 사용해 대고 있었다.

벼락이 치고, 돌풍이 불었다. 그럴 때마다 권속들이 계속 죽어 나갔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흘러 나온 피는 블러드 소드를 한층 더 단단하게 하는 효과를 만들었으니.

적의 피와 살점으로 뒤덮이다시피 한 칸에게서는 스산한 귀기(鬼氣)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아군에게는 구원의 동아줄로 비쳐졌다.

지휘 체계가 실종된 디스 플루토는 파편화되어 티탄-기가스의 권속들이라는 풍랑에 고립된 섬들이 되어 있었다.

겨우겨우 권속들을 밀어내고 있지만, 언제 거친 풍랑에 집어삼켜 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칸은 위험한 곳들만 골라서 나타났다.

“카, 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따라오십시오! 어서!”

권속들 사이로 길을 뚫어 탈출로를 확보하고, 크로이츠의 결계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는 것이다.

그렇게 조각조각 나 있던 디스 플루토를 하나둘씩 모으다 보니, 어느새 전력도 불어나 집단 체재를 갖출 수 있었다.

커다란 방패를 곧추세우고, 장창을 높게 세우면서 권속들을 조금씩 밀어내기 시작했다.

연우가 지시했던 대로, 디스 플루토를 한곳에 규합시키는 데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계속 머릿수가 불어날수록, 적들의 눈에도 그만큼 잘 띄기 때문이었다.

“람이…… 죽었어.”

“1, 3, 4군단 전멸!”

“10군단으로부터도 연락이 끊어졌어! 히페리온이 강림한 장소였어…… 그렇게 가지 말라고 했었는데. 제기랄.”

“크리오스가 이곳으로 오고 있어.”

“결계가 우측 부분이 깨지려 하오! 저곳을 받쳐 주시오!”

디스 플루토의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는 람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군단이 차례로 궤멸했다는 소식도 뒤따랐다.

어둠으로 물드는 빛의 기둥을 어떻게든 보호하려다가 티탄에게 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크로이츠가 구축한 결계에도 한계는 있었다.

크기를 아무리 확장한다고 해도 수용 인원에는 한계가 있었고, 권속들이 계속 부딪치는 통에 내구도도 계속 닳을 수밖에 없었다. 줄피카르의 보석이 서서히 색이 옅어지면서 깨질 위험까지 보이고 있었다.

정말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상황.

그럴수록 갈리어드와 칸은 더 이를 악물었다.

한 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서.

지난 몇 달 동안 같이 전장을 뛰어다니면서. 디스 플루토는 그들에게도 소중한 동료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곳곳에는 여전히 위험에 빠진 이들이 너무 많았다.

문제는.

설상가상으로 티탄 크리오스가 이곳을 발견하고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티탄을 이끄는 12신 중 한 명이기도 한 녀석은 부왕지에서 입은 수모를 되갚아 주겠다는 듯, 분노에 젖은 눈동자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모두…… 짓밟아 주마.』

이곳이라며 크리오스를 안내하 듯이 녀석의 주변에 붙어 오는 권속들의 숫자도 대거 불어나 결계가 보이지 않을 만큼 빽빽하게 에워쌌다.

그러다 끝내 크리오스의 거대한 그림자가 칸 등의 머리 위로 드리웠을 때.

연우가 시차 괴리를 풀고 강림했다.

콰아아앙-

[하늘 날개-죽음]

왼쪽 날개가 한껏 확장되면서 하늘을 꿰뚫을 것처럼 높게 치솟았다. 화력이 한껏 더해지면서 검은색으로 변하고, 그것이 세 갈래로 쪼개진 순간.

죽음이 내려앉았다.

결계를 둘러싸고 있던 권속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줄줄이 도미노처럼 쓰러졌다. 방금 전까지 맹렬하게 굴던 놈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카인……?”

연우를 발견한 크로이츠가 눈을 크게 떴다.

“카인!”

“카인이 왔다! 카인이 왔다고!”

“이길 수 있어!”

그리고 뒤늦게 연우를 발견한 디스 플루토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들에게 있어 연우란 승리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죽음이 턱 앞까지 차오르면서 희망이 보이지 않던 지금, 연우의 등장은 그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기에 충분했다.

연우는 그런 디스 플루토의 동료들을 보면서 살짝 눈웃음을 지어 주다가, 다시 굳은 표정으로 높다란 산처럼 서 있는 크리오스를 올려다보았다.

『크아아……! 이게…… 이게 무엇이냐……!』

크리오스는 더 이상 이쪽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발밑에서부터 역병처럼 올라오는 무형의 권능들 때문이었다.

『너희들…… 너희들이 어째서…… 여기서……!』

죽음의 날개는 666개의 서로 다른 죽음을 근원으로 하는 권능들을 내포하고 있는바.

티탄 토에가 죽었을 때 죽음이 다가오는 공포에 사로잡혀 괴로움에 몸부림을 쳤던 것처럼.

크리오스도 마치 666명이나 되는 신과 악마들이 내려와 자신의 목을 옥죄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고 말았다.

4차 용체 각성을 이루면서 죽음의 권능이 그만큼 강화된 덕분이었다.

하지만 크리오스는 토에처럼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았다. 녀석은 허우적대면서 발버둥 치긴 했지만, 자신이 어째서 티탄의 수장이라 불리는지 말해 주겠다는 듯 죽음의 신과 악마들이 벌이는 간섭을 이겨 내고 있었다.

빛의 기둥이 물들면서 신격을 되찾아 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크오오-

결국 크리오스가 참지 못하고 거칠게 포효를 내질렀다. 세상이 울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쩌렁쩌렁한 외침.

하지만 연우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그가 필요로 했던 것은 시간이었으니까.

마력을 한껏 담아 어기전성을 터뜨렸다.

『모두…… 뛰어!』

연우가 따로 방향을 지시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열린 길은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연우가 처음 디스 플루토에 가담하고 나서 탈환하는 데 성공했던 명부전이 있는 방향. 그곳에도 다른 빛의 기둥이 있었다.

『어딜…… 가려 하느냐……!』

크리오스가 연우 등이 도망치는 것을 보고 손을 아래로 뻗쳤다. 666개의 권능이 여전히 그의 육신을 좀먹어 가고 있어 한눈을 팔면 위험했지만. 그래도 지금은 디스 플루토를 막는 게 급선무였다.

디스 플루토는 그동안 죄수였던 그들을 계속 성가시게 괴롭혔던 놈들. 만약 지금 해치워 놓지 않으면 앞으로 어떻게 그들을 귀찮게 만들지 몰랐다. 위험 요소가 될 만한 건 미리 싹을 제거해 둬야만 했다.

연우는 비그리드를 꽉 쥐며 크리오스에 맞서려 했다. 아무리 4차 용체 각성을 이루면서 지속 시간이 길어졌다고 해도 죽음의 날개를 펼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러니 일단은 날개를 거두고, 직접 시간을 벌어 보고자 했다.

그러던 그때.

쾅!

갑자기 크리오스의 목덜미 쪽으로 강렬한 뭔가가 거세게 충돌했다.

크리오스는 균형을 잃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목덜미의 절반 이상이 갈라지면서 검은 연기가 피처럼 치솟았다.

『크아아! 감히…… 감히……!』

크리오스가 분노에 젖은 채로 비명을 질렀지만.

콰콰콰-

이번에는 녀석의 가슴팍에서 다른 불길이 높게 솟구치더니 곧 전신으로 가득 번져 나갔다.

“감히? 감히라고?”

그런 녀석을 보면서. 아테나는 인상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으르렁거렸다.

연우와 정우 앞에서는 언제나 슬프고 연약한 모습만 보였던 그녀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째서 그동안 전쟁의 여신이라 불렸는지를 말해 주겠다는 듯, 푹 뒤집어 쓴 투구 아래로 눈빛을 강렬하게 빛내고 있었다.

“그 말은 네가 아니라 내가 해야지. 감히 날 앞에 두고 내 아이들에게 손을 대려 해? 네까짓 놈들이?”

휘휘휙-

순간, 공간이 열리면서 아홉 개의 꽃잎 방패가 차례대로 흘러나 오면서 허공을 수놓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마치 꽃놀이를 보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그녀를 상징하는 신물, 아이기스였다.

아테나는 아이기스 중 하나를 왼손에 착용하고, 오른손에는 거대한 장창을 들며 허공을 박찼다.

핑-

그녀는 강렬한 빛살이 되어 공간을 가로지르면서 크리오스의 미간에 작렬했다.

크아아!

두개골이 그대로 박살 났다. 다시 한 번 더 커다란 화염 폭풍이 일어나면서 크리오스의 거체를 가득 뒤덮었다.

미간에서부터 시작된 균열은 팔뚝을 따라 번져 나갔고, 그 사이로 검은 연기가 쉴 새 없이 꾸역 꾸역 쏟아졌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도우려는 듯, 어느새 헤르메스도 나타나 지팡이 케리케이온을 바닥에다 가볍게 짚고 있었다.

터엉-

하지만 결과는 전혀 가볍지 않았다.

지면을 따라 파문이 크게 퍼져 나가더니 지축이 크게 위아래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땅거죽이 뒤집어지면서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보아뱀 여섯 마리가 튀어나와 크리오스에게 달려들었다.

가장 큰 크기를 자랑하는 녀석은 크리오스의 몸뚱이를 밧줄처럼 칭칭 감았고, 다른 놈들은 사지를 물어뜯었다.

팔 한 짝이 강제로 뜯기면서 허공으로 높게 치솟았다. 검은 연기가 분수처럼 쏟아지면서 땅바닥을 걸쭉하게 물들였다. 보아뱀은 크리오스의 거체를 맛있게 물어 뜯고, 먹어 치우면서 배를 불려 나갔다.

크어어! 크어!

크리오스가 그렇게 고통에 몸부림을 치는 동안.

헤르메스는 어서 가 보라는 듯이 연우에게 눈짓을 했다. 엷은 미소를 띠고 있는 그의 눈에는 정겨움이 가득했다.

연우로서는 언제나 저 둘에게 도움을 받는 게 미안하고, 또 감사하기만 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몸을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왼쪽 날개를 거두면서 이번에는 오른쪽 날개를 활짝 펼쳤다.

[하늘 날개-투쟁]

하늘을 태울 듯했던 검은 불꽃이 가라앉은 자리 위로 붉은 불길이 타오르고.

[검은 구비타라 - 현인의 눈]

[용신안]

[화안금정]

두 눈이 황금색으로 물들면서, 탈출을 시도하는 디스 플루토를 잡기 위해 다가오는 다른 티탄과 권속들을 눈에 포착했다.

현자의 돌이 맹렬하게 돌아가면서 과열되기 시작했다. 시차 괴리의 병렬 연산을 통해 빠르게 타깃이 지정되었다.

그리고 비그리드를 안쪽으로 잡아당겼다가, 옆으로 강하게 뿌렸다.

[‘비그리드-???’가 숨겨진 진명, ‘듀렌달’을 개방합니다.]

[전승: 일진광풍]

비그리드에 집약된 광풍이 해일처럼 세상을 뒤흔들었다. 제천류와 성화가 가득 실린 힘답게 수많은 적들이 그대로 쓸려 나갔다.

특히 무수한 투쟁의 권능이 실린 덕분에 위력은 처음 연우가 타르타로스에 도착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콰콰콰콰-

쿠르릉, 쿠릉-

콰르르르!

모든 것이 쓸려 나가는 가운데.

연우는 다시 불의 날개로 되돌리면서 바람길을 밟았다. 그리고 디스 플루토의 선두를 맡으면서 길을 뚫기 시작했다.

엑소더스(Exodus, 대탈주)의 시작이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