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422화 (422/862)

22화. 용의 신전 (9)

“제기랄……! 이 미친 것들은 죽여도 죽여도 끝이 나질 않는구나.”

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그린 드래곤과 손을 잡고 다 같이 포탈을 넘을 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큰 꿈에 부풀어 있었다.

마지막 용왕의 유산을 모두 독차지하리라. 그래서 어머니 여름여왕도 해내지 못했던 일을 해내리라. 그렇게 다짐했다.

하지만 그런 탐의 원대한 꿈은 미궁에 입장하는 순간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같이 데려왔던 수하들은 알지도 못하는 곳으로 뿔뿔이 흩어져 버렸으며.

그들을 찾으려 움직일 때마다 석실에서 마주치는 가디언과 용아병의 공세는 너무 거칠었다.

문제는 그들을 해치운다 치더라도.

츠츠츠-

떨그럭, 떨그럭!

[‘용의 저주’가 강화됩니다.]

[두 번째 시련: 길을 개척하십시오.]

어느새 검은 안개 같은 것이 맴돌더니, 이미 기존에 쓰러져 있던 사체들이 일어서기 시작한다는 점이었다.

그것들은 이미 쓰러뜨렸던 용아병과 똑같은 모습을 한 채, 탐에게 칼을 겨누었다.

이처럼 용의 저주는 죽은 망자들을 억지로 움직여 침입자들을 가로막는 악독한 성질까지 보였으니.

“제기라아알!”

탐은 결국 참지 못하고 폭발하면서 앞으로 튀어 나갔다. 어느새 본체인 조각류(鳥脚類) 형태로 변한 그는 닥치는 대로 모든 것을 쓸어 내기 시작했다.

『죽여 버리겠다!』

우선은 어머니께서 남기신 수정구를 따라, 다른 형제들을 찾는 게 가장 중요했다.

쾅! 콰콰쾅–

.

.

.

그렇게 미궁 속을 수없이 배회하면서 돌아다니기를 한참.

탐은 드디어 몇몇의 수하들과 함께, 구석진 석실에서 다른 형제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꼴이 말이 아니군.』

탐은 엉망이 되다시피 한 형제들을 보면서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 역시 온통 단단한 외피가 부서지고 상처로 도배되는 등, 피를 철철 흘리는 중상을 입은 상태였지만.

할, 이수, 바하라탄은 상태가 더 끔찍했다.

할은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 벽에 등을 기댄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와이번의 본체로 변한 이수는 왼쪽 날개가 잘린 상태였다.

그나마 바하라탄은 상태가 괜찮은지, 한쪽 눈만 붕대로 칭칭 감은 채 다른 두 형제들에게 치유 마법을 걸어 주는 중이었다.

거기다 그들의 수하로 보이는 자들은 대부분 ‘찢겨 죽은’ 채로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으니. 숨이 붙어 있더라도 곧 죽을 것 같은 녀석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딜 보아도 정상적인 자들이 한 명도 없었다.

탐은 그들을 보면서 살짝 군침이 돌았다. 중태를 입은 이상, 빠른 회복을 할 수 있는 방법은 같은 용의 인자를 보유한 용혈을 흡수하는 것.

이미 형제였던 트라이거 등을 먹었던 전적이 있던 그였기에. 그게 얼마나 달콤한 과실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용혈을 삼킨다는 건, 단순히 회복뿐만 아니라 ‘격’이 상승하고, 보다 용종에 가까워진다는 뜻이기도 했으니.

“허튼짓할 생각 마라, 탐.”

하지만 바하라탄은 너의 생각 따윈 이미 짐작하고 있다는 듯, 강하게 으르렁거렸다. 햘과 이수도 잔뜩 경계 어린 표정으로 그를 주시했다.

한두 명이라면 모를까. 아무리 부상을 입었다고 해도, 셋이나 되는 형제들을 동시에 상대하기란 요원한 일.

결국 탐도 한 발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형들에게 위해를 끼칠 생각 따윈 없다고.』

“잘도 헛소리를 지껄이는군. 지금 당장은 칼라투스의 유산 때문에 손을 잡았다지만, 우리는 너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라.”

『알았다고, 알았어. 막내를 이렇게 몰아가다니. 참 애석해.』

‘다음에 기회가 있겠지.’

탐은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한데, 왜 전부 이딴 꼴이 되고 만 거지?』

비록 왈츠나 탐에 비하면 한 수가 처진다고 하더라도.

그린 드래곤의 세 수장도 따지고 보면, 아홉 왕 다음 자리를 위협할 만큼 뛰어난 실력자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셋이나 뭉쳤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중태를 입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석실에 남아 있는 전투의 흔적으로 봐서는 분명.

‘한 명…….’

홀로 이들을 모두 물리쳤다는 건데. 대체 누구지? 아홉 왕 중에 한 명과 부딪치기라도 한 걸까?

"저놈 때문이다.”

『저놈?』

“숨죽여. 이쪽으로 오는군.”

탐은 바하라탄이 말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모퉁이 너머로 무언가가 이쪽으로 접근하는 것이 느껴졌다.

저벅, 저벅-

“용 고기, 용 고기를 내놓아라……!”

군침을 질질 흘리며, 반쯤 이성을 상실한 눈으로 어슬렁거리는 식탐황제가 보였다.

* * *

“기어 다니는 혼돈?”

연우는 작게 중얼거리면서 일기장 속에 있던 수많은 내용 중 저 밑에 있던 정보를 하나 떠올릴 수 있었다.

흔히 초월적인 존재라 일컫는, 신이나 악마, 용종, 거인과 같은 종들은 기원을 알 수 없는 아주 오래전부터 탑을 무대로 살았다.

하지만 모든 초월적인 존재들이 탑의 천계에만 머무는 건 아니었다.

일반적인 플레이어들이 절대 관측할 수 없을 외부 차원, 흔히 타계(他界)라 부르는 어지러운 차원에도 그런 존재들은 실존했었고.

그들 중 일부는 탑에 호기심을 갖고 이따금 접근해 오곤 했다.

하지만 일반적인 지성이나 이성과는 동떨어진 의식 체계를 가진 그들의 생각은 도저히 읽을 수 없는 것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들을 관측하고 움직임을 예측해 왔던 용종은 그들을 정의할 이름이 따로 없어 이렇게 부르곤 했다.

타계의 신이라고.

용종이 관측한 타계의 신은 그리 숫자가 많지 않았다.

이렇다 할 형태를 갖추고 있지 않아, 계측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여러 차원과 시공간에 중첩되어 있는 경우도 많아 관측이 너무 까다롭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것을 관측해 내었다 싶더라도, 기존에 관측했던 것과 같은 존재인 경우가 비일비재했으니.

용종의 시각으로 봤을 때 살아 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움직임이 굼뜬 것도 많았다.

그래도 대개 활동적이거나, 탑의 세계로 관심을 기울이는 몇몇 존재들은 관측이 가능했고, 그 특성에 따라 다양한 이름을 붙였다.

기어 다니는 혼돈은 그중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이던 존재였다.

외부에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다른 존재들과 다르게.

유일하게 탑을 인식하고, 호기심을 가지며 접근하는 존재.

다만, 탑에 접근하는 방식이 마치 실뭉치에 관심을 둔 고양이처럼 너무 단순하고 패턴을 읽을 수가 없어서, 어떤 사고 체계를 갖추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방대한 지식 체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뿐.

그래서 동생도 평상시 활동할 때 이따금 타계의 신에 대해 들었어도, 별반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라퓨타를 위협하고 있다고?

하지만 칼라투스씩이나 되는 존재가 서두르라고 재촉할 만한 원인이 될 수 있는 건. 저 정도의 존재가 아니면 없기도 했다.

“저런 게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과거에 맺은 언약 때문입니다.』

“언약?”

『…….』

연우가 되물었지만, 우발라는 거기에 대해서는 절대 알려 줄 수 없다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연우는 가볍게 혀를 찼다. 사실 짐작 가는 바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 대체 올포원은 뭘 하고 있는 거지?”

신과 악마들이 하계에 접근하는 것도 철저하게 막는 녀석이 저런 것이라고 내버려 둘까.

하지만 곧 돌아온 대답은 연우로 하여금 욕지거리를 뱉게 만들었다.

『이곳은 용의 권역, ‘비나’이니까요.』

“빌어먹을 일이로군.”

하데스의 권역, 타르타로스가 히든 스테이지에 놓여 올포원의 간섭을 차단할 수 있었듯.

이곳 미궁과 라퓨타도 하데스에 못지않은 존재였던 칼라투스의 권역이었으니, 올포원이 접근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었다.

만약 기어 다니는 혼돈이 라퓨타를 잠식하고, 스테이지로 나오면 모를까.

그런 게 아니라면 올포원은 나서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그가 바라는 건 어디까지나 하계와 77개 층계의 안전뿐이니.

기어 다니는 혼돈도 그 사실을 깨닫고 저런 움직임을 보이는 게 아닐까.

『어쩌시겠습니까, 올라가시겠습니까?』

“말이라고.”

『자칫 휘말릴 수도 있습니다. 필멸자에게 있어 타계의 신이란…….』

“위험하지. 관측을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이성이 날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니까.”

하지만 연우는 이미 신살의 업적을 이루고, 신성까지 일부 획득했던 바가 있었기 때문에. 기어 다니는 혼돈의 영향력에 크게 좌우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정확하게 파악해야만 했다.

‘정우가 남긴 유산들이 저기에 있기도 하고.’

아르티야의 클랜 하우스부터 되찾아야 할 테니까.

연우는 불의 날개를 활짝 펼치면서 라퓨타로 이동했다. 우발라가 조금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연우의 뒷모습을 보다가, 날갯짓을 하며 뒤따랐다.

라퓨타는 생각보다 제법 높은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위로 올라갈수록 라퓨타의 주변으로 아른거리는 검은 촉수도 더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덩치로 보나 존재감으로 보나 녀석에게 연우는 벌레 정도에 불과해 보일 터. 때문에 놈은 연우를 딱히 인식한 것 같지 않아 보였지만.

연우가 보기에는 타르타로스를 위협하던 대지모신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았다.

‘그런 게 일개 ‘단면’에 불과하다는 거지?’

단면이 대지모신과 비견될 정도라니. 물론, 타르타로스에서 봤던 대지모신도 일부에 불과하긴 했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타계의 신이 얼마나 거대한 우주적 존재인지를 알 수 있었다.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어지러워질 것 같은 느낌.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그대로 잡아먹히겠는데.’

블랙홀이 행성과 먼지를 가리지 않고 빨아들이듯. 기어 다니는 혼돈도 자칫 잘못하면 자신을 통째로 휩쓸어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미 소울 컬렉션에 있는 망령들은 하나같이 절규를 내지르고 있었다. 어떻게든 빠져나가게 해 달라면서. 칠흑의 권능으로 억누르고 있지만, 쉽지가 않았다.

「주인. 님.」

계속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위험하겠다는 생각에 돌아서려는데, 갑자기 부가 연우에게 말을 걸었다.

여태껏 자신이 부르는 것 외에는 불경스럽다며 직접 말을 거는 경우가 없던 부였기에. 연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지?’

「잠깐. 저것. 을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그때. 문득 연우는 부가 잃어버린 옛 기억 중 일부가 떠올랐다.

파우스트였던 시절. 그는 모종의 이유로 타계의 신과 접촉해 지식을 전수받고, 에메랄드 타블렛을 완성시켰다.

그러고 보니 기어 다니는 혼돈은 타계의 신 중에서 탑에 가장 관심이 많은 존재. 어쩌면 파우스트가 가장 접촉하기 쉬웠던 존재인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분명. 처음. 보는 것인데. 익 숙. 합니다.」

어느새 활짝 열린 공간 너머로, 부의 시퍼런 두 눈이 기어 다니는 혼돈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알아. 보고. 싶습니. 다.」

“위험할 텐데.”

「조심. 하겠습니. 다.」

“레베카.”

휘이이-

“부와 같이 다녀와.”

「감사. 합니다.」

부는 고개를 숙이고 레베카와 함께 검은 촉수가 있는 열권으로 올라갔다. 만약 부가 기어 다니는 혼돈의 영향력에 휩쓸리더라도, 케르눈노스의 신령인 레베카가 옆에 있으면 괜찮으리란 생각에서였다.

연우는 아주 잠깐 멀어지는 둘을 보다가, 천천히 라퓨타에 착지했다.

탁!

라퓨타는 일기장에서 봤던 것처럼 화려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하늘을 찌를 것처럼 높게 선 수십 개의 지붕과 주변을 둘러싼 견고한 성채, 내성과 외성 사이로 흐르는 깊은 해자와 마당을 채우는 정원, 아름다운 가로수.

칼라투스가 눈을 감고, 관리자였던 동생이 사라진 뒤에도. 라퓨타의 시스템은 여전히 환경을 그대로 보존하는 중이었다.

기어 다니는 혼돈의 접근을 차단하던 방어막은 연우의 존재를 인식하고 아주 잠깐 해제되어 그의 착지를 허락했다.

연우는 깔끔하게 정리된 도로를 지나, 성채의 중심지로 향했다.

이동할 때마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활짝 열리고, 방비 시스템이 해제되었다.

그리고 거대한 중앙 홀에 도착했을 때.

『드디어 이곳까지 왔구나.』

수백 미터나 되는 거체가 그곳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에도라를 통해서 보았던 것만큼이나 큰 크기. 하지만 그림자가 사라진 지금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위태롭게 보였다.

치지직, 치직-

사념체만 남았는데도 불구하고. 칼라투스는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쇠약한 모습이었다.

노이즈가 잔뜩 끼고, 위풍당당해야 할 거죽은 뼈와 상접해서 앙상하게 메마른 몸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기다렸다. 그대가 오기만을.』

초점이 잘 잡히지 않는지, 칼라투스의 눈동자가 가늘게 좁혀졌다.

『칠흑의 또 다른 후예여』.

그런 그를 보면서.

연우는 질문을 던졌다.

“각설하고, 묻겠습니다. 정우의 마지막을 수습한 건 당신입니까?”

『아니. 내가 아니다.』

순간, 연우는 정신이 번쩍 깨는 기분이었다.

지이잉-

무의식중에 듣고 있었던지 회중시계도 잘게 떨렸다.

그만큼 칼라투스가 던진 말은 충격적이었다.

적들로 인해 쓰러졌던 동생을 수습하고, 지구로 보냈던 이가 칼라투스가 아니었다고?

그럼 대체 누가 해 줬단 거지?

『자신을 벗이라고 밝혔던, 반거인의 아이였다.』

그리고 언급되는 이름에. 연우의 두 눈이 경악으로 커지고 말았다.

『그래, 발데비히. 그런 이름을 썼던 것 같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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