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천동(天動) (1)
[크시티가르바가 강신을 종료하였습니다.]
[태산부군이 강신을 종료하였습니다.]
[아이쉬마-다이바가 강신을 종료하였습니다.]
……
털썩-
연우는 강한 탈력감을 느끼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육체를 꽉 채워 주던 영력이 다시 안쪽으로 말려 들어가고, 맹렬하게 돌아가던 드래곤 하트와 현자의 돌도 서서히 가동이 정지되었다.
666명에 달하는 초월자들의 강신.
비록 강신이 이뤄진 건 5분 남짓에 불과한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지만. 그것이 남긴 여파는 만만치 않았다.
하늘 날개는 당분간 발동하는 게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쿨타임이 길어졌다.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만약 드래곤 하트라는 만능 보구가 만들어지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하아, 하아, 하아.”
연우는 숨을 크게 내쉴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대로 까딱했다가는 체력 방전으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데도 깊이가 보이지 않을 만큼 무한한 마력을 지닌 현자의 돌은 보라색 기운을 공급하면서 어떻게든 조금씩 피로를 덜어 내는 중이었다.
그러다 어느 정도 정신이 들었을 때, 연우는 겨우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필 수 있었다.
곳곳이 망가져 있었다.
스테이지가 맞나 싶을 정도로 대지 곳곳이 뒤집혀 형체를 알아 보기 힘들었다. 하늘을 비롯한 공간 군데군데엔 신력이 짙게 배어 크고 작은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거칠게도 날뛰었군.’
거대 포탈을 잠그느라 정신이 없어서 미처 몰랐는데. 대지모신이 남긴 흔적은 너무 컸다. 단순히 의지를 내비친 것만으로도 스테이지가 이렇게 흔들릴 정도인데.
그렇다면 대체 대지모신의 본체가 등장한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카인!”
그때, 일행들이 달려왔다. 칸은 연우의 이곳저곳을 살피더니 자가 회복력을 끌어 올리는 선술을 써서 도왔다. 브라함도 곧바로 신성력으로 치유 마법을 전개했다.
외상이 빠르게 아무는 것을 보면서. 연우는 칸에게 물었다.
“도일과 헤노바는?”
“도일은 여전히 자고 있어. 헤노바 님은 다행히 빅토리아가 탑 외 지역으로 미리 피신시켜서 아무 문제 없으시고.”
연우는 다행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디스 플루토도 모두 무사히 탈출했다.”
연우는 디스 플루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친 병사들이 새로운 주인을 맞기 위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연우는 그럴 필요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이 지친 만큼, 아니, 그보다 더 지친 사람들이었다.
하루아침에 평생을 모시던 주인과 터전을 잃었으니. 마음이 많이 심란할 게 분명했다. 그들에게는 복잡한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휴식 시간이 필요했다.
디스 플루토의 병사들은 감사하다며 목례를 취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최전성기 때에 비하면 절반의 절반도 남지 않은 초라한 전력이었지만.
그들의 두 눈은 다른 어느 때보다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혹시 좌절감에 허덕이면 어떡하나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보다.’
연우는 자신의 망막에 떠오른 메시지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든 퀘스트(엑소더스)의 첫 번째 달성 조건을 완수하였습니다.]
‘왜 아직 이것밖에 인정되지 않는 거지?’
엑소더스 퀘스트의 첫 번째 달성 조건은 ‘디스 플루토의 신임을 살 것’.
이것이야 원래 여러 전투를 전전하면서 이미 쌓아 뒀었고, 대지모신의 마수로부터 탈출을 하면서 후왕으로서 인정도 받았기 때문에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두 번째 달성 조건이었던 ‘타르타로스를 탈출할 것’이 성공했다는 메시지가 아직 떠오르질 않아 이상했다.
‘뭐지? 아직 엑소더스가 끝나지 않았다는 건가?’
혹시 타르타로스에 빠뜨린 병사라도 있는 걸까? 너무나 큰 혼란 중이었으니 낙오자가 한두 명 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시스템이 그 정도를 판별하지 못할 리 없었다.
아니면. 대지모신이 어떤 다른 위협을 한다는 걸까?
‘하지만 어떻게?’
연우는 관리자들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최고 관리자들은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우선 자신들의 권한으로 스테이지 미션을 일시 중단하고, 백업 데이터를 이용해서 망가진 곳들을 빠르게 수복하고 있는 중이었다. 때마침 이블케가 외눈 안경을 고쳐 쓰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오효효효! ### 님, 23층에 이어서 벌써 두 번째시군요. 그러고 보니 11층에서도 오래 계시면서 꽤 큰 활약상을 보이셨었지요? 아무래도 10층 단위로 스테이지를 격파하는 게 취미이신가 봅니다.”
외눈 안경 너머로, 옆으로 쭉 찢어진 눈이 호선을 그렸다.
“다음에 이렇게 부술 때는 미리 언질이라도 주시지요. 그래야 저희도 미리 마음을 먹고 있지 않겠습니까, 오효오효!”
자신이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냐만은. 연우는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부터는 그러도록 하지.”
“오효효. 좋습니다, 그런 마인드. 역시 ### 님은 이런 쪽으로 말씀이 아주 잘 통해서 좋단 말이지요. 그리고.”
이블케의 눈이 좁아졌다.
“이번 일에 대해 참고인 조사가 필요할 듯해서 말이죠. 저힐 따라가 주실 수 있겠습니까?”
관리자들은 모든 층계를 면밀히 감시하면서 관리를 한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영역도 많았다.
초월자들과 관리자들 사이에는 플레이어들이 모르는, 여러 가지 규약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최소한 내가 여러 번 관찰했을 때에는, 초월자들은 관리자들에게, 관리자들은 초월자들에게 서로 관심을 두기 싫어하는 분위기였다.
98층의 천계나, 끝자리 0번대 층계에 숨겨진 히든 스테이지들이 보통 그런 경우였다.
타르타로스도 마찬가지. 하데스의 설정에 의해, 관리자들은 타르타로스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이번 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당연히 그들로서도 어떻게 된 일인지 정확한 진상 조사를 필요로 할 수밖에.
그리고 이번엔 연우도 초월자라고 하면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꺼려 하는 관리자들을 이용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정도는 협조할 생각이었다.
돕지 않으면 추후에 어떤 불이익이 따를지도 모르는 일이고.
결론을 내린 듯한 연우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이블케는 어느새 자신을 둘러싼 날카로운 시선들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새 디스 플루토가 전부 일어서 이블케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던 것이다. 여전히 피가 마르지 않은 창날이 그에게로 향했다. 살벌한 기세가 흘렀다.
하지만 이블케는 그런 살벌한 기세를 맞고도 아무렇지 않은지, 가볍게 외눈 안경을 고쳐 쓰면서 병사들을 둘러봤다.
“으음?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인가요? 제가 명계의 분들께 밉보일 짓이라도 하였나요? 이래 봬도 공손함을 빼면 시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온 몸입니다만. 흐음!”
“허락 없이, 우리의 왕을 함부로 데려가지 못한다.”
“우리의 왕?”
이블케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뭔가를 깨닫고 곧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지 않아도 명계의 왕이 바뀌었다고 갑자기 시스템 공지가 떠서 저희도 뭔가 싶었었는데…… 그 대상이, 아차. 말을 해서는 안 되는 비밀이었군요. 흠! 하여간 흥미로워요!”
이블케도 이번 디스 플루토의 엑소더스 이벤트가 명계의 왕좌와 어떤 관련이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설마 연우가 그 주인공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던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플레이어가 명계의 왕좌를 물려 받을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으니까. 아무리 연우라고 해도, 이블케의 상식선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었던 파격적인 사건이었다.
그제야 디스 플루토들도 자신들이 무슨 실수를 저지른 건가 싶어 슬쩍 연우를 쳐다봤다.
연우는 가면 속에서 쓰게 웃었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 굴면서 이블케에게 말했다.
“조사는 돕도록 하지. 대신에.”
“이렇게 해 달라는 것이지요?”
이블케는 입에 지퍼를 잠그는 시늉을 했다.
연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블케는 익살맞게 웃었다.
“오효효! 그 정도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른 관리자들께도 똑같이 해 드리지요.”
이런 재미난 것을 다른 사람에게 굳이 알려 줄 필요는 없잖습니까. 이블케는 굳이 뒷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에게 연우는 언제나 따분하고 지루하던 일상에 내리는 단비 같은 존재였다.
“다만, 친애하는 ### 님의 벗이자, 최고 관리자로서 한 가지 조언을 드리자면.”
순간, 외눈 안경 속 이블케의 눈이 번들거렸다.
“저토록 많은 명계의 병사들이 이곳, 플레이어들의 영역인 스테이지에 들어온 것은 영역 침범이라고도 할 수 있는 행위랍니다. 대지모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저쪽에도 똑같이 억제력이 발생할 수 있으니, 미리 주의하시는 게 좋으실 듯합니다만.”
디스 플루토에는 비록 하급이기는 해도 신격에 달하는 존재들이 더러 있었다.
기간토마키아에서 약자로 분류되어서 그렇지, 면면을 따진다면 일반 플레이어들은 어떻게 범접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자들.
그런 이들이 수백이나 뭉쳐 있으니, 스테이지의 밸런스를 깨기 충분한 전력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스테이지를 최우선시하는 시스템으로서, 디스 플루토를 이레귤러로 처리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기미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타르타로스의 환경에 익숙한 디스 플루토는 새롭게 바뀐 스테이지의 공기가 맞지 않는 듯, 안색이 하나같이 창백했다. 그들이 가진 힘이 조금씩 제어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지금 당장은 작은 제지로 끝날지 모르지만, 여차하면 억제력이 발동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연우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퀘스트의 세 번째 달성 조건이었던 ‘새로운 거류지와 베이스 캠프 설치’는 이미 생각해 둔 바가 따로 있었다.
‘부의 던전이라면, 충분할 테지.’
레드 드래곤의 인트레니안을 여러 개 이어 붙여 만든 던전은 이제 거의 완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디스 플루토를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크기였다. 환경 설정을 타르타로스 쪽으로 맞춘다면 새로운 거류지로서는 최적의 장소인 셈이었다.
여기라면 시스템도 크게 손을 대지 않을 것이다.
디스 플루토를 꺼내 스테이지 공략을 시도한다면 이레귤러로 간주, 억제력이 작동할 테지만, 단순히 수용만 한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그러다 나중에 탈각을 이루고, 왕좌에 제대로 앉았을 때 그들을 꺼내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이블케는 연우의 그런 생각을 이미 짐작하고 있다는 듯, 검지를 좌우로 까닥거렸다.
“제 말은 그 뜻이 아니랍니다. 시스템의 맹점이야 ### 님이 어련히 알아서 하실까요. 하지만 이 탑에서는 억제력이란 것이 단순히 시스템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서 문제이지요.”
“……?”
연우는 이블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시스템 외에 다른 억제력이 존재한다고? 그런 말은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정우에게 의념을 보내 의견을 물었지만.
『몰라, 나도. 그런 게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역시나 모른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그래서 그게 무슨 뜻이냐며 물으려는데.
쿠르릉, 쿠릉-
갑자기 고요했던 하늘이 크게 용틀임하기 시작했다.
복원을 진행하던 최고 관리자들이 하나같이 작업을 중단하고, 인상을 찡그리면서 고개를 위로 들었다.
디스 플루토를 비롯한 일행들도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창과 방패를 세게 움켜쥐면서 위쪽을 올려다봤다.
하늘이…… 뒤틀리고 있었다.
공간이 이리저리 구겨지는 현상은 어떻게 말로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 두렵기도 하고, 경이롭기도 했다. 어디가 왼쪽이고 어디가 오른쪽인지 방향 구분도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다 쩌거걱 하고 하늘이 갈라지면서, 거대한 균열 사이로 여러 색채를 자랑하는 오로라가 새어 나와 허공을 가득 물들이고, 그 사이로 짙은 안개가 잔뜩 뭉쳤다.
“……!”
촤르륵, 촤륵-
그 모습을 보면서. 연우는 소름이 돋고 말았다. 용체 각성을 시도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피부가 저절로 뒤집히면서 용의 비늘이 올라왔다. 비늘은 다른 어느 때보다 빳빳하게 일어나 있었다. 그만큼 바짝 긴장했다는 뜻이었다.
저 끝을 모르는 존재에 의해.
대지모신이 직접 현신을 시도한다면 저러할까.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할지도 몰랐다.
어마어마한 존재감이 부서진 하늘을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최고 관리자들이 설정한 억제력을 억지로 밀어내면서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스테이지를 능가하는 압박감을 내포하고 있었다.
“저게, 대체……?”
디스 플루토도 바짝 긴장할 정도였다. 여태 여러 차례 티폰도 상대했던 그들이었지만, 저건 그딴 것과 비교할 만한 게 아니었다.
하늘이 움직인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연우가 난생처음 보는 것이면서도, 낯이 익은 현상이었다.
정우가 어느새 연우 옆에 영체를 드러내며 착잡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올포원.』
지난 수천 년 동안 수많은 플레이어들의 장벽이 되었고, 초월자들에게는 증오의 대상이, 관리자들에게는 예외의 대상이었던 존재가.
이곳에 강림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