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용의 신전 (7)
‘내가 위치한 곳은…… B2-AC11 구역인가? 생각보다 좀 먼 곳에 떨어졌어.’
연우는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고는 가볍게 혀를 찼다. 아무래도 가장 깊은 중심부, 레어까지 도착하기 위해서는 제법 많이 이동해야 할 것 같았다.
‘우선 여기서는 우측으로. 그다음에는 좌, 세 번째 출구, 대각선 두 번째 순이던가?’
[바람길 - 질풍]
연우는 용신안을 활짝 열어 둔 채, 바람길이 만들어 내는 길을 고스란히 밟으면서 빠르게 이동했다.
그처럼 미궁의 구조를 미리 파악해 두지 않으면 절대 통과할 수 없을 것 같은 복잡한 구조를 한참 지나던 도중.
쿠쿠쿠-
「침입자. 확인.」
갑자기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연우가 밟으려던 지면이 갈라 지면서 검은색 갑주를 착용한 해골 창기사가 천천히 일어나 앞을 가로막았다.
용아병, 스파르토이.
칼라투스의 이빨을 매개체로 태어난 가디언.
용아병은 보통 용종의 신체를 일부 빌려 태어나기 때문에 가진 바 능력이 보통 뛰어난 편이었다. 지금은 봄의 여왕과 가을군주로 대변되는 왈츠와 탐도 원래 여름 여왕의 혈청(血淸)을 이용해 태어났던 용아병들이었다.
이곳 미궁에는 칼라투스의 그런 용아병들이 가득했다.
다만, 그중에도 단계는 있었다. 가장 높은 등급이 다섯 무덤지기인 발난타 등이 속한 5급이라면.
지금 눈앞에 있는 녀석은.
‘3급쯤 되나?’
용아병의 붉은 안광이 연우를 위아래로 가볍게 훑더니 기계음을 냈다.
「침입자. 판정 중…….」
연우는 가만히 녀석이 하는 짓을 지켜보았다.
녀석을 상대하기 전. 우선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칼라투스는 분명히 ‘그놈’들이 닥친다고 했었어. 대체 그게 뭘까?’
분명히 미궁의 위치를 알고 있는 건 자신밖에 없었을 텐데.
다른 누가 접근을 한다?
일반적인 플레이어는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계에서 감히 칼라투스를 직접 위협할 만한 존재는 없을 테니까. 그건 과거에 여름여왕도 해내지 못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칼라투스가 직접 에도라의 눈을 빌려 부탁을 했을 정도라면 사안이 급박한 것은 사실.
그렇다면 칼라투스가 말하는 ‘그놈’들의 접근은 어디까지 이뤄졌을까?
연우는 용아병의 상태를 보면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발난타야 입력된 프로그래밍이 그렇다 치더라도.
미궁 내에 있는 가디언들은 자신에게서 용의 흔적을 읽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파악하는 게 보인다면 미궁의 시스템은 ‘그놈’들로부터 아직 안전한 것일 테고, 그런 게 전혀 없다면.
‘이미 위협이 목전까지 다다랐다는 뜻이겠지.’
그런데.
「판정. 소멸!」
쾅!
용아병은 별다른 판단 없이 지면을 거세게 박차면서 창을 길게 앞으로 쭉 내뻗었다.
역시.
그런 생각이 연우의 머릿속을 스쳤다.
채애앵!
연우는 재빨리 아공간에서 비그리드를 비스듬히 뽑아 창날을 옆으로 흘렸다.
‘몸이 조금 무겁긴 하지만.’
팟!
연우는 아트만 시스템을 적극 활용하면서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창날이 비스듬하게 꺾이면서 연우에게 내리꽂혔지만, 이미 그는 블링크를 이용해 사라진 상태. 다시 그가 나타난 곳은 용아병의 바로 뒤쪽이었다.
비그리드에 맺힌 검은 오러가 단번에 녀석을 반 토막 내려는 순간.
차차창!
갑자기 연우 옆으로 두 개의 창날이 불쑥 교차하면서 비그리드를 가로막았다.
어느새 두 명의 용아병이 각각 좌우에서 나타나 동료를 구해 낸 것이다.
「침입자 등급, 상향 조정.」
「위험 등급, 3.」
위험 등급이 5까지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마음에 안 드는데.”
연우는 더 이상 길게 상대해 봤자 귀찮아지겠다는 생각에, 비그리드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가득 실었다.
콰르릉!
검은 오러가 더 짙은 검은색으로 변하더니, 여태 단단히 압축되었던 것을 그대로 폭발시켰다.
간만에 사용하는 〈불의 파도〉였다.
비록 미궁의 디버프 때문에 평상시에 비하면 위력이 현저히 약했지만.
그래도 세 용아병을 집어삼키고, 나아가 그 뒤에 잠복해 있을 여러 용아병과 트랩들을 한꺼번에 망가뜨리기에 충분했다.
화르륵-
여러 폭발 소리마저 화마에 집어삼켜졌다가 끝내 가라앉았을 때.
주변에 남은 건, 종유석마저 녹아 버릴 정도로 모든 게 새카맣게 탄 동굴과.
잿더미가 되다시피한 용아병의 흔적들이 전부였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 처음 연우와 맞닥뜨렸던 3등급의 용아병이 남긴 머리통뿐.
「위험 등급…… 4.」
쩌거걱, 파스스-
녀석의 안광은 여전히 연우에게 고정되어 있다가, 이내 모든 기능이 다해 쪼개져 사라졌다.
“이제야 조금 맘에 드는군.”
연우는 피식 웃으면서 용아병의 머리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 잔해를 뒤졌다.
그러자 나타나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구슬.
[고룡 칼라투스의 이 조각]
종류: 잡화
내용: 고룡 칼라투스가 가디언을 만들기 위해 직접 매개체로 사용한 자신의 이 조각.
효과: ‘용의 저주’를 조금씩 물리친다. 소지하고 있는 이 조각이 많아질수록 효과가 상승한다.
[아티팩트의 효과로 ‘용의 저주’가 조금씩 해제됩니다.]
[몸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스킬에 적용된 페널티가 일부 완화됩니다.]
[히든 퀘스트(저주항마력 I)이 생성되었습니다.]
[히든 퀘스트 / 저주항마력 I]
내용: 당신은 지금 마지막 용왕, 칼라투스의 무덤에 무단으로 침입하였습니다.
마지막 용왕의 안식을 방해한 대가로 당신은 현재 ‘저주’를 받아 육체가 제 기능을 되찾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침입자에 대한 정보는 무덤을 지키고 있던 모든 가디언들에게 전달된 상태이며, 그들은 이곳을 샅샅이 뒤져 당신을 찾아 제거하고자 합니다.
정해진 시간 내에 그들을 제거하거나 피해 곳곳에 흩어진 마지막 용왕의 이 조각들을 찾으세요. 그래야만 모든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할 시, 저주가 당신을 잠식할 것입니다.
참여 조건: ‘용의 미궁’ 침입자
제한 시간: 48시간
성공 시:
1. ‘용의 축복’
2. 연계 퀘스트(저주항마력 II) 제시
실패 시:
1. 능력치 영구 상실
2. 저주의 영혼 잠식
‘다른 놈들은 이런 게 있을 줄 전혀 짐작도 못 하고 있겠지.’
24시간이라는 타이머는 이미 미궁에 입장한 순간부터,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적용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히든 퀘스트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자신도 모르게 저주에 잡아먹히고 말겠지.
용의 저주는 아홉 왕이라고 해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니.
어떻게 살아남는다고 해도, 그리고 미궁을 빠져나가더라도 저주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용종의 마법은 그만큼 지독했다.
연우가 이곳을 두고 ‘덫’이라고 했던 가장 큰 이유였다.
츠츠츠-
연우는 그림자를 이용해서 곳곳에 널브러진 이 조각들을 전부 회수했다.
연우는 이 점을 십분 활용해 혹시 있을지 모를 충돌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자 했다.
그러다 마지막 이 조각을 수거할 때 즈음.
“으아악!”
저 멀리,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보아하니 침입자 중 누군가가 용아병을 만난 모양이었다.
연우는 기척을 최대한 죽이고, 초감각의 영역을 한껏 넓히면서 그쪽으로 빠르게 접근했다.
그런데 왠지 기척들이 낯이 익었다.
‘아이반…….’
정말이지 타르타로스를 나온 이후로 지긋지긋하게 마주치는 놈들이었다.
하지만 저들이 혼란에 잠긴 지금이 기회인 것도 사실.
연우는 비그리드를 다시 고쳐 쥐었다.
놈들을 빠르게 제거하기 위해서.
* * *
"대주교……!”
“……하아. 하아. 이런. 내가 못난 모습을 보이는군.”
대주교는 자신을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주교를 보면서 쓰게 웃었다.
이 아이가 네 번째였던가, 다섯 번째였던가? 아니면 여섯 번째? 머릿속이 어지러워서 그런가, 몇 번째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아니, 사실 한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주교 위가 너무 자주 갈아 치워졌기 때문에, 바로 아래에 있는 교구장이나 상급 사제 등의 계급이 뒤죽박죽 섞인 탓에 헷갈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러니저러니 하더라도. 편의상 직책과 계급을 나눴다지만, 이들 모두가 자신의 손으로 직접 키운 소중한 형제들이며.
천마께서 사랑으로 낳으신 자식들이 아닌가.
애당초 그는 천마의 신도들에게 차별을 둔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정작 그런 당신께서는 이렇게 신실한 당신의 자식들을 전혀 돌보지 않고 계시지만 말입니다.’
대주교는 자신을 걱정하면서도 안색이 더 파랗게 질린 주교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우선 이것을 먹으면서 기력을 되찾거라. 나를 보호한다는 녀석이 그렇게 비실대서야 쓰겠느냐.”
“하지만 대주교, 이 선단(仙丹)은……!”
“어서 먹으래도.”
대주교는 걱정 말라는 듯이 손에 쥐고 있던 것을 주교에게 강제로 먹였다.
주교는 울상 가득한 얼굴로 선단을 꼭꼭 씹었다. 선단은 비상시에 기력을 되찾게 해 주는 영약으로, 전대 대주교, 검은 새벽이 죽으면서 제조법도 유실되어 이제 교단에도 몇 개 남지 않은 상태. 그런 귀한 것을 자신에게 주었으니 어찌 감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는 어떻게든 이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는 곳에서 대주교를 지켜 내겠노라고 다짐했다.
대주교는 그런 비장한 기색이 역력한 주교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한편으로, 다른 생각에 잠겼다.
‘그나저나 이제 어쩐다…….’
미약하게나마 이어져 있던 천마와의 채널링이 모두 끊어진 상태.
그나마 동주칠마왕의 사당에서 얻은 ‘힘’이 있어 버티고는 있다지만, 이게 얼마나 지속될지는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여기 있는 전부가 그 아이의 술수에 휘말렸다는 뜻이겠지. 동맹인 혈국까지. 허허! 정말이지 볼수록 대단한 아이가 아닌가.’
대주교는 자신을 이런 꼴로 만든 연우를 떠올리면서 너털웃음을 흘렸다.
‘어떻게든 치워야만 하는 아이로다. 그래야 여기서 한 발을 더 나아갈 수 있겠지.’
대주교는 이미 고행오산에서의 실패 이후로, 천마를 버리겠노라고 다짐했던 바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존에 갖고 있던 계획까지 전부 버린 건, 절대 아니었다.
이제는 오기로라도, 천마의 얼굴이 되겠다는 일념이 남아 있었다.
‘우마왕께서 하셨던 말씀이 옳다면. 효마의 ‘머리’는 분명히 그곳에 있을 터…….’
대주교는 동주칠마왕의 사당에서 만났던 거대한 존재를 떠올리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식자, 그 아이에게서 열쇠를 되찾아와야만 한다.’
물론, 쉽지는 않을 것이다.
철문이 열리고, 빛무리가 터지면서 갑작스레 이동된 장소.
이곳은 채널링도 끊어지고, 권능이며 능력들이 전부 닫히거나 약화되는 곳이었다.
신앙을 근간으로 삼는 마군으로서는 최악의 장소인 셈이니.
이런 곳에서 적이라도 맞닥뜨렸다간 어떻게 될는지.
아무리 그들끼리 서로 방해를 하지 말자는 조약을 맺었다고 하더라도, 전력이 이렇게 약화되었다는 것을 안다면 그깟 조약쯤은 아무렇지 않게 내팽개치겠지.
만약 그런 자신이라도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똑같은 선택을 할 테니.
그러니 어떻게든 수를 찾아야만 했다.
그러던 그때.
“……대주교.”
“그래. 나도 느껴지는구나.”
“이곳은 제가 맡을 터이니, 대주교께서는……!”
“아니. 이미 늦은 듯싶다. 우리에게로 오는 듯하니.”
대주교와 주교의 시선이 기다란 통로 쪽으로 향했다.
곧 모퉁이 부근의 어둠이 갈라지면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여대 격전을 벌이고 왔는지, 제법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대주교를 보고 마음에 들지 않는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이런 곳에서, 이리 빨리 마주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군. 봄의 여왕.”
왈츠가 고요한 눈빛으로 대주교를 보았다.
* * *
칸은 탑으로 향하다 말고, 시장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소리를 우연찮게 듣고 말았다. 오늘 하루만 해도 벌써 몇 번째 듣는 화젯거리인지.
“이봐, 이봐! 그 소식 들었나?”
“무슨 소리……?”
“이 못난 사람이! 그 왜 50층이 지금 난리가 나지 않았나!”
마지막 용왕, 칼라투스의 무덤이 나타났다!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모를 소문은 갑작스레 시작되어, 금세 탑의 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이제는 탑 외 지역에까지 다다르고 말았으니.
여름여왕 이후로 완전히 사멸되었다고 알려진 옛 용종의 유적지는 당연히 많은 플레이어들의 이목을 잡을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여러 거대 클랜을 비롯해, 50층에 입장이 가능한 랭커들이 눈에 불을 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50층에는 여러 번 공략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의 쓴 맛을 봐야만 했던 세미 랭커들도 있었으니.
그들은 혹시 랭커가 될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아닐까 싶어 부리나케 뛰어들었다.
그러다 보니. 칼라투스의 무덤으로 향하는 포탈은 금세 여러 진영의 각축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서로가 마지막 용왕의 유산을 독차지하겠노라며 뛰어들면서.
칼라투스의 안식처는 탄생된 이래 처음으로, 여러 플레이어들에 의해 더 이상 안식처가 아니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탑 외 지역에 머물던 낙오자들 역시도, 한창 들뜨는 중이었다.
최후의 승자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우연찮게 용종의 유산 중 하나만 가지게 되더라도 대박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곳곳에서는 벌써부터 자기들끼리 십시일반 돈을 모아 조합을 만들거나, 원정대를 꾸리는 등 다양한 움직임을 보이는 중이었다.
‘용의 미궁이라.’
칸은 그런 변화를 느끼면서.
‘거기에 카인이 있단 말이지?’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역시 도일의 채널링 문제로 연우를 찾으러 가던 길.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계획이 진행되는 모양이었다.
‘이제 슬슬 시작하려는 거구나.’
탑을 바라보는 칸의 시야에는. 짙은 전운이 먹구름처럼 잔뜩 드리우는 것 같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