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392화 (392/862)

17화. 기간토마키아 (17)

“당신은 결국 마지막까지 이런 모습인가요.”

페르세포네는 검 한 자루에 몸을 지탱한 채로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하데스를 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한창 격전을 치르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한겨울처럼 싸늘한 분위기만 감돌던 그녀였지만. 아주 잠깐 동안 얼굴 위로 갖가지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언제나 원망만 하던 남편. 그녀의 젊은 날을 앗아 간 못된 남편이었지만…… 그래도 이따금 마음이 돌아설 뻔한 적도 있었다.

그는 언제나 진심을 다해 자신을 사랑했다. 다만, 무뚝뚝한 성격만큼이나 그 마음을 표현할 줄 몰라 늘 그런 사달이 났을 뿐. 그녀의 마음을 달래려 얼마나 노력했었는지,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대지모신과 계약을 맺고 나서도 한참 동안 고민을 했었다. 이것을 계속 진행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무리 남편을 원망했어도, 당시에는 세월이 지난 만큼 어느 정도 마음이 풀리기도 했었으니까. 대지모신과 계약을 맺는 순간 어머니도 계신 올림포스가 위험해지는 것 역시 알았기 때문에 망설여지기도 했다.

하데스가 처음 진실을 알고 타르타로스로 내려갔을 때. 사실 페르세포네는 대지모신과 사도 계약을 맺기 전이었다.

만약 그때 하데스가 도망치지 않고 그녀와 깊은 대화를 나눴더라면.

그런다면 오늘 벌어졌을 결과는. 뭔가 다르지 않았을까.

“못된 사람.”

하지만 그런 건 다 부질없는 가정이기도 했다.

“당신 때문에 난, 결국 마지막에도 나쁜 존재가 되었네요. 지아비를 등지고 가족들을 배신한…… 그런 이가. 반대로 당신은 아주 멋있게 남았구요.”

이미 결과는 나왔고, 사건은 벌어졌다.

그녀가 물러설 곳은 없었다.

“그러니 더 못된 사람으로 남을게요.”

페르세포네는 한쪽 다리를 굽혀 앉아 하데스의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수염을 덜 깎은 얼굴에는 여전히 온기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 온기도 곧 머지않아 사라질 테지.

그 순간.

퍼걱-

하데스의 육체가 잘게 부서져 흩어졌다. 가루가 바람을 타고 사라졌다.

그리고. 페르세포네의 표정이 딱 딱하게 굳었다.

“없어……?”

페르세포네는 한 줌의 가루만 남은 자신의 손을 펼쳐 보았다. 손가락 틈 사이로 가루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분명 이 손에 잡혀야 할 것이 잡히지 않았다.

아주 중요한 것이.

왕좌.

명계의 왕만이 가질 수 있다는. 칠흑으로부터 빼앗은 ‘죽음’의 신능이 잡히질 않았다.

칠흑이 저물고 난 뒤, 수많은 사회가 그것을 가져갔고. 올림포스에서는 분명히 하데스가 받아 명계로 내려온 것일 텐데? 어째서 보이질 않는 거지?

어떻게 두고 다닐 수 있는 물건도 아니기에 없어진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데스가 있던 자리를 둘러봐도 마찬가지였다. 하데스의 껍데기를 이루던 가루도 모두 사라지고 난 뒤였다.

그러다 페르세포네는 뒤늦게 한 가지 생각에 닿았다.

“설마?”

하데스에게 없다면. 이미 다른 누군가에게 준 것은 아닐까. 하데스를 구하고 도망치던 연우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대체 어느새?

왕좌는 절대 그렇게 쉽게 넘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물며 상대는 한낱 필멸자일 텐데. 시스템이 거부하고, 올포원이 승인하지 않았을 텐데, 대체 무슨 수로?

일이 이렇게 진행될 줄 알고 미리 준비를 해 뒀던 걸까? 그렇다면 언제부터?

갖가지 복잡한 의문이 머릿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났지만.

결국 쟁취해야 할 왕좌의 힘이 바로 눈앞에서 갈취당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왕좌의 힘은 반드시 필요했다. 타르타로스를 완전히 자신의 권역으로 삼기 위해서도. 설정권이 그것에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페르세포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국 끝까지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군요. 역시 난 당신이 미워요.”

페르세포네는 그런 혼잣말과 함께 여태 마지막까지 억누르고 있던 격을 해방했다.

화아악-

그녀의 신체가 돌풍과 함께 사라졌다.

대신에 그림자가 먹물처럼 지면을 타고 성역을 따라 한가득 퍼져 나갔다.

* * *

지면 위로 검은 어둠이 차오르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마치 물이 범람해서 발목과 무릎을 적시는 것처럼. 검은 어둠도 그렇게 전장에 남아 있던 이들의 무릎을 차지하면서 그 위로 검은 아지랑이를 피워 올렸다.

가느다란 아지랑이는 꽈배기처럼 저마다 배배 꼬이더니 커다란 촉수가 되어 하늘로 치솟기 시작했다.

그런 촉수가 수백 수천 개.

마치 거대한 새장이 성역 위로 드리우는 것 같았다.

“뭐지, 저건?”

때마침 크리오스의 목을 치고 있던 아테나가 섬뜩한 느낌을 받고 고개를 위로 번쩍 들었다. 헤르메스의 시선도 똑같이 이동했다.

티폰을 상대하던 아레스를 비롯해 포세이돈 등도 마찬가지였다.

“저건……?”

“설마!”

“말도 안 돼!”

새장을 형성하던 촉수들이 한데 뭉치기 시작하면서 검은 구체를 이루었다.

그런데 거기서 풍기는 느낌이 심상치 않았다.

절대 이곳에서는 현신할 수 없는 힘이 물씬 풍겼으니까. 모든 신과 악마들의 공통된 적, 대지모신이 직접 강신을 시도하려 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거냐, 티폰!”

포세이돈이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리면서 티폰을 노려봤지만.

티폰은 되레 광소를 터뜨렸다.

“아하하! 우리의 여왕님께서 마음을 독하게 먹으신 모양이군. 절대 고상함을 잃지 않으려 하더니. 결국 뜻대로 되지 않았나?”

그의 웃음이 끝나기 무섭게.

콰앙-

검은 구체가 폭발하면서 이번에는 하늘을 따라 어둠을 넓게 퍼뜨렸다.

그리고 서서히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거신의 형체를 지닌 티탄도 조막만 하게 보일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

어둠이 만들어 낸 수평선 너머로 상반신만 드러냈는데도 불구하고, 타르타로스 전역에 그림자를 가득 드리울 정도로 큰 형체를 가진 그것은, 페르세포네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등 뒤로 여기저기 찢긴 어둠의 날개를 한껏 드러내면서.

대지모신과 직접적인 강신을 시도하면서 대지를 굽어다 보는 존재가 된 페르세포네는 기다란 포효를 내질렀다.

크어어어-

태풍이 불어닥쳤다.

전장에서 한창 전투를 벌이던 이들은 신격이며 대신격 가릴 것 없이 죄다 쓸려 나갔다. 성역을 이루던 신전이 기둥 채로 뽑혀 날아갔고, 땅거죽이 통째로 뒤집히면서 저 뒤로 거대한 산맥이 만들어질 정도였다.

페르세포네는 너무 큰 크기를 가진 탓에 육성이나 어기전성도 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발산하는 강렬한 의지는 따로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찾. 아. 라.

녀. 석.을.

잡. 아. 야. 한. 다.

페르세포네는 거대한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면서. 자신의 의지를 다시 한 번 더 타르타로스에 투여했다.

* * *

[‘비그리드-???’가 숨겨진 진명, ‘듀렌달’을 개방합니다.]

[전승: 거인 살해]

콰콰콰-

불길이 거세게 휘몰아쳤다.

[티티오스를 처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신살의 업적을 추가하였습니다.]

[누구도 쉽게 이루지 못할 위대한 업적을…….]

……

[티티오스에게서 신성의 파편을 강탈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신성이 왕좌의 부족 부분에 추가됩니다.]

[초월성의 단서를 추가 획득하였습니다.]

크리오스와 티폰을 따돌렸다고 해도, 연우를 쫓는 티탄-기가스의 추격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아니, 도리어 거세졌다.

그들은 이 기회를 빌려 디스 플루토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 놓겠다는 듯, 추후에 일말의 문제 거리가 될 수 있는 싹마저 전부 제거하겠다는 듯이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당연하지만, 그들을 막아서는 건 거의 연우의 몫이었다.

샤논과 한령, 레베카, 부를 풀어 저들의 발목을 붙잡는 한편, 불의 날개를 활짝 펼치면서 적들의 사이를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다.

이제는 얼마나 많은 권속들을 베고, 신살을 이뤘는지도 헷갈릴 정도였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격전을 치러서 그런지, 현자의 돌이 너무 많이 과열되어 있었다. 효율 좋은 영혼석의 보라색 마력을 사용하고, 4차 각성을 이룬 마룡신체가 있다지만. 그래도 정신적으로 받는 피로까지 덜어 줄 정도는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신살을 이룰 때마다 저들이 가진 신성을 소량이나마 강탈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여태껏 신성에 대해서 이론적으로만 알 뿐, 정확한 사용법을 몰랐던 연우였지만.

하데스로부터 왕좌를 물려받고 나니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신성이란, ‘격이 있을 수 있게’ 하는 힘이었다.

격이 크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건 아니다.

분명 체급이 달라지니 분쟁이 발생할 때에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너무 비대해졌을 경우에는 그만큼 무너질 가능성도 컸다.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영혼에 상당한 부담이 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충돌이 일어났을 때 공략할 곳이 많아지기도 했다.

하지만 많은 신성을 품고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신성은 격이 격으로서 유지될 수 있게 하는 힘. 쉽게 말해, 단단한 내구도를 다지게 해 주었다.

하지만 이 신성을 얻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많은 신앙을 모으거나, 그만큼 큰 깨달음을 얻어 아득한 초월성으로 대체하는 수가 전부였다.

하지만 이미 수많은 신도를 확보한 여러 신들과 다르게, 필멸자인 연우로서는 신성을 획득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격이 모자라 왕좌의 힘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연우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인 것이다.

그러나 신살을 이루면서 그들이 지녔던 신성을 강탈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부족분을 채우면서 내구도를 다지고, 왕좌의 힘을 조금씩 깨울 수 있었으니.

쿠르르릉-

콰콰쾅! 쾅!

[신성의 추가 획득으로 임시 잠금 처리되었던 권능, ‘어둠 속의 눈’을 해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권능, ‘어둠 속의 눈’을 사용, 명계의 법칙을 쫓기 시작합니다.]

아주 약간이지만 권능도 조금씩 깨우면서 왕좌의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여태껏 다른 신과 악마들로부터 부여받은 권능들은 뜻대로 제어하기가 쉽지 않아 날개로 묶어 낸 것이었지만, 왕좌의 힘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미 그가 확보한 신위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니. 자신의 것인데 사용하는 데 어려움을 느낄 리 없지 않은가.

쾅! 그렇게 얼마나 여의봉과 비그리드를 휘둘러 댔을까.

“헉, 헉, 헉.”

연우는 어느새 자신들이 명왕의 신전을 완전히 벗어나 목적지인 명부전까지 거의 다다랐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명왕의 신전과 명부전 사이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산맥, 크로노스의 사체가 보였던 것이다.

뱅그르르. 크로노스의 사체에 가까워질수록 품속에 있는 회중시계가 잘게 떨렸다. 칠흑왕의 형틀 세트도 똑같이 반응을 하는 중이었다.

크로노스 역시 칠흑의 힘을 품고 있으니. 저절로 호응을 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연우는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또 온다.”

저 너머로 새 추격대가 쫓아오는 중이었다.

「빌어먹을. 오늘 정말 원 없이 싸워 대는군. 올림포스 놈들은 대체 뭘 하는 거야? 저것들 안 막고.」

샤논은 질린다는 기색으로 투덜거렸다. 실컷 싸우면서 그만큼 성장할 수 있으니 즐겁기도 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이렇게 계속 반복하다 보면 지치기 마련이었다.

거기다.

『인간…… 이번에야말로 죽여 주마……!』

「저놈, 또 왔네? 질리지도 않나?」

선두에 아주 익숙한 면상이 있다는 점이었다.

이아페토스. 신격을 대거 방출하고 영락할 줄로만 알았던 녀석이,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다시 거인의 형상을 하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물론, 이전에 싸웠을 때에 비하면 한없이 약해져 있었지만, 그래도 여태 상대했던 하급 신격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녀석은 연우를 반드시 죽이겠다는 살의를 잔뜩 풍겨 대고 있었다. 이전에 받았던 수모를 되갚으려는 게 틀림없었다.

“왕이시여.”

그때, 디스 플루토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쪽을 쳐다봤지만.

“얼마 안 남았으니 먼저 올라가.”

연우는 대답 따윈 듣지 않겠다는 듯, 날개를 활짝 펼치면서 이아페토스 쪽으로 몸을 날렸다.

쐐애액-

몸에 많은 무리가 따랐지만, 이번에는 죽음과 투쟁의 날개를 전부 뽑아 올렸다. 수많은 권능들이 톱니바퀴처럼 굴러가기 시작하면서 왕좌의 권능에 힘을 바짝 실었다.

연우는 이아페토스와 정면에서 충돌했다.

큭, 하는 소리와 함께 이아페토스가 뒤로 크게 튕겨 났다. 녀석의 눈이 부릅떠졌다. 설마하니 자신이 힘에서 밀릴 줄은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못 본 몇 달 사이에 저렇게 강해질 수 있는 거지?

하지만 연우는 그의 의문 따윈 들어줄 생각도 없다는 듯, 다시 날개로 한껏 홰를 치면서 달려들었다.

이미 몇 번씩 사용한 까닭에 하늘 날개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안에 승부를 봐야만 했다.

콰아앙-

끝에 비그리드가 꽂힌 여의봉을 거칠게 휘둘렀다. 녀석의 가슴팍이 크게 벌어지면서 검은 연기가 피분수처럼 치솟았다. 크로노스의 시정. 검은 연기는 저절로 칠흑왕의 절망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아페토스의 두 눈이 시뻘겋게 변했다. 또 이전과 같은 현상이었다. 자신의 힘을 저렇게 빼앗아가는 걸 도무지 용납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연우는 만만치 않았다. 충돌이 벌어질 때마다 이아페토스의 거체에는 커다란 상처가 늘어났다. 그럴수록 연우도 점점 육체적인 한계에 부딪쳐 가면서 내상을 입었다. 이아페토스의 무력 때문에 팔다리가 몇 번씩 부러졌다가 재생되기를 반복했다.

콰르르-

그러다 큰 충돌과 함께 둘이 서로 크게 밀려나고.

다시 승부를 결착짓기 위해 날개를 한껏 펼치고자 했을 때. 이변이 발생했다.

연우가 미처 눈치를 채기도 전에 검은 해일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여왕! 이게 무……!』

이아페토스는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검은 해일에 ‘먹혔’다. 하지만 검은 해일은 그것으로도 모자라다는 듯, 연우도 집어삼키고자 했다.

페르세포네? 대지모신? 아니면 비에라 듄? 그게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끈적끈적한 늪처럼 보이는 검은 해일은 그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형!』

정우도 위기를 깨닫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연우는 이를 악물면서 다시 한 번 더 날개로 홰를 치면서 재빨리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곳곳에 뿌려 뒀던 권속과 망령들도 전부 거둬들였다. 저 어둠 속에 먹힌다면 이들도 되찾기 힘들 게 분명했다.

‘저게 디스 플루토 쪽으로 오게 해서는 안 돼.’

연우는 명부전 쪽을 재빨리 탐색하고 나서 이를 악물었다. 디스 플루토가 어느새 빛의 기둥에 도착해 있었다. 칸 등은 연우의 지시에 따라 디스 플루토들이 빛의 기둥을 타고 위쪽 층계로 넘어갈 수 있게 돕는 중이었다.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그래서 방향을 다른 쪽으로 틀려는데.

“젠장……!”

검은 해일은 연우의 생각 따윈 알고 있다는 듯, 급격히 방향을 틀면서 빛의 기둥 쪽으로 움직였다.

연우는 다시 같은 방향으로 되돌아와 권능을 잇달아 뿌려 댔다. 어떻게든 해일의 접근을 지연시키고자 했지만, 스킬이 닿은 자리만 잠시 파일 뿐 전혀 멈출 기미가 없었다.

내. 놓. 아. 라.

왕. 좌.를.

해일에서 풍기는 의념도 연우를 짜증 나게 만들었다. 페르세포네인지, 비에라 듄인지 알기 힘들 정도로 뒤섞인 대지모신의 목소리는 연우에 대한 집착으로 가득했다.

그러다 연우는 어느새 빛의 기둥이 있는 곳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문제는 아직 절반도 안 되는 인원만 빛의 기둥을 타고 넘어갔다는 점이었다.

이대로는 정말 위급하다.

연우는 결국 물러서기를 멈추고, 여의봉을 꽉 쥐었다. 해일에 먹힐 위험이 있더라도 일단은 저것부터 막아야만 했다.

[시차 괴리]

그런 위급한 순간 속에서. 연우는 타개책을 마련하고자 했다.

하지만 어떻게?

대지모신과 페르세포네의 마수가 턱밑까지 쫓아왔다. 아무리 죽음과 투쟁의 날개가 있다고 해도 홀로 막기엔 요원했다. 도움이 있어야 하는데…… 아테나와 헤르메스 등이 저쪽에 발목이 묶인 이상 그러기도 힘들었다.

그렇다면…….

그 순간, 연우는 자신을 보고 있는 수많은 시선을 읽을 수 있었다.

[태산부군이 당신의 왕좌를 지켜봅니다.]

[크시티가르바가 당신의 왕좌를 지켜봅니다.]

[이자나미가 당신의 왕좌를 지켜봅니다.]

……

모든 죽음의 신과 악마들의 시선.

그들은 연우가 하데스로부터 왕좌를 선양받고 난 뒤부터 별다른 말이나 반응 없이 가만히 그를 지켜보고만 있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몰랐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저들은 전부 그를 도와주려 하고 있었다.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지켜보고 시험해야 할 대상이 아닌. 하데스의 후왕으로서, 그의 후계로서, 자신들과 ‘동등한’ 위치에 놓고 보고 있었다. 당장은 그렇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서.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연우는 자신이 새로운 패를 가졌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시간이 되돌아오고, 대지모신의 검은 해일이 바로 직전까지 치닫는 순간.

연우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이곳으로 오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화아악-

연우의 몸을 따라 검고 붉은 빛무리가 폭발하듯이 팽창했다. 죽음의 날개가 다른 어느 때보다도 화려하게 불타올랐다.

강신(降神).

모든 죽음의 신과 악마들. 666명의 초월자들이 일제히 연우의 육체 위로 강림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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