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천동(天動) (4)
『형, 이게 대체……?』
드높은 창공에서 지상으로 떨어지면서.
정우는 형에게 안겨 있는 내내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힘이 쪽 빠져서 비루먹은 강아지처럼 꾀죄죄한 몰골로 있던 양반이 어떻게 우악스럽게 심상 세계를 뚫고 들어올 수 있었는지.
아주 오랜 옛날에 올포원과 대적했다던 전설적인 대마도사, 파우스트의 이름은 왜 거론되는 건지.
분명히 쓸쓸하게 죽었다고 했던 여름여왕의 몸이, 왜 저기에 있는 건지……!
크롸롸롸-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있었던 창공에는 장장 수십 미터에 달하는 용의 거체가 우뚝 서 있었다.
정확하게는 마기에 잔뜩 물든 본 드래곤이었지만.
그것은 정말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드래곤 피어를 피워 대고 있었다. 자신만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처럼.
피막이 없는 날개를 활짝 펼치면서 포효를 내질렀다. 대기가 우르르 떨릴 정도였다.
정우도 이미 연우의 아공간을 몇 번씩이나 살피면서 본 드래곤을 본 적은 있었다지만.
그래도 지금 저기 있는 본 드래곤은 평상시와는 많이 달랐다.
더 강렬하고, 살벌했다.
더군다나.
드래곤 피어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설마…….’
정우의 눈이 커졌다.
“이스메니오스?”
그 순간, 본 드래곤에게서 연우와 정우에게로 의념이 전달되었다.
「도와주는 건 어디까지나 이번에 한해서다. 저놈은 언젠가 내가 도모해야 했을 존재였으니까.」
푹 꺼진 본 드래곤의 두 눈두덩 사이에서는 보라색 광망이 불길처럼 이글거렸다.
올포원에 대한 짙은 분노가 드러나고 있었다.
과거 자신의 동족들을 앗아 가고, 수천 년을 사는 동안 뛰어넘어 보고자 발버둥 쳐 봤지만 결국 그럴 수가 없었던 존재를 향한 짙은 분노.
스테이지를 권역으로 삼고자 한 그녀의 권능에 따라, 법칙이 유동하면서 갖가지 마법 포격이 올포원에게로 쏟아졌다.
마법은 하나하나가 뛰어난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강렬한 열기와 화력을 품은 폭발들. 전성기 시절의 그녀에 못지않은 힘이었다.
목젖 근처에서는 영혼석의 기운을 담은 것 같은 보라색 광채가 드래곤 하트를 대신해 빛나는 중이었다.
정말 맞구나. 정우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그런 본 드래곤을 바라봤다.
한평생 탑의 정점에서 군림해 오며 그렇게나 고고하던 존재가, 저런 몰골로 나타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었으니까.
심지어 자신의 사체로 만든 본 드래곤이다. 그런 곳에 강림을 한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을 죽인 원수의 부름에 응답할 줄이야.
정우가 아는 선에서, 그녀는 영광스러운 죽음을 추구하면 추구했지, 절대 저런 불명예를 겪을 사람이 아니었다.
하물며 죽기 직전, 자신을 그토록 증오하던 여름여왕이 아니었던가.
한때 그녀와 깊은 친교를 나눈 적이 있었고, 그녀가 마음속에 쌓아 둔 응어리를 풀어 주려고 노력하기도 했다지만.
그래도 당시를 생각해 본다면 왜 자신을 도와주는 것인지 이해도 가질 않았다.
그런 정우의 의문 어린 시선을 읽은 걸까.
본 드래곤의 시선이 순간 이쪽으로 향했다.
「넌, 그때 왜 나에게…….」
의념이 잠깐 이어지다가 도중에 끊어졌다. 본 드래곤은 한참 동안 정우를 빤히 쳐다봤다. 그녀의 시선에서는 갖가지 감정이 편린처럼 스치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는 끝까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다시 커다란 머리를 올포원 쪽으로 향하더니 크게 날갯짓을 하며 창공으로 날아 올랐다.
크아앙!
본 드래곤은 크게 홰를 치면서 단숨에 올포원에게로 향했다. 짙은 마력이 아가리 쪽으로 몰려들면서 브레스가 쏟아졌다.
콰콰쾅!
쿠르릉, 쿠르르-
올포원의 잿빛 안개를 따라 수많은 폭발이 이어지는 가운데. 파우스트로 짐작되는 인페르노 사이트는 어둠을 이끌면서 올포원을 한껏 유린하는 중이었다.
탁!
정우는 한참 그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바닥에 착지하는 소리에 화들짝 깨면서 연우를 돌아봤다.
그는 연우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연우가 아닌 존재였다.
하지만 정우의 눈에는 그가 여전히 연우로 보였다.
다른 커다란 무언가와 뒤섞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을 향한 마음은 형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래서…… 너무나 미안했다.
이토록 동생에 대한 마음이 간절한 형인데.
정작 오랜 기다림 끝에 찾은 사람이 진짜 동생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는데.
빠악!
갑자기 다짜고짜 연우가 세게 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골이 울렸다. 정우는 자기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높였다.
『아 씨! 이게 무슨 짓이야!』
“한 번만 더 쓸데없는 짓 하면 그때는 정말 패 버린다.”
『하지만 내가 가……!』
빠아악!
『젠장! 아프다고!』
“아프라고 때리는 거다.”
『에이……!』
빠아악!
『좀 그만 때려!』
정우는 머리를 쥐어 쌌다. 아파도 정말 더럽게 아팠다. 대체 뭘 먹고 저렇게 된 건지 이대로 머리가 떨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정우를 보는 연우의 눈빛은 무뚝뚝했다.
“아프냐?”
『아프지, 그럼!』
“그런데 네가 왜 가짜라는 거냐?”
『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
정우의 눈이 커졌다.
연우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있는 넌 똑같이 말하고, 생각하고, 아프지. 나와 추억을 함께하고 있고, 지난날을 후회하기도 하고 그리워하기도 해. 그러니 묻겠어.”
보라색으로 빛나는 연우의 눈동자가, 정우는 오늘따라 유독 슬프게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있는 넌 가짜냐, 진짜냐?”
『……뭐, 고딩 때 배웠던 철학이라도 다시 공부하자는 거야? 실존주의, 뭐 그런 거?』
“뭐라고 붙여도 좋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명심해.”
연우는 정우의 정수리 쪽으로 손을 뻗었다. 정우는 자기도 모르게 자라목이 되어 움츠러들었지만…… 형은 가만히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넌 내 동생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를 애타게 찾았고, 나를 기다렸던,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서 누구보다 열심히 뛰어다녔던 착하지만 호구 같았던 동생.”
『…….』
“그러니까 어디든 갈 생각 마라.”
연우는 그 말만 남기고 훌쩍 정우의 옆을 지나쳤다. 부-파우스트와 여름여왕이 한껏 날뛰고 있는 자리에 자신도 같이 낄 참인 것이다.
정우는 연우를 돌아보지 못한 채, 한참 동안 멀거니 서 있었다.
『뭐래. 누가 호구라는 거야.』
그러다 작게 투덜거리는 그의 눈가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지고 있었다.
『혼자서 잘난 척은.』
축 가라앉은 어깨는 조용히 고개와 함께 아래로 떨궈졌다.
『……씨발.』
정우는 영체가 흐트러지며 점차 활자가 쏟아지려 하는 자신의 몸을 감싸 안으면서.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파직, 파지직-
영체가 부서지고 있었다.
* * *
저벅, 저벅-
연우를 닮은 무언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시선은 저 하늘 위 부-파우스트와 여름여왕, 그리고 올포원에게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우르르, 콰쾅-
퍼버버벙-
이대로 있다간 스테이지가 무너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격전이 이어지는 중이었다.
본 드래곤이 붉은 브레스를 내뿜을 때마다 하늘은 몇 번씩이나 붉게 물들었다.
뜨거운 열풍이 사방팔방 퍼지면서 대기가 뜨겁게 달궈지고, 지면은 삽시간에 황무지로 변해 더 이상 생명이 살 수 없는 땅이 되고 말았다.
부-파우스트는 여기서 번져 나오는 불길들을 모아, 오른손을 사용해 제 입맛대로 갖고 노는 중이었다.
파우스트가 생전에 자주 애용했다던 〈헬 파이어〉가 전개되면서 땅에서는 불기둥이 수십 미터도 넘게 치솟고, 하늘에서는 〈미티어 스트라이커〉로 인해 거대한 불덩이가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중이었다.
거기다 왼손으로는 지면을 가리키며 죽음을 다스리고자 하였으니.
여태 연우의 컬렉션에 붙들렸던 수십만 마리의 망령이 일제히 풀려 나오면서 올포원의 안개를 좀 먹어 나갔다.
그러다 칠흑을 너무 많이 삼킨 망령은 자폭하거나, 다른 망령들과 뒤섞이면서 덩치를 무럭무럭 키워 나갔다.
지면을 따라 불길이 춤을 추고, 망령이 돌아다니며, 하늘에서는 칠흑이 내린다.
신화 속 지옥을 고스란히 여기다 옮겨 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끔찍한 광경.
스테이지의 법칙을 강제 조정하던 올포원의 권능이 이를 누르려 했지만, 그럴수록 반발은 더 거세졌다.
최고 관리자들은 행여 두 거대 존재의 충돌에 피해를 입을까 멀리 떨어지면서도,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23층 때에도 이 때문에 그토록 많은 고생을 했었는데. 당시의 데자뷰가 다시 반복되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스테이지가 입고 있는 막대한 피해만큼이나 많은 플레이어들도 충돌에 휘말리고 말았으니. 골칫거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골치를 던져 주면서도.
연우를 닮은 무언가는 그게 뭐가 중요하냐는 듯한 태도였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여의봉의 조각들이 천천히 흘러나오면서 뱅글뱅글 춤을 췄다.
파직, 파지직!
여의봉의 조각과 연우 사이로 스파크가 튀었다. 흘러나오는 조각의 수가 많을수록, 조각이 더 크게 춤을 출수록 스파크는 더 커졌다.
여의봉의 조각이 연우를 거부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연우에게 깃는 ‘무언가’가 여의봉의 재질인 신진철과 상성상 맞지 않기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이었다.
하지만 연우를 닮은 무언가는 자칫 스스로가 여의봉에 봉인될 위험이 있으면서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칠흑으로 조각을 강제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피부가 따끔거리는 게 영 귀찮기만 했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올포원에게서 떨어지질 않았다.
귀찮기만 한 ‘잔여 자아’의 바람은 이걸로 충분히 들어줬다. 녀석의 소망은 구출. 구원이나 부활 따위의 기적이 아니라면 눈 딱 감고 해 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주 자아’의 소망을 이룰 차례였다.
그리고 그 소망은 한 가지 대상으로만 가득했다.
올포원.
연우에게 깃든 그에게도 증오 가득한 이름.
저 이름값은 여전히 그때와 같은지 알아보고 싶어졌다.
“이런 몸뚱이로는 한계가 있겠지만.”
연우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래도 왕좌가 있으니 재미있게 놀 수 있겠어. 키키킥!”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연우를 닮은 무언가가 올포원의 방향으로 손을 길게 내뻗었다.
그 순간.
철컹-
여태껏 오랫동안 칠흑왕의 절망과 함께 연우의 오른팔을 휘감고 있었던 쇠사슬의 이음쇠가 처음으로 풀리는 소리가 나더니.
촤르륵, 촤륵!
쇠사슬이 붕대처럼 한 꺼풀 한 꺼풀 빠르게 벗겨지기 시작했다. 신진철의 첫 개방이었다.
그리고 여의봉의 조각들도 쇠사슬과 똑같이 공명을 일으켰다.
“늘어나라, 여의.”
연우를 닮은 무언가의 시동어에 따라, 여의봉의 조각들이 빛무리에 잠기더니 길게 풀려나온 쇠사슬과 차례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철컹, 철컹, 맞물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쇠사슬이 크게 쭉쭉 늘어났다. 그러다 컨베이어 벨트처럼 끄트머리가 빠르게 움직이면서 공간을 비집고 이면 세계 어디론가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우웅, 웅-
우우웅-
본 드래곤과 부-파우스트가 날뛰고 있던 잿빛 안개 사이사이로 공허가 활짝 열리더니 쇠사슬이 튀어나왔다.
촤르르륵-
그런 공허가 여섯 개. 쇠사슬들이 빠르게 움직이면서 잿빛 안개 속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가뜩이나 정우가 풀어놓은 활자로 인해 무뎌진 심상 세계였건만. 여기에 본 드래곤과 부-파우스트의 거센 공세가 몇 번씩이고 가해지니 깨지기 일보 직전까지 약화되어 있었다.
그러다 모든 법칙을 ‘무효화’시키는 특성을 지닌 신진철이 가세하면서 심상 세계가 완전히 부서지고 말았다.
와장창!
하지만 쇠사슬은 거기서 그치지 않겠다는 듯, 더 안쪽으로 비집고 들어가면서 중심부까지 다다랐다. 아무것도 없던 텅 빈 공간 속으로, 쇠사슬이 부딪치면서 빠르게 감기기 시작했다.
“……잡았다. 쥐새끼 같은 놈.”
연우를 닮은 무언가는 마치 월척을 낚은 낚시꾼처럼 차갑게 한쪽 입술 끝을 말아 올리더니, 쇠사슬을 단단히 붙잡으면서 오른손을 세게 잡아당겼다.
순간, 허공에 맺힌 쇠사슬이 끊어질 듯이 팽팽해졌다.
그리고 공허 속으로 빠르게 빨려 들어가면서, 올포원의 의념을 강제로 붙들어 잡아당겼다.
올포원의 의념은 어떻게든 버텨 보려 했지만, 공간이 통째로 뜯기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부서진 심상 세계에서 튕겨 나고 말았다.
중심부를 잃은 잿빛 안개와 오로라가 그대로 찢기면서 하늘을 따라 한가득 퍼져 나갔다. 강렬한 충격파가 파문을 그리며 퍼져 나가는 가운데.
나가떨어진 올포원의 의념은 서서히 사람의 형체를 갖춰 나가면서 바닥에 착지했다.
엉덩이까지 길게 늘어뜨린 머리로 인해 얼굴 생김새나 성별을 정확하게 판별할 수 없었지만.
그건 분명히 여태 정체를 아는 사람이 극히 적다던 올포원의 진체를 닮아 있었다. 다시 짙은 안개 같은 것이 발밑에서 올라와 몸을 가렸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크롸롸롸-
본 드래곤이 녀석을 날려 버리겠다는 듯, 다른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잔뜩 응축시켜 뒀던 브레스를 크게 내뱉었다.
불로 만들어진 해일이 고스란히 올포원의 의념을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