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용의 신전 (12)
“용 고기, 용 고기를 내놓아라……! 용 고기이이!”
“폐…… 하! 쿨럭!”
티르빙 공작은 저 멀리 사라지는 식탐황제를 보면서 피를 울컥 토해 냈다.
무너지는 미궁 속에서도 어떻게든 주군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식탐황제를 겨우 찾았을 때부터.
식탐황제는 이미 반쯤 눈이 뒤집혀 있는 상태였다.
티르빙 공작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따금 전투가 길어져 열량이 부족해지면 나타나는 현상. 허기와 갈증을 심하게 느끼고, 이것이 심해질수록 식탐황제의 광기도 그만큼 비례해서 커졌다. 이때의 식탐황제는 뚜언띠엔 공작이 나서도 절대 막지 못했다.
눈에 보이는 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삼키고자 하는 그 광기는 적아를 가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화이트 드래곤과의 전쟁에서도 백작 두어 명을 제물로 내놓아야 했다.
그러다 허기를 어느 정도 충족하고 나면 이성이 돌아왔으니. 그 때마다 식탐황제는 죄책감에 잠겨 땅을 치고 후회했다.
하지만.
오늘은 뭔가 평소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미 식탐황제가 먹어 치운 병사의 수가 몇이며, 적군의 머리가 몇 개던가.
그런데도 식탐황제는 이성을 되찾지 못하고, 한창 그린 드래곤의 세 수장들을 몰아붙이다가 칼라투스가 나타나자 곧장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용 고기라는 단어를 주문처럼 연신 되뇌면서.
티르빙 공작은 어떻게든 그런 식탐황제를 말려 보려 했지만, 오히려 왼쪽 팔만 뜯기고 말았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그래도 본능적으로 어떻게든 다시 일어나, 주군의 이성을 되찾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이미 독식자의 농간으로 미궁에서 병력의 8할 이상이 날아간 상태. 여기에 스테이지를 권역으로 삼는 칼라투스까지 나타난 이상, 전멸까지 각오해야 하는 상황이다. 어떻게든 병력을 추슬러 대책을 강구해야 했지만, 식탐황제의 상태가 저래서야 그러기도 힘들 것 같았다.
결국 남은 방법은 하나.
‘폐하를 지켜야만 한다.’
어차피 제한 시간 동안 스테이지를 빠져나가기란 요원하니, 식탐황제를 보호하다가 뒤로 빠지는 것이 최선이었다.
“폐하를…… 보호하라!”
“전군, 진군하라!”
“용을 사냥하여! 우리의 용맹함을 탑의 떨거지들에게 보여 주자!”
티르빙 공작의 외침에 따라 혈국의 병사들이 전열을 다지면서 다시 뛰어가는 동안.
크롸롸롸-
칼라투스가 목을 뒤로 크게 젖히더니 브레스를 거칠게 내뿜었다.
저주와 독기로 범벅이 된 브레스는 지면을 거칠게 휩쓸면서 감히 자신에게 덤비려는 대적자들을 한꺼번에 쓰러뜨렸다.
하지만.
바로 그 위로 덤비는 자들이 있었으니.
콰콰쾅-
칼라투스라는 거대한 보스 몬스터 앞에서 일시적으로 연합을 구축한 ‘왕’들이었다.
“마(魔)에 물든 용이라니. 자신을 잃어버린 것만큼 추한 것도 없소. 그대가 있던 대지로 돌아가시오, 위대한 용이여!"
드높은 상공에서. 마그누스가 착잡한 시선으로 칼라투스를 내려다보면서 합장하던 손을 활짝 풀었다. 초월종과 지고종의 후예를 자처하는 엘로힘의 수장으로서, 칼라투스가 지금 겪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웠던 것이다.
어떤 신화를 품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타계의 신 따위는 엘로힘이 가장 경멸하는 존재들이었고.
그런 이들에게 영혼이 사로잡힌 칼라투스를 어떻게든 해방시켜 주고 싶었다.
파라락-
그렇기에. 마그누스가 풀어내는 스킬은 다른 어느 때보다 강렬했다.
지금은 사멸한 거인족은 과거 타고난 전사로서, 그들의 전의가 타오를수록 세상을 집어삼키는 불길도 거칠어졌다고 하니.
〈거신함의(巨神含意)〉. 마그누스는 양손을 앞으로 쭉 내뻗었다. 옷자락이 깃발처럼 펄럭대면서 강렬한 파동이 벼락처럼 내리꽂혀 칼라투스의 왼쪽 날갯죽지를 길게 자르고 지나갔다.
크아아아!
칼라투스는 아래쪽으로 브레스를 쏟아 내다 말고, 끔찍한 고통에 거대한 몸뚱이를 옆으로 돌렸다. 그의 비행은 날개가 아닌 마법으로 이뤄지는 것이라 추락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위해를 끼친 벌레를 어떻게든 잡고자 했다.
그때가 바로 빈틈이었으니.
다른 ‘왕’들도 바로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고기! 맛있는 용의 고기다! 크하하!”
식탐황제가 어느새 광기를 줄줄 흘리면서 칼라투스의 바로 앞까지 나타난 것이다.
비록 칼라투스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하고 작은 크기였지만. 식탐황제가 발산하는 기세는 절대 그에 못지않았다. 배 속에 담아 둔 식탐의 돌이 기승을 부리면서 보라색 기운이 모공 밖으로 새어 나와 넘실대고 있었다.
“이것만 먹는다면! 이것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이 돌도 완전히 내 것이 될 것이다아!"
와그작!
식탐황제의 입술이 귀까지 쭉 찢어지더니 칼라투스의 오른쪽 다리를 깨물었다. 보라색 기운이 맺힌 송곳니는 단단한 비늘을 관통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마치 맹수가 사냥감을 물어뜯듯 우악스럽게 오른쪽 다리를 본체에서부터 강제로 분리시켰다.
“고기, 고기이! 하하하하하!”
크아앙!
콰르르르, 쿠쿠쿠-
왈츠는 백보신권(百步神拳)을 전사경으로 풀어냈다. 원거리에 있는 적에게 막대한 일격을 먹이는 격산타우(隔山打牛)의 묘리가 극에 달한 무공. 여기에 힘을 한 지점에 집중시키는 〈헤느리파의 송곳〉이라는 마법까지 접목되자, 칼라투스의 왼쪽 눈이 그대로 박살 났다.
마치 송곳으로 찌른 것처럼 뒤통수에도 커다란 바람구멍이 생겨나고.
그 위로 본체로 현신한 탐이 내려오면서 우악스러운 이빨로 칼라투스의 반쪽 머리를 뜯어 버리니.
크아아아-
단번에 얼굴의 절반이 날아간 칼라투스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마법이 마구잡이로 난사되었지만, 눈먼 포격에 휩쓸리는 멍청한 플레이어들만 있을 뿐. 아홉 왕들에게는 이렇다 할 타격을 전혀 주지 못했다.
그들은 용의 저주에 단단히 묶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자신들이 아홉 왕이라 불리는지 보여 주겠다는 듯.
그리고 어째서 탑의 정점에 군림하고 있는지를 확인시켜 주려는 듯, 과감하게 자신들의 시그니처 스킬을 풀어내면서 칼라투스의 날개와 손발을 잘라 나갔다.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것은.
아무리 칼라투스가 위대한 마지막 용왕이었다고 해도, 수천 년이 지난 만큼 플레이어들의 평균 능력치가 발달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칼라투스가 기어 다니는 혼돈에 이성을 빼앗기면서 제대로 된 사고 판단이 안 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여러 왕들의 합공에 당하는 칼라투스의 마지막을 장식하려는 듯.
“이런 짓은 되도록 안 하려 했지만.”
대주교는 체내에 잠재된 동주칠마왕의 힘을 격발, 마령으로 화려하게 태워 올리면서 72선술을 과감하게 뿌렸다.
“어쩔 수 없지. 조금 무리라도 할 수밖에.”
한 손가락에 하나씩, 서로 다른 광망이 맺혔다. 발현한 선술은 〈뇌(雷)〉, 〈폭(爆)〉, 〈파(破)〉, 〈열(裂)〉, 〈소(燒)〉. 총 5개였다.
선술 하나하나에 일반적인 스킬을 능가하는 힘이 담겼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전대 대주교, 검은 새벽도 최대 4개가 한계였지만.
콰르르릉!
대주교는 어떻게 자신이 검은 새벽과 옛 주교들을 모두 죽일 수 있었는지를 증명하려는 듯, 손을 거세게 아래로 내리쳤다.
하늘에서부터 수십 수백 줄기를 뒤섞은 듯한 거대한 벼락이 떨어졌다.
마치 하늘의 장수가 칼날로 내리그은 것처럼 거대한 벼락이 칼라투스를 직격하고, 폭발하면서 단번에 불길이 녀석을 집어삼켰다.
크아아! 크아아앙!
칼라투스는 불길을 어떻게든 꺼트리고자 갖가지 마법을 사용해 봤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불길은 더 거칠게 타오르며 칼라투스를 좀먹어 갔다.
“허허. 그리 잘 되진 않을 것이오. 그래 봬도 붕마왕의 환염(晥炎)에 미후왕(彌候王, 손오공과는 다른 존재)의 통풍(通風)을 섞은 것이니.”
대주교는 조금 지쳤던지, 자신을 돕던 주교에게 기대어 숨을 고르고 있었다. 동주칠마왕과의 채널링이 끊어진 상태에서 힘을 억지로 격발하다 보니 반작용이 돌아온 것이다.
그래도 고생한 만큼 효과가 있었던지, 칼라투스는 마법으로 해결이 되지 않자 이번에는 스테이지 곳곳에다 몸을 마구잡이로 부딪쳤다.
절벽이 충격과 함께 와르르 무너지고, 신전이 산사태에 완전히 뭉개졌다. 브레스도 곳곳으로 뿜어지며 대기를 뜨겁게 달궜다. 산이 쓰러졌다. 짙은 고랑이 지면 곳곳에 남았다.
가뜩이나 미궁의 붕괴와 함께 망가지다시피 한 스테이지였기에. 칼라투스의 광란은 더 큰 파괴만을 불러올 뿐이었다.
그러다.
쿵!
쿠르르-
칼라투스가 힘이 잔뜩 빠진 채 균형을 잃고 지면에 처박혀 굴렀다.
덩치가 덩치이다 보니 산자락 두어 개가 부서지고 난 뒤에야 겨우 멈췄고, 불길은 더욱 거세지면서 어느새 하늘까지 닿을 정도로 높게 치솟았다.
쿠륵, 쿠르륵!
그리고.
“용이, 쓰러졌어……?"
“지금이라면……!”
“가자!”
플레이어들은 마지막 경련을 일으키는 칼라투스를 보면서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보상은 공헌도에 따른 차등 지급. 칼라투스의 힘이 빠지고 있는 지금이 아니면 언제 공헌도를 쌓을 수 있을까.
“와아아아!”
“놈을 죽여라! 잡아!”
플레이어들이 일제히 칼라투스의 명줄을 끊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저마다 자랑하는 시그니처 스킬을 발동시키니, 화려한 이펙트로 스테이지가 요란하게 반짝일 정도였다.
『크하하! 저놈은, 내 것이다!』
『무슨 소리! 나다!』
『비켜라! 용왕의 심장은 내가 취할 것이다!』
인파의 가장 선두에 있는 건, 그린 드래곤의 세 수장들이었다.
햘, 이수, 바하라탄. 이미 미궁 내에서 식탐황제와의 충돌로 몸이 거의 망가지다시피 한 그들이었지만.
오염되었다고 해도, 마지막 용왕의 혈청이라면 회복은 물론,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용종 각성까지 완성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때, 와이번의 형태를 띤 이수가 하나 남은 날개를 연거푸 퍼덕이면서 앞으로 치고 나갔다.
『캬하하! 이건 내가 먼저 먹겠……!』
하지만 이수의 말은 도중에 끊기고 말았다. 불길 속으로 뛰어들며 칼라투스의 남은 머리를 씹으려는 순간, 갑자기 밑에서 다른 손길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그대로 그를 양옆으로 찢어 버린 것이다.
촤아악!
“내 고기다! 내 고기에 손대지 마!”
여태 칼라투스에 달라붙어 고기를 뜯어 먹고 있던 식탐황제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온통 화상을 입어 흉측한 몰골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두 눈에 맺힌 보라색 안광이 사위를 압도하고 있었다.
『이수!』
『네놈이, 감히 내 형제를!』
할과 바하라탄은 너무나 처참하게 죽어 가는 형제를 보면서 울부짖었다.
아무리 틈만 나면 신경전을 벌이긴 했다지만. 그래도 그들은 어머니 여름여왕으로부터 같은 피를 물려받은 형제라는 자긍심으로 살았던 존재들이었다. 형제의 이런 허망한 죽음은 절대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아주 잠깐의 방심이 또 다른 죽음을 불러왔다. 분명히 다 죽어 간다고 생각했던 칼라투스가 별안간 머리를 위로 튕기더니, 단숨에 햘을 낚아챈 것이다.
『안……!』
그것이 햘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콰직!
콰드득, 콰득-
칼라투스는 마치 개껌을 씹어 삼키는 개처럼 입에 물고 있던 할을 질겅질겅 씹다가 그대로 집어삼켰다. 녀석이 쏟아 낸 핏물이 목울대를 타고 넘어갔다. 혈청을 어느 정도 회복한 덕분인지, 칼라투스의 눈가에 초점이 되돌아왔다.
크오오오-
칼라투스는 다 부서진 몸으로, 불길을 칭칭 감은 채 다시 한번 더 기력을 되찾아 길게 포효를 내질렀다.
[‘타락한 용왕, 칼라투스’의 마기를 모두 제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숨겨진 신력이 발현됩니다.]
[주의! 2차 페이즈가 시작됩니다.]
드래곤 피어가 파문처럼 퍼져 나가면서. 이쪽으로 달려오던 모든 플레이어들의 얼굴을 단숨에 새파랗게 질리게 만들었다.
이전보다 훨씬 무거운 프레셔가 스테이지를 짓눌렀다. 마치 중력이 몇 배로 가중된 듯, 가까이 있던 플레이어들 백여 명이 삽시간에 피떡이 되어 터져 나갔다.
고열로 잔뜩 달아오른 광풍도 몇 차례나 불면서 지면을 다시 한 번 더 뒤집고, 플레이어들을 한꺼번에 날리고 말았다.
『말도…… 안 되…… 는……!』
바하라탄도 날개와 다리, 꼬리 등이 터지면서 지면에 그대로 처박혔다.
두려움에 찬 눈빛이 거대한 그림자를 일으키면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칼라투스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절대 거스를 수 없는 포식자를 만난 듯한, 아니, 그보다 훨씬 상위에 있는 개체를 맞이해 잔뜩 겁을 먹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제야 바하라탄은 제 주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아룡인 그는, 애당초 용왕을 넘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려고 시도했던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이었다.
이윽고 칼라투스의 아가리가 바하라탄의 혈청도 흡수하기 위해서 내려왔다. 그림자가 잔뜩 지면서 바하라탄을 가렸다.
그때였다.
마치 또 다른 태양이 갑자기 생겨난 것처럼 하늘이 환해지고.
거대한 불기둥이 떨어진 것은.
화아아-
촤아아악!
칼라투스가 바하라탄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려다 말고, 황급히 고개를 위로 들며 날개로 홰를 쳐 몸뚱이를 물리고자 했다.
하지만 불의 기둥은 바하라탄을 단숨에 갈라 잿더미로 만드는 것으로도 모자라, 순식간에 방향을 바꾸면서 칼라투스의 ‘결’을 확 가르고 지나갔다.
크아아-
칼라투스의 결은 기어 다니는 혼돈과 이어지는 채널링. 그것이 모조리 끊어지자, 갑자기 주인을 잃은 신력이 폭주하면서 칼라투스의 발작을 일으켰고.
여기에 불의 기둥, 비그리드에 담긴 전승인 ‘화룡 살해’는 화룡을 베었던 영웅 란슬롯의 무용담에 따라, 칼라투스의 몸뚱이를 확 긋고 지나갔다.
사선으로.
푸화악!
갈라진 몸뚱이를 따라 호수를 이룰 수 있을 정도로 많은 핏물이 잔뜩 쏟아지다가, 고열과 함께 증발해 사라지고.
크우우우-
칼라투스는 ‘존재가 사라진다’는 고통에 더 크게 울부짖었다.
“……!”
“……!”
드래곤 피어와 프레셔에 묶여 그 광경을 멍청하게 지켜봐야만 했던 이들은. 전부 충격에 잠겨 어떻게 말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그들의 눈에는 한순간 태양이 섬광처럼 번뜩이면서 칼라투스를 가르고 지나간 것처럼 보였으니.
그리고. 그 태양이 다시 한 번 더 방향을 꺾으면서, 이번엔 자신들에게로 다가온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모든 것이 늦은 뒤였다.
피하라고 소리를 지르거나, 스킬을 발동할 새도 없었다.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어마어마한 고열에 전신이 타 사라졌고, 이어지는 불의 해일은 그나마 남아 있던 이들까지 깡그리 쓸어버렸으니.
콰르르릉, 콰르, 콰르르-
쿠쿠쿠쿠-
정말 모든 것이 쓸려나갔다.
스테이지에 남아 있는 것을 전부 지워 버리겠다는 듯.
사자 연맹의 용병과 마법사, 트리톤 등의 잔여 세력은 물론. 혈국, 엘로힘, 화이트 드래곤, 그린 드래곤, 블랙 드래곤, 마군, 미궁의 소식을 듣고 온 여러 랭커 및 클랜들까지. 적아를 가리지 않고 많은 것들이 사라졌다.
‘번쩍’하는 순간에.
문제는 그것이 한 번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불의 기둥은 몇 번씩이나 스테이지를 갈라놓았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뒤이어 나타난 화염 폭풍은 그 무엇도 남겨 두지 않겠다는 것처럼 나머지를 휩쓸어 갔다. 다시 위로 튀어 오른 불씨들은 뇌기로 서로 연결되면서 불벼락까지 연거푸 지면에다 때렸다.
쿠르르르, 쿠르르-
그것은 재앙이었다. 스테이지를 집어삼키는 재앙.
아무리 아홉 왕이라 해도, 거기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들 전부 칼라투스를 상대하느라 상당한 힘을 소진했던 상태. 거기다 용의 저주는 여전히 작동 중이라 피해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왈츠는 모든 원영신들이 파괴되면서 깊은 내상을 입었고, 탐은 오른팔이 잘려 나갔다. 대주교는 억지로 다시 동주칠마왕의 힘을 사용하다 마력이 역류하면서 고꾸라졌으며, 마그누스는 수하들을 지키려다가 되레 빈사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촤촤촤촤-
그렇게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지옥의 불길이 끝난 뒤에는.
“영역 선포.”
어디선가 나지막하게 울린 목소리와 함께,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용의 권역, ‘비나’가 선포되었습니다.]
화아아-
여전히 불씨가 가득한 세상이 갑자기 반전되면서 암전(暗轉)이 찾아왔다.
열기가 채 식지도 않은 대지 위로 그림자가 퍼져 나가고, 그 위로 영괴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키키킥, 키킥!
영괴들은 하나같이 기괴한 웃음을 흘려 대면서 곳곳으로 뻗쳐 나가 겨우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플레이어들을 급습했다. 도처에 맛난 영혼들이 가득했다. 간만에 배를 채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자 포식을 시작했다. 아주 탐욕스럽고, 게걸스럽게.
스테이지는 삽시간에 온통 플레이어들이 내지르는 비명과 절규로 가득 찼다.
“아아아악! 살려줘!”
“으아악! 으아아아악!”
“독식자! 독식자, 왜 이러는…… 크억!”
특히 상황을 미처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연우를 여전히 아군으로 생각하던 혈국의 플레이어들은, 연이은 배신 때문에 더더욱 고통스럽게 죽음의 늪으로 빠져 들어야만 했다.
“카이이이인!”
그리고 그런 지옥도 사이에서.
어느새 칼라투스로부터 헤쳐 나온 식탐황제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화상으로 온통 흉측하게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는 이제 허기와 갈증 대신에, 분노와 원한만이 가득했다.
"어째서냐, 어째서어어!"
이성이 어느 정도 돌아왔는지, 식탐황제는 왜 이딴 짓을 저질렀는지에 대해 격렬하게 울부짖었다. 그동안 연우를 호의로 대했던 그로서는 도무지 지금과 같은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 그들이 나눴던 계획은 적들을 향하는 것이었을 텐데. 어째서 자신들까지 배반한단 말인가!
"어째서냐고?”
연우는 하늘에서 그런 녀석을 내려다보면서 차갑게 웃었다.
“지금부터 가르쳐 주지.”
하늘 날개를 펼친 그대로 급강하했다. 불의 파도가 다시 한 번 더 터지며 식탐황제를 뒤덮었다.
콰르르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