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50층으로 (6)
50층, 용의 신전.
북서부, ‘이무기의 숲’.
“쫓아!”
“얼마 가지 못했을 거다. 놓치면 우리가 엿 되는 거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잡아.”
파밧-
하늘에 닿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높이를 자랑하는 나무들 사이로, 플레이어들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언제나 여러 랭커와 세미 랭커들의 수련 장소로 각광을 받던 한적한 숲이었지만.
지금만큼은 너무나도 소란스러웠다.
“제길…… 끝도 보이질 않는군. 대체 어디서 저렇게 많은 놈들이 튀어나오는 거지?”
따돌렸다고 생각했는데도 불구하고,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추적자들을 보면서.
마희성의 부성주, 차투라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단 며칠 사이에 겪게 된 지금의 상황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하아.
하아.
그때, 그녀의 등 뒤로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고열과 피로로 가득한 숨결.
‘마희만 깨어 있으셨어도……!’
차투라는 창백한 안색으로 자신의 등에 업힌 에도라를 보면서 이를 더 세게 악물고 말았다.
에도라가 용의 신전으로 들어가 시련을 진행하고 있던 와중에 시작된 갑작스러운 기습은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제각기 다른 복장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구성원의 면면도 용병이나 마법사 등 다양해 단일 소속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는 자들.
적은 최근 ‘사자 연맹’이라는 이름으로 규합된 이들이었다.
철사자단을 중심으로, 용병 연맹과 마법 연합이 주축이 되어, 트리톤과 네크로폴리스를 비롯한 여러 잔존 세력들, 신흥 클랜들, 그리고 새로운 시류에 편승하려는 랭커들이 뭉쳐서 만든 거대 단체.
복잡하고 아주 긴 정식 명칭이 따로 있었지만, 초대 맹주로 추대된 철사자 아이반의 별칭을 본따 사자 연맹이라 불리는 이곳이 발족하자마자 가장 먼저 시행한 것은 바로 ‘마희성 토벌’이었다.
녀석들이 내세운 명분은 아주 간단했다.
최근 들어 마희성이 중위 층계의 질서를 복잡하게 어지럽히는 일이 아주 많은바, 여러 플레이어들의 의견을 모아 그들을 징치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그것이 허울 좋은 명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애당초 사자 연맹에 가담한 세력들은 독식자와의 충돌에서 패배를 입었던 곳들이 대부분이었기에, 그에게 복수를 하겠다는 성격이 강했다.
그러니 그 일환으로 독식자의 동료라고 알려진 마희 에도라를 노린 것일 테지.
문제는 녀석들이 노린 기회가 하필 에도라가 시련에 집중해 있고, 마희성도 경계를 늦추고 있을 때였다는 점이었다.
그 때문에.
에도라는 시련이 강제로 불발되면서 큰 부상을 입고 말았다. 거기다 추가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그녀는 여태 사경을 헤매면서 깨어나지도 못했다.
마희성도 마찬가지. 별다른 방비를 구축하지 못한 탓에 사자 연맹의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했다.
그나마 추종자들의 희생이 있어 시간을 벌 수 있었다지만.
사자 연맹의 집요한 추격을 완전히 따돌릴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시간을 버는 정도밖엔 되지 못했다.
그러다 피신을 하게 된 곳이, 스테이지의 북서부에 위치한 이무기의 숲이었다.
하지만 돌아가는 분위기로 보건대, 이 숲은 이미 녀석들에게 철저하게 포위된 상태였다.
‘어떻게 해야 하지?’
에도라를 대신해, 실질적으로 마희성의 총책임자 역할을 해 왔던 차투라로서는 어떻게든 이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머리를 굴릴 수밖에 없었다.
다른 도움의 손길이 있다면 좋을 테지만, 그런 건 바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50층에 상주하고 있는 플레이어들은 대개 랭커가 되고자 하는 세미 랭커들.
당연히 시련에 집중하고자 하는 그들로서는 굳이 위험을 사서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사자 연맹은 수많은 세력이 뭉친 만큼 그 규모가 기존 신흥 4대 클랜들을 여럿 합친 것보다도 훨씬 컸다.
전력 규모가 기존 8대 클랜과 비교해도 절대 크게 뒤처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그런 곳과 척을 지고 싶어 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고.
괜히 독식자의 분쟁에 휘말려 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지난 몇 번의 경험으로 체감을 해 본 탓이었다.
다만, 차투라로서는 왜 사자 연맹이 이렇게까지 위험한 선택을 내렸는지 의아하기도 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마희성은 그렇다 치더라도, 에도라의 배경에는. 이제 명실상부한 일인자나 다름없는 무왕이 있었으니까.
물론, 외뿔부족이 일족의 명예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면, 부족원의 일에 무심한 편이긴 하다지만.
그래도 워낙에 지난 수십 년 동안 무왕의 괴팍한 농단을 여러 차례 겪어 봤을 테니, 짐짓 무슨 일이 또 발생하지 않을까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걸 아는지 모르는지, 사자 연맹은 마희성과 불구대천의 원한이라도 진 것처럼 거세게 몰아치는 중이었다.
콰아앙-
때마침 그들의 머리 위로 거대한 불덩이가 우수수 쏟아졌다.
이미 차투라를 비롯한 마희성의 수뇌는 여러 번의 마법 포격을 막으면서 지칠 대로 지친 상태. 그래도 반사적으로 나서려는데, 다른 그림자가 불쑥 앞으로 튀어 나갔다.
“이곳은 내가 어떻게든 막을 테니, 그대들은 마희를 모시고 층계부터 빠져나가시오!”
나이엔스가 갑자기 대열에서 이탈하더니 칼을 뽑은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없소. 빨리!”
나이에스는 대답을 시간도 없다는 듯, 검을 강하게 움켜쥐면서 이쪽으로 뛰어오는 적들에게로 달려들었다.
콰콰콰-
‘매서운 서풍’이라는 별칭답게, 그가 검을 휘두른 자리 위로 검기가 한 다발 떨어지면서 추적자들의 발목을 단단히 묶었다.
몇 번이나 이뤄졌는지 알 수 없을 희생. 하지만 차투라와 일행들은 다시 눈물을 삼키면서 뛸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알고 있었다. 나이엔스가 저렇게 희생을 했어도, 정작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포위망은 더 촘촘하게 조여 오고 있었고, 탈출로는 전부 차단되었다. 다른 층계로 향하는 포탈 스크롤도 작동을 하지 않는 중이었다.
이대로 녀석들에게 에도라를 내어 주고 당해야만 하는 걸까?
그들의 머리 위로 검은 먹구름이 끼고 있었다.
하아.
하아.
그 와중에도.
차투라의 등에서는 에도라의 거친 숨결이 느껴지고 있었다.
* * *
-네가 그때 여러 번 보았던, 그 아이의 눈에 담겼던 그 아이로구나. 소호의 눈을 가졌던.
마희성이 사자 연맹에 다급하게 쫓기던 그 시각. 에도라는 꿈속에 갇힌 상태로 용의 신전에서 마주쳤던 존재의 말을 계속 되뇌고 있었다.
-그때는 스치듯이 보아서 몰랐으나, 이제는 알겠다. 너에게 점지된 것이 무엇인지.
각 플레이어들마다 주어지는 시련이 다르다는 스테이지답게.
에도라가 맞닥뜨렸던 시련도 오래전 아버지 무왕이나 대장로에게서 들었던 것과 너무나 판이하게 달랐다.
그녀 앞에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건, 좀처럼 크기를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체고를 가진 그림자였다.
그러다 에도라는 〈혜안〉을 열고 난 뒤에야, 그림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용이었다.
언젠가 본 적이 있던 여름여왕의 본체보다도 훨씬 거대한 용.
용은 황금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로, 에도라보다도 훨씬 큰 동공 안에 그녀를 한껏 담으면서 알 수 없는 말들을 내뱉었다.
‘그 아이’가 누구를 가리키는 건지, ‘점지된’ 것은 또 무엇인지. 그리고 당신은 또 누구인지.
에도라는 많은 것들을 묻고 싶었지만, 어째서인지 도무지 아무 말도 나오질 않았다.
그건 아마도 용에게서 보이는 것들이 너무 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 무왕을 엿보아야만 저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기백은 둘째 치더라도.
〈혜안〉을 통해서 보이는 용의 구성 요소들은 이 세상을 이루는 모든 법칙이 다 담겨 있었다.
마치 처음으로 넓게 펼쳐진 은하수의 장관을 보게 되었을 때처럼. 그녀는 그 광경에 압도된 나머지 한참 동안이나 넋을 잃고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 속에는 그녀가 그토록 궁구했던 양도(陽刀)의 비밀도 담겨 있는 듯했다.
그래서.
에도라는 그 용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분명 여름여왕 이후로 멸종되었는데도 살아 있는 듯한, 수상쩍은 용인데도 불구하고. 정체를 도저히 알 수 없고, 시련이 주는 이상한 환각일지도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용에게서 이상한 끌림을 받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용에게 닿아 보고자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지만.
하필이면 그때 사자 연맹의 기습이 터지고 말았다.
에도라를 둘러싸고 있던 시련도 그때 같이 부서졌다. 용의 형체가 흐려지고, 연결도 강제로 끊어지면서 영혼이 큰 타격을 받고 만 것이다.
-나의 이름은 칼라투스.
그래서 에도라는 거대한 용이 남긴 잔상에 한동안 계속 묶여 있어야만 했다.
-일족을 파멸로 이끈 패륜왕이었으며, 그것을 바로 잡아 너희들의 운명을 열…….
용이 그녀에게 남기고자 하는 말도 거기서 끊어지고 있었다. 말꼬리가 흐려졌던 것이다.
‘대체 뭘 말하려고 했던 걸까?’
다만, 흐트러지는 목소리에서도 유독 잘 들렸던 말은 있었다.
-차연우. 차연우를 내게로 데려와다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쾅-
에도라는 정신을 세게 내려치는 듯한 충격과 함께 눈을 번쩍 떴다.
용이 남겼던 이름, 차연우.
그 이름이 낯설지 않았던 것이다.
용은 대체 그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걸까?
에도라는 그런 의문을 계속 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순간 코끝을 찌르는 짙은 피비린내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용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도중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가 자신을 덮쳤었다. 그럼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었었지? 시련에서 튕겨 나고, 마희성의 추종자들이 자신을 구하던 기억이 단편적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 뒤에는…….
기억이 전혀 없었다.
“마희!”
“정신이 드십니까, 마희?”
아픈 머리를 꾹꾹 누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수많은 시선이 이쪽으로 쏟아지는 게 느껴졌다.
가까운 곳에서는 감격에 젖은 시선이나 안도에 찬 한숨이. 먼 곳에서는 짜증이나 귀찮게 되었다는 투가 느껴졌다.
에도라는 시야를 되찾자마자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를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을 보호하려는 마희성과, 어느새 그들을 완전히 에워싸다시피 한 사자 연맹.
“눈을 계속 뜨지 않는 게 더 좋았을 것을. 괜히 더 피해를 크게 키우게만 만드는구려.”
에도라는 여전히 두통이 심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쫑알쫑알 시끄럽게 떠드는 목소리에 골이 울렸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시련을 망친 주범도 저런 얼굴이었던 것 같은데.
“너부터.”
에도라는 그래서 처음으로 짜증 섞인 목소리를 가득 담아 신마도를 세게 움켜쥐었다.
“죽여 줄게.”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머리칼 사이로, 초췌하게 가라앉았던 에도라의 두 눈이 차갑게 번뜩였다.
“보아하니 너 말고도 날 찾는 손님이 아주 많은 것 같아서.”
에도라는 주변으로 곁눈질을 슬쩍 했다가, 녀석들이 있는 쪽으로 몸을 날렸다.
쾅!
쐐애액-
“저년을 잡아! 어떻게든!”
사내의 명령에 따라, 사자 연맹도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호오. 우리를 본 건가?”
에도라가 적과 부딪치고 있던 그 시각.
먼 곳에서 전황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던 자들이 있었다. 하이 엘프를 비롯한 여러 요정족으로 이뤄진 자들. 엘로힘이었다.
파네스 파티의 궤멸 이후, 우왕좌왕하던 엘로힘에게는 새로운 신탁이 내려온 상태였다.
-빛을 삼켜 모든 것을 칠흑으로 되돌리려는 어둠을 내려라.
비록 이전과 다르게 내린 이의 정체를 정확하게 알 수 없어 아주 잠깐 혼선이 생겼던 신탁이었지만.
엘로힘은 그 내용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빛은 자신들이요, 어둠은 그동안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은 존재를 이야기하는 것이리니. 어둠이라 할 만한 것은 최근 들어 수상쩍은 행보를 보인 독식자밖에 없었다.
하지만 독식자를 해치우기 위해서는 외뿔부족이나 혈국 등 거쳐야 할 상대가 많다. 그래서 엘로힘도 독식자를 끌어낼 미끼를 필요로 했다. 사자 연맹이 생각한 것처럼.
그래서 어부지리를 노리려 했던 것인데. 아무래도 이쪽을 들킨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엘로힘의 특수 부대, 7인대의 수장이자 ‘태산 가문’의 수장이기도 한 우로스는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엘로힘이 움직였습니다.”
“그럼 우리도 뛰어든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이들은 비단 엘로힘만이 아니었다.
역귀 킨드레드는 잔혹한 미소를 흘리면서 로브를 푹 뒤집어썼다. 그리고 표홀히 사라지는 그를 따라, 마군의 광신도들도 포위망을 좁혀 나갔다.
“카인. 이번에야말로 네놈의 그 시건방진 눈깔을 잡아 뜯어 주마.”
킨드레드가 남긴 혼잣말이 귀곡성처럼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 * *
“……에도라가 50층에?”
연우가 에도라의 소식을 듣게 된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