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50층으로 (1)
50층, ‘용의 신전’의 관.
“저 무리…….”
“어. 맞아. 마희성(魔姬城). 결국 여기까지 왔구만.”
길을 지나던 사람들은 모두 걸음을 멈추고 좌우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들 사이로 움직이는 어느 거대한 무리 때문이었다.
통일된 구색 없이, 다양한 복장과 무장을 한 자들.
언뜻 보기에 동네 왈패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일그러진 얼굴이나 풍기는 기세가 하나같이 흉흉했다.
게다가 허락 없이 다가온다면 바로 베어 버리겠다는 듯. 주변엔 살기와 투기까지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래서 구경꾼들은 그들을 신기하다는 듯이 가만히 지켜보는 게 전부였다.
다가갈 엄두는 전혀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이들 무리의 악명은 지난 몇 달간 탑 내에서도 널리 알려진바.
그들이 이룬 업적도 대단했다.
클랜 ‘달밤의 그림자’의 궤멸.
랭커 ‘나인 블레임’의 패퇴.
히든 던전 ‘여섯 개의 마수정굴’의 붕괴.
히든 보스 ‘알레아노의 영주’ 토벌.
그 외, ‘마검 타천’의 시험 등등.
각 층계가 보유하고 있다는 난이도 높은 퀘스트를 압도적인 성적으로 공략하는 것은 물론, 그들과 분쟁을 벌인 클랜과 랭커들은 줄줄이 죽어 나갔다.
이렇다 할 지휘 체계가 없어 아직 세력으로서 인정을 받지 못했던 그들이었지만.
언제부턴가 그들은 무너진 트리톤과 네크로폴리스를 대신해 새로운 신흥 클랜으로 손꼽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일으키는 돌풍은 아래 층계를 크게 뒤흔들면서 여러 이목을 한꺼번에 집중시켰다.
하지만.
가장 크게 두각을 드러내는 존재는 따로 있었으니.
바로 마희성의 수장이자, 구심점인 마희 에도라였다.
연보랏빛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관자놀이에서부터 산양처럼 굽은 뿔을 세운 여인.
품이 넉넉한 도복에 이제는 그녀를 상징하는 트레이드 마크가 되다시피 한 거대한 칼, 신마도가 안겨 있었다.
외뿔부족 청람가 출신으로서 튜토리얼 때부터 이목을 집중시키며 화려한 데뷔식을 치르고, 이제는 어엿하게 스스로를 증명하면서 뛰어난 전사로 각광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특히 누군가가 도전을 해 올 때마다 냉막한 표정으로 신마도를 거침없이 휘두르는 모습은 잔혹하면서도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아름다웠으니. ‘마희(魔姬)’라는 별칭이 붙은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누군가는 여태껏 그녀가 세운 업적을 따라, ‘핏빛 현자, 무왕에 이어 외뿔부족의 새로운 세대를 이끌 인재의 등장’이라고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혹은 ‘독식자의 돌풍을 유일하게 견제할 수 있는 라이벌’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게 어떤 평가든지, 외뿔부족과 경쟁 관계에 놓인 자들은 또 한 번 더 탄식을 흘릴 만한 소식인 셈이었다.
그리고.
마희 에도라에게 달라붙는 세간의 시선과 기대가 그만큼 크다는 뜻이기도 했으니.
그리고 이제 그녀가 50층에 다다랐다는 소식은 더더욱 그런 시선과 기대를 크게 부채질하는 데 한몫할 것이 자명했다.
50층, 용의 신전.
일반 플레이어와 랭커를 가른다는 기준점.
수많은 실력자들이 이곳을 통과하기 위해 도전했지만 좌절을 겪어야만 했다는 곳.
달리 ‘통곡의 벽’이라 불리는 스테이지에, 에도라가 도전하게 된 것이다.
물론, 사람들의 관심사는 에도라가 이곳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이냐가 아니었다.
이미 그들은 에도라의 실력이 랭커 급에 다다랐거나, 넘었을 거라고 예상하는 중이었으니까.
다만, 에도라가 ‘어떻게’ 용의 신전을 공략할 것인지를 가장 궁금했다.
용의 신전은 여태껏 플레이어들이 공략한 여러 스테이지 중에서도 가장 ‘괴이하다’는 평가를 받는 곳.
공통된 시련 내용은 널리 알려졌지만, 중간부터는 각 플레이어마다 주어지는 시련이 다 다르다.
그래서 충분히 통과할 만한 실력을 지녔다고 평가를 받는 이들 중에서도 탈락하는 이들이 더러 있을 정도였다.
반대로 자격이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운 좋게 통과해서 뛰어난 랭커로 성장하는 자들도 있었고.
그러니 여태껏 압도적인 성적으로 스테이지를 클리어했던 에도라의 공략 방식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귀찮아.’
에도라는 그런 시선들이 영 지겹고 따분하기만 했다.
사실 그녀는 이런 수많은 관심이 영 불편하기만 했다.
탑은 어디까지나 수행자들이 개개인의 역량을 단련하고, 더 높은 경지로 올라서고자 하는 곳. 당연히 개인주의가 그만큼 강할 수밖에 없다. 자신을 단련하는 데 집중해도 하루하루가 모자라기 때문이었다.
에도라도 그런 성격이었다.
아버지가 그러했고, 일족의 사람들이 그러했다. 보고 자란 것이 그런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수행에 임하는 자세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건 대체 무엇일까?
각자 태어난 행성이나 세계에서는 손꼽히는 실력자들로 분류되었을 이들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열광하고 환호한다.
이미 그들은 스스로를 잊어버리고, 기존 지배층을 노릴 수 있는 새로운 루키의 등장에 대리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을 따라다니면 무언가 한자리라도 차지할 수 있지 않을까, 콩고물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속셈을 갖고 달라붙는 승냥이들만 많아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다 떨쳐 냈었지만, 언제부턴가는 귀찮아서 자신이 하는 일에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내버려 두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자 따라다니는 무리도 계속 눈덩이처럼 불어나더니, 언제부턴가는 저들끼리 서열을 정리하고 체계를 갖추기까지 했다.
그리고 붙은 마희성이라는 이름은 조금 어이없기도 했지만.
어차피 그들에 대한 별다른 관심이 없었기에 계속 내버려 두고 있었다.
정도가 지나치면 그때 베어 버리면 그만이었으니.
아니, 저런 쓸데없는 곳에 신경을 쓸 겨를조차 없었다.
지금은 저 통곡의 벽이라는 시련에만 집중할 생각이었다.
-난. 너희들이 내 날개가 되어 줬으면 한다.
언젠가 마을을 떠나기 전에 연우가 했던 말은 여전히 그녀의 머릿속에 단단히 남아, 그녀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었다.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를 나쁜 님이었지만.
어디선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스르릉-
에도라는 칼집에서 천천히 신마도를 뽑았다.
어느새 거대한 신전의 문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시련이 시작됩니다.]
* * *
『내 영역을 침범한 자, 죽음으로서……!』
용암이 강물처럼 흐르는 대지 위로.
마수 플루크라트는 구겨진 종잇장처럼 헐거운 검은 날개를 활짝 펼치면서 포효를 내질렀다.
산자락이 떨쳐 울릴 정도로 강렬한 파동이 불어닥쳤지만.
[‘비그리드-???’가 숨겨진 진명, ‘게이 볼그’를 개방합니다.]
[전승: 해수 귀소]
쐐애액-
여의봉과 연결된 비그리드가 큰 궤적을 남기면서 단번에 플루크라트의 가슴팍에 틀어박혔다.
새롭게 개방된 비그리드의 진명, 게이 볼그.
게이 볼그는 죽은 바다 괴물의 늑골로 만든 창으로, 대대로 영웅들의 손을 타고 내려오다가 쿠훌린이라는 영웅에게까지 다다랐다는 전승을 지니고 있었다.
한 번 던지게 되면 목표가 무엇이든지 간에 필중(必中)이며, 박힌 자리에서 수십여 개의 가시가 치솟아 적을 격살시킨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 연우도 처음 게이 볼그라는 진명을 개방할 때, 이게 제대로 된 게 맞나 의심이 들었었다.
비그리드는 어디까지나 검의 형태였으니까.
하지만 창날은 몸체와 분리를 하는지 여부에 따라 얼마든지 검으로 변화할 수 있고, 평상시 연우도 비그리드를 여의봉과 결합해 사용하던 것을 생각해보면 절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최근 들어 비그리드를 투창용으로 많이 사용하던 연우로서는 기꺼운 일이기도 했다.
게이 볼그는 흔히 투창용으로 잘 알려진 무기. 당연히 위력도 배로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콰아앙!
쿠쿠쿠, 콰르르-
『크어어어!』
게이 볼그가 명중한 가슴팍을 따라, 등허리와 사타구니까지 수십 개에 달하는 뼈 가시가 삐죽삐죽 솟아올랐다.
플루크라트는 고통에 크게 몸부림을 치며 악다구니를 질렀다. 하지만 녀석의 비명 소리도 금세 파묻히고 말았다.
검게 물든 뼈 가시를 따라 그림자가 잔뜩 번져 나오면서 녀석의 몸뚱이를 야금야금 먹어 치워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먹을 거다, 먹을 거.」
「주인께, 더 강한 힘을…….」
타르타로스에서 나온 이후로 맛난 먹잇감을 만끽하지 못했던 영괴들은 서로 플루크라트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먹겠다면서 아귀 같이 달려들었다.
결국 플루크라트는 그림자의 늪에서 허우적대다가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다.
39층의 히든 보스로서,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공략하고자 애썼지만 결국 해내지 못했던 존재의 죽음이었다.
[모든 시련이 종료되었습니다.]
[누구도 쉽게 이루지 못할 업적을 이뤄냈습니다. 추가 공적치가 제공됩니다.]
[공적치를 100,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추가 공적치를 200,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체력과 마력이 회복됩니다.]
[모든 상태 이상이 회복됩니다.]
……
[모든 죽음의 신들이 당신을 보며 경탄합니다.]
[모든 죽음의 악마들이 당신의 활약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다수의 신들이 당신을 신중한 눈으로 지켜봅니다.]
[다수의 악마들이 당신에 대한 탐욕을 드러냅니다.]
……
[모든 공적치를 합산합니다.]
……
[위대한 기록을 달성했습니다.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시겠습니까?]
[등록을 거부하셨습니다.]
[하지만 공개되지 않아도 당신의 업적은 탑에 깊게 새겨져 원할 시에 언제든 등록 여부를 전환하실 수 있습니다.]
[다음 층계로 올라가시겠습니까?]
“이번에도 스테이지 랭킹 1위로군. 저렇게 빠른 공략을 시도하는데도 참 대단해.”
브라함은 멀리서 그런 연우를 보면서 쓰게 웃음을 지었다.
갈리어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우리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히든 피스라는 히든 피스는 죄다 쓸어 모으면서 올라가고 있는데. 게다가 층계의 시련도 아무리 높이고 높여 봤자, 저 친구에게 너무 쉽기도 하고.”
아마 50층대, 아니, 60층대가 아니고서야 타르타로스에 버금가는 위험천만한 난이도를 가진 스테이지도 없었다.
아니, 연우가 겪은 이벤트만 따지고 본다면 그것도 부족할 수 있었다.
기간토마키아가 발발하고, 대지모신이 나타나며, 마지막에는 올포원까지 간섭하려던 것을 감안한다면.
아마 그런 대규모 이벤트를 겪은 플레이어는 거의 없지 않을까.
아홉 왕이나 되어야 겨우 비교할 수 있을 터였다.
“또 잔뜩 조바심도 나고 있겠지. 아마 모르긴 몰라도, 지금도 최대한 자제하고 있는 게 아닐까?”
갈리어드는 36층에서 가면을 푹 쓰고, 회중시계를 끌어안은 채 천천히 돌아오던 연우의 모습을 떠올렸다.
돌아오는 길에 정우는 없었지만.
설명이 없어도, 어떻게 된 일인지 눈치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들이 만난 정우는 존재가 언제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을 위태로운 사념체였고, 회중시계라는 매개체가 없었다면 절대 실재가 불가능했다.
정우도 그런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에 훗날을 기약하면서 다시 회중시계 속으로 들어가 깊게 잠이 든 것이겠지.
연우가 뭘 노리는지도 잘 알 것 같았다.
완전한 소생.
혹은 부활.
믿을 수 없는 신화로만 전해졌을 뿐, 초월자들도 이루지 못했다던 기적을 그리려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하루라도 빨리 층계를 올라야만 한다.
하지만 여전히 층계 곳곳에는 연우를 가로막을 장애물이 너무나 많았고.
그들을 일일이 치우면서 올라가려면 아직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연우도 그것을 잘 알기 때문에 순서대로, 차근차근히 단계를 밟아 나가려는 것 같았지만.
역시나 그도 사람이라 그런지 조바심을 완전히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스테이지 공략이 계속 이뤄지는 중이었다.
36층을 통과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39층이 끝나서 40층을 앞두고 있으니.
평소에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처럼 차갑기만 하면서. 유독 정우와 관련된 일에는 쉽게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한데, 백이 회중시계에 남아 있었다면, 그럼 혼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글쎄.”
그리고 그런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면서. 브라함과 갈리어드는 마지막까지 남은 의문을 지울 수가 없었다.
‘존재’는 의식인 백과 영혼인 혼의 결합으로 이뤄진다.
그중 정우의 사념은 회중시계에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정우의 영혼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분명한 건, 녀석이 회중시계에 자신의 사념을 남겨 놓은 게 단순히 일기장을 만들어 놓기 위해서만은 아니란 건데.”
브라함은 미간을 좁히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분명 처음 일기장을 남긴 의도는 특전을 이용해서 연우의 빠른 성장을 유도하기 위해서였지만.
과연 단순히 그런 이유만 있는 걸까?
브라함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가 아는 정우는 비록 순진할지언정 우둔하지는 않았으니까. 생각보다 영악한 녀석이었다.
‘언젠가 영혼만 돌아와서는 별 의미가 없을 테니. 기억과 자아를 따로 저장해 둔 건가?’
이게 끝이 아닐 거란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최악의 경우에는.
‘특전을 계속 반복하다가 영혼이 쇠락을 거듭하며 기억만 남고 완전히 소멸한 것일 수도 있을 테지만…….’
브라함은 침음을 삼켰다.
‘그건 아니길 빌어야지.’
그렇다면 너무 슬픈 이야기가 되어 버릴 테니.
다른 어떤 안배가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자네, 그래도 창조의 브라흐마이지 않던가. 그래도 몰라?”
“신격을 상실하고, 신성도 놓아 버린 몸일세. 전지와 전능은 이미 딴 데다 둬 버린 지 오랜데, 알려면 뭘 얼마나 더 알려고.”
브라함은 갈리어드의 구박에 코웃음을 치면서 무시했다.
그때, 새로운 메시지가 그들 앞으로 떠올랐다.
[40층으로 이동합니다.]
층계 공략은 별다른 휴식 없이 계속 이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