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50층으로 (10)
아주 잠깐 동안.
연우는 자신과 대주교 간의 전력 차이를 빠르게 분석했다.
[시차 괴리]
대주교는 탑 내에서도 손꼽히는 강자였고. 지금 연우가 가진 전력으로는 상대하기 어려운 축에 속했다.
물론, 지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길 자신이 있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도일의 몸에 강신해서 싸웠을 때를 떠올려 본다면. 분명 녀석은 대단한 강자였으니까.
하물며 본신을 끌고 나온 지금은 하늘 날개를 펼쳐 모든 권능을 개방해야 해볼 만할 것 같았다.
그래서 연우는 아주 잠깐 전력을 드러내어 녀석을 여기서 제거해야 할까 고민을 했지만.
‘아냐. 아직은.’
일대일로 부딪치고 있는 중이라면 모를까, 이렇게나 많은 눈이 있을 때에는 최대한 숨기는 게 좋다. 하늘 날개를 펼칠 때는 가면을 벗어도 무방할 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만약 대주교도 숨겨 둔 패가 있다면.’
분명히 연우가 알기로 대주교는 당장 운신이 힘든 상태. 천마로부터 정식 사도로 임명을 받는 게 거부당하면서 육체가 망가지고 있는 중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천마의 다른 얼굴인 미후왕을 잡아먹고, 도일이라는 새로운 육체에 들어앉아 새로운 얼굴로 거듭나려 했던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대주교는 일기장에서 보던 것과 다르게 아주 쌩쌩해 보였다.
용신안으로 살펴봐도 전혀 무너질 기색이 없었다.
완전무결. 완벽에 가깝다는 뜻이었다. 그사이에 천마가 깨어나 녀석을 인정했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뜻은 하나.
‘무슨 방법이라도 찾았나?’
자신이 타르타로스에 있는 동안, 대주교도 무언가 수를 냈다는 뜻이었다.
그 방법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대주교가 전력을 되찾은 게 분명하다면. 그리고 새로운 힘을 얻은 게 맞는다면 쉽게 상대할 생각 따윈 버려야 했다. 녀석은 아홉 왕 중에서도, 이제 유일하게 무왕에 비빌 만한 실력을 지닌 강자였다.
하지만 녀석이 이렇게 나타난 이상, 그냥 지나갈 수도 없는 노릇.
그래서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 비집고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무엇을 그리도 고민하는가?”
“……!”
연우의 사고 흐름을 무시하고, 대주교가 어느새 불쑥 그 앞에 나타났다.
연우는 두 눈을 크게 뜨면서 불의 날개를 활짝 펼쳐 녀석과의 간격을 최대한으로 벌렸다.
빠르게 흐르던 시간의 흐름이 유리처럼 깨졌다.
“놀라는 모습도 아주 인상적이군. 피하는 것도 본능적이고. 아주 좋은 버릇을 들여놓았어.”
대주교는 잔뜩 경계하는 연우를 보면서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정작 뒤로 물러난 연우는 경계심으로 등에 식은땀이 잔뜩 맺힌 상태였다.
‘내 사고의 흐름을 쫓아왔다고?’
시차 괴리는 시전자의 사고 흐름을 빠르게 돌려서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게끔 만든다. 이젠 연우의 시그니처 스킬이라고도 할 수 있는 능력이었고, 숙련도가 높아진 지금은 이 사고의 흐름에 간섭할 수 있는 존재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아테나를 비롯해 대지모신과 같은 상위 신격 이상의 존재들.
그들에게 ‘시간’이라는 개념은 일반 플레이어들과 전혀 다를 테니, 사고의 흐름에 쉽게 간섭할 수 있을 테지만.
문제는 대주교는 절대 거기에 해당하는 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분명 대주교가 가진 전력은 타르타로스에서 마주쳤던 하위 신격들보다 훨씬 강한 게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대신격에 비빌 만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절대 아니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궁금한가?”
대주교는 그런 연우의 생각을 알고 있다는 듯, 입가에 엷은 미소를 뗬다.
“날 저버린 신에게서 잠시 떨어져, 그분의 친우 분들께 도움을 받은 까닭이지. 다행히 흔쾌히 이 몸의 바람을 들어주시더군.”
친우?
바람?
전혀 알 수 없는 말들이었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대주교는 천마 외에 다른 힘에 손을 댄 게 분명했다. 육체를 버젓이 움직일 수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인 듯싶었다.
“당장 자세한 건 말해 주기 힘드네만. 그래도 자네라면 대답해 줄 용의도 있어. 난 그대가 참 맘에 들거든. 우리와 함께하지 않을 텐가?”
대주교는 연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전히 여러 세력들의 난립으로 시끄러운 전장이었지만, 유달리 그가 있는 곳만큼은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고요했다.
연우는 도리어 코웃음을 치면서 한쪽 입술 끝을 비틀었다.
“내가 마음에 드는 게 아니라, 내게 있을 ‘천마로의 가능성’이 탐이 나는 거겠지.”
연우는 대주교의 계획을 어그러뜨리고, 대신해서 미후왕의 허물을 집어삼켰다.
그건 달리 말하자면, 연우가 때에 따라서는 천마의 또 다른 얼굴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마군으로서는 도일보다도 더 탐이 나는 그릇인 셈이다.
“이런. 들켰나?”
대주교는 멋쩍은지 내밀었던 손을 거두면서 관자놀이를 가볍게 긁었다.
그러다 피식 웃으면서 다시 뒷짐을 졌다.
“그렇다면. 내가 여기에 이리 나타난 이유도 잘 알겠군.”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휙-
콰아아앙!
대주교의 신형이 아래로 움푹 꺼진다 싶더니, 어느새 연우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곧장 손을 활짝 펼치면서 그대로 내리찍었다.
그러나 연우는 전혀 당황하는 기색 없이 침착하게 비그리드를 위로 쳐올렸다.
검은 오러가 대주교의 마기와 충돌하면서 커다란 폭발을 일으켰다.
쿠쿠쿠!
불의 파도가 빚어 낸 불기둥이 하늘을 따라 높게 치솟는 가운데.
콰콰콰-
대주교는 손을 가볍게 흔들면서 불길을 옆으로 치우는 한편, 다른 손을 앞으로 깊숙하게 밀어 넣었다.
소맷자락이 가볍게 펄럭이면서 그의 손그림자가 단숨에 수십 개로 불어나 연우를 덮어 왔다.
하나하나가 웬만한 언덕쯤은 가볍게 분쇄시킬 만한 큰 힘을 담고 있었다.
연우는 그림자와 직접적으로 부딪치지 않고, 불의 날개를 한껏 젖히며 블링크와 바람길을 잇달아 펼쳐 간격을 다시 널찍이 벌렸다.
“어딜 도망가려 하느냐. 아직 이 몸과의 대화가 끝나질 않았는데.”
대주교가 공간을 접으면서 연우에게로 다가오려 했지만.
“미안하지만.”
연우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지금 당신과 말 상대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서.”
그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대주교는 연우를 잡으려다 말고 도중에 걸음을 멈춰서 고개를 위로 들었다.
갑자기 하늘에서부터 커다란 뭔가가 운석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쾅!
대주교는 재빨리 손을 위로 쳐올리면서 운석을 뒤로 튕겨 냈다.
연우도 불의 파도를 휘둘러 겨우 상쇄했을 만큼 큰 힘이었지만, 거대한 살덩이는 가볍게 출렁이는 게 전부였을 뿐. 별다른 타격 없이 공처럼 가볍게 튕겨 나 저만치 떨어진 곳으로 착지했다.
착!
살덩이의 정체는 식탐황제였다. 피지로 번들거리는 얼굴을 한 녀석은 대주교를 보고 입맛을 가볍게 다시다가, 곧 가벼운 경련과 함께 육체를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우두둑, 두둑. 살덩이가 딱딱하게 굳으면서 안쪽으로 말려들어갔다. 그러다 나타난 것은 정말 식탐황제가 맞나 싶을 정도로, 앙상하게 메마르고 눈덩이가 퀭하게 내려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신경질적인 인상으로 변모한 식탐황제는 송곳니가 훤히 드러나라 포악하게 웃으면서 소리쳤다.
“누가! 내 벗에게 함부로 무례하게 구는가? 그것참 몹쓸 인사로군.”
식탐황제가 등장하는 것과 동시에 외곽에서는 거친 북소리가 들렸다.
둥, 둥, 둥-
혈국의 군대가 진군을 할 때 울린다는 〈혈향 전고(血香戰鼓)〉의 북소리였다. 그리고 그 너머로 아스라이 녀석들의 군가도 같이 들려오고 있었다.
대주교는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면서 다시 식탐황제를 바라봤다.
“우리와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는 식탐황제의 갑작스러운 등장이 연우와 혈국 간의 계획이란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못할 것도 없지.”
“화이트 드래곤에 실컷 두들겨 맞고 있는 중이라고 들었네만.”
“캬캬캬! 승패는 병가지상사라! 전투에서 지더라도, 전쟁에서 이기면 그만이 아닌가!”
광기에 가득 찬 웃음에, 대주교는 식탐황제와 연우를 번갈아 보다가 쓰게 웃고 말았다.
“어지럽다 싶으니 아예 판을 키워 버릴 생각이로군. 아무도 함부로 손을 쓰지 못하게. 대전쟁이라도 생각하는가?”
“아무렇게나 생각하라고. 그럼 어디 간만에 광신도들의 고기가 얼마나 익었는지 볼까? 키키키킥!”
“망국의 망령들이 현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까지 악영향을 끼치는군. 어떻게든 치워야겠어.”
식탐황제와 대주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몸을 던졌다.
콰아아앙-
갑작스럽게 벌어진 아홉 왕 간의 충돌에 모두가 혼비백산하는 동안.
연우는 어느새 에도라가 있는 곳에 도착해 있었다.
“오라버니.”
“이곳은 저들에게 맡기고, 우선 빠져나가자.”
연우는 에도라의 허리를 안으면서 불의 날개를 한껏 펼쳤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거칠게 싸워 댔었지만. 지금 연우의 품에 안긴 에도라의 얼굴은 살짝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콰르릉!
전장은 여전히 여러 충돌로 격전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사고만 크게 치고 빠지기. 크. 역시 우리 주인님만 한 사람이 없단 말이지.」
샤논의 깐족대는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연우는 언제나 그렇듯 무시하면서 자리를 이탈했다.
* * *
“빌어먹을 것들.”
아나스타샤는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이 자리에 없는 연우를 욕했다.
어떻게 녀석과 관련되기만 하면 이렇게 골치 아픈 일거리만 생기는 것인지.
“스승님.”
그때, 옆에서 아나스타샤를 돕던 빅토리아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 아이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탑의 일에 깊숙이 관여하지 않았을 텐데. 아나스타샤는 속으로 가볍게 혀를 차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가.”
“그런……!”
“어째서입니까!”
칸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아나스타샤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연우만큼이나 그녀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녀석이 있다면 바로 이 녀석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제자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놈.
아나스타샤는 앞으로 한 번만 더 시건방지게 굴면 아무리 제자가 말려도 날려 버리겠다고 다짐한 뒤, 천천히 방금 전까지 진맥하던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도일이 창백한 안색으로 누워 있었다.
“너희들은 대체 채널링을 무엇으로 여기는 것이냐? 쉽게 붙였다 뗐다 할 수 있는 안테나 같은 걸로 보이기라도 하는 것이냐?”
“그건…….”
“이 아이에게로 이어지는 채널링의 교란이 심해도 너무 심하다. 이미 한 차례 채널링을 강제로 뜯어 놓아 상처가 다 아물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번에도 또 끊어 버린다고? 그랬다가는 이 아이의 영혼이 아마 남아 있지 않을 것이야.”
“……!”
“……!”
아나스타샤는 충격에 젖은 칸과 빅토리아를 보면서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더구나 그동안 이 아이와 연결되었던 존재들은 하나같이 아주 지고하신 ‘놈’들이었더구나. 어디서 그런 것들만 골라서 맡았던 건지. 다른 놈들은 한 놈이라도 얻기를 바라는 존재를. 쯧.”
처음에는 천마. 그다음에는 대지모신. 그런 존재들과 이어져 있었던 것만 하더라도, 일개 필멸자로서는 사실 영혼이 송두리째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아나스타샤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굳이 뒷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사실 신적인 존재들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그녀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여러 신과 악마들이 이쪽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놈’이라는 단어를 썼던 것이다.
그건 그녀가 여태 타인에게는 숨기고 있는 과거와 관련이 있는 일이었으나. 굳이 거론하지는 않았다.
“…….”
“……어떻게든 수가 생길 거야. 같이 머리를 맞대다 보면.”
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렇게 험난했던 시기를 보내고, 이제야 겨우 마음을 놓는가 싶었는데. 다시 이런 일이 찾아올 줄 이야. 정말 그들 형제에게는 좋은 날이 오지 않는 건지, 너무 가슴이 아팠다.
빅토리아는 그런 칸이 안타까워 가만히 등을 다독여 주어야만 했다.
후우-
아나스타샤는 연기를 길게 내뿜으면서 생각했다.
‘아주 지랄들을 하는구나.’
그녀는 이제 기도 차지 않는다는 표정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여기에 계속 이렇게 둬서는 저 지랄 맞은 모습을 계속 보게 되겠다는 생각에,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곰방대를 바닥에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어렵지만, 가능한 방법이 있지.”
“무엇입니까?”
“대체재를 찾는 것이다.”
“대체재라면……?”
“천마와 대지모신, 놈들이 지나간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놈이 오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만한 존재를, 쉽게 찾을 수 있을까?”
순간, 칸과 빅토리아의 시선이 마주쳤다.
동시에 떠오르는 존재가 있었다.
‘카인!’
두 사람은 이미 연우가 하데스로부터 사왕좌를 물려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비록 아직 탈각과 초월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 또한.
더군다나. 올포원을 상대할 당시에 연우의 몸을 빌려 깨어났던 존재도 있었다.
연우에게 불가사의한 힘을 주던 존재. 그가 여전히 연우에게 내재되어 있다는 건 이미 짐작하고 있는바.
그렇다면 연우가 천마와 대지모신이 사라진 자리를 대체할 수 있지 않을까?
당장은 힘들지 몰라도. 시도는 해 볼 만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대체재는 최대한 빨리 물색하는 게 좋을 거다. 이 아이, 지금은 이렇게 억지로 재워 두고 있지만, 언제 다시 눈을 뜰지 모른다. 그리고 그때는 너희들이 아는 놈이 아니게 될지도 모르지.”
시간이 얼마 없다.
칸과 빅토리아는 서로를 보면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