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50층으로 (5)
“대, 대체 이런 것을 어디서 구한 것이오?”
뚜언띠엔 공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지도를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
꽤나 오래된 것 같은 지도.
확실히 지도는 용의 신전을 상세하게 그려 내고 있었다. 특히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나, 혈국만 파악했던 장소까지 그려져 있어 가짜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지도에 비밀 장소로 통하는 게이트의 위치와, 여기로 향하는 통로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분명했다.
이건 공개되지 않은 히든 스테이지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만약 연우가 했던 말대로라면.
‘이건 천금을 주고도 절대 바꿀 수 없는 보물이다!’
고룡 칼라투스.
그는 세간에 다른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었다.
마지막 용왕, 칼라투스.
용종의 최전성기를 이끌었지만, 조상들이 이루지 못한 초월에 대한 미련을 벗지 못하고 올포원에 도전해 결국 일족을 멸망으로 이끌고 만 비운의 왕.
그의 무덤을 찾을 수 있다면.
용종에 대한 비밀이란 비밀은 모두 독식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남긴 갖가지 연구 자료며 보물 창고는 물론, 용종의 후예들이 가지는 약점도 알게 되겠지.
혈국은 지금 처한 전황을 뒤집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수천 년 동안 비원으로만 남았던 ‘국가 재건’도 이룰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따, 미끼를 물어 버린 놈, 고것 참 실허네이.」
연우는 샤논의 깐족대는 목소리를 한쪽 귀로 흘리면서, 혹시 타인이 들을까 싶은지 목소리를 낮추며 진중한 목소리로 설명을 덧 붙였다.
“이 지도는 30층에서 우연찮게 얻을 수 있었습니다.”
연우는 지도를 만들면서 밤새 생각해 낸 이야기를 술술 풀어냈다.
우연찮게 히든 퀘스트를 통해 보상으로 지도를 입수하고, 연계 퀘스트를 이어 나가다 보니 끝내 퀘스트의 종착지가 50층으로 이어졌다는 이야기.
그리고 보상으로 ‘용의 미궁’이라고 명명된 고룡 칼라투스의 무덤을 찾아냈다는 것까지.
“카인이 그동안 종적을 감췄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셨던 거였군. 이해하오. 한데, 어째서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오? 사실 혼자서 독차지해도 괜찮았을 텐데.”
“혼자서는 공략하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지요.”
연우는 언제부턴가 혼자서 퀘스트를 진행하는 데 한계를 느꼈다고 말했다. 갈수록 난이도는 높아지는데, 제한 시간까지 걸려 어쩌지 못하고 발이 동동 구르던 상황.
그런 지난날에 대한 설명들이 얼마나 구구절절하고 애타는지, 듣고 있는 내내 뚜언띠엔 공작은 뭔가에 홀린 표정이었다.
「정우는 분명히 우리 인성왕이 참 연기를 못한다고, 발연기라고 했었거든? 근데 저놈은 왜 저렇게 잘 속는 거지? 역시 욕심이 눈을 가리면, 사람은 앞뒤가 제대로 안 보이는 건가?」
「헛소리 그만하고. 맡은 임무에 충실해. 이쪽은 이제 거의 정리가 끝났다.」
샤논의 혼잣말을 들었는지, 저 멀리 링크를 통해서 한령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구박을 받았어도, 샤논은 여전히 즐겁기만 했다.
「공작은 잘 감시하고 있으니까 걱정 말라고.」
그런 사이에도 설명은 계속 이어졌고.
끝내 마지막에 다다랐다.
“……그래서 이렇게 결례를 무릅쓰고, 혈국에 도움을 요청하게 된 것입니다. 혈국이 현재 얼마나 경황이 없는 와중인지를 잘 알면서도, 혹여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이렇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렇군. 일리 있소.”
뚜언띠엔 공작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지도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의 두 눈동자가 광기로 번들거렸다.
제 딴에는 숨긴다고 숨겼지만. 연우는 그 속에 숨겨진 탐욕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뚜언띠엔 공작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는 지도를 매만지다가 천천히 손을 떼며 등을 의자에 붙였다. 눈가를 따라 예리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우리에게 제안한 건, 단순히 그런 이유만은 아닌 듯 보이오만?”
그래도 거대 클랜을 이끄는 이인자다운 통찰력이라고 해야 할까.
뚜언띠엔 공작은 단번에 연우에게 다른 노림수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연우로서도 이야기의 진행이 그리되는 것을 원했기 때문에, 냉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몇 가지를 제안했다.
뚜언띠엔 공작은 신중한 얼굴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제안을 경청했고.
이윽고 몇 가지 의견을 건네면서 살짝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만하면 괜찮은 것 같소. 좋소. 한번 해 봅시다.”
옛 보검의 이름을 딴 그의 이름처럼, 예리하게 번뜩이는 차가운 미소였다.
“마지막 용왕의 무덤을, 저들의 무덤으로 만들어 봅시다.”
「월척이로구만.」
연우는 뚜언띠엔 공작이 내미는 손을 크게 맞잡았다.
가면 아래.
연우의 입꼬리도 뚜언띠엔 공작처럼 말려 올라가 있었다.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미소였지만.
* * *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참으로 앙큼한 짓을 저지르려 드는구나. 참으로 시건방지다. 인간.」
화아아-
뚜언띠엔 공작이 우선 식탐황제에게 보고를 올리겠다면서 자리를 비운 순간.
갑자기 연우의 뒤쪽으로 깔깔거리는 앙칼진 웃음소리와 함께 강렬한 기운이 뭉치며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여름여왕이었다.
비록 칠흑의 권능이 빠져나가면서 처음 현신했을 때처럼 강한 기운을 풍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흐릿하게나마 영체를 유지하며 자신의 의지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러자 연우 옆으로 여태껏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샤논도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면서 우두커니 섰다. 여름여왕을 경계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여름여왕이 연우의 부름에 따라 강림한 상태라고 해도, 그녀는 샤논 등과 다르게 권속으로 묶여 있는 형태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몰라 방비를 하려는 것이다.
「주인을 바꾼 번견의 충성도 아주 대단하고 말이지.」
물론, 지금 여름여왕의 상태로 연우에게 어떤 해코지를 하기란 힘들 테지만. 그래도 워낙에 오랜 삶을 살았던 존재이니 어떤 수를 쓸지 짐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름여왕은 그런 샤논의 태도가 귀여운지 피식 가볍게 웃으면서 무시했다.
생전에 샤논은 자신과 얼굴도 마주치지 못했던 조장 급 인사에 지나지 않았던바.
그런 녀석이 운 좋게 여기까지 강해져 원주인이었던 자신을 노려보고 있으니, 불쾌하기는커녕 귀엽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눈길에도 불구하고, 샤논은 전혀 흐트러지는 기색이 없었다.
옛 주인을 만났다지만, 지금 그가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존재는 연우였다.
이내 여름여왕도 흥미가 팍 식었는지, 팔짱을 끼며 오만한 자세로 연우를 내려다보았다.
연우가 지금부터 무너뜨리려고 하는 화이트 드래곤은, 그녀가 이 세상에 남긴 유산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유산을 망가뜨리려 하는 모습을 보는 데도 불구하고, 여름여왕은 화를 내기 보다 아주 침착했다. 오히려 입가에 흥미까지 감도는 모습이었다.
“결국 너희 레드 드래곤이 정우를 다치게 한 건 달라지지 않는 현실이니까.”
연우는 정우를 ‘죽게 만든’이라는 말을 더 이상 쓰지 않았다. 회중시계에 잠든 정우의 사념체가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더 이상 그런 말을 써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 그래서 날 막을 건가?”
「그럴 리가. 이 몸이 생전의 일에 대해 미련을 둘 것 같나? 후세의 일은 후세가 알아서 할 일이지.」
죽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구천을 떠도는 원혼이 많은 인간과 다르게.
오랜 삶을 사는 용종은 그만큼 눈을 감고 나면 미련을 전부 훌훌 털어 버리는 편이었다.
여름여왕은 정우에 대한 마지막 미련이 남았었고, 이제는 올포원에 대한 종족의 원한 때문에 아직 체류 중이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남긴 유산에 대해서는 더 이상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미련을 가질 만큼 미련한 용이니. 아예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만큼 자식들을 믿는 건가?”
「정확하게 맏이를 신뢰하는 것이지.」
“그 말이가 다른 동생들에게 밀리고 있는데도?”
「그렇다면 거기까지인 것이지.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의 법칙은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절대 바뀌지 않는 순리이다.」
여름여왕은 자식들이 자신의 유산을 망가뜨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태도였다.
결국 그렇게 서로 물고 뜯다가 최후에 남는 자가 유산을 독차지하고, 자신의 의지를 제대로 계승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수혜자가 맏이인 봄의 여왕, 왈츠가 될 거란 것도.
“해볼 테면 얼마든지 해보라는 거로군.”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갖가지 방해를 꺾어야 왕이 될 자격이 있는 법이지. 얼마든지 해보라.」
연우는 가면을 가만히 벗으면서 머리를 가볍게 쓸어 올렸다. 흉흉한 눈동자가 여름여왕을 꿰뚫었다.
정우는 그녀를 용서했을지 몰라도, 연우는 아직 아니었으니.
하지만.
여름여왕은 할 수 있으면 얼마든지 해보라는 듯, 가볍게 코웃음을 치면서 도로 자취를 감췄다.
조금 남은 칠흑의 권능으로 현신을 자유자재로 하는 녀석은 연우가 어떻게 커버하기가 어려운 상태였다.
연우는 도로 가면을 쓰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아쇠는 당겨졌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달릴 일만 남은 것이다. 목표는 50층이었다.
그렇게 돌아서려다, 문득 연우는 한 가지 생각에 미쳤다.
‘그러고 보니 에도라도 지금쯤 50층을 통과할 때가 됐을 텐데.’
판트와 에도라.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동생들과 함께 나눴던 술잔이 그리워지는 날이었다.
* * *
우르르, 콰쾅-
그 날은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있었다.
“이게 조나단이란 말이지?”
철사자 아이반은 수하가 드리우는 우산을 피하면서 가만히 목관 앞에 섰다. 너무나 무미건조한 목소리. 감정이 한 점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무뚝뚝했다.
하지만 주변에 시립해 있는 이들은 그가 초월적인 인내심으로 화를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42층에서 홀로 눈을 감고 있던 것을 발견하여…… 죄송합니다.”
부단장 조나단의 죽음이 철사자단에 주는 충격은 그만큼 컸다.
비록 가진 실력은 부단장이라고 하기에 부족한 면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래도 따스한 성품으로 거친 용병들을 올바른 길로 인내해 주던 어머니 같던 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조나단을 존경하는 무리는 철사단뿐만 아니라, 용병계 전체에 널리 걸쳐 있었다. 그로부터 은덕을 입지 않은 용병을 찾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강제로 규합된 용병 연맹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들 전부 이런 일을 저지른 독식자에 대한 분노로 공감대를 형성하는 중이었다.
“……멍청한 놈.”
그리고. 아이반은 왜 조나단이 그런 선택을 내렸는지를 잘 알 것 같았다.
조나단은 지난 고행오산에서의 싸움에서 수하들을 대거 잃은 후부터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겉으로 크게 티는 내지 않았지만, 그와 가까운 사람들은 전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적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해 피해를 키운 것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린 것이다. 아이반이 ‘승패는 전장에 늘 있는 일이다’며 달랬어도, 쉽게 떨치지 못했다.
그래서 독식자가 다시 스테이지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직접 자신이 나서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아이반은 위험하다는 생각에 그를 뜯어말렸지만, 워낙에 조나닥의 의견이 강경해 결국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빠지는 조건으로 보냈다.
하지만 불안감은 현실이 되어 돌아오고 말았다.
조나단이 왜 이렇게 돌아왔는지도 알 것 같았다. 강제 병합으로 인해 불만이 들끓던 연맹에서부터 벌써 분노 섞인 적의가 흘러 나오고 있으니. 자신의 죽음으로 더 큰 것을 노리려 한 것이다.
아이반은 자신의 오른팔이 뜯겨 나가는 듯한 그런 기분을 느끼면서도.
조나단이 이렇게 만들어 준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주먹을 꽉 쥐었다.
목관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일어나는 아이반의 두 눈이 차갑게 뜨였다.
“다함.”
“예.”
옆에 시립해 있던 부부단장, 이제는 부단장으로 직급이 오른 다함이 고개를 숙였다.
“독식자에 대한 분석은 모두 끝났겠지?”
“예. 지금 남은 자료를 정리 중에 있습니다.”
격전이 휩쓸고 지나간 전장에는 그만큼 플레이어의 흔적이 강하게 남기 마련.
죽은 킬러들의 상태를 바탕으로 그들은 독식자의 전투 스타일에 대한 자료를 분석하고 공략법을 모색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결과는?”
“조금 더 살펴봐야겠지만…… 정면으로 부딪쳐서는 이쪽의 피해도 클 듯합니다.”
독식자가 여러 권속을 부리는 군주라는 건 이미 알려진 사실. 그러면서도 초인의 반열에 다다랐으니 아이반도 중상을 피할 수 없으리란 이야기였다. 그래서는 ‘사냥’이 되질 않는다.
“지금 본부에 마탑 놈들이 왔다고 했었지?”
“예. 동맹 제안입니다. 그 외에 트리톤이나 네크로폴리스의 잔당들, 여러 신진 클랜이나, 랭커들, 생각보다 훨씬 많은 곳들이 사절을 보내왔습니다.”
이미 철사자단의 움직임은 단순히 용병 업계의 규합에만 국한되어 있던 게 아니었다.
독식자에 원한이 있는 자들, 그의 부상을 시기하는 자들, 견제하는 자들까지, 전방위로 해서 속속들이 움직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현재. 드디어 모든 조직들 간의 조율이 끝나면서 첫 번째 대규모 회의가 곧 철사자단의 본단에서 시작될 예정이었다.
반(反)독식자 클랜 연합.
아직 이렇다 할 정식 명칭은 없었지만, 그들 사이에는 그렇게 불리고 있었다.
“그만큼 녀석이 뿌린 분란의 씨가 많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단순히 그걸로는 안 된다. 우선 사냥감의 힘부터 빼놔야겠어.”
아이반은 서슬 퍼런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리다,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다함을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독식자와 친하게 지냈던 외뿔부족…… 마희가 50층에 도전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예. 그렇습니다.”
순간, 아이반의 입꼬리가 크게 비틀렸다.
“힘을 빼는 데는 미끼 만한 것이 없지. 회의가 끝나는 대로, 그쪽으로 병력을 보내도록.”
“충!”
다함이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