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천동(天動) (3)
그곳에.
나는 없었다.
우리가 있을 뿐.
연우는 마성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의식이 한순간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정확하게 말하자면 의식이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거대한 무언가에 ‘녹아드는’ 기분이었다.
칠흑같이 어두워서 두렵기만 한 바닷물이 범람해 목 밑까지 차오른 기분.
거기에 가라앉으면 익사할 것 같아 자기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발버둥 쳤지만. 막상 들어오고 나니 안방처럼 너무 편안해서 쉽게 유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그렇게 넓던 바닷물이 전부 자신의 의식이 되어 있었다.
아늑함.
무한함.
어떻게 말로 표현하기가 너무 힘든 기분이었다.
무한한 힘이 샘솟고 있었다.
드래곤 하트와 공명하기 시작한 현자의 돌이 뿜어 대는 보라색 기운이 간만에 제대로 휘몰아치고 있었다.
화아아-
검은 기운이 파문을 그려 냈다. 보라색 잔상이 그의 몸을 타고 흘렀다.
콰콰콰-
드넓은 스테이지를 따라 강풍이 휘몰아쳤다. 마력을 사용하지 않으면 곧바로 휩쓸릴 것 같은 어마어마한 강풍. 지면이 깎여 나갔다. 스테이지를 가득 채우던 올포원의 중압감이 언제부턴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에 어마어마한 패기를 발산하는 연우가 서 있었다.
하늘 날개는 하늘에 다다를 것처럼 높게 일어서서 보라색으로 빛나는 중이었다.
방금 전까지 피로로 축 가라앉았던 몸이건만.
그게 전부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죽음의 신과 악마들을 강신시키면서 깨웠던 왕좌의 힘과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왕좌의 힘이 오로지 ‘죽음’만을 다룬다고 한다면, 지금은 그보다 더 높은 무언가를 다루는 것 같았다.
깊이를 모르는, 심연처럼 너무 깊은 무언가가 있었다.
그래서 날뛰고 싶었다.
이 넘쳐흐르는 힘을,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 힘을 마구 휘둘러서 모든 걸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래서.
“키키킥.”
연우는 기분이 너무 좋은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새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웃음소리가 이랬었나?
“키키킥. 바깥 공기는, 음, 그래. 좋아. 아주.”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대고 있었다. 흐뭇하게 웃으면서. 바깥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상쾌했다.
오랫동안 잠만 자다가 일어나니 몸이 찌뿌둥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한들 어떤가. 이렇게 기지개를 펴는 지금 순간이 즐겁고 유쾌한 것을. 올포원의 공기로 가득 찬 스테이지긴 하지만, 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기분 좋은 공간이었다.
아무래도 ‘그릇’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잘 빚어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키키키킥-
그런 웃음소리가 다시 흘러나오면서.
연우는 깨닫고 말았다.
지금의 자신은 차연우라는 존재이되, 차연우가 아니었다.
분명 의식은 차연우를 유지하고 있지만, 행동이나 버릇, 본능, 무의식 따위는 마성과 똑같았다. 아니, 의식마저도 마성에 물들면서 딱 잘라서 차연우라고 하기 힘들 것 같았다.
이 상쾌함!
파괴하고 싶은 충동!
이런 것들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은 아닐 테니까.
하지만.
“……뭐, 아무렴 어때.”
연우이되, 연우가 아닌 존재는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외로 꼬았다.
그의 두 눈은 불길하기만 한 보라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악마를 연상케 하는 가면이, 오늘따라 유달리 더 괴기하게 느껴졌다.
“저 빌어먹을 놈을 치워 버릴 수 있으면 그만이지.”
연우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손가락을 갈퀴처럼 가볍게 구부렸다. 그리고 옆으로 크게 휘둘렀다.
쩌거걱!
그 순간, 손가락이 스친 자리로 공간이 짓눌리면서 깨진 유리처럼 으깨진다 싶더니.
콰르릉, 콰콰콰-
공간이 그대로 부서지면서 다섯 개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파장이 하늘로 치달았다.
콰아아앙!
엄청난 폭발 소리와 함께 하늘을 가득 뒤덮고 있던 잿빛 안개와 오로라가 그대로 강제로 찢겨 나가면서.
그 안쪽에 있던 정우와 올포원의 심상 결계를 훤히 드러냈다.
“찾았다, 빌어먹을 놈.”
연우는 정우가 아닌 올포원의 심상 결계를 보면서 차갑게 웃더니.
쾅!
보라색 날개를 한껏 크게 펼치면서 단번에 하늘로 쇄도했다. 그가 있었던 자리로 엄청난 소닉붐이 일어나면서 지면을 위아래로 크게 뒤흔들었다.
스테이지가 격동했다.
* * *
사념체.
정우가 여기에 있는 자신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건,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따금 영체가 흐트러질 때가 있었지만, 너무 오랫동안 영혼석에 있으면서 특전을 반복해 영혼이 많이 쇠락해서 생긴 일이라고 여겼을 뿐이었다.
-쉬다 보면 괜찮아질 거다.
-누가 뭐래? 누가 들으면 내가 되게 걱정한 줄 알겠네. 말 안 해도 알거든요?
연우는 겉으로는 태연한 척해도, 속으로는 금방이라도 사라지는 게 아닐까 불안해하는 그를 언제나 달래려 애썼고.
그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리면서도, 형의 위로에서 적잖은 위안을 느꼈다.
그리고 실제로 형의 말마따나 휴식을 취하다 보면 영체가 다시 돌아왔기 때문에 머지않아 제 모습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여기기도 했다.
그러다 안정화가 끝나면 브라함처럼 호문클루스 같은 임시 육체를 만들어 들어갈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고.
그 후에는.
‘형과 같이 스테이지를 오를 수 있었겠지. 어쩌면 77층을 넘어서 그 위를 노려 볼 만했을지도.’
복수는 걱정하지도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형은 늘 마음먹은 일을 언제나 해내었고. 그도 다시 새로운 기회가 주어진다면 지난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자신을 옭아매는 그 많은 것들을 다 잘라 내고, 형과 함께, 새로운 연인과 함께, 몰랐던 딸과 함께, 층계를 오르고, 올포원을 넘어서, 저 시끄럽기만 한 천계까지 다다라 볼 생각이었다.
그러다 천계까지 넘어서, 99층도 뛰어넘고, 어느 누구도 닿지 못했다던 꼭대기 층, 100층에 다다를 수도 있을 거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때 가서 빌 소원도 생각해 두었었다.
‘모두가 행복하게 해 주세요.’
아주 사소한 것 같지만, 그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소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것들도 전부 부질 없게 되어 버렸네.’
자신은 정우가 아니었으니까.
정확하게는, 올포원의 말마따나 세상에 새겨진 상에 불과했다.
특전이 수없이 반복되면서 겹겹이 쌓인 사념, 즉, 활자와 데이터들의 군집체(群集體).
데이터의 양이 너무 방대한 나머지 영성을 띠게 되었고, 형체를 갖추기 위해 가장 가까운 정우의 형태를 띠게 된 것이다.
즉 자신은 일기장,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정우는 이런 사실을 아이테르와 격전을 치른 후부터 알아채고 있었다. 흐트러진 영체 사이로 언뜻 보이던 활자들은 분명히 일기장에서나 보던 것이었으니까.
영혼석에 갇혀 있던 자신을 속박하고, 수도 없이 괴롭혀 대던 그 활자가, 사실은 체내에 있었던 것이다.
마치 살과 피처럼. 자신을 이루는 구성 요소였다.
아마도 형은 이 사실을 진즉에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따금 던지는 시선하며 말투가 전부 그랬었다. 동생을 걱정하면서도 혹시나 진실을 알게 될까, 그래서 충격을 받고 실의에 잠길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이 묻어났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기도 했다.
‘거기서도 이상하긴 했지만. 하여간 거짓말 참 더럽게도 못해요.’
정우는 형을 생각하면서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찌 티가 나도 그렇게 잘 나는지. 듣자 하니 그 연기력에 속은 놈들이 한둘이 아니라던데,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다만, 한 가지 모호한 사실은 ‘진짜’ 정우가 어디에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수많은 특전 속에서도 유일하게 끊겼던 부분.
영혼석에 일기장을 만들어 낸 뒤부터 기억이 없는 것을 보면. 그리고 고룡 칼라투스가 아직 살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그것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막연하게 추측하는 게 전부였다.
‘불쌍한 우리 형, 결국엔 모든 게 제자리네.’
처음 잃어버린 동생을 되찾았다고 기뻐하던 모습이 선명한데. 아니란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그러면서도 여기 있는 동생의 분신이, 상처를 입지 않도록 남몰래 애써서 마음을 다스리려 했다고 생각하면. 참 불쌍해도 그런 불쌍한 인간이 없었다.
그래서.
정우는 그런 불쌍한 형을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다.
다시 질질 짤 게 훤히 보이지만. 그래도 마지막만큼은 도와주고 싶었다. 저 인성 못돼 먹었으면서도 착한 형을.
나이도 먹을 대로 먹은 남정네가 우는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게 참 다행이구나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촤라락-
정우는 자신을 구성하고 있던 모든 활자들을 풀어 헤쳤다. 문장과 문단을 이룬 활자는 쇠사슬이 되어 올포원을 구속하기 위해 심상 세계 전체로 퍼져 나갔다.
『이런다 한들,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거라는 것, 잘 알지 않은가?』
심상 세계의 중심에 있던 올포원의 시선이 계속 출력되는 활자들을 보면서 말했다.
정우는 심상 세계를 일기장의 데이터로 감염시키려 하고 있었다.
심상 세계는 시전자의 의념으로 구성된 별세계(別世界). 그런 곳이 다른 데이터로 덧씌워진다면 당연히 폐기 처분할 수밖에 없게 된다.
평범한 존재라면-심상 세계를 구현할 때부터 ‘평범’의 단계는 넘어선 것이지만-심상 세계를 빼앗기는 것만으로도 큰 타격을 입게 될 테지만.
〈천리안〉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올포원에게 심상 세계는 얼마든지 버렸다가 새로 취할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정우가 자신을 희생해 이번 심상 세계를 막는 데 성공하더라도, 올포원은 얼마든지 다시 심상 세계를 구현해서 연우에게 제재를 가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네. 알고 있습니다.』
정우도 모르는 게 아니었다.
그 역시 한때 무왕이나 여름여왕, 그리고 다른 아홉 왕들처럼 올포원을 넘어설 길을 도모하고자 했던 존재. 당연히 그에 대해서 알아낼 건 다 알아냈었다.
그리고 그 후에 내린 결과는 아주 간단했다.
접근 불가.
올포원은 바로 그런 존재였다.
『하지만 최소한 시간은 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시간을, 벌어?』
『아무리 당신이라 해도 폐기된 심상 세계를 다시 금방 만들어 내지는 못할 테니까요.』
올포원은 어이가 없다는 투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단순히 그런 생각인가? 내가 축지를 쓴다면? 직접 강림하면 그만일 텐데.』
하지만 정우의 두 눈은 여전히 고요했다.
『당신이 지금 그럴 수 없는 상태라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
『태초 신들과 창조신들의 반발이 최근 들어 거세다는 것,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처음으로 발목이 묶였다는 것도.』
『…….』
올포원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니 최소한 형이 도망칠 시간은 벌 수 있겠죠.』
『……그 뒤에 내가 찾아간다면?』
『물론, 당신이 쫓아오기는 할 테지만. 그래도 그사이에 형은 방법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당신도, 시스템도 피할 수 있는 방법을요. 지금은 좀 지쳐서 시간이 필요할 뿐이거든요.』
정우의 미소가 짙어졌다.
『워낙에 잔꾀가 많은 양반이라. 인성질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니까요?』
『으음!』
올포원은 침음을 흘렸다. 이렇게까지 나선다면 골치가 아파진다.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덤비는 사람만큼 골치 아픈 것도 없으니까.
아무리 사념체라고 해도 자아가 있는 이상, 죽는 게 두려울 텐데도 녀석은 자신의 형을 위해서 거리낌 없이 스스로를 내던지려 하고 있었다.
게다가 정우의 말마따나 그는 당장 35층에 직접 나타날 여건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내버려 둘 수도 없는 일.
익히 말했던 대로, 예외란 있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군. 개인적으로 자네는 마음에 들고, 또한 존경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겠어.』
쿠우우-
정우는 바짝 긴장했다. 지금부터가 진짜였으니까. 아무리 의념뿐이라고 해도, 올포원이 전력을 다한다면 힘들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도 최소한 ‘타격’은 입혔으면 하는 바람은 있었다. 그래야 연우가 도망칠 시간을 벌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그사이에 튀어. 제발.’
정우는 드래곤 슬레이어를 꽉 세게 움켜쥐었다. 하늘 날개를 활짝 펼치면서 심상 세계로 달려들었다. 출력되는 활자의 양도 그만큼 많아졌다.
그리고 충돌하려는 순간.
콰아아앙-
『뭐지?』
갑자기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잿빛 안개와 오로라가 큰 충격파와 함께 들썩이면서 그대로 ‘찢겨’ 나갔다.
이곳은 올포원이 구축한 세계. 웬만한 충격에는 꿈쩍도 않는 곳이었다.
올포원도 놀랐는지,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정우도 날아가다 말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고개를 돌렸다가 인상이 잔뜩 굳었다.
연우가, 아니, 연우를 닮은 무언가가 살벌한 기세를 흘리면서 그곳에 서 있었다.
음산하고 불길하기 짝이 없는 보라색 기운을 흘려 대고 있었다.
『형, 여긴 어떻게 왔……!』
정우가 되돌아가라며 소리치려 했지만, 연우를 닮은 무언가가 으르렁거리면서 말허리를 끊었다.
“누가 너더러 가짜라는 거냐, 멍청한 놈아!”
『뭔……!』
“넌 내 동생이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무슨 지랄을 하건 간에, 내 동생이다.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아.”
『……!』
정우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럴수록.
연우의 두 눈이 보라색 광망으로 번들거렸다.
“그러니 헛지랄 그만하고 돌아와. 어서!”
연우는 정우의 뒷말 따윈 듣지 않겠다는 듯, 오른손을 활짝 펼치면서 안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와류가 형성되면서 정우의 몸뚱이가 그대로 빨려 들어갔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정우가 어떻게 피할 새도 없었다.
동시에. 연우는 심상 세계 너머에 있을 올포원의 시선을 정확하게 노려보고, 정우를 데리고 곧바로 날개를 활짝 펼치며 잿빛 안개를 빠져나왔다.
올포원은 재빨리 연우와 정우를 잡기 위해 의념을 투사했다. 잿빛 안개가 뭉치면서 연우를 뒤쫓았다. 이렇게 가까워진 지금이, 빠르게 이레귤러들을 처치할 기회였다.
하지만.
“파우스트. 막아라.”
「분부를. 따릅. 니다.」
연우의 명령에 따라, 연우와 올포원 사이로 공간이 갈라지면서. 어느 때보다 크게 활활 타오르는 두 개의 인페르노 사이트가 나타났다.
마성과 하나가 된 연우로부터 칠흑을 건네받아, 일시적으로 전생의 기억과 힘을 되찾은 부-파우스트가 세상에 다시 나타나며 옛 숙적에게로 손길을 뻗었다.
콰아아앙-
커다란 폭발이 일어나면서 올포원의 안개가 부서져 튕겨 났다.
하지만 올포원을 잡기 위한 연우의 공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지이잉-
칠흑왕의 형틀이 일제히 몸을 떨었다.
권능의 발동이었다.
[‘사자 소환’이 발동되었습니다.]
[누구를 소환하시겠습니까?]
“여름여왕.”
크롸롸롸-
그 순간, 하늘이 갈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