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405화 (405/862)

5화. 50층으로 (2)

[이곳은 42층, ‘격쟁(擊錚)의 관’입니다.]

[42층의 시련을 시작합니다.]

[시련: 예부터 전사에게 있어 전장은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무대였습니다. 증명할 수 있는 것들도 아주 많았습니다.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 굽히지 않는 기상, 군중을 휘어잡는 카리스마, 타인보다 뛰어난 육체적인 능력…….

그리고 나열된 이런 것들과 마찬가지로 전장에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또 있습니다.

그건 바로 ‘지략’과 ‘운’이었습니다.

전장에선 자신이 위치한 진영이 지닌 전력을 냉정하게 파악할 줄 아는 눈과 환경을 불리(不利)에서 유리(有利)로 바꿀 줄 아는 명석한 두뇌, 그리고 변수 없이 계획이 진행될 수 있도록 운 역시 필요로 합니다.

지금 이곳에는 당신 외에 99명의 인원이 서로가 볼 수 없는 대기 공간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네 가지 길이 놓여 있습니다.

붉은색, 푸른색, 검은색, 흰색.

이 중 한 곳을 선택하고, 그 끝에 있는 무리들과 함께 팀을 이뤄 무작위로 주어진 환경에서 경쟁해 승리를 이루십시오.

경쟁의 룰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한번 정해진 팀원은 절대 바뀔 수 없습니다.

2. 각 팀에는 해골 문장 5개와 팀의 깃발이 1개씩 주어집니다.

3. 해골 문장을 지닌 팀에게는 디버프가 주어지며, 문장의 개수가 많아질수록 디버프의 위력도 강해집니다. 즉, 각 팀은 해골 문장을 어떻게든 다른 팀에게 전가시켜야 합니다.

4. 여기에는 한 가지 변칙이 존 재합니다. 만약 다른 팀의 깃발을 쟁취했을 시, 그 팀과 상징색 교환이 이뤄집니다. 이때, 소지한 해골 문장도 똑같이 교환됩니다.

5. 24시간을 간격으로 팀 정산이 이뤄지며, 해골 문장을 더 많이 소지한 팀이 패배하게 됩니다.

6. 경기는 총 5일에 걸쳐 진행되며,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팀이 최종 승리를 하게 됩니다.]

30층대의 시련이 대부분 스스로의 역량을 키워서 극복해야 하는 솔로 플레이가 주를 이루는 것과 다르게.

40층대의 시련은 무작위로 팀을 구성하고, 함께 미션을 수행해야 하는 팀 플레이가 주를 이루는 편이었다.

그중에서도 42층은 가장 복잡한 룰을 가진 것으로 유명했다.

100명의 한정된 인원이 4개의 팀으로 나뉘고, 각자 주어진 해골 문장을 최대한 많이 털어 내야만 한다.

해골 문장을 많이 얻을수록 디버프가 중첩되기 때문에 한 번 패배를 겪은 팀은 계속 몰락을 거듭하게 된다.

게다가 처음에 팀을 정할 때에도 눈치 싸움을 필요로 한다.

한 번 정해진 팀원이 그대로 가야 하니, 만약 소수 인원으로 이뤄진 곳에 배정되거나, 전력이 너무 약한 곳에 가담한다면 회차가 엉망으로 꼬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42층은 입성하기 전에 따로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팀 컬러를 미리 정해 두는 편이었다.

이 과정에서 용병을 구하는 등, 여러 방식이 나오기도 했고.

하지만 전력이 약한 팀에 속했다고 해서, 반전의 기회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변수는 팀의 색깔이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것.

깃발을 소지한 팀원이 적에게 노출되어 깃발을 빼앗길 경우, 타 팀과 해골 문장이 곧바로 교환된다는 점이 관건이었다.

다른 팀들이 얼마나 해골 문장을 소지하고 있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정황을 바탕으로 판단하는 게 전부. 그렇기에 문장을 많이 소지한 팀은 최대한 없는 척하거나, 없는 팀은 많은 척을 하는 등 기만 전략도 상당히 필요로 한다.

때에 따라서는 팀끼리의 협력이나 배신 등, 다양한 전술도 나올 수 있으니.

꽹과리가 요란하게 울린다는 뜻의 ‘격쟁’이라는 단어가, 스테이지의 이름이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다만, 이번 회차에는 새로운 변수가 더해지고 말았다.

아니, 단순히 변수라고 지칭하기에는 너무 큰 걸림돌이었다.

“뭐? 독식자가 나타나? 그놈이 여기는 왜? 더 위에 있어야 할 놈이…… 무슨 양민 학살이라도 하러 왔나?”

“그새 잊었나? 독식자는 아직 50층에도 이르지 못했었던 거?”

“아, 그랬지? 젠장!”

“한동안 보이지 않기에 어디서 객사한 건 아닌가 했었는데…… 하필 이번에 나타나고 말았군.”

“진짜 어쩌지?”

“어쩌긴 뭘 어째…….”

한바탕 소란이 있고 난 뒤.

“당연히 독식자가 있는 팀을 찾아서 가야지.”

참여자들은 눈에 불을 켜고 독식자가 어디로 이동했을지 추론하기 시작했다.

비록 독식자가 지난 몇 달 동안 알 수 없는 이유로 행방불명이긴 했다지만.

그래도 그의 명성이 어디로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랭커들 사이에는 여전히 과대평가를 받고 있다는 평가가 주를 이뤘으나, 그래도 저층 구간에서는 압도적인 실력자인 것만큼은 확실했다.

특히 20층에서 철사자단을 비롯한 여러 클랜 연합을 패퇴시킨 이야기는 아직도 회자가 될 정도였다.

당연히 플레이어들은 독식자와 같은 팀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래야 이 복잡하기만 한 42층의 시련을 편하게 통과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가 어디로 갈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유추할 만한 이렇다 할 근거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개 운이나 자신의 직감에 의존을 해야만 했고.

플레이어 윌럼프도 독식자와 한 팀이 되길 바라는 일반적인 케이스에 해당했다.

다만,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아예 까막눈인 저들과 다르다는 거지.’

윌럼프는 지금쯤 각자 대기 공간에서 고민에 잠겼을 다른 플레이어들을 떠올리면서 비웃음을 던졌다.

그가 지닌 특성은 ‘운명의 별’.

내리는 선택마다 의도했던 것보다 좋은 결과가 나오거나, 최악의 상황이 닥쳤을 때 목숨을 보전할 수 있게끔 최소한의 방어책이 마련되는 아주 드문 것이었다.

덕분에 윌럼프는 자신의 실력에 비해 꽤 높은 점수로 층계를 꾸준히 공략할 수 있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운을 체득해서 뛰어난 실력자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윌럼프는 이번에도 42층의 시련을 시작하기에 앞서 품에서 작은 주사위 두 개를 조용히 꺼냈다.

〈운명의 주사위〉. 특성에서 비롯된 스킬로, 그의 운명을 점지해 주는 고마운 도구였다.

이걸 두고 동료들은 ‘운빨망겜’이라면서 투덜거리기 바빴지만.

윌럼프는 이번에도 이 주사위가 자신을 행운으로 이끌 것이라 믿었다.

독식자가 있을 곳으로.

‘굴러라!’

윌럼프가 주사위를 굴렸다. 이미 머릿속으로 규칙은 생각해 두었다. 주사위 총합 12를 기준으로, 3 이하는 레드, 4 이상에서 6 이하는 블루, 7 이상에서 9 이하는 화이트, 10 이상에서 12 이하는 블랙을 선택할 참이었다.

그리고 결과는 6과 6. 12였다.

“누가 봐도 무조건 블랙으로 가라는거군. 좋아!”

윌럼프는 주사위를 회수하면서 쾌재를 외쳤다. 이렇게 깔끔하게 숫자가 나는 경우는 잘 없다. 그렇다면 이번 자신의 선택은 무조건 옳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곧장 검은 깃발이 있는 쪽으로 길을 선택해 걸었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는 깜깜한 어둠을 따라, 보이는 것이라고는 꼬불꼬불한 오솔길 같은 좁은 길뿐이었다.

그런데.

‘뭐지, 저건?’

어느 정도 걸었다 싶을 때, 갑자기 길목 한가운데에 커다란 무언가가 나타났다.

그림자를 뭉쳐 놓은 것처럼, 배경과 같은 색을 자랑하는 인간 형상 같은 것이 우뚝 서 있었다.

제 몸집만큼 커다란 소드 브레이커를 앞에 세운 채로. 불길한 기운을 마구 뿜어 대는 중이었다.

42층에 저런 게 있었던가? 윌럼프는 미리 숙지했던 시련의 내용을 상기해 봤지만, 도저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때.

「멈춰.」

그림자 인형으로부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얼마나 강렬한지 대기가 잘게 떨릴 정도였다. 윌럼프도 이 이상 걸으면 뭔가 위험하겠다는 생각에 흠칫 걸음을 멈췄다.

「미안하지만, 이 앞으로는 더 가지 못해. 우리 인성왕이 다른 저급한 것들과는 어울리기 싫다고 하셔서 말이야. 정말 나아쁘은 놈이야, 그렇지 않냐?」

윌럼프는 어쩐지 생김새를 알 수 없는 그림자 인형이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발이 땅에 딱 달라 붙어서 도저히 떨어지질 않았다.

저 말을 무시하고 앞으로 가면 머리가 당장 어깨에서 분리될 것 같은 기분.

저건 단순한 충고가 아니었다.

경고였다.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그제야 윌럼프는 떠올릴 수 있었다.

독식자가 부린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권속들. 하나하나가 웬만한 플레이어쯤은 쉽게 잡아먹는다는 괴물이 바로 저것이라는 것을.

그렇다면 저 너머에 독식자가 앉아 있다는 건데. 대체 뭘 하려는 걸까?

윌럼프는 그게 너무나 궁금했지만.

확인할 용기는 전혀 없었다.

* * *

“도일은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검은 깃발이 있는 블랙 팀에는 연우만 홀로 앉아, 브라함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는 이번에도 점수를 독식하기 위해서 샤논을 입구에다 박아 두고 아무도 들어 오지 못하게 하는 중이었다.

팀이 불리를 겪으면 겪을수록 가중되는 가산점도 클 수밖에 없으니 이것을 노리려는 것이다.

거기다 연우는 이참에 해골 문장도 가득 모을 생각이었다. 그만큼 많은 디버프를 받겠지만.

‘그걸 토대로 42층에서만 터득할 수 있는 히든 피스도 있으니.’

그러다 마지막 정산 때 마음에 안 드는 놈들의 깃발을 빼앗아 역전하면 그만이었다.

그런 생각을 읽은 건지, 브라함은 가볍게 혀를 차면서도 연우가 던진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가능할 듯싶어. 조금 더 살펴야 할 것 같지만, 페르세포네와의 채널링은 아직 맺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싱크로율만 떨어뜨린다면 가능할 것 같네.”

연우가 스테이지 공략에 몰두하는 사이, 다른 일행들은 잠시 흩어진 상태였다.

칸과 빅토리아는 도일을 데리고 페르세포네와의 채널링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아나스타샤에게로 갔고, 크로이츠는 오랜만에 연대의 본단에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헤노바는 갈리어드의 도움을 받아 대장간으로 되돌아간 상태였다.

그러다 도일의 소식을 다시 듣게 된 것이다.

듣기로, 빅토리아가 도일을 데려온 것 때문에 아나스타샤가 다시 단단히 뿔이 났다고 했다.

기껏 큰맘 먹고 아다만틴 노바를 쥐여 주고 보낸 제자가 무사히 돌아오자마자 하는 말이 난생 처음 보는 놈팡이를 구제해 달라는 것이었으니 얼마나 기가 찼을까.

하지만 초월자와의 채널링을 끊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이를 위해서는 반칙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선택된 것이 바로 아나스타샤가 다룬다는 주술이었다.

큰 존재로부터 힘을 빌려 오는 게 주술의 본질이니, 채널링의 방향을 바꾸는 데도 효과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여기에 대신격이었던 브라함이 붙어서 의견을 더한다면 큰 도움이 되리라 여겼다.

대지모신의 사도인 페르세포네와의 채널링이라 쉽게 끊어지지 않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이미 천마와의 채널링도 끊어진 전적이 있기 때문인지, 이번에도 해제가 가능할 듯싶었다.

물론, 문제점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문제는 대체할 만한 채널링을 찾는 것이야.”

천마에 이어 대지모신까지. 도일의 채널링은 웬만한 걸로는 절대 대체가 불가능했다.

그러니 다른 대체품을 모색하는 게 쉽지가 않았다.

“거기에 대해서는 좀 더 논의를 나눠 봐야겠군요.”

“그렇겠지. 그래도 다행히 시간은 좀 남아 있어. 천천히 해도 될 것 같아. 그리고.”

브라함은 다른 일행들의 상황을 모두 전달하고, 입꼬리를 씩 말아 올리면서 짓궂게 웃었다.

“아주 재미난 소식도 같이 갖고 왔다네.”

재미난 소식?

연우가 고요한 눈빛으로 브라함을 바라봤다.

“자네가 뿌려 놨던 씨앗들 있지 않은가. 슬슬 싹이 제법 보이더군. 상황이 아주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어.”

순간, 연우의 두 눈동자가 가면을 뚫으며 안광을 잔뜩 예리하게 드러냈다.

브라함이 말한 ‘씨앗’이 무엇인지 눈치챈 것이다.

혈국과 마군. 화이트 드래곤과 블랙 드래곤. 마탑이 이끄는 마법 연합이나, 철사자단이 규합한 용병 연합 등이 뒤엉키기 시작한 세력전의 상황. 여기에 타르타로스의 일을 계기로 엘로힘도 참여하게 될지 몰랐다.

“아직 전초전에 불과하지만. 혈국이 블랙 드래곤과 손을 잡고, 화이트 드래곤에 충돌을 시작했다네.”

가면 아래, 연우의 표정이 조금 묘하게 변했다.

워낙에 큰 세력들이 주렁주렁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당분간 큰 싸움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의외로 빨리 시작된 것이다.

그만큼 식탐황제가 욕심을 부린 걸까, 아니면 자신이 모르는 어떤 변수가 개입한 걸까.

뭔지는 몰라도, 예상했던 것보다 상황이 빠르게 진행될 듯했다.

“언제부터입니까?”

“더 자세하게 알아봐야겠지만. 파악한 바로는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야. 이전까지 자잘한 충돌은 여러 번 있었지만, 그래도 크게 부딪칠 기색은 전혀 없었어. 마치 간을 보는 것 같았달까. 그런데.”

브라함의 눈이 묘하게 변했다. 너무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올포원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백팔십도 뒤집혔다더군.”

“……?”

“거대 클랜 놈들이, 올포원의 움직임을 어떤 ‘징조’라고 받아들인 모양이야. 그놈이 움직일 때면 언제나 큰 파란이 있곤 했으니까. 이번에도 그가 움직일 만한 큰 ‘거리’가 있다고 여긴 거지.”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이마를 탁 짚고 말았다.

결국 변수는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다.

올포원의 갑작스러운 강림.

전후 사정을 전혀 모르는 이들로서는 갖가지 오해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연우도 올포원의 등장으로 탑이 꽤나 시끄러워질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아무래도 그가 생각한 것보다 반향이 더 큰 모양이었다.

“여름여왕의 유지를 이으려는 화이트 드래곤은, 이유는 몰라도 올포원에게 무슨 일이 있다고 생각해서 77층 공략을 재시도하려 했고. 기회를 틈틈이 노리던 블랙 드래곤이 이 뒤를 들이친 것 같아. 혈국도 덩달아 신나서 뛰어들었고.”

브라함이 그 뒤에 말해 준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77층을 노리는 화이트 드래곤과 이 뒤를 노리는 블랙 드래곤&혈국 연합.

전초전에 불과해도 막상 충돌이 시작되니, 탑의 층계 곳곳에서 분란이 발생했다.

‘우선 심지부터 당기고 본 건가? 식탐황제가 수를 크게 던진 것 같은데.’

식탐황제는 예전에 외뿔부족과 환상연대를 끌어낼 목적으로 연우에게 동맹 제안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대답을 제대로 듣기도 전에 먼저 전쟁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정말 연우를 같은 편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브라함이 혀를 가볍게 찼다.

“그렇게 저들끼리 열심히 싸워 대는 건 좋은데, 블랙 드래곤이 혈국만 전면에다 세워 두고 뒤로 조금씩 빠질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지.”

연우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혈국 혼자서 독박을 뒤집어쓸 모양새가 되고 말겠군요.”

“그런 셈이지. 그린 드래곤도 블랙 드래곤을 돕겠다고 말만 하고서 막상 전투가 시작되니 발을 빼 버렸으니까. 아무튼 덕분에 현재 정황은.”

“혈국이 화이트 드래곤에게 실컷 두들겨 맞고 있다?”

“정답일세.”

연우는 인상을 살짝 구기면서 가볍게 혀를 찼다.

화이트 드래곤이 아무리 소수 인원이라고 해도, 여름여왕의 정식 후계자였던 봄의 여왕, 왈츠가 이끌고 있는 곳이었다.

특히 왈츠는 아홉 왕 중에서도 순위권에 해당할 만큼 뛰어난 실력자.

감히 식탐황제가 도모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혈국이 패퇴를 하고 있을 거라는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바였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지.’

혈국이 무너지는 것이야 연우로서도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이었지만. 이렇게 무참하게 꺾이는 건 그가 바라는 바가 절대 아니었다.

판세가 더 크게 흔들려야 했다.

그래서 발생한 소용돌이가 탑을 집어삼킬 수 있도록.

모든 세력들이 남김없이 그 속에 휘말려 죄다 갈려 나가게 만 들어야만 했다.

“도와야겠습니다.”

연우는 지금쯤 혈국이 자신을 애타게 찾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저들로서는 손이 하나라도 더 절실할 테니.

게다가 연우는 자신에게 판세를 더 크게 뒤흔들 만한 힘이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만큼 타르타로스에서 이룬 게 많기 때문이었다.

죽음과 투쟁의 날개, 권속으로 거둬들인 디스 플루토, 탐욕스러운 영괴, 그리고 깊어진 칠흑왕의 권능까지.

여기다 다른 동료들까지 더해진다면.

그 모든 전력을 따진다면 다른 거대 클랜들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을 터였다.

격동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물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 전까지는 전력을 최대한 많이 감춰야겠지만.

그래도 판세를 뒤흔들 정도는 되었다.

혈국과 식탐황제를 처리하는 건, 그렇게 소용돌이가 커진 뒤에 해도 늦지 않았다.

“마음을 정한 게로군.”

“정우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쓰레기장이 있으면 안 되니까요. 이참에 깨끗하게 쓸어 내야겠습니다.”

브라함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씩 웃었다.

“잘 생각했네. 마침 좋은 기회도 생겼고 말일세.”

“……?”

연우가 무슨 말이냐는 눈빛으로 브라함을 바라봤다.

브라함의 입꼬리가 씩 말려 올라갔다.

“철사자단과 마탑 기억나나? 그들이 응분을 갚겠답시고, 이번에 42층으로 킬러들을 대거 고용해 보냈다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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