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400화 (400/862)

25화. 천동(天動) (6)

탁!

올포원은 자신의 멱살을 잡은 연우의 손길을 거칠게 뿌리쳤다. 얼마나 거센지 연우의 오른팔이 그대로 잘려 나갈 정도였다.

동시에 올포원은 몸으로 반원을 그리면서 다른 손길을 뿌렸다. 손 끝에서 화려한 빛이 터졌다. 마치 태양이 어둠을 사르는 듯한 빛이었다.

번-쩍!

올포원의 빛은 그 자체로 강한 성력을 품고 있기 때문에 벽사(闢邪)와 축귀(逐鬼)에 뛰어난 효과가 있었다.

연우를 닮은 무언가를 이루고 있는 칠흑은 온통 죽음과 혼돈을 담고 있기 때문에, 올포원의 빛과 상성상 맞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빛은 눈 깜짝할 사이에 세상을 환하게 비춘다. 때문에 연우를 닮은 무언가를 순식간에 녹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연우는 정면에서 부딪치지 않았다.

쾅!

거세게 발을 구르면서 칠흑을 지면에다 투사했다. 그러자 그의 의지에 따라 두 사람 사이로 땅거죽이 높게 치솟으면서 거대한 장벽을 만들어 냈다. 멀리서 보면 산이 저절로 융기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올포원의 빛이 장벽에 가로막혀 역류하는 해일을 만들어 낼 때 즈음.

연우는 뒤로 멀찍이 물러서면서 몸을 빠르게 회복시키는 중이었다. 장벽을 일으켜 빛을 막아 냈다지만, 완전히 막지는 못했는지 몸의 절반이 날아간 상태였다.

하지만 칠흑왕의 형틀에서 스멀스멀 흘러나온 칠흑이 부서진 부위를 빠르게 복구시켰다.

그러던 그때.

『어딜 가려 하시는가.』

물러나던 연우의 뒤편으로 공간이 열리면서 올포원이 나타났다.

〈축지〉. 지맥을 접으며 원하는 곳 어디에서나 나타날 수 있는 시그니처 스킬을 발동하면서 녀석이 손길을 뻗쳤다. 다시 한 번 더 빛이 터졌다.

연우는 활짝 펼친 날개로 홰를 치면서 급제동하는 동시에 반원을 크게 그리면서 왼손을 펼쳤다. 이쪽에서는 칠흑이 칼날처럼 치솟아 빛을 갈랐다.

콰콰쾅-

우르르, 콰르르-

빛과 칠흑이 부딪치면서 충격파가 연거푸 퍼져 나갔다. 칠흑을 어떻게든 집어삼키려는 빛과, 빛을 불사르려는 칠흑이 거칠게 맞붙었다.

그 사이로.

연우를 닮은 무언가는 자신의 몸이 파괴되는 것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불쑥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재생]

올포원을 쫓기 위해 터득한 재생 스킬은 칠흑과 뒤섞이면서 불사에 못지않은 재생력을 갖게 해 준바.

몸 여기저기가 빛에 뜯겨 나가도, 그 속에 있는 칠흑이 다시 봇물 터지듯 치솟아 수복을 완료했다.

그리고 연우는 어느덧 올포원 가까이에 다다라 손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아공간이 열리면서 비그리드가 튀어나와 손에 잡혔다. 팔극검에 따라 그대로 거세게 휘둘렀다.

콰르릉-

건(乾)의 단천부터 곤(坤)의 철토로 이어지는 8대 비기가 순차적으로 풀려나왔다. 거기다 그 속에 담긴 제천류는 위력을 몇 배로 증폭시키기까지 했다.

올포원의 팔다리가 빠르게 잘려 나갔다. 빛의 장막이 몇 번씩이나 둘러쳐졌지만, 그럴 때마다 비그리드는 장막을 찢으면서 더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하지만 올포원이라고 해서 가만히 있는 건 아니었다.

그의 주특기는 〈불사〉와 〈천리안〉.

아무리 죽을 수밖에 없는 치명상을 입어도 얼마든지 원활한 수복이 가능하고.

사위를 살피는 뛰어난 눈 덕분에 연우의 행동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다.

올포원에게 있어 육체는 얼마든지 쓰다 내버릴 수 있는 일회용품에 불과했다.

푸화악-

올포원의 머리가 왼팔과 함께 통째로 잘려 나갔다. 하지만 몸뚱이는 이미 계산된 대로 연우에게 깊숙하게 파고들면서 손을 빠르게 휘둘렀다.

콰콰쾅!

회전하는 손날은 집요하게 연우의 약점을 공략해 나갔다. 팔극검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는 빠른 무술 실력. 무공에 대해서 알지 못해도, 수천 년 동안 홀로 단련한 수행자라면 당연히 가질 수밖에 없는 실력이었다.

그러다 연우가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몸뚱이를 다 잘라 냈다 싶으면.

팟!

그중 일부 남은 몸뚱이가 축지를 전개, 완전히 원상 복구된 상태로 연우의 뒤편에서 나타나 손날을 거세게 내려치고 있었다.

촤악-

“흡!”

연우의 목덜미 중 절반 가까이가 날아갔다. 칠흑이 그대로 갈라지면서 빛이 독처럼 스며들어 재생 스킬의 작동을 막고자 했다.

연우를 닮은 무언가는 이를 악물면서 몸을 측면으로 틀어, 비그리드를 녀석이 있는 쪽으로 뿌렸다.

하지만 올포원은 왼팔 하나를 내어 주고 다시 축지를 전개, 다시 연우의 사각지대를 교묘하게 파고들면서 나타났다.

손이 활짝 펼쳐지면서 연우의 가슴팍에 닿으려는 순간.

촤르륵-

갑자기 올포원의 팔을 여태 감고 있던 쇠사슬이 팽팽해지면서 녀석을 그대로 잡아당겼다. 팔다리를 몇 번씩이나 잘라 내어도, 쇠사슬은 영혼에 결박되는 것이기 때문에 쉽게 풀 수가 없었다. 쇠사슬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공허가 열린다 싶더니, 올포원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어느새 눈앞에 연우가 있었다.

포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쥐새끼같은 것!”

비그리드가 올포원의 목덜미에 틀어박혔다. 하지만 올포원은 이번에도 축지를 밟으면서 연우의 뒤편에 나타나 손날로 허리를 노렸고, 연우는 몸을 반대로 돌리면서 다시 왼팔로 쇠사슬을 강하게 잡아당겨 녀석을 끌어왔다.

콰콰콰콰-

공간을 이리저리 열고, 닫고. 비집고, 부수면서.

연우를 닮은 무언가와 올포원은 집요한 꼬리잡기 게임을 연거푸 반복해야만 했다.

칠흑과 빛이 서로 맞물리면서 스테이지를 몇 번씩이나 사르고, 또 살랐다.

그리고.

크롸롸롸-

본 드래곤이 자신도 여기에 있다는 것을 보여 주겠다는 듯, 대가리를 뒤로 크게 젖히면서 브레스를 뿌려 댔다.

「죽음이. 없는 자. 에게. 죽. 음. 을.」

부-파우스트는 드넓은 하늘을 따라 수백 개의 마방진을 일제히 열어젖히면서 마법 포격을 개시했다. 헬파이어를 가득 머금은 운석이 유성처럼 수없이 추락했다.

콰콰콰쾅!

* * *

신격, 그것도 최상위 신격과 비교해도 절대 부족하지 않을 두 존재의 충돌에 이어, 플레이어로서 ‘전설’ 급의 업을 쌓은 이들까지 가세한 전장은.

“미친.”

“저게 말이 돼?”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을 멍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하늘의 은총이 저들에 닿기를…….”

크로이츠는 여태껏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관이 산산조각 나는 충격에 한쪽 무릎을 꿇고 경건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성검 줄피카르를 지면에다 꽂은 채, 성역 결계를 넓게 두르면서 연우에게 행운이 깃들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그리고.

『…….』

정우는 입을 꾹 다문 채 멍하니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전장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연우를 닮은 무언가에게서.

처음 그가 자신을 구해 줬을 때.

정우는 ‘지금의’ 연우가 자신이 아는 형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분명 더 큰 무언가에 씌인 듯한 모습이었다.

정우는 그런 모습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흔히 사도들이 잘 겪는 신병(神病)이 보통 그랬다. 거대한 존재와의 잦은 접촉으로 인해 영혼이 틀을 유지하지 못하고 점점 흐트러지다가, 종국에는 모시는 신에게 존재마저 잡아먹히는 현상.

과거 비에라 듄도 몇 번씩 그럴 위험에 사로잡혀 편집증에 가까운 두려움에 젖어 살기도 했었다.

그녀는 그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되레 대지모신을 잡아먹어 버렸지만.

대부분 사도들은 쉽게 힘을 얻는 대가로 그런 위험을 안고 살아야만 했다.

그런데 지금 연우가 그랬다.

정우가 알기로, 형은 분명 따로 모시는 존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존재에게 단단히 씌어 있는 중이었다.

그것도 그저 그런 자잘한 신격 따위가 아닌.

대지모신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는 엄청 큰 무언가와…….

문제는 그게 어떤 존재인지, 수많은 특전을 겪은 그로서도 도저히 짐작 가는 바가 없단 점이었다.

이미 죽은 지 오래인 두 플레이어를 소생시키고, 웬만한 신격들도 맞서지 못할 올포원과도 대등하게 전투를 벌일 정도라면 엄청나게 큰 존재일 텐데도.

그렇기에 그것만 따진다면 연우는 위험한 상황인 게 분명했지만.

또 그런 상태이면서도 연우는 끝까지 정우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 사실이, 더더욱 정우의 가슴을 찢어지게 만들었다.

어차피 여기에 있는 나는 가짜인데도 불구하고.

저렇게까지 자신을 지켜 주려 하는 형이 안타까웠던 것이다.

거기다.

파스스-

자신의 몸은 이미 형체를 유지하는 것조차 힘든 상태였다. 영체가 흐트러지면서 활자가 계속 새어 나오고 있었다.

조금만 아차 싶어도 부서질 가녀린 몸. 이렇게 겨우 버티고 있는 것도, 형을 지켜보고 싶다는 갈망과 아직 더 여기에 있고 싶다는 소망 때문이었다.

“차정우 군?”

그때, 정우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상념에서 벗어나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작게 침음을 삼켰다.

『……이블케.』

“오효오효. 오효효! 이렇게 만나게 되니 참 색다른 경험이로군요. 정말이지 반가워요. 너무 오랜만이에요. 아, 차정우 군에게는 얼마 되지 않았으려나요?”

이블케는 외눈 안경을 고쳐 쓰면서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특전 내용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시스템 총책임자인 당신이 여긴 어떻게…….』

“쉿!”

정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블케가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댔다. 흉측하게 생긴 고블린의 두 눈이 곡선을 그렸다.

“그건 우리들만 알기로 했던 비밀이 아니었던가요?”

『…….』

“오효효. 역시 당신은 예나 지금이나 말이 잘 통해서 아주 좋아요. 그런 뜻에서, 선물을 한 가지 드리겠어요.”

『……?』

정우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가 아는 이블케는 결코 ‘호의’로 뭔가를 주는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이블케는 그런 정우의 생각을 알고 있다는 듯, 빙긋 웃으면서 가볍게 박수를 쳤다.

짜악!

그 순간, 정우의 몸 위로 희뿌연 서기가 올라왔다. 그러자 새어 나오던 활자들이 금세 눈에 띄게 느려지고, 흐트러지던 영체도 조금씩 또렷해졌다.

『이건……?』

“저기 계신 분께서 어떻게든 차정우 씨를 고쳐 달라고 하시더군요. 자신이 가진 것으로 얼마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말이지요.”

『뭐……?』

정우는 눈을 크게 떴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곧 이블케가 하는 말뜻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연우가 여태껏 스테이지 랭킹을 차례로 갱신하면서 쌓았던 엄청난 수치의 공적치. 그것을 전부 털어서 자신에게 투자한 것이다.

정우는 이를 악물었다.

공적치는 플레이어가 앞으로 탑을 공략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필수품이다. 많이 모으면 모을수록 큰 보상을 얻어 낼 수 있으며, 때에 따라서는 실력을 대폭 증가시킬 수 있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아무리 연우가 층계에 비해 높은 실력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공적치는 반드시 필요했다.

아니, 오히려 높은 실력을 지녔기에 더 많은 공적치를 필요로 했다.

더 높은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그만큼 더 큰 대가가 필요할 테니까. 투자해야 할 곳이 한두 곳이 아닐 터였다.

하지만 연우는 자신에게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기회를 전부 포기하고, 정우에게 주고자 했다. 그가 더 오래 살기를 바라면서.

-넌 내 동생이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무슨 지랄을 하건 간에, 내 동생이다.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아.

정우는 주먹을 꽉 쥐고 말았다.

못난 형 같으니.

사실 이렇게 치료를 한다고 해도, 영체가 부서지는 속도를 늦추기만 할 수 있을 뿐 완전한 복구는 불가능했다.

그저 시간을 최대한 버는 것에 불과할 텐데.

정우는 울컥하는 마음을 억누르고, 이블케를 홱 하고 돌아봤다.

『이블케, 물어볼 게 있어.』

“관리자는 플레이어들의 일에 관여도, 간섭도 않는 게 원칙이긴 하지만…… 그래도 차정우 군과 저 간의 관계가 있으니 웬만한 질문에는 답변을 드리도록 하지요. 사실 공적치도 꽤 많이 남았고요.”

순전히 ‘재미’ 때문에 이블케가 답변을 주려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우는 모른 척했다.

“오효효! 그래. 궁금한 게 무엇인가요?”

정우는 외눈 안경 너머로 비치는 이블케의 시선을 마주치면서 물었다.

『‘진짜’ 차정우는 그럼……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그는.”

이블케의 눈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없답니다. 어디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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