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428화 (428/862)

3화. 가면을 벗다 (3)

콰드득, 콰득-

여태껏 평온하던 왈츠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상반신을 따라 피부가 뒤집히면서 용의 비늘이 잔뜩 돋아나고, 어깻죽지에서는 날개가 튀어나와 높다랗게 치솟았다. 용의 꼬리가 바닥을 두들길 때에는 대지가 들썩일 정도였다.

왈츠의 본체는 용인(龍人).

그것도 연우보다 한 단계가 높은 6차 각성이었다.

자신의 심상을 외부로 구성하여 법칙을 뒤바꾸는. 흔히 외뿔부족에서는 심검(心劍)으로 분류되기도 하는 경지.

윙, 윙, 위잉-

왈츠의 본체 위로 여름여왕이 물려준 각종 마법들이 발동, 버프들이 한가득 실리면서 기풍은 단박에 몇 배로 거세졌다.

거대한 기의 폭풍이 푸른 물결처럼 퍼져 나가다, 연우를 중심으로 몰아치는 검은 그림자와 맞부딪치는 지점에서.

두 개의 기류가 뒤섞이며 하늘로 솟구쳤다. 서로 절대 밀리지 않겠다는 듯, 팽팽한 접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하늘에서부터 쏟아지는 새로운 드래곤 프레셔는 이쪽으로 맹렬하게 달려오던 연우의 어깨를 짓눌렀다.

[강한 압박이 육체를 제지합니다. 스턴 상태에 빠집니다.]

[‘냉혈’ 특성으로 이성을 유지합니다.]

[스턴 상태가 해지되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연우가 자랑하는 냉혈 특성은 상태 이상을 단번에 무효화시켰다.

그러나 연우가 잠시 멈칫한 사이.

팟!

왈츠가 한 발을 더 앞으로 내딛더니, 어느새 연우의 뒤편에서 나타나 손날로 목덜미를 노리고 있었다.

마법 블링크에 이은 무공이 전개되었다. 파바박! 연우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외뿔부족의 무공, 칠십이파랑검(七十二波浪劍)이었다.

원래는 이름처럼 검을 필요로 하는 검법이었지만. 왈츠는 이미 그쯤은 능숙한 듯, 손날에다 오러를 덧씌우면서 빠르게 연우를 몰아쳤다.

채앵!

연우는 린치 거리가 짧은 것을 감안, 몸을 반쯤 돌리면서 비그리드 대신에 왼손으로 마장대검을 뽑아 올려 왈츠의 손날을 튕겨 냈다.

‘역시 강해.’

단 한 번 충돌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연우는 왈츠가 강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외뿔부족의 대장로와도 능숙하게 손속을 겨뤘던 만큼. 왈츠는 여름여왕의 이름을 잇는다는 명분에 절대 부족하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놈을 어떻게든 뚫어야겠지만.’

연우는 빠르게 뒤에 있는 놈들을 살폈다.

탐은 여전히 칼라투스와 난투를 벌이는 상황이었고. 대주교는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진언을 외워 대는 중이었다.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어 시간을 벌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이들의 계획을 어그러뜨려 놓으려면 어떻게든 대주교부터 공격해야 할 것 같았지만.

왈츠는 전혀 비켜 줄 생각이 없는 듯, 탄탄한 벽처럼 서 있었다. 단순히 기세를 풀어내고 손속을 몇 번 나눠 본 게 다였지만, 도저히 뚫을 길이 없어 보였다. 저 너머로 이어지는 결이 모두 왈츠의 주변에서 끊어지는 중이었다.

하늘 날개를 펼치더라도, 승부를 장담하기 힘든 상대라는 뜻.

연우는 과거 트리톤의 벤티케와 싸우고 있을 당시 맞붙었던 왈츠의 원영신을 떠올렸다. 중상을 입었던 자신을 끝까지 쫓아오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아마 하이디 등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정말 위험했을 것이다.

그때 느꼈던 섬뜩한 느낌이 다시 찾아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피식-

연우는 한쪽 입술 끝을 비틀었다.

“이번에야 겨우 설욕을 할 수 있겠군.”

“해 볼 수 있으면 해 봐.”

왈츠는 그런 연우를 보면서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짧게 말했다.

“그 전에 뒈지겠지만.”

팟!

이미 용의 저주에서도 거의 해방된 듯, 움직임에 전혀 무리가 없었다.

스르륵-

연우는 녀석의 손날을 옆으로 흘리면서 비그리드로 크게 왈츠의 허리를 갈라 나갔다.

분명히 왈츠가 하늘 날개를 발동시킬 수 없는 연우보다 여러모로 우세인 건 사실이었지만, 그녀도 칼라투스를 상대하느라 기력을 너무 남발한 탓에 백 퍼센트의 전력이라 할 수 없는 상태.

승부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었다.

화아악-

새하얀 비그리드의 칼날을 따라 감돌던 검은 오러가 폭사했다.

그것을 보면서 왈츠는.

“이 수법은 예전에도 겪었었지.”

무미건조하게 코웃음을 쳤다.

“지겨워.”

오러를 다발로 날려 연쇄 폭발을 일으키는 불의 파도의 초기 버전.

하지만 왈츠는 그깟 공격 패턴 따윈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냉소를 흘리며 발을 세게 굴렀다.

쿵!

강렬한 진각(震脚)과 함께 힘의 파장이 파문을 그리면서 검은 오러를 밀어내는 것은 물론, 심지어 연우까지 단박에 튕겨 냈다.

연우가 짙은 고랑을 남기며 저만치 밀려나는 사이.

“그동안 발전 따윈 없었나 보지?”

왈츠는 자신의 몸에 더 많은 버프를 잔뜩 실으며 단박에 거리를 좁혀 왔다. 그리고 날리는 일격에는 전사경의 묘리가 단단히 실려 있었다.

“그렇다면 조심해야 할 거야. 오늘 너는 머리부터 터져 나갈 테니.”

일위도강에서 아라한신권으로 이어지는 강렬한 일격.

쿵, 쿵, 쿵-

내딛는 발짓 하나하나에, 주먹을 휘두르는 동작 하나하나에 경력(勁力)이 회오리치면서 대지를 들썩이게 만들고, 공간을 연거푸 부숴 놓았다.

이미 무공에 있어서는 도가 트다시피 한 왈츠가 내딛은 위치는 진인 급.

순수한 무술 실력에 있어서만큼은 연우가 밀릴 수밖에 없었다.

채채채챙!

퍼퍼펑-

왈츠의 공격을 막아 내는 연우의 손길이 바빠졌다. 마치 망치로 연신 내려치듯, 왈츠의 일격은 하나하나가 너무나 위협적이라 어떻게 반격을 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더구나 용체 각성의 수준도 한 단계가 높으니 피지컬에도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쾅!

연우도 그에 못지않은 실력을 선보였다.

용체 각성에서 나타나는 피지컬의 차이는 이미 마룡신체라는 특이한 특성을 이용해 메운 지 오래였고.

부족한 무공 실력은 압도적인 마력 차로 커버하면 그만이었다.

우우우웅-

현자의 돌과 드래곤 하트가 공명하며 훨씬 더 많은 마력을 뿜어냈다.

불의 날개가 한껏 더 커지면서 검은 오러가 벼락처럼 왈츠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왈츠가 손바닥을 쳐올렸다.

보리옥룡인. 마치 용이 승천하기 위해 꿈틀거리듯, 왈츠를 따라 휘몰아치던 경력이 아주 잠깐 용의 형태를 띠면서 충돌했다.

콰쾅! 콰르르르-

우르르-

다시 한 번 더 부서진 오러의 파편들이 공간을 몇 번씩 찢어발겼다.

그러다 어느 틈엔가 그렇게 곳곳에 흩뿌려졌던 오러의 파편들이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으니.

그 오러들은 일제히 꽃잎의 모양을 띠기 시작했다.

〈낙매화판(落梅花瓣)〉. 떨어지는 매화 꽃잎을 보며 왈츠가 깨달음을 얻어 탄생시킨 무공이 춤을 췄다.

파바밧-

붉은 꽃잎이 바람에 실려 흩날리는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지만.

그 하나하나가 어마어마한 양의 오러를 압축시킨 강기라는 것을 알고 난다면 간담이 서늘해질 수밖에 없었다.

꽃잎은 왈츠를 중심으로 돌면서 연우와 춤을 추고자 했다.

쿵!

다시 한 번 더 진각과 함께 내뻗는 전사경. 백보신권이 펼쳐지자, 일정한 흐름과 함께 춤을 추던 꽃잎들이 확 퍼지면서 단번에 연우에게로 쏟아졌다.

콰아앙-

파바박!

[시차 괴리]

그렇게 쏟아지는 매화 꽃잎의 세례 속에서.

연우는 사고 속도를 더 빠르게 하면서 백보신권이 타격점으로 잡는 위치가 어디인지를 파악하고.

‘견정.’

그다음에는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꽃잎들의 방향이 어떤지를 빠르게 예측했다.

‘극천, 소해, 신문, 누곡…….’

하나하나가 전부 인체의 중요 혈 자리에 해당하는 곳들. 왈츠가 내공 체계에도 해박하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그 흐름들을 어떻게 잘라 내야 할지를 빠르게 판단하는 것과 동시에.

파앗!

비그리드를 사선으로 높이 그어 올렸다. 그러자 잘게 부서진 검은 오러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수백 수천 개의 칼바람이 꽃잎을 일제히 잘라 내고, 나아가 비그리드가 백보신권의 타격점을 비스듬하게 흘리면서 도리어 왈츠의 복부로 파고드는 과정은.

설명은 길었지만,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진 일이었고.

둘의 싸움을 지켜보던 관전자들은, 자신들이 어떤 상황인지조차 잊고 전부 황홀하다고 느낄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기도 했다.

결과는 끔찍했지만.

콰쾅, 콰르르르-

꽃잎과 칼바람이 일제히 터져 나가면서 불길이 번져 대지를 다시 한 번 더 밀어 버렸다. 그리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간 비그리드가 왈츠의 심장에 박히려는 찰나.

쿵!

왈츠는 몸을 비스듬히 돌렸다. 비그리드가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겨드랑이 사이로 통과하며 팔뚝에 단단히 붙잡혔다.

콰직-

연우가 재빨리 비그리드를 뽑으려 했지만, 꿈쩍도 않았다. 왈츠의 힘은 그만큼 대단했다. 비그리드에 처음으로 금이 가는 소리가 났다.

〈철산종(鐵山種)〉. 신체를 강철처럼 단련시키는 외공에 드래곤의 비늘, 여기에 결계 마법까지 더해진 왈츠의 육체는 움직이는 성채나 다름없었다.

쩌거걱, 쾅!

결국 비그리드가 박살 났다. 칼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사이로 왈츠가 손가락을 구부리며 마치 짐승처럼 연우의 상반신을 쓸어내렸다.

〈흑호시조(黑虎試爪)〉. 마치 검은 범이 먹잇감을 찢어죽이기 위해 내려치는 모양새를 닮았지만. 정작 왈츠가 풀어내는 무공은 세상을 찢어발길 듯한 위력이 담겨 있었다.

잘게 부서진 꽃잎들이 다시 한 데 모이면서 이번에는 다섯 개의 발톱이 되었다.

촤아악-

여태 연우를 단단히 보호해줬던 검은 코트, 마장이 강제로 찢기면서 그 안에 있던 용의 비늘까지 강제로 헤집었다.

핏물이 튀면서 잔뜩 벌어진 상처 사이로 내장이 언뜻 보였다.

“끝내 주마.”

왈츠는 드래곤 하트를 더 강하게 쥐어짜면서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꽃잎들이 완전히 흩어지면서 이번에는 정권의 끄트머리에 모여 단단히 압축되었다.

연우는 재빨리 불의 날개로 홰를 치면서 블링크를 발동시키려 했지만.

“허튼 짓.”

그보다 먼저 왈츠의 디스펠이 발동되어 마법이 실패로 돌아갔고.

“말했을 텐데? 정말 끝내 주겠다고.”

콰아앙-

왈츠의 주먹 끝에서 전사경이 다시 한 번 더 터졌다. 압축되었던 구체도 같이 폭발했다.

격산타우의 백보신권. 먼 지점을 노리는 권법이니만큼, 거리가 가까울수록 위력은 더 거셀 수밖에 없었다.

연우의 왼쪽 가슴에 휑하니 사람 머리 크기만 한 바람구멍이 생겼다.

하지만 왈츠는 이게 끝이 아니라는 듯, 단숨에 거리를 좁히면서 손으로 연우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오라버니이!”

뒤늦게 이쪽을 지켜보던 에도라가 기겁하며 달려오려 했지만, 왈츠는 그보다 먼저 움직였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두 눈이 다 쓰러져가는 연우를 담았다. 바로 지금이 어머니 여름여왕의 원한을 풀 때였다.

“죽어라.”

콰드득-

주먹에 힘을 주자, 연우의 머리가 그대로 뒤로 돌아갔다. 식탐황제와 독재관 마그누스, 두 명의 ‘왕’을 죽인 플레이어치고는 허망한 최후였다.

하지만 왈츠는 드디어 어머니의 원한을 갚았다는 생각에 크게 기뻐했다.

그토록 바라던 순간이 드디어 온 것이다.

그렇게.

언제나 분노만 가득하던 그녀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희열이 차올랐다.

아니, 차올라야만 했다.

어디선가. 나지막하게 울리는 시계 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째깍.

째깍-

[시간 예지]

조용한 시계 소리는 왈츠의 머리를 거세게 두들겼다.

분명히 자신의 손에 축 늘어져 있어야 할 연우의 시체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를 처치했던 모든 과정들이 마치 덧없는 꿈처럼, 사막의 신기루처럼, 흐릿해졌다.

용의 사고력을 가진 그녀는 한순간에 어떻게 된 상황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있었을’ 수도 있는 미래. 거의 확정된 것이었으나, 결국 펼쳐지지 않은 미래였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선을 비튼 주인공은.

[하늘 날개-투쟁의 날개]

왈츠의 사각 지대에서 나타났다. 오른쪽 날개만 활짝 펼친 채로.

하늘 날개를 다시 온전히 펼치는 것에는 24시간이라는 쿨 타임을 필요로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연우와 가장 가까운 죽음의 날개로 인해 벌어진 일일 뿐. 만약 투쟁의 날개만 부활시키고자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투쟁의 날개는 아직 미완성이며, 연우가 앞으로 써 내려가고자 하는 설화(說話)를 담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연우는 왼쪽 날개의 복구를 정지시키고, 오른쪽 날개만 수복하는 데 성공했고.

최근 들어 15초 이상의 시간을 내다볼 수 있게 된 시간 예지와 함께 공격을 피하며 나타날 수 있었다.

비록 모든 예지를 피할 수는 없어 마장과 비늘이 전부 벗겨지는 중상은 면치 못했지만.

이것만 하더라도 엄청난 성과였다.

왈츠의 빈틈을 노릴 수 있게 되었으니까.

목표는.

당연히 목이었다.

[‘비그리드-???’가 숨겨진 진명, ‘아론다이트’를 개방합니다.]

[전승: 화룡 참살]

촤아악-

녀석의 목덜미를 덮고 있던 용의 비늘이 모조리 갈라지면서 핏물이 튀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