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416화 (416/862)

16화. 용의 신전 (3)

칼라투스는 한시라도 빨리 연우에게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오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용의 미궁은 만반의 준비를 하지 않으면 절대 통과할 수 없는 곳.

그래서 연우는 시간을 들이더라도 공략을 위한 준비를 해야만 했다.

그것을 위한 첫 단계가 바로 혈국을 비롯한 여러 세력들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머릿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빠른 공략에 더 유리해지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열매가 무르익기를 기다려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에도라와의 일은. 그녀를 걱정했던 마음이 안도감으로 변하면서, 그조차도 예상치 못하게 일어난 감정이 빚어낸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관계가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를 챙기고, 위할 뿐이었다.

* * *

에도라는 연우가 말해 주는 일들을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정우를 만났다는 부분에서는 같이 기뻐하고, 대지모신이 나타나며 타르타로스를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대목에서는 같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저도 언젠가 올포원을 본 적이 있어요.”

“올포원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

연우가 놀란 얼굴로 에도라를 바라봤다.

“네. 너무 어렸을 때였고, 그냥 스치듯이 본 게 전부였지만요. 아버지를 찾아서 방문한 거였어요.”

당시에 마을이 워낙에 소란스러웠기 때문에, 에도라는 아직도 그때를 잊을 수가 없었다.

“사실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자세하게 기억나지 않아요. 아마 인식 방해 마법 같은 거였겠죠? 그래도 뭐랄까, 그 분위기가 되게 묘해서 선명해요.”

“분위기?”

“네. 되게 특이했어요. 고고하게 서 있는데, 그게 오히려 위태롭게 보였달까.”

에도라는 기억 한편에 묻어 둔 올포원에 대한 인상을 다시 그려 나갔다.

“마치…… 어딘지 모르게, 스스로 쓰러지길 바라고 있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지쳐 보인다고 해야 하나. 하여간 그런 느낌이었어요.”

“음.”

연우는 아주 잠깐 생각에 잠겼다. 위태롭게 보이는 올포원이라. 자신이 여태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 다른 인상이라, 뭐라고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에도라는 〈혜안〉을 습득했을 정도로 뛰어난 눈을 가졌다. 어린 시절이라고 하더라도 본질을 꿰뚫는 안목은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의 눈에 비쳤던 올포원의 모습이 어쩌면 진짜인지도.

‘어렵군.’

연우는 가볍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어쩌면 그동안 동생과 자신이 보고 겪었던 올포원이, 사실은 현실과 많이 다를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달라질 건 없지만.’

진실이 무엇이라 하더라도.

탑의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 언젠가는 넘어야 할 벽이라는 사실 만큼은 달라지지 않는다.

물론, 그 전에 우선 넘어야 할 벽들이 더 많았지만.

“오라버니, 이거 혹시 더 없나요? 너무 맛있는데.”

에도라는 어느새 싹 비워진 탕수육을 아쉬운 눈으로 보았다.

“아직 더 있으니 맘껏 먹어. 하지만 이번에는 그냥 찍어 먹도록 해. 부어서 먹었다가 식으면 눅진눅진해지니까.”

“그래도 이렇게 해야 튀김에 소스가 잘 스며들어서 고기랑 잘 어우러지는 것 같아서요. 전 이렇게 먹을래요!”

“……!”

연우는 가만히 부먹이 되는 탕수육을 보다가, 가볍게 한숨을 내 쉬었다.

“커피도 끓였는데, 마실래?”

* * *

그날 밤.

연우와 에도라는 식탐황제와 접선하기로 한 장소로 이동했다.

“아하하! 짐의 전우! 짐의 고대하던 벗! 이제야 겨우 나타나면 쓰나! 짐이 얼마나 경을 보고 싶어 했는지 아는가 말이야!”

식탐황제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연우에게 달려왔다. 어느덧 포동포동하게 살찐 모습으로 되돌아온 그는 얼굴에 피지가 가득했다.

연우도 그를 마주 안으려는데, 갑자기 두 사람 사이로 칼날 두 개가 X자 형태로 불쑥 끼어들며 연우를 가로막았다.

“이게 무슨 짓인가, 모글레이 공작! 티르빙 공작!”

두 칼날의 주인은 괴력난신 중 각각 ‘난’과 ‘신’에 해당하는 모글레이 공작과 티르빙 공작이었다.

“무례를 용서하시옵소서, 폐하.”

“하지만 신(臣)들은 이자에게 따져야 할 용건이 있사옵니다.”

식탐황제가 더 소리를 지르기 전에, 티르빙 공작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사이 모글레이 공작이 재빨리 눈살을 좁히면서 연우를 노려보았다.

“카인 경. 그대가 앞으로 할 대답 여부에 따라 우리들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폐하를 만류하고 그대를 멀리하라 청을 드릴 것이오.”

연우는 모글레이 공작과 티르빙 공작을 번갈아 보다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그대가 벌인 이 판으로 인해 본국은 이제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굴레 속으로 들어오고 말았소. 이제는 화이트 드래곤만이 아니라 혈국이나 엘로힘까지도 적으로 돌리고 만 셈이지. 하지만 당신이 제안한 계획은 너무 단순해. 이 힘의 균형을 대체 어떻게 맞출 것이오?”

에도라가 뒤에서 눈을 한껏 치켜떴지만, 연우가 그녀를 제지했다.

연우는 모글레이 공작을 보면서 담담하게 대답했다.

“환상연대가 참전 의사를 밝혔고, 마희성이 곧 세력을 규합해 참여할 계획이라면?”

모글레이 공작이 코웃음을 쳤다.

“가당치도 않는 소리! 그깟 무뢰배 집단으로 균형의 추가 맞을 수 있다고 보는 거요? 기껏해야 사자 연맹이니 하는 졸자들이나 상대하면 끝일 텐데?”

“그 둘만 있는 건 아니지.”

연우가 피식 비웃음을 던졌다.

“나도 있으니까.”

“뭔……!”

채앵!

연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갑자기 그림자가 위로 불쑥 올라오면서 연우를 겨누던 모글레이 공작의 칼을 후려쳤다.

그리고 동시에 뒤쪽에서 다른 칼날이 불쑥 튀어나와 모글레이 공작의 목젖에 다다랐다.

「움직이지 마라. 그 순간 목이 떨어질 테니.」

‘대체 어느 틈에?’

한령이 칼끝을 한껏 치켜세우면서 바로 그의 뒤에 서 있었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 모글레이 공작의 눈이 커졌다. 그 역시 뛰어난 검사인데, 한령의 움직임을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다.

연우는 잔뜩 굳은 모글레이 공작을 보면서 차갑게 말했다.

“내가 그림자로 권속을 부리는 군주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을 테고. 이 정도라면 무게 추의 균형이 맞지는 않더라도 일을 도모하기엔 충분하다고 생각이 드는데. 이걸로도 부족하나?”

아무리 기습적이었다지만, 공작에 다다른 자신의 공격을 막아 내는 권속을 부리는 플레이어.

모글레이 공작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해야만 했다.

“……결례가 많았소.”

스르릉!

그는 자세를 바로잡으면서 검을 도로 검집에 밀어 넣었다. 한령은 한 발자국 떨어지면서 그를 노려보다가 다시 그림자 속으로 녹아 사라졌다.

티르빙 공작도 뒤로 물러서자, 식탐황제가 분기에 찬 얼굴로 씩씩대며 다가와 손을 올렸다.

짜악!

“이 죄는 짐이 추후에 추문(推問, 따져 물음)할 것이다. 보기 싫으니 썩 물러나거라!”

“은혜가 하해와 같사옵니다.”

“은혜가 하해와 같사옵니다.”

두 공작이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물러섰다.

식탐황제는 그들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계속 노려보다가, 조급한 발걸음으로 뛰어가 연우를 이리저리 살폈다.

“괘, 괜찮은가?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 사람 보게! 지금 인사가 중요하신가! 경의 몸이 더 중요하지! 이 일은 절대! 절대 짐이 시킨 일이 아닐세!”

“잘 알고 있습니다. 염려치 마십시오.”

“어찌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나!”

“공작께도 따로 벌을 주거나 하지 마십시오. 전부 폐하에 대한 충성심에서 발로된 일들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백번 이해합니다.”

연우를 아는 권속들이 보기에는 터무니없어 보일 만큼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지만.

식탐황제는 감동한 얼굴이 되어 붉어진 눈시울을 손수건으로 훔쳤다.

“허. 마음도 태산처럼 높은 이로고. 어찌 짐이 경과 같은 사람을 이제야 만났단 말인가? 더 일찍이 교분을 나눴더라면 좋았을 것을.”

식탐황제는 두툼한 손으로 연우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지 말고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 내 경을 위해 만찬을 준비해 뒀으니.”

식탐황제는 연우를 자신의 막사로 안내하면서 침이 튀도록 그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의 뒤로 도모태자와 뚜언띠엔 공작이 따랐다.

“칼라투스의 무덤이라니! 고 얄미운 봄의 여왕, 그 계집과 연놈들이 죄다 눈에 불을 켤 만한 것들이 아닌가. 하하하! 거기다 이제 아예 판세를 복잡하게 얽어 놓았으니, 아마 곧 머리가 복잡해질 테지.”

막사 안에는 기다란 탁상을 따라 갖가지 만찬과 술들이 화려한 접시에 가득 놓여 있었다.

“그리고 경이 부탁했던 대로, 조사도 모두 끝났다네. 착굴만 남은 셈이지.”

식탐황제는 연우의 귓가에 살짝 중얼대면서 실실 웃음을 흘렸다. 제 딴에는 비밀스럽게 이야기한답시고 한 거였지만, 사실 듣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연우가 에도라를 구하면서 적들의 이목을 끄는 동안, 혈국은 타 세력들의 눈을 피해 연우가 건네 준 지도를 검토하며 무덤을 물색했다.

지도가 사실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결과는 빙고였다.

히든 스테이지를 발견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식탐황제는 신하들이 잔뜩 흥분한 얼굴로 달려와 칼라투스의 무덤을 찾았다고 보고했을 때의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그 때만 생각하면 입가에 침이 가득 고였다.

“다들 그러더군. 아직 초입만 열었을 뿐인데도, 정말이지 진귀한 것들이 너무 많았노라고. 과거의 용들이 어떻게 초월종으로 분류되었는지, 여름여왕이 어째서 그토록 오랫동안 탑을 지배할 수 있었는지를 엿보았다고 말이야.”

이미 식탐황제는 신하들이 가져온 용종의 유산 일부를 만져 보았었다. 그 하나하나가 전부 현재 탑에서 거래되는 상위 아티팩트와 비교해도 절대 뒤처지지 않았다.

“폐하.”

“으하하! 왜 그러는가. 말씀만 해 보시게.”

“지금 폐하께서 보셨던 것들은 전부 입구에 있던 것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안쪽에 더 진귀한 것들이 가득할 거란 의미.

“그리고 거기에 있는 모든 것들이 폐하의 것이 될 것입니다.”

식탐황제의 입꼬리가 찢어져라 훤히 벌어졌다. 그러다 그는 손으로 입을 겨우 가리면서 최대한 엄숙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짐더러 경의 공을 가로채라는 것인가? 아니면 짐을 배은망덕한 폭군으로 볼 생각인가? 이것은 어디까지나 경의 몫. 짐은 경을 돕고자 나선 것 뿐일세. 여기에 있는 것들은 전부 경의 것이야.”

물론, 연우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지만.

‘그럴 생각도 없으면서, 무슨.’

녀석이 가진 끝없는 탐욕을 연우가 모를까.

친형제들을 잡아먹고 황제의 자리에 앉았을 만큼, 녀석이 가진 탐욕의 크기는 대단했다. 그건 저 뱃속에 들어있는 영혼석, 식탐의 돌 때문일지도 몰랐다.

“저에게는 보물을 지킬 힘도 욕심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보물은 폐하께서 가지시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식탐황제는 씰룩거리는 입술을 겨우 진정시키면서 물었다.

“그럼 자네는? 거기 있는 걸 전부 나에게 주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지 않나?”

“제가 바라는 건 그 안에 있는 한 가지면 됩니다.”

“뭔가? 말씀만 하시게! 경이 바라는 것이라면, 짐이 수십 수백 개인들 못 내어 주겠나!”

“그건 그때 가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하게! 짐의 이름을 걸고 무엇이든지 내어 줄 테니! 하하하! 그동안 참 골치 아픈 일이 많았건만, 오늘 드디어 짐이 천군만마를 얻었도다! 다들 무엇들 하는가, 만찬을 내오지 않고!”

“식사는 무덤을 전부 둘러보고 난 뒤, 천천히 즐겨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으하핫! 경은 참으로 짐의 속에 직접 들어갔다 나온 사람 같으이. 어찌 그리 한 마디 한 마디 하는 말들이 다 마음에 드는지. 좋네. 무덤, 아니, 미궁으로 짐이 직접 안내하지. 따라오게.”

연우는 기분 좋게 웃으며 용의 미궁과 연결된 포탈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식탐황제의 모습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너의 목이 갖고 싶다는 말을 할 수는 없지 않나, 식탐.’

곧 빛무리와 함께 장소가 반전되었다.

[히든 스테이지, ‘용의 미궁’에 입장하였습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