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427화 (427/862)

2화. 가면을 벗다 (2)

탑 내에서 독식자의 가면 속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누군가는 그 속에 화상으로 흉측해진 얼굴이 있을 거라고 하고, 또 누군가는 탑에서도 보기 드문이 종족이기 때문에 정체를 숨기고 있는 것이라고도 했다.

워낙에 다양한 추측이 있었지만.

대부분이 탑의 어떤 인물들과 원한 관계가 있어서 얼굴을 가리는 게 아닌가 하고 대략적으로 막연하게 생각할 뿐이었다.

어차피 탑에 들어온 플레이어치고, 평범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 독식자처럼 후드를 깊게 쓰거나, 가면을 덮고 다니는 사람도 꽤나 있는 편이었다.

소속원의 신분을 강하게 필요로 하는 거대 클랜이 아니고서야. 정체를 숨긴 플레이어들의 정체를 강제로 알아내고자 하는 이들도 없었다. 개인주의적인 성향은 탑을 지배하는 전체적인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면을 벗은 독식자를 보았을 때 놀라지 않을 수는 없었다.

가면 뒤에 나타난 얼굴은 모두가 아는 모습이었고.

그 얼굴은 분명히 죽었어야 할 사람의 것이었으니까.

기나긴 침묵은.

“헤, 헤븐윙!”

어디선가 삐져나오듯이 새어 나온 비명 소리와 함께 깨지고.

“헤븐윙이 어떻게……?”

“주, 주, 죽었던 게 아, 아니었어?”

“도, 도, 도……!”

어수선한 혼란은 전염병처럼 인파 전체로 금세 퍼져 나가다가.

“도망쳐라!”

누군가가 지른 악다구니와 함께. 공황에 빠졌던 플레이어들의 머릿속은 오로지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찼다.

어떻게든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한다!

“독재관님을 보호하라!”

“독재관님을 피신시켜야 한다!”

“주군을 모셔라!”

“놈을 어떻게든 막아!”

소속이 없는 랭커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도망치기 시작했고.

거대 클랜의 플레이어들은 어떻게든 연우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앞으로 튀어나갔다. 인의 장막을 세워 그를 제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지금 연우가 헤븐윙의 부활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가 누구를 노릴지는 불에 보듯 뻔한 일이지 않은가!

쐐애액-

그리고 그런 그들의 생각에 호응하듯이. 연우가 다시 한 번 더 날개로 홰를 치면서 놈들에게로 쇄도했다.

쿠쿠쿵!

콰르르-

하늘에서부터 잇달아 갖은 마법과 스킬이 화려한 이펙트를 터뜨리면서 연우에게로 쏟아졌다.

“비켜.”

하지만 연우는 귀찮다는 듯이 비그리드를 옆으로 거칠게 휘둘렀다.

[‘비그리드-???’가 숨겨진 진명, ‘듀렌달’을 개방합니다.]

[전승: 일도양단]

연우는 다시 한 번 더 칼날에 검은 오러를 한껏 담아 크게 휘둘렀다.

검은 불길이 폭발하면서 단번에 마법과 스킬을 허공에서 삭제시켜 버리고.

파아앗-

연우는 불길을 헤집으며 인파 사이를 단번에 꿰뚫었다.

“크아악!”

“아악!”

연우가 그냥 지나간 자리의 근방에 있던 플레이어들은 일제히 심장을 부여잡거나,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발버둥을 치다가 게거품을 물면서 쓰러졌다.

바닥을 따라 넓게 펼쳐졌던 그림자에서부터 솟아올라 온 죽음의 권능이, 검은 손길을 따라 그들을 늪으로 잡아당겼던 것이다.

연우가 먼저 노린 곳은 가장 가까운 곳.

엘로힘과 마그누스가 있는 곳이었다.

“아아아악!”

“막……!”

마그누스를 보호하기 위해 있던 플레이어들이 검은 불길과 함께 한껏 옆으로 치워지고, 그 자리를 7인대가 채우면서 검을 교차시켰다.

현재 그들의 독재관, 마그누스는 채널링이 끊어지고 칼라투스를 상대하면서 상당히 많은 기력을 소모한 상태.

이대로 연우와 맞닥뜨렸다가는 너무 위험했다.

채채챙!

비록 대장이었던 우로스를 비롯해 몇몇이 죽으면서 상당한 전력 상실이 있었다지만. 하이 랭커로만 이뤄진 그들은 엘로힘 내에서도 상당한 전력을 갖고 있었다.

여태껏 도축장에서 소, 돼지를 잡듯이 플레이어들을 마구잡이로 날리던 비그리드가 처음으로 가로막혔다.

‘막았……!’

연우를 막았던 그라이키아는 이대로 밀어내면 되겠다는 생각에 아주 잠깐 기뻐했지만.

퍽!

어디선가 날아든 칼바람이 그의 목을 너무 말끔하게 자르고 지나가며 7인대의 머리 위를 덮쳤다. 레베카가 어느새 나타나 합류하고 만 것이다.

결국 남은 7인대가 레베카를 상대하며 손발이 복잡하게 얽히는 사이.

연우는 마그누스와 맞닥뜨렸다.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전력을 다해 녀석을 죽이는 것뿐!

파라락-

철컥!

연우의 품에서 여의봉의 조각들이 돌개바람을 그리면서 나타나 봉을 만들어 내고, 그 위에 비그리드가 안착되었다.

[팔극검-비기연계(祕技連繫)]

[제천류-뇌벽세]

파직, 파지직-

콰르르릉!

여의봉과 비그리드가 움직일 때마다 칼날에서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우렛소리가 터지면서. 검은 벼락을 동반한 칼바람이 마그누스의 팔다리를 잘라 나갔다.

마그누스는 합장을 풀면서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거인의 추〉에 따라 강렬한 기파가 송곳니처럼 앞으로 쏟아졌다.

쿠쿠쿵!

여태껏 지칠 줄 모르고 앞으로 전진하던 비그리드의 기세가 잠시 주춤했다.

하지만 마그누스는 이게 끝이 아니라는 듯, 몸을 크게 비틀면서 장풍을 연달아 쏟아냈다.

촤악-

연우는 검은 오러를 키우면서 그것을 옆으로 쳐 내다가 블링크를 발동시키며 마그누스의 뒤를 밟았다.

하지만 마그누스도 그런 움직임쯤은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전혀 당황하는 기색 없이 상반신을 그쪽으로 돌리면서 손바닥을 앞으로 뻗었다.

콰아앙!

칼날과 손바닥이 부딪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폭음과 함께, 뇌기가 위로 치솟고 지반이 깊은 크레이터를 만들어 내며 움푹 아래로 눌렸다.

“오랜…… 만이로군, 헤븐윙. 그동안 잘 지내셨는가?”

연우를 보는 마그누스의 눈꺼풀이 살짝 파르르 떨렸다. 그는 여전히 눈앞에 있는 상대가 자신이 아는 헤븐윙이 맞는지 계속 탐색하는 중이었다.

그가 알고 있던 헤븐윙과 연우는 다른 사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너무 달랐으니까. 분위기, 기질, 스킬, 권능…… 언제나 정의롭고 화려한 광명으로 가득하던 헤븐윙과는 전혀 다르게, 연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같이 죽음과 어둑한 암흑에 가까웠다.

“잘 지냈을 것 같나?”

연우는 그런 마그누스를 보면서 한쪽 입술 끝을 비틀었다.

마그누스는 거인의 힘을 실으며 비그리드를 밀어내면서. 어떻게든 인자한 미소를 흘렸다.

“힘든 일이 많았다는 말은 들었네만. 그래도 우리가 이렇게 있을 사이는 아니지 않은가. 난…….”

“닥쳐.”

가가각!

연우는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 비그리드를 힘껏 밀어내면서 마그누스를 튕겨 냈다.

녀석이 무슨 말을 할지는 불에 보듯 뻔했다.

이전에 있었던 일은 오해다.

자신들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쩌다 보니 일이 그렇게 되었다.

마그누스는 언제나 스스로를 정의로운 척 포장하는 데 능숙했고, 동생도 처음에는 거기에 속아 넘어가곤 했었다.

하지만 뒤늦게 깨달은 사실은. 마그누스는 그를 전혀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그누스가 올바르고 정직한 사람은 맞았다. 권력 분산이 잘 되어 있는 엘로힘 내에서 최초로 절대 권력을 거머쥐고도,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고 스스로 은퇴를 자청했을 정도로 청렴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처럼 신혈을 타고난 이들에게만 해당할 뿐.

마그누스의 눈에 엘로힘을 비롯해 용종, 외뿔부족을 제외한 이들은 하나같이 그들이 이끌어야 할 미개한 종족에 지나지 않았고.

용의 힘을 물려받은 동생은 제 주제도 모르고 위대한 힘을 우연히 갖게 된 운 좋은 놈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마그누스는 동생의 호의를 마지막에 배반하고, 동생이 가지고 있던 용의 힘을 강탈하고자 했다.

물론, 동생을 상대하는 데 있어 그가 전면에 나선 적은 없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배후에 녀석이 있었던 사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아니, 그런 것을 제외하더라도.

‘세샤를 건드리려고 했던 건 용납 못 하지.’

엘로힘이 처음 용종 복원 계획이니 뭐니 하는 되도 않는 헛소리를 지껄이며 세샤에게 손을 대려 했을 때부터.

이미 연우는 엘로힘을 살려 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배후에 있을 마그누스까지도.

콰아아-

연우는 하늘 날개를 다시 한 번 크게 펄럭이면서 마그누스를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현재 마그누스는 그를 보호하던 채널링이 모조리 끊어진 상태. 권능도 바닥을 치고 있는 지금, 반드시 잡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두고두고 그의 발목을 잡을 녀석이었다.

[‘하늘 날개’의 발동 잔여 시간은 27초입니다.]

처음부터 너무 크게 권능을 남발한 탓인지, 평소보다 잔여 시간이 많이 소모되어 있었다. 영역인 비나를 유지하는 데도 그만큼 많은 마력이 소모되는 중이었다.

때문에. 30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만 남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

연우는 권능을 더 크고 화려하게 불태우면서 마그누스를 힘으로 밀어냈고.

“크으으윽!”

마그누스는 자신을 보호하던 스킬이며 마법이 죄다 우악스러운 힘에 박살이 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거인의 추〉나 〈거신함의〉와 같은 힘도, 마신룡체의 용력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퍼퍼퍼펑-

그러다 비그리드의 칼날이 마그누스의 목젖까지 다다르고, 아주 잠깐 멈췄을 때.

[권속, 데스 노블(샤논)이 플레이어 ‘티르빙’을 처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괴랄(怪刺)’을 갈취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권속, 데스 노블(한령)이 플레이어 ‘뚜언띠엔’을 처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귀신(鬼神)’을 갈취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영혼석(오만의 돌)이 영혼석(식탐의 돌)의 모든 기능을 강탈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최종 결과: 96.8%]

[융화를 시도합니다.]

[합성을 시도합니다.]

……

[죄악석을 완성시키는 데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할 수 있습니다.]

이미 괴력난신 중 ‘력’에 해당하는 용력(勇力)은 식탐황제를 처치하면서 얻어 둔 상태.

이어서 티르빙 공작과 뚜언띠엔 공작까지 처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모든 괴력난신이 연우에게로 저절로 전해졌다. 오만의 돌이 식탐의 돌이 갖고 있던 모든 기능을 집어삼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그건 연우의 또 다른 성장을 의미했으니.

아주 잠깐 더해진 힘은 마그누스를 겨우 버티게 하고 있던 스킬을 부수기에 충분했다.

퍽-

비그리드의 칼끝이 그대로 마그누스의 목젖을 꿰뚫고 지나갔다.

마그누스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듯, 입을 금붕어처럼 벙긋거렸지만.

촤아악-

연우는 듣기 싫다는 듯, 비그리드를 옆으로 크게 휘둘러 녀석의 목을 날려 버렸다.

엘로힘을 재건했다고 알려지며, 클랜원들로부터 수많은 지지를 받던 ‘왕’의 너무 허망한 죽음이었다.

하지만 그림자는 녀석에게 평온한 죽음마저 허락하지 않기 위해 그대로 위로 솟구쳐 영혼을 컬렉션 속으로 삼켰다.

“마, 마그누스 님……!”

“독재관님마저……!”

엘로힘의 잔당들은 믿었던 마그누스마저 허망하게 당하고 말자, 반쯤 넋을 잃고 말았다.

[‘하늘 날개’의 발동 시간을 모두 소진하였습니다.]

[다음 발동이 가능한 시간은 24시간 후입니다.]

파스스-

그리고 때마침 하늘 높이 솟아 올라 있던 하늘 날개가 풀리면서 불의 날개로 되돌아왔다.

억지로 쥐어짰던 수천 개의 권능이 일제히 작동을 멈추자, 그만큼의 페널티가 되돌아오면서 연우는 한순간 몸이 단단히 경직되는 것을 느꼈지만.

최대한 내색을 하지 않으면서, 이제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다시피 한 혈국과 엘로힘의 잔당들을 번갈아보고는 차갑게 말했다.

“모두 치워 버려.”

키킥, 키키킥-

캬아아아!

영괴와 검은 그림자가 불길하게 넘실대며 놈들을 덮쳤다. 그런 놈들을 뒤로한 채.

연우는 다시 움직였다.

아직도 남은 사냥감이 많았다.

* * *

「주인께 영광을!」

「죽음의 왕좌에 앉으신 우리들의 왕에게, 적의 죽음을 선물로 안기리라!」

그림자가 넘실대고 영괴들이 날뛰는 전장 사이로.

언제부턴가 나타나기 시작한 죽음의 군단은 검은 갑옷과 검은 투구, 그리고 장창을 높게 세우면서. 일사불란하게 군기를 갖추며 큰 함성과 함께 적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척, 처처척-

디스 플루토. 하데스의 권속이었으나, 이제 후왕인 연우에게로 전해진 죽음의 군단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비록 아직 연우가 초월을 이루지 못해 본신의 힘을 전부 발휘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지난 수천 년 동안 티탄-기가스와의 전쟁에서 버텨 온 것이 절대 요행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전진을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급박해진 것은 화이트 드래곤과 블랙 드래곤, 그리고 마군이었다.

이미 혈국과 엘로힘은 거의 궤멸되다시피 한 상태. 그 다음으로 위기를 맞닥뜨린 건 그들이었고, 당연한 말이지만 상황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전면에서는 디스 플루토가 압박을 시작하고.

좌에서는 환상연대가 좁혀 오며.

우에서는 마희성이 모루처럼 단단하게 버텨 그들을 빠져 나갈 수 없도록 만들었다.

특히 후방에는 어느새 4차 페이즈로 돌입한 칼라투스가 광란을 벌이는 중이었다.

비록 격이 타락할 대로 타락한 나머지 이렇다 할 마법도 크게 부리지 못하고, 이젠 용종이라고 말하기도 꺼려질 만큼 마지막 용왕으로서의 위엄도 보이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지만.

그래도 용은 용이라는 것을 보여 주려는 듯. 현재 칼라투스는 마지막 남은 신력을 불사르면서 육체를 복구시키며 플레이어들을 마구잡이로 짓밟았다.

꼬리를 흔들 때마다 랭커들이 줄줄이 튕겨 나가고, 브레스가 대지를 강타할 때마다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는 이들이 허다했다.

크롸롸롸-

왈츠와 탐, 대주교도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한 상태. 때마침 마그누스를 처치하고, 남은 혈국을 정리하면서 이쪽으로 날아오는 연우가 보였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전멸을 면치 못하겠군.”

대주교는 이쪽으로 날아오는 연우를 보면서 쓰게 웃었다. 채널링이 단절된 시간이 너무 길어지면서 그가 겨우 막아 뒀던 육체의 노화가 다시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벌써 몸이 삐거덕대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떠신가? 지금이라도 풀어내는 것이.”

그러다 대주교는 왈츠를 돌아보며 물었다.

왈츠는 칼라투스에게 암경을 날리던 주먹을 회수하다가, 그쪽으로 홱 하고 고개를 돌렸다.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이 대주교를 직시했다.

무슨 말이냐는 눈빛.

“나야 이미 살 만큼 살았으니 이대로 죽는다고 해도, 천마의 뜻이 그러하겠거니 하고 넘어갈 수 있다지만. 그대는 아니잖나. 아직 젊고, 여태 산 날보다 앞으로 살 날이 훨씬 길지. 그런 꽃다운 인생을 여기서 저버릴 셈이신가?”

왈츠는 아무런 대답 없이 대주교를 응시했다.

“그리고 이 몸도 교단에 두고 온 신도들이 있어 목숨을 가벼이 할 수 없는 몸. 해서 제안함세.”

여태 묵묵히 잠겨 있던 왈츠의 입이 처음으로 열렸다.

“어떤 제안이지?”

“저 말썽쟁이를 잠시만 막아 주시게.”

대주교는 이쪽으로 날아오는 연우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늙은이도 숨겨 둔 수가 제법 있으니. 이 갑갑한 스테이지를 빠져나갈 수 있도록 만들지. 그러니 거기에 집중할 수 있게 시간을 벌어 주게.”

“여긴 저놈의 영역. 갇혀 있는 상태라 쉽지 않아.”

“자꾸 숨기려 들지 마시게. 이미 저주는 완전히 극복했고, 숨겨 둔 수가 서너 개가 더 있다는 걸 모를 것 같은가? 애당초 자네가 진심으로 나섰더라면, 식탐이나 독재관이 저리 허망하게 가지도 않았을 것 아닌가.”

“…….”

왈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 이참에 적당히 기회를 보다가 쓸데없이 많은 머릿수를 줄여 놓을 참이었겠지. 하지만 여기까지. 이 이상은 아니야.”

결국 왈츠는 한발 물러서고 말았다.

“……뭘 하면 되지?”

“말하지 않았나. 시간을 벌어 달라고.”

쯧. 능구렁이 같은 영감. 왈츠는 자신의 속내를 정확하게 꿰뚫은 대주교를 보면서 혀를 가볍게 차고, 앞으로 나섰다.

연우가 혼란 속에서 그들을 제거하려 했던 것처럼. 사실 왈츠도 이 기회에 연우의 힘을 소진시켰다가 마지막을 노릴 생각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연우는 언젠가 반드시 죽여야 할 어머니 여름여왕의 원수였으니.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더 이상 기다려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나도 얼마 못 가. 부서진 원영신의 타격이 커서.”

“엄살 부리시긴. 잠시면 된다네.”

결국 왈츠는 주먹을 가볍게 풀며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사실 연우가 용체 각성을 이뤘다지만, 그녀도 그에 못지않은, 아니, ‘용체’에만 국한시킨다면 그 이상의 경지를 밟았으니.

“영역 선포.”

그녀가 나지막하게 내뱉은 말과 동시에.

화아악-

왈츠를 중심으로 맹렬한 푸른색 기풍(氣風)이 파문처럼 퍼져 나가면서 그림자의 영역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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