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402화 (402/862)

2화. 사왕좌(死王座) (2)

어떻게 말릴 새도 없이 발생한 일이었다.

이렇다 할 징조도 없었고, 유언도 없었다. 올포원을 둘러싼다 싶더니 갑자기 창칼의 방향을 역으로 돌렸다.

연우를 닮은 무언가는 올포원이 처음으로 ‘당황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리 탑을 굽어보는 올포원이라 하더라도, 미래까지 전부 예측할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

집단 자결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부서진 심장을 따라 수많은 신격들의 피가 허공으로 튀어 오르고, 꺼져 가는 각막 위로 영혼이 서서히 떠올랐다.

그 광경을 보면서.

연우를 닮은 무언가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이이잉-

칠흑왕의 세 형틀이 일제히 몸을 길게 떨었다.

화아악-

바닥에 맺힌 그림자가 지면을 따라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림자는 빛에 먹히기도 하지만, 때로는 빛을 잡아먹기도 하는 어둠을 담고 있다. 그림자는 칠흑의 총화이자, 권능의 근원. 당연히 그 속에는 소울 컬렉션도 담겨 있었다.

그림자 위로 검은 아지랑이들이 한껏 치솟으면서 디스 플루토의 영혼들과 뒤섞이기 시작했다.

그들을 소울 컬렉션 속으로 수용하려는 것이다.

『허튼짓!』

올포원은 그들의 노림수를 읽고, 잿빛 안개를 사방으로 퍼뜨려 그림자의 확산을 막아서려 했지만.

「하하하! 미쳤구나, 미쳤어! 다들 제대로 미쳤어! 하지만! 올포원, 가장 미쳐 있는 그대가 이걸 막는 건 도무지 말이 안 되지 않은가!」

「주인. 께. 방해. 하지 마라.」

본 드래곤이 광소를 터뜨리면서 브레스를 다시 한 번 더 내뱉어 잿빛 안개를 태워 버리고, 부-파우스트는 영괴들을 이용해서 올포원의 다른 권능들을 견제했다.

연우와 디스 플루토가 하려는 일을 방해하지 말라는 시위였다.

츠츠츠-

그사이. 어느덧 검은 아지랑이와 뒤섞인 디스 플루토들의 정신이 연우와 하나둘씩 접촉되기 시작했다.

그들이 내뱉는 생각, 사고, 염원 따위가 모두 한목소리가 되어 연우에게로 전해지고 있었다.

「새로운 왕이시여.」

「부다.」

「우리들의 염원을.」

「이뤄 주소서…….」

그들이 내뱉는 사념이 연우를 닮은 무언가에게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왕으로서.”

연우는 부쩍 차오르는 고양감에 자신도 모르게 크게 웃음을 터뜨리면서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대들의 간언을 가납하겠노라.”

그 말과 함께 연우는 왼손을 활짝 펼치면서 땅거죽에 갖다 댔다. 시동어는 따로 외울 필요가 없었다. 탐욕스러운 녀석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으니.

검은 멍울을 따라 새하얀 톱니 이빨이 드러나며 지면에 박혔다.

찰칵, 찰칵-

[‘바토리의 흡혈검’이 대규모 흡수를 진행합니다.]

구오오-

디스 플루토의 영혼들을 묶은 거대한 그림자가 소용돌이를 그리면서 바토리의 흡혈검으로 빨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디스 플루토는 말단 병사까지 개개인이 전부 신격을 이루거나 그에 준하는 자들.

그들의 영혼은 아주 크며 신성하다.

그런 그들의 ‘죽음’은 연우가 앉은 왕좌인 사왕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그들의 행위는 단순한 자결이 아닌 연우에 대한 강한 신뢰, 아니, 그마저도 넘어선 신앙(信仰)이 한껏 담겨 있는 것이었으니.

그런 신앙을 바탕으로 이뤄진 순교(殉敎)는 신에게 막대한 공양으로 다가오게 된다.

지금 이 순간.

연우를 닮은 무언가는 집단 순교를 선택한 디스 플루토의 왕이자, 그들이 모시는 신으로서 서 있었다.

“아하하.”

연우를 닮은 무언가는 부족했던 칠흑이 바짝 차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죽음이라!

이것이야말로 가장 기본적인 칠흑의 한 형태일지니!

[서든 퀘스트(엑소더스)의 두 번째 달성 조건과 세 번째 달성 조건을 차례로 완수하였습니다.]

엑소더스 퀘스트의 두 번째 달성 조건은 타르타로스를 무사히 탈출하는 것, 그리고 세 번째 달성 조건은 안전한 거류지를 찾아 베이스 캠프를 차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안전한 거류지에 대한 조건은 따로 명시되어 있는 게 아니었다.

시스템이 납득할 수 있는 곳, 혹은, 보호 대상인 디스 플루토가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장소면 충분했다.

그런 뜻에서.

칠흑의 권능이 가득 담긴 소울 컬렉션은 더할 나위 없이 안전한 거류지이기도 했다.

그 속에서는 다른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들의 왕이자 신이 있는 이상, 절대 무너질 리가 없었다. 아니, 도리어 죽어서도 신과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그토록 바라던 완벽한 이상향이나 다름없었다.

[서든 퀘스트(엑소더스)를 완벽하게 달성하였습니다.]

[누구도 쉽게 이루지 못할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추가 공적치가 제공됩니다.]

[공적치를 100,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추가 공적치를 200,000만큼 획득했습니다.]

……

[보상으로 권능 ‘명토 선포’를 획득했습니다. 지금부터 지정된 권역에 사왕좌의 힘을 투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보상으로 ‘타르타로스의 재건 자격’을 획득했습니다. 에레보스로 향하는 새로운 타르타로스를 설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보상으로 ‘신성 조각’을 획득했습니다. 추가 보상으로 ‘초월성’에 대한 힌트를 획득했습니다.]

……

[잠겨 있던 권능 ‘어둠 속의 군세’가 해제되었습니다.]

[잠겨 있던 권능 ‘사왕좌의 심안’이 해제되었습니다.]

……

콰콰콰-

“그릇이 또 한 번 단단해졌군.”

연우를 닮은 무언가는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가볍게 혀를 찼다.

괜히 귀엽지 않은 놈에게 좋은 일만 해 준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이건 이것 나름대로 괜찮았다.

어차피 이 몸뚱이는 언젠가 자신이 완전히 독차지할 그릇이었으니까. 단단하게 다져질수록 이로운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기분 좋은 감정을 한껏 만끽하면서 올포원 쪽을 보았다. 여전히 치열하게 싸워 대는 본 드래곤과 부-파우스트가 보였다.

거기다 대고 손을 뻗으며 외쳤다.

“명토 선포.”

[이미 지정된 권역 ‘비나’ 위에 새로운 성질이 부여됩니다.]

[명토(冥土)가 설정되었습니다!]

연우를 따라 춤을 추던 검은 아지랑이가 촉수처럼 뻗쳐 나가며 하늘을 새카맣게 물들였다.

칠흑이 다시 내려앉으면서 잿빛 안개를 밀어내고, 그 아래로 어두운 무언가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아지랑이가 하나둘씩 사람의 형상을 갖췄다.

어두운 칠흑색으로 빛나는 갑주를 두르고 투구를 쓴 채. 역시나 칠흑색으로 빛나는 창을 길게 잡은 병사들.

투구 아래로 빛나는 붉은 안광이 불길처럼 뜨거웠다.

명계의 군세가, 새로운 명왕의 그림자에서 다시 태어나 창칼을 높이 든 것이다.

그것도 절대 죽지 않는 불사의 군대.

몇 번이고 부서져도 재복구가 가능한,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신의 군대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거기엔 이곳에서 순교를 택한 이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타르타로스에서 힘없이 쓰러진 이들. 연우가 언젠가 구원하겠노라면서 거둬들였던 다른 병사들의 영혼도 더러 섞여 있었다.

그중에 가장 크게 빛나고 있던 람의 영혼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왕의 위명을 더럽히려는 간악한 자를!」

그리고 여기 화답하듯, 다른 군단장들이 말을 이어받았다.

「바로 이곳에서 토벌하라!」

「전- 군!」

「돌격하라!」

「돌격하라!」

구우우-

명계의 군대가 일제히 올포원에게로 달려들었다. 죽음의 기운을 한가득 몰고서.

본 드래곤과 리치에 이어서 끝없는 숫자의 군단까지.

그 어마어마한 광경 앞에서.

오랫동안 탑의 지배자로 군림해 왔다던 올포원은 망망대해에 갇힌 외딴섬처럼 보였다.

그때, 올포원이 이쪽으로 시선을 홱 하고 돌렸다.

이딴 것으로 자신을 막을 수 있을 것 같느냐는 눈빛.

그에.

“물론, 여기서 끝나지는 않겠지.”

연우를 닮은 무언가는 올포원에게 보라는 듯이 가볍게 웃어 보였다.

올포원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 인상을 찡그리다, 갑자기 연우가 비그리드를 높이 드는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뒤늦게 그가 뭘 하려는지를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제지를 하기도 전에.

촤아악-

연우를 닮은 무언가는 공간을 길게 찢었다. 그 너머에 활짝 열린 공허를 따라, 또 다른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 나오고 있었다.

『미쳤구나, 네놈이 정녕!』

“키키킥! 그릇이 좀 더 다져졌다고 해도, 지금 이 몸으로 널 막으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않겠나?”

공허에서 튀어나온 기운은 여태 두드리고 있었던 벽을 드디어 뚫었다는 듯이, 아주 기분 좋게 튀어나와 스테이지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쿵, 쿵, 쿠웅-

곧 공간이 부서지는 커다란 충격파와 함께 공허가 더 크게 열리면서 기세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올포원도 어떻게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거센 해일.

잡. 아. 먹.는.다.

내. 놓. 아. 라.

내. 것.

그것은 무언가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기웃거리다가, 곧 스테이지를 장악하고 있는 존재를 포착하고 움직였다.

우선 영역을 독차지하기 위해서 영역의 주인부터 제거하고자, 본능적으로 나선 것이다.

당연하지만, 그 대상은 올포원이었다.

쐐애액-

콰앙!

연우를 닮은 무언가는 그것을 보면서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녀석이 내뿜는 막대한 사념이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 아로새겨졌다.

타르타로스와의 공간을 활짝 열며 나타난 것은.

바로 대지모신이었다.

연우를 찾아서, 스테이지를 찾기 위해 여전히 발버둥 치던 놈.

내. 놓. 아. 라.

쿠아아앙-

대지모신은 바로 지척에 있는 연우를 감지하지 못했다. 그보다 더 큰 무언가가 연우를 삼키면서 기척을 숨겼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대지모신은 올포원이 자신이 삼키려던 연우를 대신 삼켰다고 생각했다.

올포원으로서는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명계의 군세에 이어서 대지모신까지 등장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을 테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지모신이나 되는 작자가 스테이지를 함부로 침범하는 것을 용납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올포원도 이대로는 위험하겠다는 생각에 인상을 굳히면서 77층에 묶어 뒀던 본체의 태반을 이쪽으로 끌어와야만 했다.

휘리릭-

그를 감싸던 빛무리가 활짝 열림과 동시에 실타래처럼 풀린다 싶더니.

쿵!

스테이지를 짓누르는 중압감이 더욱 커지면서, 그 사이로 어마어마한 존재감이 솟아올랐다.

강림.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이뤄진 올포원의 등장이었다.

그오오-

곧 좌측에서는 칠흑을 둘러싼 명계의 군사들이 달려들고, 우측에서는 대지모신의 기세가 다가왔다.

올포원은 그들을 최대한 빠르게 제거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지체하면 77층이 천계의 것들에게 잠식당할 수 있었다.

“씨발……! 이제 어떡하면 좋니…….”

“오효효효!”

연우는 망연자실한 표정이 된 관리자들의 말을 들으면서, 몸을 돌려 일행들에게로 그림자를 뻗쳤다.

이 정도 사고를 쳤으면, 이제 뒤로 빠져도 될 것 같았다.

제아무리 올포원이라고 해도 저 많은 것들을 제대로 상대하려면 골치가 이만저만이 아닐 테니까. 그리고 싸움이 끝난 뒤에는 다시 77층으로 이동해서 방어에 전념해야 할 테지.

무리한 강림으로 인한 스테이지의 피해 복구와 그 후폭풍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아마 시스템의 제약까지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때마침 합체도 거의 풀리려고 하던 차였기에 여러모로 잘된 셈이었다.

당분간은 녀석의 귀찮은 마수를 피할 수 있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저 고리타분한 면상에다 한 방 먹였다는 사실이 흡족하기만 했다.

“키키키킥!”

연우를 닮은 무언가는 그렇게 웃음을 터뜨리면서 층계를 이동했다.

[다음 층계로 올라가시겠습니까?]

[36층으로 이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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