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403화 (403/862)

3화. 사왕좌(死王座) (3)

[이곳은 36층, ‘푸른 섬’의 관입니다.]

크게 활짝 열린 푸른색 포탈을 따라, 대인원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칸을 비롯한 일행들의 얼굴에는 피로가 역력했다. 타르타로스에서의 격전에 이어 올포원의 등장까지.

다른 플레이어들은 평생 살아도 한 번 겪을까 말까 한 대규모 이벤트를 연속으로 겪다 보니 머릿속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카인!”

하지만 그들은 힘든 기색을 내비칠 시간도 없었다. 포탈을 통과하자마자, 연우가 균형을 잃고 한 쪽으로 쓰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칸이 다급히 뛰어가 연우를 끌어안았다.

방금 전까지 올포원을 상대로 그렇게 미쳐 날뛰던 녀석이 맞나 싶을 정도로, 지금 그는 너무 약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연우에게서는 새카만 아지랑이가 물 새듯이 빠져나오는 중이었다. 몸뚱이가 불에 올린 것처럼 펄펄 끓고 있었다. 신열(神熱)이었다.

칸은 선술로, 브라함은 마법으로 연우를 치료하고자 했다.

하지만 연우를 괴롭히는 신열은 점점 더 심해질 뿐, 가라앉을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신격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후유증이나 다름없는 신열은, 영혼의 오버히트나 다름없기 때문에 선술로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브라함이 비록 98층 출신이긴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잘 모르기도 했다.

그때.

「비켜라, 아둔한 것들.」

갑자기 뒤쪽에서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다.

일행들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인상을 딱딱하게 굳혔다.

여름여왕이 어느새 인간의 형태로 폴리모프를 한 채, 도도하게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생전에 그녀를 상징하던 붉은 머리칼 대신에 검은빛이 감도는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면서. 여름 여왕은 자신을 경계하는 이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네놈들이 멍청한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고 있다만. 그딴 일은 없을 것이니 비켜. 마음에 들지 않지만, 지금은 나도 저놈의 편을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여름여왕을 소환한 것은 연우의 권능이었다. 만약 연우가 잘못된다면 겨우 얻은 소생의 기회도 같이 날아가게 된다.

그제야 일행들도 일리가 있다 여겼는지 물러섰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경계는 풀지 않았다. 여름여왕이 얼마나 영악한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지금은 같은 편이라고 해도, 자신을 죽인 것이나 다름없는 연우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름여왕은 도리어 콧방귀를 끼면서 연우에게 다가갔다. 그때, 다른 누군가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정우였다.

여름여왕은 아주 잠깐 흠칫거렸다. 그녀에게 있어 본 드래곤으로의 강령(降靈)은 사실 수치나 다름없는 일이었지만. 그런데도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정우에 대한 한 줄기 미련이 남아 있어서였다.

「무엇이냐? 또 하지 못한 말이라도 남아 있나, 헤븐윙?」

사실 따지고 보면, 정우에게 가장 큰 원수 중 한 명이 여름여왕이었다.

정우가 그녀의 드래곤 하트를 앗아 갔듯이, 그녀도 정우에게서 수명을 앗아 갔으니까.

당장 부딪쳐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지만.

정우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다 살짝 엷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아니. 형을 잘 부탁한다고.』

「…….」

『부탁할게, 이스메니오스.』

「……흥. 말했지만, 지금 나와 그 녀석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일심동체나 마찬가지인 상태다. 그러니 얼쩡대지 말고 비켜.」

여름여왕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정우의 목소리에 아주 잠깐 눈빛이 흔들렸지만. 곧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도도하게 휙 하고 옆을 지나쳤다. 정우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멍청한 것. 아주 잠깐이라도, 이 나를 거느렸을 정도라면 당연히 이 정도는 거뜬하게 극복해야 맞건만. 아직 갈 길이 멀었군.」

여름여왕은 연우를 보면서 손을 활짝 펼쳤다.

화아아-

그녀의 손을 따라 시푸른 광망이 터졌다.

* * *

여긴…… 어디지?

『이제 그릇은 그런대로 쓸 만해졌나 싶었는데. 안에 담긴 내용물은 여전히 부실해. 먹을 게 없어도 너무 없어.』

어지러웠다. 모든 것이.

『키키킥! 조금 더 분발해야 할 거야. 너에게 주어지는 기회도 이제 거의 끝이 보여 가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너에게만 이런 좋은 기회가 주어지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안 그래?』

기회?

연우는 어지러웠던 정신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여태껏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심해 깊숙한 곳을 마구 떠돌아다니다가, 겨우 정신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갖가지 기억의 편린들이 떠올랐다.

마성과 합일을 이루며 날뛰던 기억들. 부에게 파우스트의 기억을 되돌려 주고, 본 드래곤에 여름여왕을 강령시켜 같이 싸웠던 순간들. 손을 흔들 때마다 불길처럼 휘몰아치던 칠흑은 아직도 손 끝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건 자신이었으며, 자신이 아닌 존재였다.

더 거대한 무언가.

마성이라고 하기에도 어려운…… 아주 커다란 무언가였다.

마치.

‘근원으로 되돌아간 것 같은…….’

아주 오래전에 잊어버린, 기억의 바다 저 너머에 묻어 두었던 옛 기억과 인격을 끄집어 올린 듯한 기분이었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사람이 보고 있는 빙산은 사실 끄트머리에 지나지 않으며, 대부분의 몸체는 해수면 아래에 가라앉아 있다는.

연우는 자신이 그런 빙산의 끄트머리이고, 무의식 아래에 가라앉아 있던 큰 몸체를 끄집어 올린 듯한 기분이었다.

단순히 마성이 튀어나와 뛰어다닐 줄 알았던 그로서는. 당혹스러운 감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연우의 의문을 풀어 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 마성은 그를 한껏 희롱하면서 서서히 사그라졌다.

연우가 몇 번이고 녀석을 불러 댔지만, 마성은 전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현자의 돌 속으로 숨어 잠이 들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마성이 있었던 덕분에 올포원을 따돌릴 수 있었으니.

만약 녀석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짐작도 가질 않았다.

디스 플루토는 물론, 하데스로부터 받은 명계의 왕좌도 강탈되지 않았을까.

물론, 전지(全知)와 전능(全能)에 가장 가깝다고 불리는 올포원이니만큼, 언제고 다시 제지를 가할 가능성이 높았지만.

연우는 마성이 판단했던 대로, 당분간 그러기 어렵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아마도 지금쯤 위쪽 층계의 압박이 다시 거세지기 시작했을 테니.

아래에서는 연우가 열어 버린 공허를 따라 대지모신이, 위쪽에서는 태초신과 창조신들이 손길을 뻗친다면. 올포원으로서도 발목이 단단히 묶일 수밖에 없을 테니.

게다가 어떻게든 올포원이 그들을 떨쳐 낸다고 해도, 연우에게 당장 손길을 뻗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도 칠흑왕의 권능을 깨운 연우를 봤을 테니, 그것을 막을 대책을 마련하려 할 것이다.

결국 연우도 올포원이 다시 제지를 가해 오기 전에, 힘을 최대한 많이 길러 둬야만 했다.

‘그보다…… 분명히 올포원에 강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어.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거지?’

연우는 마성에 대한 그런 의문을 던지면서 천천히 눈을 떴다.

때마침 검붉은 머리칼을 칙칙하게 늘어뜨린 여인이 자신과 닮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연우는 처음 보는 색깔의 머리였지만, 그녀가 누군지는 잘 알고 있었다.

워낙에 낯이 익은 얼굴인 데다가, 자신과 심령으로 연결이 되어 있었으니.

“여름여왕.”

사실 따지고 보면 눈앞에 있는 존재는 여름여왕이되, 여름여왕이라 할 수 없는 존재였다.

진짜 여름여왕이라는 존재는 완전히 지워져 연우의 영혼에 영양분이 되고 말았으니까.

눈앞에 있는 여름여왕은 그것이 남긴 잔재이자, 껍데기 같은 존재였다.

연우가 그녀를 보고 있는 감정도 마치 한 개의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다른 분신을 보는 것에 가까웠다. 그녀의 존재 근원이 연우의 영혼에 적을 두고 있으니.

여름여왕은 정우와 짤막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연우가 의식을 되찾은 것을 확인하고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무심하기 짝이 없는 눈빛을 하고 연우를 위아래로 훑더니, 여전히 도도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꼴을 보아하니, 이제 좀 괜찮아진 모양이로군.」

『가려고?』

정우가 쓰게 웃으면서 여름여왕을 바라보았다.

여름여왕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이미 나는 무(無)와 공(空)으로 스러진 지 오래인 존재. 여기에 남아 있는 것도 지난 미련이 있어 머무는 것일 뿐이지. 사실 종족의 어른들이 보셨다면 경을 쳤어도 크게 쳤을 일이다.」

용종은 순리를 거역하지 않는다. 순리에 따라 움직이며, 때에 따라서는 순리를 움직여 자신들의 의지를 발현한다. 그것이 그들 종족이 마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이었다.

그런 뜻에서, 여름여왕이 죽음이라는 순리를 거스르고 다시 탄생한 것은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여름여왕은 자신이 한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이만하면 놀 만큼 즐거이 놀았고, 그대와도 이야기를 나누었지. 그럼 되었다.」

여름여왕이 정우와 나눈 이야기는 고작해야 시시한 신변잡기가 전부였을 뿐. 생각보다 연우가 금방 눈을 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으로도 만족했다.

정우는 여전히 원수나 다름없는 자신에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원망을 많이 하더라도, 할 말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는 이미 복수는 형이 마쳐 주었으니 괜찮다고 말했다. 도리어 같이 죽은 몸으로 지난 은원은 잊어버리고, 예전처럼 잘 지내자는 말까지.

순진한 건지, 호구 같은 건지. 아니면 마음이 넓은 건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여름여왕은 그런 짧은 대화만으로도 마지막 남은 미련을 훌훌 털어 버릴 수 있었다.

휘이이-

여름여왕이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자취를 감춘 뒤.

연우는 정우를 보았다.

영체는 여전히 흐릿했다. 그 속을 수많은 문자열들이 동맥처럼 흐르는 것이 보였다.

그래도 이전에 비해 많이 안정화 되어 보였다.

물론, 연우는 그게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념체는 자신이 사념체라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서서히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자신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고, 형체를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물며 영력을 과소모했다면 유지 시간은 더더욱 줄어들 수밖에 없다.

“몸은 좀 괜찮고?”

『어. 덕분에.』

“그렇다면 다행이다.”

연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무뚝뚝한 태도였지만, 그 안에 형의 진심이 담겨 있다는 것을 동생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싸움이 끝나면서 정리했던 생각을 진심으로 털어놓을 수 있었다.

『형, 혹시 저번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해?』

“무슨 말?”

『나, 다시 살고 싶다고 했던 말.』

-난 못난 자식이었지만. 그래도 어머니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되살아나고 싶어.

-그러니까.

-그래서 내 손으로 세샤를 안아 주고 싶어. 어머니가 우리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나도…… 그럴 수 있을까?

정우가 처음 일기장에서 깨어나 깊은 이야기를 나눴을 때.

녀석은 저런 말들을 했었다.

자신의 손으로 세샤를 안아 주고 싶다고.

아난타를 다시 만나 미안하고, 또한 고마웠다는 말을 전해 주고 싶다고.

『그때, 그 소원 다시 부탁해도 될까?』

그래서. 정우는 간절한 염원을 담아 연우를 바라보았다.

연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소생(蘇生)’은 보통 신의 영역도 넘어서는 일이라는 것, 잘 알고 있지?』

“알다마다.”

『그러려면 해야 할 게 참 많겠네.』

정우는 피식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

시체를 다룬다거나, 죽은 영혼을 부린다거나 하는 경우는 그래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죽은 사람을 살아 있던 때와 동일한 상태로 되돌렸다는 이벤트는 아직 탑에서 벌어진 적이 없었다.

소생과 부활은 일반적인 스킬과 권능의 영역을 넘어선 ‘기적’의 영역이기 때문이었다.

창조나 생명과 관련된 태초신, 혹은 개념신이나 되어야 가능한 영역.

또는, 그 지점에 다다랐을 거라고 추정되는 창조신들만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추론하는 게 전부인 아득한 영역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성공했다는 말도 들린 적이 없었다.

즉, 명계의 왕좌를 물려받은 연우가 아무리 신격을 터득하고, 계속 성장한다고 해도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는 영역이란 뜻이었다.

그렇다면.

연우가 정우를 소생시킬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모든 플레이어들의 비원.

탑의 꼭대기에 이르러, ‘진짜’ 신이 되어 소원을 이루는 수밖에는 없었다.

『우리 형, 앞으로도 많이 바쁘게 살겠는데.』

플레이어들의 장벽이라는 50층에 오르고, 올포원이 있는 77층을 처음으로 지나, 신과 악마들이 산다는 98층을 딛고 일어서, 어느 누구도 발을 들이지 못했다는 100층에 다다른다.

플레이어와 초월자, 누구든 가릴 것 없이 이르지 못했던 미지의 영역.

99층부터는 누가 존재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게다가 ‘어디’ 있을지 모를 영혼을 찾는 것도 지난한 숙제가 될 터였다.

그렇기에 연우가 하고자 하는 다짐이 허풍으로밖에 안 보일 수도 있었지만.

정우는 형이 언제고 간에 해낼 수 있으리라 여겼다.

자신이 늘 보아 왔던 형은 언제나 그런 존재였으니.

그래서.

정우는 편하게 잠에 들 수 있었다.

파아아-

정우를 이루고 있던 영체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활자들이 문자열을 이루면서 흘러나왔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이전처럼 물 새듯이 마구잡이로 새는 게 아니라, 차례차례 풀려나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문자열의 내용도 전부 말이 되는 것들이었다. 일기장을 이루고 있던 글자들.

『그때까지.』

정우는 흐릿해지는 모습으로 미소를 흘렸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팟!

정우는 그 말과 함께 빛무리가 되어 잘게 부서졌다. 활자들이 연우를 따라 한껏 춤을 추다가 서서히 회중시계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

J. W. CAH

연우는 말없이 회중시계의 뒷면에 새겨진 글자를 몇 번씩 쓰다듬으면서.

뚝.

뚝.

소리 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땅바닥이, 어디서 떨어지는지 알 수 없을 빗자국으로 점점이 물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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