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용의 신전 (10)
발데비히.
동생이 튜토리얼에 발을 들였을 때 만났던 첫 동료. 비에라 듄과 함께 가장 먼저 아르티야를 창설했던 멤버이기도 했다.
반거인으로서, 언제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질문을 던졌던 마음 아픈 존재였고.
또,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적들을 쓰러뜨리는 광전사로서 수많은 이들로부터 공포를 사던 존재이기도 했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이유도 없이 홀연히 사라져 정우의 마음에 비수를 꽂기도 했던 존재가.
동생의 마지막을 수습해 주었다고?
대체 어떻게?
지이이잉!
회중시계가 아주 크게 떨렸다.
그만큼 칼라투스가 아무렇지 않게 던진 말은 충격적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연우도 시끄럽게 요동치는 마음을 억누르면서 물었다. 하지만 악다문 입술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목소리는 분노로 들끓었다.
동생이 필요로 할 때는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다가, 마지막에야 나타나서는 했던 짓이 그것이라고?
동정인가?
아니면 속죄?
그게 무엇이든, 연우에겐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기만에 불과했다.
『가장 먼저 묻는 것이 정우와 관련된 것이라니. 역시.』
“제게 그것보다 중요한 건 없습니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지금에 와서 느끼는 것이지만. 그대들의 우애는 정말이지 당해 낼 길이 없어. 정우, 그 아이도 마지막까지 그대를 생각하곤 했었지.』
연우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알겠으니, 자꾸 말을 빙빙 돌리지 마십시오. 정우의 영혼은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5차 용체 각성]
드드득-
연우는 드래곤 하트와 현자의 돌을 같이 구동시키면서 마신룡체로서의 힘을 한꺼번에 개방시켰다.
피부를 따라 비늘이 잔뜩 올라오고, 용의 날개와 꼬리가 돋아 나오면서 흉측한 기파가 회오리 치기 시작했다.
연우는 어느새 아공간에서 비그리드를 뽑아 들고 있었다.
더 이상 칼라투스가 대답을 회피하면 그때는 정말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무언의 시위였다.
『내가 그대들에게 건네주었던 것을 이렇게나 발전시키다니. 옛날이라면 끔찍한 혼종이라며 눈살을 찌푸렸을 테지만…… 이것도 이것 나름대로 괜찮군그래.』
칼라투스는 그런 연우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만족스러워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씁쓸해하는 모습. 순수한 용종의 힘이 아닌, 다양한 기운이 뒤섞여 있으니 이제 탑 내에 순혈(純血)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연우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비그리드가 흔들리려던 그때.
『발데비히라는 아이가 어떻게 이곳 미궁을 찾았는지는 나도 모른다.』
“……!”
연우의 손길이 뚝 하고 멈췄다.
칼라투스가 말해 준 적이 없다?
그런데도 찾아왔다는 뜻은 하나.
『정우가 오래전에 말해 준 것이겠지.』
“…….”
『당시의 나는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상태였다. 이 몸뚱이는 어디까지나 만약을 대비해서 만들어진 임시 조처였을 뿐이었으니.』
고룡 칼라투스가 생전에 바라던 소망은 한 가지.
자신의 실책으로 빚어진 종족의 사멸을 뒤집어, 용종의 인자를 다시 길이 남게 하는 것.
하지만 그런 소망은 동생이 죽으면서 요원해지고 말았고.
새로운 방책을 찾기 위해 라퓨타에 남겨 두었던 사념체가 깨어나게 된 것이다.
새로운 후예를 물색하기 위해서.
『그러던 차에 반거인, 그 아이가 찾아와서는 묻더군. 정우를 대신 수습해도 되겠느냐고. 몸이라도 고향으로 되돌려 보내 주고 싶다고 말이다.』
“…….“
『해서 지구로 통하는 게이트를 열어 주었고…… 그렇게 장사를 치르고 난 뒤에는 다시 사라져 버렸다.』
빠득-
연우는 이를 악물면서 물었다.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습니까?”
『모른다. 내가 머물 수 있고, 감지할 수 있는 곳은 이곳 라퓨타가 전부이니.』
연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발데비히. 녀석은 대체 그동안 뭘 했던 것이고, 왜 마지막에야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났던 걸까.
…….
방금 전까지 미친 듯이 떨리던 회중시계도 다시 잠잠해졌다.
‘걱정 마라. 그놈은 내가 어떻게든 찾아 줄 테니.’
연우는 회중시계를 가만히 쓰다듬으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언젠가 마주해야 할 녀석이긴 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이번 일이 끝나면 곧바로 찾아 나서야 할 것만 같았다.
문제는 녀석의 종적이 묘연하다는 것. 탑 외 지역에 있는 나이트 워치를 시켜 봐도 번번이 돌아오는 대답은 ‘찾을 수 없음’이었으니.
그래도 라퓨타를 방문한 흔적은 있으니, 이를 토대로 행적을 되짚어 나가 보면 뭔가 알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연우는 칼라투스를 올려다봤다.
발데비히도 발데비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그럼 정우의 영혼은 어디에 있습니까?”
『원래 있을 곳에.』
원래 있을 곳?
연우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게 무슨……!”
『깊디깊은 심연의 늪. 어둠과 혼돈이 뒤섞이는 알. 수많은 존재가 깨어났다가 스러지는 곳. ‘그것’? 아니면 ‘그곳’? 하여간 이를 두고 지칭하는 말은 아주 많지만, 흔히 그렇게 부르곤 하지.』
칼라투스의 두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공허. 혹은 칠흑.』
“……!”
그 순간.
우우우웅-
연우의 손목과 발목, 목을 감싸고 있던 칠흑왕의 형틀이 일제히 길게 몸을 떨었다.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듯이. 통증이 느껴질 만큼 격한 진동이었다.
연우 역시 충격을 받긴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버럭 소리치고 말았다.
“정우가 왜 그런 곳에……!”
『연어가 다 자라고 나면 고향으로 돌아가듯. 그대의 동생 또한 귀소 본능에 따라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갔을 뿐이다.』
귀소 본능이라고?
『그대는, 그대에게 칠흑왕의 유산이 전해진 것이 과연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대의 동생에게 만통이라는 재능이 있어, 나의 간택을 받았던 것은?』
우웅, 우우웅-
진동은 더 거세져 갔다.
『그대와 그대의 동생은 양면을 이루는 거울이되, 떨어지지 못할……!』
칼라투스는 한창 말을 하다 말고 도중에 멈춰야만 했다.
우-
우우-
갑자기 이번에는 하늘에서부터 기다란 울음소리가 들렸다. 세상이 울리고 있었다. 라퓨타가 떨어질 듯이 요란하게 격동했다.
그리고.
콰직, 콰지직-
마치 달걀의 껍질이 깨어지듯이. 단단한 결계로 둘러쳐져 있던 성채의 지붕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서 그 사이로 검은 촉수가 안쪽으로 스멀스멀 들어오기 시작했다.
라퓨타를 집어삼키고자 하던, 기어 다니는 혼돈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칼라투스는 천장을 보다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다시 연우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유예를 달라고 하였으나, 그새를 참지 못하는군. 더 길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나, 이제 정말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구나.』
“어딜 가려 하십니까! 아직 이야기가 덜 끝났……!”
『떠나기 전에 한 가지만은 말해 주마. 정우의 영혼을 되찾고 싶다면. 아니, 모든 것을 삼키는 그곳에 영혼이란 게 남아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되찾으려 한다면.』
칼라투스는 슬픈 눈빛으로 연우를 바라보았다.
『칠흑으로 되돌아가라. 그곳에 길이 있을지니!』
쩌거거걱-
쾅!
성채의 지붕이 부서지면서 촉수가 어느새 칼라투스에게로 닿아 가고 있었다.
『하지만 칠흑은 아직 격을 갖추지 못한 그대를 잡아먹을 수 있으니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할 것이다. 가는 길조차도 험난하겠지만.』
치직, 치지직-
촉수가 칼라투스의 사념체를 비집고 들어가면서 노이즈가 잔뜩 꼈다.
연우는 이대로라면 정말 칼라투스가 사라지겠다는 생각에 비그리드를 사선으로 거칠게 뿌렸다.
아직 칼라투스에게 다 전해 듣지 못한 말이 너무 많았다.
공허나 칠흑에 정우의 영혼이 있다는 말은 무엇이고, 거기로 향하는 길을 찾으라는 건 또 무슨 의미인가? 그 끝에는 칠흑왕이나 마성이 관련이 있는가?
있다면 당신은 어디까지 알고 있으며, 대체 그 방법이 무엇인지는 말해 주어야 하지 않는가!
수수께끼만 잔뜩 던져두고서 가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비그리드-???’가 숨겨진 진명, ‘듀렌달’을 개방합니다.]
[전승: 일도양단]
휘이이, 콰아앙-
비그리드에서 발출된 어마어마한 풍압에 불의 파도와 제천류까지 섞이면서. 화염 폭풍이 라퓨타의 성체를 절반 이상 그대로 휩쓸어 내어 검은 촉수를 잘랐다.
화르륵-
불길이 넘실대며 촉수를 타고 위로 오르고자 했지만.
파스스.
불길이 묻은 검은 촉수는 사라지고, 대신에 그 자리에 더 많은 촉수들이 나타나 그대로 칼라투스를 칭칭 옭아매었다.
연우가 아무리 연거푸 비그리드를 휘둘러 봐도, 촉수는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크기만 더 커져 나갔다.
어둠에 가려지기 직전, 칼라투스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연우를 보며 외쳤다.
『부디, 정우와 내가 못다 이룬 소망을 이뤄다오……. 새로운 연자여. 클랜 하우스, 그곳을 찾아 볼……!』
파스스-
칼라투스의 사념체가 모래성처럼 잘게 부서지면서 촉수 속으로 그대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우-
우우우-
기어 다니는 혼돈은 그것으로 만족한 듯, 촉수를 거둬들이면서 자신이 왔던 하늘 위로 다시 올라갔다. 여태 열권을 새카맣게 물들이던 우주적 존재가 자신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어딜 가!”
[네르갈과의 채널링이 복구되었습니다.]
[할파스와의 채널링이 복구되었습니다.]
[비마질다라와의 채널링이 복구 되었습니다.]
……
[당신과 연결된 신들이 갑작스러운 상황을 확인하고자 합니다.]
[당신과 연결된 악마들이 당신이 맞서는 존재에 대해 경악합니다.]
[아가레스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 안 된다! 대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저건 건드려서는 안 돼!]
[아가레스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 내 말 들……!]
[사용자의 권한에 따라 메시지가 차단되었습니다.]
미궁을 뒤덮던 저주의 주체인 칼라투스가 사라지면서 채널링이 복구되기 시작했다.
연우는 그런 채널링을 하나로 묶어 날개를 활짝 펼쳤다.
[권능 전면 개방]
연우의 등에 매달려 있던 불의 날개와 용의 날개가 뒤섞이면서 검은색으로 빛나는 세 쌍의 날개, 하늘 날개로 변했다.
연우는 그대로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면서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모든 스킬과 권능을 난사했다. 칼라투스를 두고 가라는 무언의 시위였다.
퍼버버벙-
하지만 일렁이는 어둠에 자그마한 구멍만 숭숭 뚫릴 뿐. 기어 다니는 혼돈은 이미 존재의 대부분을 게이트 너머로 넘긴 채 사라지고 있었다.
“제기라아아알!”
연우는 드래곤 하트와 현자의 돌을 극한까지 쥐어짜며 비그리드를 위로 그었다. 불의 기둥이 높다랗게 치솟으면서 라퓨타의 거대한 성채를 모두 불사르는 것으로도 모자라, 하늘을 절반으로 갈라 버렸다.
거기서 퍼져 나온 불씨들이 다시 연쇄 폭발을 일으키면서 스테이지를 가득 물들였다.
그리고 그런 먹구름 사이로. 자그마한 눈동자가 살짝 나타나 연우를 응시했다.
순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너무나 많은 언어와 정보가 쏟아졌고.
용의 사고 체계는 그것을 이렇게 이해했다.
칠. 흑.
아. 직.
아. 니. 다.
우우우-
기어 다니는 혼돈은 그렇게 게이트 너머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제 미궁의 중심부에는 불길로 타오르는 라퓨타만 남아 있을 뿐. 하늘은 창연한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
연우는 이를 바득 갈았다.
또였다.
타르타로스에서도. 36층에서도.
대지모신과 올포원에게 농락당한 데에 이어, 또다시 초월적인 존재에게 당하고 만 것이다.
동생과 관련된 일은 깊이 파면 팔수록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었고, 그마저도 초월자들에 의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다 가로막혀 있었다.
이대로 녀석을 보내야만 하는 걸까?
아니다.
연우는 자신에게 아직 방법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현자의 돌 속에서 꿈틀대고 있는 것.
“마성.”
『…….』
“보고 있는 것 다 알아. 도와줘. 제발.”
『…….』
“……제기랄!”
하지만 연우의 바람과 다르게 마성은 꿈쩍도 않았다. 이 일은 자기와 전혀 무관하다는 듯이.
연우는 무력감에 주먹으로 바닥을 거세게 내리쳤다. 역시 남아 있는 건, 초월을 이루는 방법뿐인 걸까.
그때.
츠츠-
연우 옆으로 공간이 열리면서 부가 나타났다.
기어 다니는 혼돈을 조사하겠다고 나선 그도 신체 곳곳이 파훼 되고, 마력이 훼손되는 등 큰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하지만 부의 커다란 손에는 금색으로 빛나는 눈이 있었다.
「기어. 다니는 혼돈. 의. 체내에서. 뽑. 은. 칼라투스의 눈. 입니다. 이것. 이라면…….」
대체 언제 이런 일을 해냈던 걸까.
“너?”
「칠흑. 으로. 가는 길을. 여셔야. 합니다.」
부는 그 말만 남기고 조용히 던전 속으로 사라졌다. 큰 부상을 입어 자가 치료가 시급했기 때문이었다.
연우는 그가 남긴 칼라투스의 눈을 꽉 쥐면서 칠흑왕의 권능을 발현시켰다.
세 개의 형틀은 여전히 크게 진동하고 있었다.
[‘사자 소환’이 발동되었습니다.]
[누구를 소환하시겠습니까?]
“칼라투스.”
칼라투스의 황금색 눈이 확 하고 흩어지면서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사용 지정된 물건은 ‘감염’된 상태입니다.]
[소환하신 대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
[소환하신 대상의 정보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영향이 미쳐 그와 비슷한 존재를 물색합니다.]
[‘기어 다니는 혼돈’에 감염된 ‘혼돈의 마룡’ 칼라투스가 강제 소환됩니다.]
그 순간.
콰콰콰-
라퓨타를 비롯해, 미궁의 중심부를 이루던 심상 결계와 용의 미궁을 감싸던 저주 전체가, 폭주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