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천동(天動) (5)
콰아앙!
세상이 녹는다는 표현은 바로 이럴 때 어울릴지도 몰랐다. 땅거죽이 끝을 모를 정도로 푹 내려 앉았다. 단단한 암반이 나타났어도 녹는 건 예외가 없었다.
장장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깔때기 모양의 크레이터 끝부분에 남은 불길이 튀어 올랐다.
바위마저 녹인 용암이 철철 넘쳐흐르면서 강을 연상케 하고,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진 지표면 사이사이로 새하얀 김이 풀풀 휘날렸다.
콰콰쾅, 콰쾅-
쿠르르르!
그런데도 충격은 여전히 가시질 않았다.
브레스의 강한 자극 때문에 지맥이 크게 뒤틀리면서, 몇 번씩이나 강도 높은 지진이 와 땅 전체가 위아래로 출렁댔던 것이다.
올포원의 의념도 저만치 밀려나 있었다. 브레스로부터 탈출을 시도하려 해도 쇠사슬이 안개 사이로 파고들어 한쪽 팔을 묶고 있는 터라 빠져나갈 수도 없는 상황.
결국 정면에서 브레스를 감당해야만 했다.
반쯤 날아간 잿빛 안개 사이로 녀석의 몰골이 언뜻 드러났다. 이대로 있다가는 안개도 모두 날려 버릴 수 있겠다 싶었을 때.
「죽음. 을.」
갑자기 올포원의 뒤쪽으로 공간이 열리면서 부-파우스트의 두 눈동자가 나타났다.
부-파우스트는 공허 사이로 손을 쭉 내밀었다. 뼈로 이뤄진 앙상한 손끝이 올포원의 등에 살짝 닿았다.
하지만 결과는 결코 ‘살짝’이 아니었다.
쿵!
쿵!
마치 거대한 범종을 치듯이. 보이지 않는 거력(巨力)이 올포원의 의념을 무참하게 두들겼다.
〈망령의 은총〉. 흔하디흔한 망령을 강제로 모아서 쏘아 내는 공격으로, 강한 물리적 충격에 이어서 망령의 저주를 상대에게 강제로 덧씌워 디버프를 거는 데 목적이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소비되는 망령의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상대에게 전가되는 저주도 그만큼 강렬해지는 구조였다.
은총이 더해질 때마다, 녀석이 크게 들썩였다.
안개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이 흐트러졌다. 저주가 올포원의 의념에게 서서히 스며들면서 그를 계속 위태롭게 만들어 나갔다.
촤르륵, 촤륵-
그사이에도 쇠사슬은 더 팽팽하게 잡아당겨지며 올포원의 의념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속박을 이어 나갔다.
쇠사슬은 단순히 사지만 묶는 게 아니었다.
쇠사슬의 재질은 신진철. 물리적인 제약을 넘어 영적인 구속까지 같이 이어진다.
신과 악마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쇠였으니, 올포원에게도 같은 영향을 끼치는 게 당연했다. 하물며 여기 있는 것이 진짜 올포원이 아닌, 올포원의 의념임에야.
그래서 마력을 유동해서 쇠사슬을 뿌리려 해도, 도리어 쇠사슬은 더 깊게 파고들면서 마력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덕분에.
올포원은 앞뒤에서 계속 이어지는 공세를 탈출하기 위해 〈축지〉를 연거푸 전개했지만, 불발로 이어지고 말았다.
『마력을 못 쓴다는 게 이렇게 불편한 거였나?』
올포원의 의념이 쓰게 웃는 소리가 났다.
자신이 시스템에 관여해서 플레이어들의 스킬을 불발시켰던 것처럼.
이번엔 자신의 마력이 묶여 평소 자랑하던 스킬이며 권능이 계속 실패로 돌아가니 갑갑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안개의 대부분이 사라지고.
지금이 기회라 여긴 부-파우스트가 손을 앞으로 더 거세게 밀어 넣었다.
끼아아-
망령 수천 마리가 한꺼번에 갈려 나가면서, 거대한 칼날이 생성되어 공간에다 단층을 만들어 냈다. 그 위에는 올포원의 의념이 있었다. 단번에 잘라 버릴 심산이었다.
올포원을 향한 부-파우스트의 감정은 하나.
격노였다.
『이런. 안 되겠군.』
올포원의 의념은 이대로면 정말 당하겠다는 생각에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저 하계에는 불필요한 왕좌를 회수하고, 이레귤러만 정리한 뒤 돌아가려 했었는데. 아무래도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훨씬 복잡하게 돌아가는 듯했다.
칠흑의 개화.
그리고 그로 인한 죽은 자들의 소생이라.
여름여왕과 파우스트, 둘 모두 한때 자신을 괴롭히던 자들이었던 것은 사실이었기에.
칠흑을 등에 업고 이렇게 덤빈다면, 조금 손이 많이 갈 수밖에 없었다.
『조금은…… 놀아 줘야 하나.』
77층의 방비가 그만큼 약해지겠지만. 그래도 칠흑이 하계를 흔들어 놓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에 그는 인상을 딱딱하게 굳혔다.
순간, 흐릿해지던 잿빛 안개 사이로 두 개의 안광이 번들거렸다.
격의 해방이었다.
콰아아앙-
그건 맹렬한 돌풍이었다.
올포원의 의념을 따라 생성된 강풍이 갑자기 파문을 그리면서 사방팔방으로 뻗쳐 나갔다.
얼마나 강렬한지, 스테이지를 망가뜨릴 정도로 이어지던 브레스가 그대로 밀려나고, 주변에 있던 공간까지 모두 망가뜨려 버릴 정도였다.
결국 이면 공간 속에 숨어 있던 부-파우스트의 육체도 같이 그대로 날아갔다.
다행히 부-파우스트는 라이프 베슬만 있다면 언제든지 소생이 가능한 몸인지라, 다시 저 드높은 창공 위에서 육체를 빠르게 재생성할 수 있었지만.
그가 의식을 되찾고 재차 내려다본 지상은 그나마 형체가 어느 정도 남아 있었던 스테이지마저 모두 날아간 모습이었다.
그곳에는 올포원의 의념이 귀찮다는 듯,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서 있었다. 잿빛 안개는 조금 더 하얗게 변해서 불꽃처럼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다 하얀 안개가 안쪽으로 스며들면서 점차 사람과 비슷한 형상을 갖췄다.
비록 여전히 생김새가 다 드러난 건 아니었지만.
여태껏 계속 안개로 모습을 감췄던 것에 비하면 큰 변화였다. 특히 이상하게 녀석의 ‘시선’은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이 아마도 무엇이든 훔쳐볼 수 있다는 〈천리안〉일 테지.
잿빛 안개는 점차 색이 또렷해지면서 어느덧 강렬한 빛으로 변해 있었다.
온통 빨갛고 어둡기만 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별처럼. 서기(瑞氣)를 곳곳에 뿌려 대는 중이었다.
아니, 어둠으로만 가득한 우주에서 홀로 빛을 발산하는 태양을 보는 것 같았다.
「분신. 인가.」
부-파우스트는 가볍게 혀를 찼다. 여태껏 상대했던 의념에 비해 새롭게 각성한 분신은 확실한 존재감을 방출하는 중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들었다면 미쳤다고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의념만 해도 존재감으로 스테이지를 짓눌렀을 정도인데. 그보다 상위 단계인 분신에 ‘그나마’ 존재감이 확실하다고 평가를 하다니.
하지만 여름여왕과 부-파우스트는 정말 그렇게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은 수천 년에 달하는 기나긴 탑의 역사 동안, 올포원에게 도전했던 몇 안 되는 존재들이었으니까.
그와 충돌했던 기억 속에서 올포원이 보였던 신위는 고작 이따위로 그칠 것이 아니었다.
부-파우스트도 그런 사실을 아주 잘 알기 때문에. 올포원이 제대로 힘을 보일 수 있도록 여태 몰아붙인 것이었다.
덕분에 원하는 대로 되기는 했다지만.
이렇게 다시 직접 느끼게 되니 살벌하긴 무척 살벌했다. 무의식에 묻혀 있던 옛 기억들이 다시 새록새록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분신’ 따위가 기운을 발산하는 것만 해도 저 정도일진대.
만약 본체가 나타난다면 어떻게 될는지.
부-파우스트는 눈을 가느다랗게 좁혔다. 사실 그들은 분신으로만 끝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목적은 77층의 본체를 아예 이쪽으로 끄집어내리는 것.
비록 ‘그릇’이 완성되질 않아 칠흑이 제대로 개화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여름여왕과 파우스트가 깨어나고 처음으로 힘을 합친 이상, 죽기 전에 못다 이룬 숙원을 반드시 이뤄 보고 싶다는 게 그들의 속내였다.
특히 부-파우스트에게 ‘첫 죽음’은 도저히 생각하기도 싫은 기억이었다.
그토록 바라던 비원이었던 칠흑에 다다랐다고 생각했을 즈음 별안간 벌어진 올포원의 개입.
자신의 연구를 망가뜨린 죗값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라도 어떻게든 톡톡히 되갚아 줘야만 했다.
그런데.
「멍청한 것. 단순히 그 정도로 그칠 것 같으냐.」
갑자기 본 드래곤이 피식 비웃음을 던졌다.
떨그럭. 떨그럭. 부-파우스트의 고개가 그쪽으로 홱 하고 돌아갔다.
영 탐탁지 않아 하는 눈빛.
비록 올포원이라는 공통된 적이 있어서 손을 잡긴 했다지만.
사실 두 사람도 생전에 그리 원만한 관계는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원수에 가까웠다.
칠흑을 탐구하기 위해서 타계의 신과도 거리낌 없이 계약을 맺는 광기를 보였던 파우스트와.
수천 년 동안 탑을 지배했던 레드 드래곤의 총수, 여름여왕.
둘은 사사건건 충돌했고, 그럴 때마다 주변에 도저히 남아나는 게 없었다.
당시 플레이어들은 둘만 나타났다 하면 도망치는 데 급급할 정도였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레드 드래곤도 파우스트만큼은 피하려 했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둘 사이에 좋은 기억이란 전혀 없었고.
이렇게 한자리에 뭉쳐 있는 것만 해도 사실상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칠흑이라는 거대한 지붕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으리라.
더구나 여름여왕으로서는 칠흑의 편에 서는 이유가 있었다. 올포원에 대한 증오심도 그렇지만, 헤븐윙 차정우에게 묻고 싶은 것도 아주 많았기 때문이었다.
「무슨.」
「저길 보아라. 되살아나면서도 눈깔은 돌아오지 못한 머저리야.」
부-파우스트는 본 드래곤의 말투가 영 탐탁지 않았지만, 그녀가 허튼소리를 하는 성격이 아니란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고오오-
올포원에게서 발산되는 기세가 멈추지 않고 계속 강렬해지고 있었다. 스테이지가 위아래로 크게 격동했다. 문제는 격의 해방이 거기서 그칠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었다.
「설마?」
「그래. 멍청한 것아. 저것은 분신 따위가 아니다.」
본 드래곤이 크게 으르렁거렸다.
「본체지.」
크아앙-
본 드래곤은 다시 한 번 더 올포원에게로 브레스를 내뿜었다. 여전히 대기를 지글지글 끓게 할 정도로 강렬한 불길이었지만.
푸확-
올포원은 가볍게 손을 흔드는 것만으로 브레스를 가볍게 지워 버렸다.
그리고.
팟!
한 발을 앞으로 내디딘다 싶더니 갑자기 신체가 아래로 푹 꺼졌다. 그리고 갑자기 본 드래곤의 앞으로 나타났다.
『이스메니오스, 오랜만이구나.』
올포원은 본 드래곤을 보면서 주먹을 강하게 말아 쥐고 크게 휘둘렀다.
『하지만 순리를 추구한다는 용이 도리어 순리를 뒤집고 돌아오는 모습이, 지금은 영 좋게 느껴지질 않아.』
쿵-
대기가 그대로 떠밀려 나는 듯한 충격파가 터졌다. 본 드래곤이 재빨리 날개를 활짝 펼치면서 블링크를 사용해 자리를 벗어났지만, 충격파는 그런 공간마저 뛰어 넘으며 그대로 본 드래곤을 거세게 후려쳤다.
단 한 번의 일격인데도 불구하고, 본 드래곤을 이루던 몸뚱이 중 절반 이상이 그대로 반파(半破)되고 말았다.
다시 칠흑이 그 위를 덮으면서 재빨리 수복되긴 했지만, 정작 본 드래곤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빌어먹을, 것!」
콰아아-
다시 한 번 더 브레스가 쏟아졌다. 하지만 올포원은 이번에도 손을 가볍게 흔들면서 브레스를 밀어내고, 다시 한 번 더 축지를 전개하면서 이번에는 부-파우스트의 뒤쪽으로 나타났다.
부-파우스트는 그런 올포원의 움직임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육체를 그대로 산화시켰다.
대신에 그 자리에 갖가지 마방진이 남으면서 〈헬 파이어〉를 비롯한 망령의 저주가 한가득 덧씌워졌다.
하지만 그마저도 올포원에게서 발산되는 광채에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반발력과 함께 빛의 저주가 도리어 역으로 부-파우스트에게로 고스란히 전달되고 말았다.
죽음을 안고 사는 그로서는 올포원의 성력(聖力)이 치명타일 수밖에 없었다.
퍼퍼퍼펑-
부-파우스트의 행동이 잔뜩 경직되었다. 칠흑으로 감쌌던 손끝이 바스러지는 중이었다. 그를 보호하듯이 둘러싸던 망령들이 일제히 정화되어 소멸하고 말았다. 헬 파이어와 같은 마법들도 전개되는 족족 파훼되었다.
이대로는 위험하겠다는 생각에, 부-파우스트는 영혼을 좀먹어 가려는 성력부터 정리할 생각으로 전장을 이탈하려 했다. 블링크를 잇달아 전개하면서 던전 속으로 숨어들고자 했다.
하지만 올포원은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축지를 연달아 밟으며 쫓아왔다.
마치 무심한 눈으로 소를 도축하듯이. 그의 눈에는 순리를 거스르고 재탄생한 파우스트와 여름여왕이 전부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밖에 비치지 않았다.
찌걱, 쩌거걱-
부-파우스트와 이를 뒤쫓는 올포원의 추격이 이어질 때마다, 스테이지를 구성하던 공간 곳곳이 으깨진 유리창처럼 깨졌다. 크고 작은 균열들이 거미줄처럼 잔뜩 퍼져 나가 순회하는 법칙도 망가뜨리고 말았다.
본 드래곤이 부-파우스트를 돕기 위해서 법칙을 구성하고, 브레스를 뿌려 대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법칙은 다시 복구되고, 브레스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만 가로지르고 말았다.
그들이 바라던 대로 올포원의 본체를 끌어오긴 했다지만.
정작 올포원의 힘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퍼어엉!
그러다 올포원이 세차게 휘두른 주먹에 따라, 부-파우스트가 부서진 공간과 함께 튕겨 나오고 말았다.
올포원도 곧바로 뒤따라 나타나면서 부-파우스트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손날을 거세게 아래로 내리쳤다.
빛살이 부-파우스트를 가로지르려는 찰나.
촤르륵-
갑자기 올포원을 휘감고 있던 쇠사슬이 잡아당겨졌다.
『이런.』
올포원은 그대로 공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시건방진 것. 감히 누구의 것에 손을 대려는 것이냐.”
연우를 닮은 무언가가 올포원의 멱살을 움켜쥐면서 으르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