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천동(天動) (3)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회중시계에 있는 내내. 정우는 계속 스스로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타르타로스에 변란이 발생하고. 하데스가 눈을 감고. 대지모신이 쫓아오고. 스테이지로 탈출을 하는 동안.
그는 형에게 이렇다 할 도움이 되지 못했단 사실이 계속 마음에 걸리기만 했다.
무엇이라도 하고 싶은데. 영혼밖에 없는 몸으로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올포원까지 등장한 지금. 그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오래전에, 눈을 감기 전에 느꼈던 그 기분. 수없이 반복했던 특전에서 몇 번씩이고 느꼈던 그 감정이었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던, 그런 느낌이건만.
어째서 다시 이런 더러운 기분을 느껴야 하는 건지.
결국 난 끝까지 형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건가, 그렇게 자책을 하고 있을 때.
-어긋났던 운과 짧았던 명이라 해도, 결국 주천(周天)을 따라 계속 돌고 돌더니. 결국 하나의 상(像)을 그려 내고 말았구나.
올포원이 툭 하고 내뱉은 말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 순간, 정우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그건 스스로도 모르던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꿰뚫어 본 말이었다. 여태 ‘혹시나’ 했던 것이 ‘진짜’가 되어 버린 순간이라 충격이 크긴 했지만.
그보다 이 위기를 뒤집을 수 있는 타개책의 힌트를 얻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해 보자.’
그래서 정우는 빠르게 머릿속으로 계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리내.’
오랜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다행히 친구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 주인, 네가 가려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고마워.’
『그런 말 하지 마라.』
네메시스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면서 말을 이었다.
『친구 사이에는 고맙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니.』
그 말이 너무 고마워서, 정우는 씩 웃고 말았다.
‘예나 지금이나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은 그 중2 감성은 여전하구나?’
『……서두르도록 하지.』
그렇게 멀어지는 네메시스를 보면서.
정우는 다시 검을 쥘 수 있었다.
* * *
“차정우-!!”
저 뒤에서 형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 목소리는 어느새 저만치 멀리 사라지고 없었다.
피식-
정우는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걱정 하나는 너무 많단 말이야. 누가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이미 죽었는데 또 어떻게 죽겠어? 안 그래, 미리내?”
정우의 뒤를 따르던 네메시스는 어느새 검은색 비늘을 벗고 황금색으로 빛나는 환룡으로 변해 있었다.
네메시스는 꿈과 공허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 외양은 쉽게 변경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옛 모습을 유지하고자 했다. 전생인 미리내일 때로. 일종의 의식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정우와 네메시스는 과거로 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15년 전. 탑의 세계라는 거대한 적을 맞닥뜨렸을 때.
그들은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아군이었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마지막 남은 존재이기도 했다. 그러니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그들은 서로 눈빛만 봐도 속내를 알 수 있었다.
물론, 둘의 대화 패턴도 예전과 다를 게 없었다.
『전 주인.』
“왜?”
『유치하다.』
“…….”
『좀 더 분발하도록.』
정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네메시스를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네메시스가 가볍게 웃음을 흘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미안해. 이런 위험한 일에 같이 말려들게 해서.”
정우는 이미 ‘죽음’을 한번 겪어 보고도, 또 죽을지도 모르는 길로 걸어가는 네메시스에게 진심으로 미안했다. 두 번의 경험 모두 자신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허튼소리 마라. 이건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아무리 너희 형제들에게 내가 ‘주인’이라고 말하고 있어도, 난 나의 자유 의사를 가장 중요시한다. 그리고 이건 내 선택이다.』
네메시스는 정색을 하면서 정우의 사과를 묵살했다.
『오랫동안 전 주인, 널 기다렸다. 그리고 다시 만났고, 이렇게 함께할 수 있었지. 그 뒤도 내가 선택한 것이니,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나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다.』
정우는 빤히 네메시스를 바라봤다.
“미리내.”
『흥. 감동 같은 건 받을 필요 없…….』
“그 중2중2한 감성 좀 어떻게 안 되냐?”
『…….』
“풉.”
『전 주인.』
“왜?”
『그 머리통 좀 물어뜯어도 되나?』
“기각. 아직 할 게 좀 많아서.”
정우는 피식 웃으면서 몸을 반대로 돌렸다.
“알았어. 하여간 이제.”
『시작하지.』
네메시스는 커다란 머리를 크게 주억거리면서 서서히 허공 속으로 녹아들었다. 공간이 갈라지고 검은 먹물 같은 것이 번지며, 공허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꿈꾸는 미몽]
정우를 둘러싼 세계가 조금씩 변질되면서 몽상 세계와 현실 세계 간에 중첩이 이뤄졌다.
이것으로 현실에 어느 정도 간섭을 하는 게 가능해졌다. 브라함이 심상 세계를 연구하면서 그들에게 가르쳐 준 결계를 바탕으로 구축한 힘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한껏 느려졌던 세상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정우는 거대한 손 같은 것이 덮쳐 온다는 느낌을 받았다. 원래대로라면 연우를 덮쳐 명계의 왕좌를 강탈했을 올포원의 손길이었지만.
정우는 그 앞을 가로막으면서 드래곤 슬레이어를 뽑아 횡으로 크게 휘둘렀다.
새하얀 칼날이 시린 빛을 터뜨렸다. 검 끝에서 시작된 빛의 기둥은 단번에 공간을 자르면서 올포원의 손길도 날려 버렸다.
콰아앙-
〈빛의 파도〉. 한때 헤븐윙을 상징하던 시그니처 스킬이 잔뜩 번져 나가면서 하늘을 가득 물들이고, 올포원이 뿌리던 오로라까지 밀어냈다.
잔뜩 뻗어 나간 뇌전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 그물망처럼 번져 가면서 올포원을 이루던 안개를 몇 번이고 흔들어 놓았다.
콰콰쾅, 콰르릉, 콰르르-
쿠쿠쿠쿵!
세상이 이대로 무너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세게 이어지는 잔여 파장.
여태껏 아무도 올포원을 감당하지 못했던 것을 감안하면, 실로 대단한 일격이었다. 처음으로 그의 공세를 막아내고 반격까지 가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랭킹 6위의 하이 랭커, 헤븐윙.
그가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한 것이다.
삐그덕-
하지만 아직 회복이 덜 된 탓일까.
정우는 몸 안쪽에서 들린 소리에 머리를 옆으로 젖히면서 팔을 크게 돌렸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의 형체를 이루고 있던 영력이 살짝 흐트러졌다가 원상 복구되었다.
“간만에 칼 좀 쓰려니까, 왜 이렇게 힘 조절이 잘 안 되니.”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닌가?』
“괜찮아. 괜찮아. 여태껏 푹 자고, 쉬고 했다고. 그리고 사람이 양심이 있으면 오늘은 밥값 좀 해야지. 언제까지 동네 백수처럼 형한테 기생해서 살 수는 없잖아?”
정우는 익살맞게 웃는 얼굴로 말하면서도 두 눈만은 예리하게 올포원에게 단단히 고정시켜 두고 있었다.
쿠르르릉-
빛의 파도는 계속 올포원을 둘러싸던 오로라를 밀어내고 있었다. 비록 밀려난 자리를 다시 잿빛 안개가 채웠지만.
아주 잠깐. 정우는 그 너머에 있는 흐릿한 뭔가를 볼 수 있었다.
그건 분명히 핵이었다.
올포원의 본체가 있을 게 분명한.
위치를 특정했다면, 더 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정우는 하늘 날개를 어느 때보다 크게 활짝 펼치면서 회중시계 속에서 수없이 메모라이즈해 뒀던 마법들을 일제히 개방했다.
〈무차별 난사〉. 그를 중심으로 수많은 마방진이 하늘을 빼곡하게 물들이고. 올포원에게로 마법 포격이 일제히 시작되었다.
퍼퍼퍼펑-
마법 포격은 올포원의 안개를 수도 없이 찢어 놓았다. 그럴 때마다 안개는 빈자리를 도로 되찾으면서 빛 망울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에 따라 스테이지를 구성하던 법칙이 움직였다. 법칙에 새겨진 명령어는 ‘차정우를 배제하라’였다.
그런 명령어는 샤논이나 칸을 비롯한 이들에게는 속절없이 따를 수밖에 없는 강렬한 제약으로 다가왔지만.
이미 살아생전에 탈각을 눈앞까지 두고 있었던 정우에게는 조금 부담만 될 뿐, 손발을 묶는 사슬까지는 되지 못했다.
특히 정우는 고룡 칼라투스의 총애를 받던 후계.
당연히 법칙에 간섭할 권한은 그에게도 어느 정도 주어져 있었다. 올포원을 감당할 정도는 아니어도, 최소한 자신에게 해가 될 것들을 밀어내는 정도는 가능했다.
콰콰쾅!
덕분에 정우는 하늘을 빠르게 가로지를 수 있었다.
참격을 휘두를 때마다 안개가 갈라지고, 오로라가 무너졌다. 촉수처럼 뻗쳐 나오는 것들은 무차별 난사에 벌집처럼 헤집어지다가 사라졌다.
그 과정에서.
정우는 자기도 모르게 기시감을 느꼈다.
‘이거 꼭…… 그때 같잖아.’
77층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레드 드래곤의 포위망을 뚫었을 당시. 처절하게 싸우던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 더럽네.’
정우는 차갑게 눈을 빛내면서 다시 한 번 더 드래곤 슬레이어를 내리그었다.
쿠와앙-
잿빛 안개가 크게 갈라지고.
어느새 정우는 중심부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제법이구나.』
이상하게도, 분명히 사람이 있어야 할 중심부는 텅 비어 있었다.
마치 원래 그래야 하는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따라 둥근 결계 같은 것만 구축된 게 전부였다.
흐릿하게 공간이 굴절되면서 언뜻 사람 같은 모양이 보이는 것 같았지만. 용마안을 뜬 정우의 눈에는 아무것도 잡히질 않았다.
심상 세계.
이곳은 사실 77층에 있는 올포원이 의념만으로 구성한 공간이었다.
올포원은 〈천리안〉을 통해 어느 층계든 편하게 관찰할 수 있었고, 너무 강한 존재이기 때문에 단순히 의념을 투영하는 것만으로도 스테이지를 흔들고, 물리적 법칙을 구현할 수 있는 심상 세계를 구축하는 게 가능했다.
브라함이 갖가지 마법진과 연금술을 이용해서 심상 세계를 겨우 구축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도무지 말도 안 되는 능력인 것이다.
목소리는 바로 그 속에서 빚어지고 있었다.
『여기까지 올 줄도 알고. 하긴 넌 예전에도 그러했지. 아무리 시련과 난관이 닥쳐도 스스로 헤쳐 나갈 줄 아는. 그런 모습이 숙명에 억류된 나와 너무나 달라, 그래서 마음에 들었었지.』
기분 좋게 웃는 목소리.
하지만 정우는 표정이 딱딱했다. 그러다 고개를 외로 꼬면서 투덜거렸다.
『거, 꼰대 같은 말투는 이제 좀 안 쓰면 안 됩니까?』
『꼰대라. 그 말도 일리는 있군. 틀린 말은 아니야.』
올포원이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났다. 투명한 결계가 잘게 떨렸다.
그러다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 여기까지 온 게, 날 설득하려 온 건 아닌 것 같고. 어떻게 막을 방법이 있다는 생각으로 온 건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있는 것 같습니다.』
순간, 정우는 보이지 않는 시선이 자신을 위아래로 살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힘으로?』
의문이 가득 담긴 목소리.
그것은 정우를 깔보거나 하는 게 아니었다.
정말 순수한 질문이었다.
올포원은 한때 용종을 멸살시키기도 했던 존재. 무왕과 여름여왕이 끝내 넘지 못한 장벽이기도 했다.
아무리 정우가 헤븐윙으로서의 힘을 발현한다고 해도, 절대 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당신이 했던 말이 힌트가 되었습니다.』
『내가 했던 말?』
『네. 지금의 제가, 세상에 맺힌 상(像)이라고 하셨던 말씀 말입니다.』
순간, 올포원이 침음을 삼켰다. 쓴웃음이 번졌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아나?』
『알다마다요.』
촤르륵, 촤륵-
그때, 정우의 영체를 구성하고 있던 입자들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입자는 하나하나가 활자가 되었다. 그리고 활자는 다시 서로 이어지면서 ‘문장’이 되어 실타래처럼 한 올 한 올 풀려 나왔다.
‘일기장’을 구성하던 활자들. 문장은 다시 ‘문단’이 되어 올포원이 구성하고 있던 심상 세계를 침범하기 시작했다.
일기장은 수많은 특전을 통해, 무수히 많은 사념을 겹겹이 쌓았고, 단단하기가 올포원의 심상 세계도 위협할 정도였다. 또한,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단단한 의지를 품고 있었다.
‘정우’라는 의지를.
『여기 있는 제가, 사념체(思念體)라는 말씀이라면 모를 리가 없잖습니까?』
* * *
“제기랄……!”
연우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이를 악물었다.
우르르-
하늘이 잘게 떨렸다.
정우가 잿빛 안개로 들어간 뒤로도, 격전은 계속되고 있는지 스테이지는 여전히 요란하기만 했다.
갖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헝클여 놓았다.
올포원을 상대한다고? 저런 몸으로? 회중시계에서 아무리 영력을 많이 비축했다고 해도, 힘을 소비할수록 방전은 빠를 수밖에 없다. 더구나 현재 정우는 최대한 안정을 해야 하는 시기였다.
아니, 그보다. 방전 직전까지 간다면 비밀을 숨길 수가 없게 된다.
만약 ‘비밀’을 알게 된다면? 정우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얼마나 충격이 클지, 도무지 짐작도 가질 않았다.
그러니 막아야만 했다.
하지만 여전히 채널링은 막혀 버린 채, 도무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현자의 돌의 도움을 받아 재생 스킬이 발현되고 있지만, 아직 움직이기엔 역부족이었다.
다른 방법이, 어디 없을까?
나를 대신해서 정우를 도와주고 구해 줄 만한 손길이 없을까?
하지만 좀처럼 생각이 떠오르질 않았다. 이대로 올포원에게 무너져야만 하는 걸까.
간절한 마음이, 조바심으로 얼룩진 마음이, 그를 애타게 만들고 있었다.
그때.
지이이이잉-
손발과 목에 착용하고 있던 칠흑왕의 형틀이 일제히 크게 진동했다. 마치 연우의 멍청함을 비웃듯이.
『멍청한 놈.』
그리고 머릿속으로 어떤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성.
그놈이었다.
『이제 좀 쓸 만해진다 싶더니. 어째 이것밖에 되질 않는 건지. 아직도 모자라, 아주. 그릇을 갖추고도 왜 그것밖에 못 하는 거냐?』
가볍게 섞인 비웃음.
『어쩔 수 없군. 힘이란 걸 어떻게 쓰는 건지, 보여 주마.』
그 순간.
거대한 칠흑 같은 어둠이 턱밑까지 차오르는 듯한 착각과 함께.
연우의 정신이 푹 하고 꺼졌다.
키키킥.
아스라이 그런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