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417화 (417/862)

17화. 용의 신전 (4)

[지금 당신이 서 있는 곳은 미궁의 초입입니다.]

미궁으로 통하는 입구는 정말 이곳이 입구가 맞나 싶을 정도로 화려한 규모를 자랑했다.

수천 명은 동시에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은 크기의 공동을 따라서, 갖가지 대리석 건축물들이 화려하게 설치되어 있었고, 벽면에는 용종의 종족 신화를 담은 성화가 가득했다.

그리고 정면에는 거대한 크기의 철문이 놓여 있었다.

장장 수십 미터는 될 것 같은 크기. 두께도 엄청나서 절대 꿈쩍도 않을 것 같았다.

그 앞에는 인간 형태를 띤 석상이 가부좌를 튼 채로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조각이 어찌나 정교한지 마치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처럼 생생한 느낌이 풍겼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수많은 피와 사체들이 흩어져 있었다. 바닥과 철문을 따라 격전의 흔적도 곳곳에 남아 있었다.

“선발대 녀석들이 그새를 못 참고 통과를 시도하려 했었다더군. 보다시피 피해가 좀 막심하지.”

식탐황제는 예를 갖추는 수하들을 지나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사체를 발로 툭 차며 인상을 찡그렸다.

“저게 그 말로만 듣던 가디언인가 봅니다.”

“아마 그럴 걸세. 절대 보통이 아니야. 그리고 경에게는 미안할 따름이야.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선발대 놈들은 짐이 꼭 책임지고 문책을 하겠네.”

연우는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석상을 바라보았다.

용의 신전 지하에 마련된 ‘미궁’은 칼라투스의 무덤이기 이전에, 용종의 옛 화려한 영화(榮華)를 담은 박물관 같은 장소였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구획으로 나뉘었고, 각 구획은 철저하게 침입자들을 시험했다.

그런 시험자 역할을 맡은 이들이 바로, 무덤지기였다…….

……고룡 칼라투스는 생전에 뛰어난 업적을 이뤘던 용왕이니만큼, 그의 무덤을 지키는 무덤지기 들도 아주 많았다.

옛 전설적인 용왕들에게서 이름을 따온 그들은 그에 걸맞게 하 나하나가 하이 랭커 급에 해당하고, 어떤 것은 아홉 왕에도 필적할 정도로 강했다. 녀석들은 오로지 옛 주인의 안식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만 주입된 채, 실수일지라도 어쨌든 무덤 속으로 들어온 존재라면 모두 소리 없이 치워 버리는 역할을 맡았다.

그건 칼라투스의 후예로 점지된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가장 경계해야 하는 무덤지기는 총 다섯 기였다.

그중 하나가 바로 문지기 발난타였다.

많은 용들이 머리를 맞대어 ‘강한 플레이어는 어떤 형태를 지닐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고심한 끝에 만들어진 전투 인형.

처음 튜토리얼을 통과할 당시. 연우는 A구획의 보스룸에서 구리 인형들을 맞닥뜨린 적이 있었다. 그 인형들의 모티브가 되었던 게 바로 저 철문 앞에서 조용히 잠에 빠져 있는 발난타였다.

발난타는 어느 용종이 심심해서 툭 하고 내뱉은 별거 아닌 질문에, 여러 용종들이 머리를 맞대어 내린 결론을 바탕으로 칼라투스가 직접 빚어 만들어 낸 것.

그렇다 보니 가진 전력이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녀석은 평소에는 모든 기능이 정지해 고요한 상태만 유지한다. 하지만 만약에 허락 없이 미궁의 입구를 통과하려는 침입자가 있을 경우, 즉시 눈을 뜨며 공격을 시도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었다.

아마 발난타의 주변에 뿌려진 사체들도 무리하게 진입을 시도하려다가 당한 놈들일 테지.

미궁 입장은 분명히 모든 준비를 끝내고, 연우와 같이 시도하기로 약조를 하였으면서. 이미 그보다 먼저 들어서려고 했던 것이다. 명백한 약속 위반이었다.

‘별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실망이라는 것도 믿음을 가진 상대에게서나 받는 법이지, 그렇지 않으면 별 감흥도 없는 법이었다.

하지만 식탐황제는 적잖게 찔렸던 모양인지, 괜히 초입을 분석하고 있던 선발대를 나무라고 있었다. 선발대장은 달게 죄를 받겠다며 고개를 숙여 댔고.

누가 봐도 면피용 연기에 불과했지만.

연우는 그쪽에는 별반 신경 쓰지 않고, 발난타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저, 저……!”

“위험……!”

식탐황제와 선발대가 전부 놀라 연우를 붙잡으려 했지만. 다행히 연우는 발난타가 작동하지 않는 부분까지만 다가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녀석에게 의념을 강하게 투영시켰다.

[전투 인형(발난타)로의 접속을 시도합니다.]

[불발되었습니다.]

[접속 자격이 부족합니다.]

‘역시 안 되나.’

연우는 가볍게 혀를 찼다.

혹시나 발난타를 이쪽에서 제어할 수 있을까 싶어 시도를 해 본 것인데. 아무래도 안 되는 모양이었다.

‘칼라투스가 깨어 있어도 미궁의 시스템에는 손을 대지 못하는 상태…… 그렇게 받아들이면 되려나?’

아무래도 손쉽게 칼라투스가 있는 곳까지 가는 것은 어려울 듯 싶었다.

그렇다면.

‘원래 계획대로 갈 수밖에.’

연우는 의념을 계속 발난타에게로 침투시켰다.

[전투 인형(발난타)로의 접속을 시도합니다.]

[불발되었습니다.]

……

[자격이 없는 접속자의 계속된 해킹으로 인해, 세이프 가드 시스템이 작동합니다.]

[현재 세이프 가드의 단계: 3]

[세이프 가드 시스템이 항시 발동 중인 상태입니다.]

번쩍!

발난타가 갑자기 눈을 떴다. 분명 석상인데도 불구하고, 매서운 안광이 사위를 갈랐다.

동공이 좌우로 데구루루 굴렀다. 마치 먹잇감을 찾는 맹수처럼 매서운 눈빛이었다.

“……!”

“……!”

순간, 입구에 깊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선발대장을 문책하고 있던 식탐황제도, 선발대원들도, 전부 입을 꾹 다물며 이쪽을 보았다. 특히 이미 발난타와 한 번 부딪친 전 적이 있던 선발대의 경계심은 대단했다. 여차하면 바로 움직일 태세였지만.

다행히 발난타는 눈을 크게 뜨며 연우를 노려보기만 할 뿐.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흠! 괜히 사람을 간 떨리게 만드는군.”

식탐황제는 연우 옆으로 다가오면서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투덜거렸다.

발난타는 아무리 그라 해도 뚫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닌 상대. 미궁 안쪽에는 얼마나 더 포악한 괴물들이 있을지 몰라, 힘을 아껴야만 하는 그로서는 여기서 함부로 전투를 벌일 수가 없었다.

‘이걸로 준비는 됐고.’

하지만 안도하는 식탐황제와 다르게.

가면 아래에 있는 연우의 입은 가볍게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세이프 가드 시스템.

발난타가 침입자들을 막아 내는 보안 단계를 의미했다.

원래대로라면 침입이 감지되더라도 최고 2단계에서 그쳐 침입자들의 접근만 막도록 설정되어 있었지만.

연우의 잇따른 접속 시도로 보안 단계가 확 올라가고 만 것이다.

식탐황제 등이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 안도하는 것과 다르게, 현재 발난타는 이 주변에 있는 생명체들을 모두 ‘인식’하고, 행동과 습관을 면밀히 분석하여 유사시에 빠르게 제거할 수 있는 최단 루트를 모색하고 있는 중이었다.

여기서 만약 전투가 시작된다면.

‘4, 5단계 이상으로 빠르게 올라가겠지.’

당연한 말이지만. 단계가 높이 올라갈수록 발난타의 전투 능력도 같이 상승하게 된다.

이런 상태에 만약 사자 연맹이나 마군, 엘로힘, 화이트 드래곤 따위를 던져둔다면?

난리가 날 테지.

그리고 발난타를 어찌 꺾는다고 해도, 시스템으로 같이 연결된 내부의 다른 가디언들도 즉각 반응하게 될 테니. 그 뒤에 이어지는 여러 개의 시스템도 녀석들을 당혹스럽게 만들 것이다.

연우는 비릿한 웃음을 겨우 참으면서 식탐황제를 돌아보았다.

식탐황제가 씩 웃었다. 제 딴에는 멋지게 웃는다고 웃는 미소였지만, 푸들거리는 턱살이 역겹기만 했다.

“아무튼. 미궁도 확인했으니 바로 시작할 생각이겠지?”

“예. 놈들만 온다면.”

바로 그때였다.

모글레이 공작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사자 연맹이 본진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마군, 엘로힘, 화이트 드래곤도 수뇌 회의를 마친 다음, 즉각 이동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크하하! 놈들도 그다지 양반은 못 되는 모양인데!”

이미 사자 연맹에 심어 둔 세작에게서 마군, 엘로힘, 화이트 드래곤의 회동 소식을 들었기에, 언제 녀석들이 움직일까 싶던 참이었는데.

식탐황제는 기분 좋게 웃으면서 모글레이 공작을 돌아보았다.

“모글레이!”

“하명하시옵소서.”

모글레이 공작은 한쪽 무릎을 지면에다 꿇으며 부복했다.

“그대는 카인 경과 짐에게 죄가 있다는 사실, 잘 알고 있겠지?”

“그렇사옵니다.”

“그렇다면 목숨을 다 바쳐서라도, 놈들을 이곳으로 잘 끌어들여야 할 것이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겠지?”

“명을 받드옵니다!”

모글레이 공작은 한 번 더 고개를 숙이더니 빠르게 자리를 벗어 났다. 지금쯤 적들이 포위망을 갖추며 다가오고 있을 본진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였다.

‘미친놈들. 말로만 백성이라고 할 뿐이지, 가축처럼 아무렇지 않게 쓰다 버리는군.’

미끼가 되면서 얼마나 많은 혈국의 플레이어들이 죽어 나갈지 불에 보듯 뻔하게 보였지만.

연우는 그런 녀석의 뒷모습을 보면서. 담담히 읊조렸다.

‘한령.’

「다녀오겠습니다.」

스스스-

연우에게서 떨어진 그림자가 조용히 모글레이 공작의 그림자로 스며들었다.

“놈들을! 절대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들어라!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아이반의 명령에 따라, 숲에서는 용병을 비롯한 옛 트리톤 따위의 플레이어들이 움직이고, 후방과 하늘에서는 마법사들이 영창을 하면서 그들에게 대규모 버프를 실어 주는 중이었다.

‘독식자의 목은…… 어떻게든 내가 갖고 간다.’

사자 연맹이 북쪽에서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동쪽에서는 마군, 서쪽에서는 엘로힘, 남쪽에서는 화이트 드래곤이 포위망을 갖추며 좁혀 오는 중이었다.

누가 그쪽을 맡겠다고 자처한 것은 아니었지만.

서로에게 방해가 되지 말자고 이야기했기에, 자연스레 각자가 가까운 위치를 맡게 된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독식자의 목을 치는 것.

그 외에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도 하겠지만, 우선은 독식자를 제거하는 데 목표를 두고 먼저 쟁취하는 곳이 승자가 되는 것으로 잠정적인 합의를 본 상태였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아이반은 여기서 물러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대주교, 왈츠, 마그누스에게 여러 차례 무시를 당한 뒤로, 그는 속이 펄펄 끓고 있었다.

그래서 오만하기 짝이 없는 저들의 낯짝을 어떻게든 구겨 주고 싶었다.

그리고 당당히 외치고 싶었다.

나도 당신들 못지않노라고. 곧 비게 될 아홉 왕의 자리 중 하나는 자신의 것이 될 것이라고!

“카인!”

그렇게 독식자를 보호하고자, 방진을 시도하는 혈국의 병력들을 연거푸 밀어내면서 포효했다.

“카이이인!”

쿠쿠쿵!

그 순간, 마법 연합의 집중 포격이 떨어지면서 녀석들의 방어벽이 뚫렸다.

선봉에 선 아이반을 따라, 용병 연맹의 첨진(尖陣)이 단번에 혈국 본영으로 난입을 시도했다. 그때, 저 안쪽에서 침입자들을 꾸역꾸역 밀어내고 있던 녀석이 보였다.

모글레이 공작. 혈국의 ‘난’이 피로 점철되어 갖가지 기괴한 현상을 일으키고 있었다.

모글레이 공작은 갑자기 목을 노려 오는 공격에 본능적으로 몸을 크게 뒤틀면서 튕겨 냈다. 그 리고 상대가 아이반이라는 것을 알고 인상을 찡그렸다.

“철사자……!”

“카인은! 독식자는 어디에 있나!”

“내가 말해 줄 것 같나?”

“그렇다면…… 죽여서라도 묻는 수밖에!”

콰콰쾅-

아이반은 아홉 왕도 되지 못한 공작 따위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 더 크게 성을 내면서 모글레이 공작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사자 출동〉. 당대의 용병왕이 있게 만든 버서커 스킬이 터지면서 연거푸 폭발이 뒤따랐다. 모글레이 공작도 〈패란(悖亂)〉을 발동시키면서 칼을 위로 쳐올렸다.

쿠쿠쿠-

지면이 크게 떨리면서 모래 기둥이 높게 치솟았다.

“무엇들 하느냐! 더 높이 노래를 부르지 아니하고!”

모글레이 공작의 명령에 따라, 혈국의 클랜원들이 일제히 입을 모아 군가를 높이 불렀다.

쿵, 쿵, 쿵!

군화로 땅을 울릴 때마다 힘찬 격동이 전장으로 퍼져 나갔다. 클랜원들의 심장이 거세게 박동하면서 얼굴이 대춧빛으로 물들었다.

“함성이……!”

함성이 멈추고,

붉은 깃발이 타올랐네.

전장의 화신처럼.

저 멀리 퍼지게 하라!

우리의 노래가 만세에 울리도록.

우리의 깃발이 세계에 흔들리게.

혈국의 클랜원들은 모두 죽음을 각오하며 감히 자신들의 영토를 다시 어지럽히려는 침략자들을 물리치고자 했다.

그렇게 전장이 어지러워지는 가운데.

“여기선 보이지 않는군.”

귀신처럼 표홀하게 움직이는 수하들을 내버려 두고, 저 멀리서 사태를 관망하던 대주교는 가볍게 혀를 찼다.

아이반이 모글레이 공작과 충돌하고 있는 동안에, 빠르게 전장을 살피면서 연우와 식탐황제가 본영에 없는 것을 파악한 것이다.

“여의봉의 조각을 필요로 하는 이상, 더 오랫동안 날뛰게 할 수는 없는 노릇.”

그는 품에서 작은 우윳빛 구슬을 꺼내더니 잘게 부수면서 읊조렸다.

“동주의 칠마왕이시여. 바람을 타고 흐르는 통풍대성의 손길을 이곳으로 불러 주소서.”

휘이이!

[통풍대성이 당신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풍도천천계’가 발동합니다.]

어디선가 불어오던 바람이 대주교를 한 차례 휘감다가 전장을 따라 퍼졌다. 연우가 어디에 있는지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비슷한 광경은 서쪽과 남쪽에서도 동시에 벌어지는 중이었다.

“쯧! 식탐, 이자가 또 무슨 꼼수라도 부리고 있나?”

마그누스는 혀를 차면서 시선을 하늘로 고정시켰다.

[여러 신들의 의지가 당신과 함께합니다.]

[신의 사회, ‘아스가르드’가 참여합니다.]

[신의 사회, ‘데바’가 참여합니다.]

……

수많은 신들의 가호를 받으면서, 마그누스는 크게 기합을 터뜨렸다.

그는 독재관에 올랐을 정도로, 수많은 신들로부터 총애를 받던 몸. 이번 계획이 시행되면서 많은 신의 사회가 그에게 가호를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을 위한 채널링을 활짝 열자, 신의 권능들이 하계에 닿으면서 혈국의 방어책들을 족족 부서뜨렸다.

마그누스는 그 파장 중에 어딘가에 있을 연우의 흔적들을 뒤쫓았다.

“…….”

왈츠는 무심한 표정으로 혈국의 병사들을 마구잡이로 찢으면서 전진을 하다가 연우가 없다는 것을 확인, 십여 개의 원영신(元嬰身)을 만들어 곳곳으로 퍼뜨리며 기감을 확장시켰다.

탑을 지배한다는 세 왕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연우의 뒤를 쫓았고.

그들은 거의 동시에 알 수 없는 곳으로 향하는 포탈을 발견하는 데 이르렀다.

“가지 못한다, 이것들!”

모글레이 공작은 세 왕이 이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파악하고, 아이반을 거세게 밀어내며 칼을 포탈 쪽으로 돌리려 했지만.

쐐애액-

스걱! 스걱!

아이반도 겨우 상대하고 있던 모글레이 공작이, 동시에 진입하려던 세 왕을 막아설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빛살과 함께 칼을 든 오른팔이 허공으로 튀고, 왼쪽 다리가 무릎 아래로 잘려 나갔다.

세 왕은 쓰러지는 모글레이 공작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녀석을 지나 본영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포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빌어먹을! 전원, 전투를 멈추고 나를 따라라!”

아이반도 선수를 놓쳤다는 생각에 모글레이 공작에게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고, 최소한의 별동대만 데리고 포탈 속으로 뛰어들었다.

다른 병력들도 다급하게 수장들의 뒤를 따르면서, 그렇게 어지럽던 전장에는 단숨에 적막이 내려 앉았다.

“……키키킥. 모자란 놈들. 이것이 전부 폐하의 안배인 줄도 모르고,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꼴이라니.”

모글레이 공작은 지친 기색으로 바위에 등을 대면서도, 그렇게 포탈 너머로 뛰어든 녀석들을 보며 비웃음을 던졌다.

비록 많은 백성들의 희생과 함께, 팔다리를 각각 한 짝씩 던져 주긴 했다지만.

그래도 세 명의 왕과 네 개나 되는 거대 클랜들을 끌어들였으니. 충분히 남는 장사였다.

녀석들은 자신들이 뛰어든 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있다가, 미궁에서 쏟아지는 가디언과 함께 휩쓸리고 말겠지.

그리고 칼라투스의 무덤이 발견 되었다는 소식은 탑 전체로 퍼져 나가, 더 많은 세력과 랭커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일 것이다.

모글레이 공작은 그런 아수라장 뒤 최후에 웃고 있을 분이, 자신들의 황제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희생은 곧 완성될 ‘제국’의 탄탄한 밑거름이 되리라.

그렇게 믿었고, 그래서 웃었다.

팔다리의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맡은 임무를 다했다는 후련함이 더 컸다. 아마도 본진에 남은 수하들이 데리러 올 때까지 계속 해서 웃었을 것이다.

갑자기 귓가를 울린 속삭임이 아니었더라면.

「미안하지만, 안배는 너희의 왕이 아니라 우리의 왕께서 만드신 것이다. 너희도 저들과 다를 바가 없는 신세이지.」

모글레이 공작은 갑작스러운 위기감에 재빨리 몸을 뒤틀면서 남은 한 팔을 휘둘렀다. 비정상적으로 늘어난 자신의 그림자 위로, 한령이 이쪽을 보며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배……!’

촤아악-

모글레이 공작은 마지막에 ‘배신’이라는 단어를 끝까지 만들어 내지 못했다. 바로 뒤따라 사각지대에서 날아든 칼바람 때문에.

경악에 찬 녀석의 머리통이 허공으로 떠오르고.

한령과 레베카는 서로 시선을 마주치다가, 진영에 남아 있던 이들을 전부 지우기 위해 움직였다. 그림자가 먹물처럼 퍼져 나가면서 영괴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왜, 왜 이런…… 크아악!”

학살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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