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50층으로 (8)
쐐애액-
연우는 앞으로 쭉 내달렸다. 50 층의 스테이지는 ‘성역’이라 불리는 중심부를 토대로, 다양한 지형으로 이뤄져 있는 구조였다.
험준한 산맥, 울창한 밀림, 드넓은 바다.
50층은 탑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층계 중에서도 가장 복잡한 지형을 지니고 있었다.
본래 50층은 옛 용종들의 터전을 모티브로 해서 만든 곳. 각 종(種)마다 추구하고 좋아하는 지형이 다 다르니, 지형이 제각각일 수밖에 없었다.
레드 드래곤은 화산을, 블루 드래곤은 해저를, 골드 드래곤은 하늘 위의 부유성(浮遊城)을 터전으로 삼는 식이었다.
이렇다 보니 각 지형마다 가지는 특색도 다 다르고, 얻을 수 있는 히든 피스도 다 달랐다. 용종이 남긴 흔적 때문에 마나 스트림도 짙은 편이라 많은 플레이어들이 수양 장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연우는 넓게 퍼뜨린 인지 영역을 바탕으로 지형을 살피는 한편, 일기장에 남아 있는 스테이지 맵을 떠올리면서 지름길로 이동했다.
그러다 어느 산맥을 반쯤 건넜을 때 즈음, 저 멀리 남동쪽으로 평지 위에 우뚝 선 절벽과 그곳에 걸쳐진 신전이 보였다.
수만 명의 인원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어마어마한 크기를 가진 신전.
언젠가 본 적이 있던 16층, 앉은뱅이 세 여신의 신전들을 다 합쳐도 미치지 못할 것 같은 신전이었다.
다만, 절벽의 끝에 위치한 신전으로 향하는 길은 따로 정비가 되어 있지 않은 듯, 많은 수의 플레이어들이 절벽을 힘겹게 오르는 중이었다.
연우의 머릿속으로 일기장의 내용이 다시 차례로 지나갔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50층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소는 따로 있었다.
중앙에 위치한 성역.
흔히 ‘통곡의 벽’이라 불리는 시련 장소였다.
통곡의 벽.
지난 수천 년 동안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도전했고, 또 좌절하게 만들었던 악명 높은 벽이 바로 저것이었다.
벽은 지난 역사를 보여 주는 듯, 수많은 흔적들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랭커의 벽 앞에서 좌절하던 실력자들이나, 어떻게든 신전에 오르고자 아등바등하던 이들이 남겼던 것들. 눈물과 피와 땀이 배어 있는 흔적들이었다.
하지만.
연우는 알고 있었다.
그 수많은 흔적들 아래, 아주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는 또 다른 흔적들을.
통곡의 벽 앞에서 멈춰야만 했던 플레이어들처럼, 올포원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어떻게든 초월을 이루고자 아등바등 노력했던 용들의 흔적도 거기에 있다는 것을.
비록 이제는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고룡 칼라투스는 후계로 점지했던 동생에게만큼은 기억해 달라고 요청을 했었다.
그때 느꼈을 동생의 감정을 뒤로하면서.
연우는 품을 뒤적거려, 해골 문장이 그려진 증표를 가득 꺼냈다.
[해골왕의 증표]
분류: 아뮬렛
등급: ??? (알 수 없음)
설명: 지금은 잊힌 옛 종족의 비밀을 품고 있는 증표. 비밀에 대한 단서를 얻지 못하면 단순한 부적으로밖에 사용하지 못한다.
다만, 증표에서 풍기는 영험한 기운으로 보건대, 상당히 격이 높은 존재를 기리는 물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보유하고 있는 개수가 많아질수록 효과가 증가한다.
거인족의 단서라 할 수 있는 해골왕의 유산, 홀(笏).
하지만 동생은 수많은 특전을 수행하고도, 해골왕의 홀이 가진 비밀을 모두 풀지 못했다.
거인족은 용종보다도 훨씬 이전에 사멸해 버려 알려진 게 워낙에 적은 데다가, 그들의 유물이라 할 만한 것들도 대개 신과 악마들의 농간으로 인해 거의 남아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반거인처럼 그들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후예들이 있긴 했지만, 그들도 선조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전무한 형편이었다.
하지만 연우는 〈해골왕의 홀〉의 기초 사용법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촤라락-
증표들이 하나둘씩 흘러나오면서 차례차례 조각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연우의 손에 커다란 구슬 같은 것이 만들어졌다. 조선시대의 백자처럼 우윳빛으로 빛나는 구슬.
달리, 해골왕의 ‘사리(舍利)’라 불리는 것이기도 했다.
[해골왕의 홀]
분류: 아뮬렛
등급: ??? (측정 불가)
설명: 지금은 잊힌 옛 종족의 마지막 왕이 남긴 유산. 옛 종족에 대한 비밀을 풀지 못하면 정확한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홀이 풍기는 영험한 기운은 소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강한 힘을 실어 준다. 특히 ‘어둠’ 혹은 ‘악’ 계통에 효과가 아주 큰 듯하다.
“부.”
스르륵-
어둠이 열리면서 부가 나타나 고개를 조아렸다.
「말. 씀을.」
“먹어라.”
「감사. 합니다.」
부는 연우가 던져 준 해골왕의 홀을 받자마자 입을 쩍 벌리며 그대로 집어삼켰다. 딱딱한 턱뼈와 부딪치자, 홀이 잘게 부서지면서 그대로 부에게로 스며들었다.
거인족의 비밀을 풀 단서가 될 수도 있는 홀을 이렇게 낭비하는 것이 나쁘다고도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연우는 언제 풀 수 있을지 모르는 옛 종족에 대한 비밀보다, 더 강한 힘을 갈구하고 있는 부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게 더 옳다 여기고 있었다.
화아악!
순간, 부의 눈덩이에 맺힌 인페르노 사이트가 배 이상으로 크게 타오르면서 몸뚱이 위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 아아.」
언데드가 되면서 자신의 감정에 대해 많이 무뎌졌던 부였지만.
그는 지금 이 순간 자기도 모르게 환희에 잔뜩 젖어 있었다.
마성으로부터 칠흑을 받으면서 아주 잠깐 파우스트의 기억을 떠올리던 동안, 그는 자신이 얼마나 강한 존재였었는지를 자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에 비해서 평상시에 비치는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지도.
파우스트에 비하면 부라는 존재는 한 줌의 먼지에 불과했다. 타계의 신과의 거래를 통해 현자의 돌을 연구하고, 에메랄드 타블렛을 만들어 내던 위대한 학자와 턱뼈만 덜그럭덜그럭 움직일 줄 아는 비루한 해골 마법사 따위가 어떻게 비교가 가능할까.
그래서 부는 파우스트로서의 정체성을 되찾고자 노력했다. 아니, 오히려 그때 이뤘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우뚝 서고자 했다.
그래야만 자신이 모시는 존재, 연우를 더 높이 떠받들 수 있을 테니까.
전생이었던 파우스트는 실패했던 존재였지만, 현생에서는 절대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되도록 칠흑에는 기대지 않고자 했다. 스스로의 힘으로, 옛 기억과 힘을 되찾아 더 강해지고자 노력했다.
연우도 그런 부의 간절한 욕망을 잘 알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해골왕의 홀을 건넬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처음과 달리 부는 해골왕의 홀을 전부 흡수하고 나서도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크기가 30센티가량 더 늘어난 것이 다였다.
그러나 연우는 눈두덩이 사이로 비치는 인페르노 사이트가 이전과 확연히 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지옥에서도 가장 깊숙하다는 곳. 무간지옥에서 퍼 올린 것 같은 유황불이 일렁이고 있었다.
엘더 리치.
샤논과 한령이 격을 뛰어넘어 데스 노블이라는 새로운 존재로 태어났듯, 부도 리치라는 허물을 벗고 더 상위의 존재로 태어난 것이다.
[부(부두술사)가 기존의 한계를 벗어나 엘더 리치(Elder Lich)로 재탄생하였습니다.]
[잊었던 전생의 기억을 대부분 복원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파우스트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합니다.]
[하지만 타계의 신과의 거래로 인해 중요한 정보들이 잠금 처리되었습니다. 잠겨 있는 기억들을 되찾기 위해서는 타계의 신과의 새로운 거래를 필요로 합니다.]
[서든 퀘스트(잊힌 기억)가 생성되었습니다.]
[서든 퀘스트 / 잊힌 기억]
내용: 옛 기억이 단편적으로만 남아 있던 부는 드디어 여러 노력 끝에 ‘파우스트’로서의 정체성을 되찾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파우스트가 가졌던 모든 기억과 힘이 되돌아온 것은 아닙니다.
현자의 돌을 탄생시킨 ‘에메랄드 타블렛’을 작성하던 시절의 기억만큼은 여전히 안개로 가려진 것처럼 떠올릴 수가 없습니다.
타계의 신이 임의로 그 기억에 손을 대었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기억을 되찾고 싶으면, 타계의 신과 새로운 거래를 통해 얻어야만 합니다. 혹은 이와 관련된 단서를 얻어야 합니다.
지금부터 잊힌 기억을 떠올릴 수 있게 옛 ‘파우스트’의 행적을 좇으십시오.
제한 시간: -
보상:
1. 파우스트의 마지막 기억
2. 타계의 신과의 거래
3. ‘진품’ 에메랄드 타블렛에 대한 단서
연우는 퀘스트 창을 아래로 내리면서 부에게 명령했다.
“가라.”
「명을. 받듭. 니다.」
부는 연결 고리를 통해 연우의 계획을 모두 읽고, 고개를 작게 숙이면서 다시 조용히 어둠 속으로 녹아 사라졌다. 이전보다 훨씬 어둡고 강렬한 마기가 언뜻 흘러 나왔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어느새 연우는 스테이지에 도착하자마자 특정했던 좌표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가 선 산등성이, 저 아래.
드넓게 펼쳐진 밀림을 따라 한창 격전을 벌이고 있는 무리들이 보였다.
에도라는 상당히 지친 듯, 신마도를 지팡이 삼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중이었다. 언제나 새하얗던 도복은 온통 먼지로 범벅이 되었고, 이마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희성으로 보이는 동료들은 그녀를 보호하듯 둘러싸고 있었지만, 대부분이 바닥에 쓰러져 온전하게 서 있는 자들이 몇 되지 않았다.
그리고 주변에서는 적으로 보이는 무리들이 살기를 줄줄 흘려 대면서 접근하고 있었다.
오히려 녀석들은 에도라와 마희성을 다 잡은 먹잇감으로 생각하는 듯, 자기들끼리 눈싸움을 하거나 신경전을 벌이는 등 자잘한 충돌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연우는 단번에 녀석들이 뚜언띠엔 공작이 말하던 엘로힘, 마군, 그리고 사자 연맹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각자 소속도 목적도 달랐지만.
연우에게는 똑같이 치워 버려야 할 적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 마군 측에서 빠르게 움직이면서 마희성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에도라와 충돌하고 있는 녀석은 연우에게도 낯이 익은 자.
킨드레드였다.
그리고 이에 질세라 엘로힘이 후방으로 움직이면서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니. 사자 연맹도 바쁘게 움직이면서 세 진영 측 사이에 보이던 경계심도 충돌로 격화되고 있었다.
그러던 그때.
쿵-
갑자기 마희성을 압박해 가던 녀석들의 움직임이 도중에 멈췄다.
하나같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다가, 끝내 자신들이 딛고 있던 땅을 내려다보았다.
진원지가 지면 아래로 감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플레이어들의 얼굴 사이로 ‘혹시나?’ 하는 감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쿵, 쿵, 쿵-
쿵!
“무, 뭐야, 이거?”
“피해라!”
지면이 그대로 부서지면서, 지저에서부터 다른 무언가가 높이 치솟았다.
장장 수 미터나 되는 거대한 아가리가 무저갱처럼 어두운 식도를 한껏 드러내면서 십여 명에 달하는 플레이어를 한꺼번에 집어삼켰다.
이무기, ‘교룡(蛟龍)’이었다.
50층의 스테이지는 각 구역별로 갖고 있는 특징이 다 달랐다. 그리고 각 구역의 옛 주인들이 남긴 흔적을 따라, 그리고 그 마력의 특징에 따라 갖가지 아룡(亞龍)들이 자라나고 있기도 했다.
특히 그중에서도 북서부 스테이지, 이무기의 숲에는 ‘이무기’의 일종인 교룡이 머물고 있었다.
뱀처럼 기다란 몸집을 지니고 있으며, 검은색으로 빛나는 비늘을 가진 아룡.
비록 깨달음을 얻지 못해 ‘용’으로서의 자격은 획득하지 못했으나, 짐승의 틀을 벗어난 영리한 두뇌와 포악한 성격을 동시에 겸비한 녀석이기도 했다.
“으아악!”
“이게 뭐야, 막아!”
“아아아악!”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아룡이 튀어나와서 난장판을 치니, 세 진영으로서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사자 연맹이 가장 피해가 컸다.
마군과 엘로힘이 비교적 침착하게 장소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모, 몸이 안 움직여!”
“젠장! 적이다! 디스펠! 빨리 디스펠 스크롤을 찢어!”
어느새 그들의 발목을 따라 마방진이 넓게 깔려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마력도 유동하지 않아 마법도 불발되었다.
잠시 자취를 감췄던 부가 교룡을 깨워 녀석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을 뿐만 아니라, 어느새 광역 마법까지 그들에게 전개해 버린 것이다.
거기다 영괴까지 움직이면서, 그림자가 쭉 늘어나 그들의 사지를 구속했으니.
힘으로 어떻게든 영괴를 물리치려 해도, 이미 교룡은 제 영역을 침범당한 것에 대한 분노를 풀어 낼 준비를 끝마친 채였다.
아가리를 젖히며 산성액으로 점철된 브레스를 내뿜는 순간, 마군도 3할가량이 단번에 쓸려 나가고 말았다.
거기다 꼬리까지 휘두르니 먼지 해일이 수 미터나 높게 치솟았다. 엘로힘의 절반 정도가 부서지면서 꼬리에 피와 살점이 덕지덕지 묻었다.
“아아악!”
모두가 혼란에 빠진 사이. 죽음을 각오하고 있던 에도라와 마희성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나머지 눈만 끔뻑끔뻑 댔다.
그러다 적들을 한껏 유린하던 교룡의 꼬리가 이쪽으로 날아올 기미가 보이자 방어 자세를 취하고자 했다.
그때, 에도라 앞으로 그림자가 하나 뚝 떨어지면서 교룡의 꼬리를 가볍게 튕겨 냈다.
에도라는 방어 자세를 풀면서 놀란 얼굴로 자신들을 구해 준 사람을 쳐다봤다.
검은 코트를 흩날리며, 가볍게 머리를 쓸어 올리는 가면인이 거기에 있었다.
너무나 보고 싶었던, 익숙한 가면.
그리고 낯익은 눈빛.
가면 너머의 눈동자는 분명히 이쪽을 보며 웃고 있었다.
“오라…… 버니?”
에도라가 연우를 작게 중얼거린 순간.
“카이이이인! 네 녀석이 또 이딴 짓을……!”
콰아앙!
킨드레드가 먼지구름을 마구 헤집으면서 잔뜩 노한 얼굴로 연우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킨드레드, 아직도 살아 있었나? 이번엔 정말 죽여 주지.”
연우도 아공간에서 비그리드를 빠르게 뽑으며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