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429화 (429/862)

4화. 가면을 벗다 (4)

‘얕았나.’

연우는 칼끝에 걸린 감각을 느끼면서 가볍게 혀를 찼다. 깊게 갈라진 용의 비늘 안쪽으로 파고 드는 피의 꽃이 보였지만, 어느 정도 이상을 침범하지 못하고 있었다.

“감…… 히!”

왈츠는 순간 위험했을지도 몰랐다는 사실에 단단히 화가 났던지, 두 눈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쾅!

백보신권이 다시 한 번 더 터졌다. 너무 근거리에서 터진 까닭에, 연우는 방어할 새가 없어 황급히 투쟁의 날개를 몸 앞으로 접으면서 보호를 시도했다.

날개가 우그러지는 충격과 함께 몸뚱이가 뒤로 확 밀려나고.

날개를 치우면서 다시 공격 타이밍을 재기 위해 자세를 바로잡았을 때.

보였다.

왈츠가 고개를 뒤로 확 젖히면서 뺨을 크게 부풀리는 모션을 취하고 있는 것이.

‘드래곤 브레스!’

연우는 왈츠가 뭘 하려는지 뒤늦게 깨닫고, 비그리드를 사선으로 쳐올렸다. 용신안이 드러내는 결을 따라서.

콰아아-

왈츠가 브레스를 쏟아 냈다. 그녀를 낳은 어머니, 여름여왕의 종족은 레드(Red). 그들은 불과 화산의 속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브레스에는 어마어마한 초고열이 담겨 있었다.

마치 땅거죽을 뚫고 화산이 폭발하듯이. 삽시간에 세상이 시뻘건 색으로 물들면서, 주변에 있는 모든 대지가 녹아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때. 비그리드도 빛을 토했다. 역시나 브레스 형태로 압축시킨 불의 파도. 현자의 돌과 드래곤 하트는 위력을 최고로 증대시키기 위해서 다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콰르릉, 우르르, 우르-

콰콰콰콰!

두 개의 브레스가 전력을 다해 부딪치면서. 지반이 고열에 녹아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두 개의 불길이 회오리 모양을 그리면서 하늘로 높이 치솟았다.

그러다 회오리가 사라졌을 때.

그 자리에는 시커멓게 익은 균열 사이사이로 용암이 강처럼 흐르는 땅만이 남아 있었다.

수증기가 안개처럼 자욱하게 껴서 분간이 잘 가지 않았지만.

연우와 왈츠는 상대를 물리치기엔 아직도 역부족이라는 것을 서로 간에 ‘감’으로 알고, 재차 충돌을 위해 새로운 브레스를 준비하고 있었다.

크와앙-

바로 그때. 왈츠의 뒤편으로 탐이 출몰했다.

『큰 누님, 이럴 때 한눈을 파시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여태껏 칼라투스를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을 알고 있었기에. 왈츠는 미처 대응을 하지 못하고 왼쪽 날개를 탐의 흉물스러운 턱에 내줘야만 했다.

콰드득-

날개가 찢어지는 고통과 함께. 왈츠의 얼굴이 충격으로 완전히 일그러졌다.

“네가 감히!”

『이제 어머니도 다른 형제들도 모두 떠난 마당에. 우리 남매라도 함께 잘 지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탐은 왈츠의 날개 조각을 가볍게 씹어 삼키면서 웃었다.

『제 배 속에서.』

“지금이 사안이 어느 때인지 알고 이딴 짓을 하……!”

“명토 선포.”

[이미 지정된 권역 ‘비나’ 위에 새로운 성질이 부여됩니다.]

[명토(冥王)가 설정되었습니다!]

[사왕좌(死王座)와 관련된 모든 신성이 깨어났습니다.]

[지금부터 사왕좌의 주인으로서 명토 내 모든 권능 특권 설정을 조정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격(格)의 부족으로 상당수의 권능·특권·설정이 불가능해지거나, 효과가 약화됩니다.]

왈츠는 탐을 보며 으르렁거리다 말고 갑자기 망막을 채우는 메시지에 시선을 황급히 연우 쪽으로 돌렸다.

군침을 흘리던 탐도 어느새 두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이건 최후의 패로 아껴 두려 했지만.’

연우는 그런 녀석들이 어떻게 방어할 새도 없이, 새로운 공격을 휘몰아쳤다.

역시나 브레스의 형태로.

[사왕좌에 예속된 권능, ‘지옥겁화(地獄劫火)’가 발휘되었습니다.]

불의 파도만으로 잡기가 어렵다면. 그보다 상위에 있는 불길을 사용하면 그만이었다.

지옥겁화.

명계에 흐르는 불길을 직접 끄집어 올리는 것이다.

본래는 죄인을 단죄하여 영혼을 맑게 할 정도로 뜨거운 열기를 자랑한다는 불꽃이어서, 법칙상 현실에서는 절대 구현될 수 없었지만.

연우가 선포한 명토에서는 얼마든지 사용이 가능한 까닭에, 대지를 뚫고 지옥겁화가 잔뜩 일어나 왈츠와 탐을 노리는 게 가능했다.

“흡!”

『이건 또 무슨……!』

왈츠는 남은 날개로 몸을 칭칭 감으면서 있는 힘껏 블링크와 텔레포트를 사용, 연우에게서 최대한 멀찍이 떨어지고자 했다.

탐도 마찬가지. 본체에서 인간체로 폴리모프한 그는 황급히 도주를 시도했다.

“어떻게 플레이어가, 성역과 신성을 가질 수 있는 거지……?”

지난 일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연우가 타르타로스에서 겪은 일을 모르는 이들로서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일.

신성(神聖)이란. 탈각을 이뤄야만 겨우 힌트라도 얻을 수 있을까 말까 한 ‘초월’의 다섯 조건 중 하나였다.

어머니, 여름여왕도 말년에나 겨우 얻었던 것이었는데.

그걸 여태 상대 취급도 하지 않았던 한낱 플레이어 따위가 갖고 있었으니!

더군다나 성역은 신성을 제대로 발현하기 위해 설치되는 권역(權域).

일반적인 결계나 영역 설정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신능(神能)이었다!

콰콰콰콰-

콰르릉! 콰르르-

결국 왈츠와 탐, 둘 모두 자신들을 보호해 주던 용의 비늘이 녹아내리는 고통을 맛보며 겨우겨우 몸을 내빼야만 했다.

그리고 연우의 새로운 공격이 쏟아질지 몰라, 마력을 모두 쥐어 짰다.

왈츠는 여러 결계 마법을 섞은 무공, 〈대승범천신공〉을. 탐은 어머니 여름여왕에게서 물려받은 유니크 아티팩트, ‘고룡의 응시’를 사용해서 방어를 시도했다.

각자 마지막까지 숨겨 두고 있던 패들.

하지만 연우의 공격이 누구에게로 향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제는 더 이상 뭔가를 숨겨 두고 말고 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연우가 노리고자 했던 자들은 그들이 아니었다.

녀석들이 어떻게든 접근을 막으려고 했던 자. 가장 바로 후미에 빠져서 무언가를 시도하고 있는 대주교였다.

화아악-

[용신안]

[화안금정]

[검은 구비타라 - 현인의 눈]

[지옥겁화]

[제천류-화염륜]

연우는 어느새 여의봉과 연결된 비그리드를 쥐고 투창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가장 먼저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눈을 활짝 열어 타깃을 확실하게 설정하고, 명토를 따라 흐르는 지옥겁화를 화염륜의 법칙에 따라 끌어와 비그리드의 칼날에다 잔뜩 응축시켰다.

[괴력난신-용력(勇力)]

[드래곤 킬러]

그리고 식탐황제로부터 빼앗은 괴력난신 중 ‘력’에 해당하는 용력을 사용, 마신룡체가 갖고 있는 힘을 최대한으로 부풀리며 여의봉에 힘을 잔뜩 주었다.

그리고 여기에 드래곤 킬러가 더해지면서.

[‘비그리드-???’가 숨겨진 진명, ‘게이 볼그’를 개방합니다.]

[전승: 일발 필중]

팟-

아무리 도주한다고 해도 목표물을 절대 놓치지 않는다는 게이 볼그의 전승을 따라.

비그리드와 여의봉이 허공을 꿰뚫었다. 붉은 궤적이 유성우처럼 떨어지고, 그 뒤를 배배 꼬인 제트 기류가 꼬리처럼 따라붙었다.

연우는 어떻게든 대주교를 제거해 버릴 심산이었다.

여태 왈츠와 탐을 상대하느라 잠깐 놓치고 있었지만. 대주교가 뒤로 빠져서 뭔가 심상치 않은 것을 준비하고 있다는 건 눈치채고 있었다.

‘어떻게든 제거해야 해.’

대주교가 노리는 수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연우는 어떻게든 그걸 막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리고 되도록 여기서 대주교를 제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20층, 고행의 산에서 마주쳤던 대주교는 비록 도일의 몸을 빌려 나타나긴 했다지만. 분명 강해도 너무 강한 상대였다.

어째서 무왕과 여름여왕에 이어 아홉 왕 중 순위권에 해당하는지를 알 것 같은바.

그렇기에 모든 채널링이 끊어져 권능을 상실한 지금, 기회가 찾아온 이때 되도록 제거해야만 했다.

준비하고 있는 것도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감’이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르르르, 우르르-

콰콰콰콰!

왈츠와 탐이 제각각 연우의 노림수를 깨닫고, 각자 준비하고 있던 마지막 패를 비그리드 쪽으로 돌렸다.

결국 외부 충격을 받은 궤적은 도중에 힘을 일부 상실하고 말았고.

“덕분에 축문이 완성되었군.”

대주교는 그사이 싱긋 웃더니 손에 쥐고 있던 방울을 가볍게 흔들고 있었다.

따라랑-

여의봉의 조각으로 만들어 황금색으로 빛나는 작은 종이 내는 맑은 소리에 따라, 대주교가 안개와 함께 흐릿하게 사라졌다.

퍼어엉-

뒤늦게 대주교가 있던 자리로 비그리드와 여의봉이 꽂히면서, 지옥겁화가 단번에 풀려나 사방으로 번져 나가고, 거기서 퍼진 불씨에 맞춰 불벼락이 잇달아 때리면서 산자락을 그대로 무너뜨렸지만.

이미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대주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에 안개가 단숨에 수십 배로 확 불어나면서 기류를 따라 하늘로 솟구쳤으니.

하늘이 금세 새하얀 구름으로 뒤덮여 붉게 물들었던 색깔을 지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높이를 짐작하기도 힘들 만큼 거대한 그림자가, 천천히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구우우-

* * *

‘우마왕이시여. 제 부름에 응답해 주소서.’

대주교는 자신의 영혼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감수하고, 남은 마력을 전부 영력으로 전환시켜 안개가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영력이 아닌 신력을 부르고 싶었지만.

천마로부터 버림을 받은 그로서는 신력을 다룬다는 것이 요원하기만 한 일.

이것만으로도 72선술을 극성으로 익혀 놓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해체될지 모른다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만큼. 대주교는 자신의 남은 신도들을 50층에서 탈출시키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자신은 여기서 죽는다 할지언정, 신도들은 무슨 죄가 있어 여기에 묻혀야 한단 말인가.

그래서 신도들을 버린 못된 신은 잊어버리고.

다른 신을 찾았다.

동주칠마왕.

달리 칠대성(七大聖)이라고도 불리는. 천마의 또 다른 얼굴, 제천대성 손오공과 함께 의형제지간을 맺었다는 이들.

그들은 제천대성을 막내로 뒀을 정도로 위대한 존재들이기도 했다.

단 일곱이서, 〈천교〉, 〈절교〉와 자웅을 겨루는 것만 보더라도 얼마나 위대한지를 쉽게 알 수 있었다.

특히 대주교가 접촉하고자 한 존재는 동주칠마왕의 맏이, 우마왕이었다.

1년 전. 고행의 산에서 직접 천마의 또 다른 얼굴이 되겠다는 계획이 어그러진 이후로, 찾았던 사당에서 직접 그의 간절한 부름에 응답해 주고, 가여워해 주던 고마운 분.

모시는 신보다 더 그들을 아껴 주고 보살펴 주고자 하시던, 그런 분이었다.

아버지처럼 따스한 분.

『정녕, 그것으로 되겠느냐?』

그리고 우마왕은 이번에도 그의 간절한 부름에 응답을 해 주었다.

비록 칼라투스가 깔아 둔 용의 저주 때문에 목소리 곳곳에 노이즈가 발생하고 있다지만.

우마왕은 〈천교〉의 옥황상제나 〈절교〉의 통천교주조차도 발아래로 여긴다는 말이 절대 거짓이 아니라는 듯. 너무나 쉽게 자신의 의사를 대주교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 주십시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꼴이 될 것이다.』

‘바라던 바입니다.’

『그리도…… 분노가 컸던 것이냐. 막내에 대한 원망이?』

‘…….’

『그래도 그것을 바란다면. 알았다. 들어주마. 가련한 아이야.』

쓸쓸한 목소리가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보패 하나를 아우를 통해 전달해 주마. 하지만 계약은 신성한 것. 일이 끝나는 대로 ‘복마전’으로 곧장 찾아와야 할 것이다.』

‘곧 찾아뵙겠습니다.’

『……기다리마.』

그렇게 목소리가 멀어지고.

대주교는 자신의 영혼 안쪽으로 거대한 존재가 강제로 자리매김 하려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주교라는 큰 그릇에 신이라는 존재를 욱여넣는 과정.

강신(降神)이었다.

콰르르릉-

그리고 모든 강신이 이뤄졌을 때, 갑자기 어마어마한 돌풍이 불면서 안개와 함께 스테이지를 뒤덮던 불길을 한꺼번에 꺼뜨렸다.

얼마나 강렬한 태풍인지, 보고 있던 사람들이 전부 놀랄 정도였다.

왈츠와 탐도 겨우겨우 균형만 유지한 채, 놀란 눈으로 태풍의 눈 쪽을 보았다.

거기엔 태풍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훨씬 어마어마한 영압이 회오리치고 있었다.

탈각과 초월을 차례로 이루어, 자신만의 신위를 개척한 자들만이 내뿜을 수 있다는 어마어마한 신력.

그리고 그만큼이나 강렬한 마기도 동시에 들끓고 있었다.

신력과 마기를 동시에 품은 존재라니.

천마 말고 그런 모순을 품은 존재가 이 탑에 있었던가?

있긴 했다.

다만, 사도를 잘 뽑지 않아 하계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 알 만한 이들은 다 아는 존재들이 그러했다.

하지만 그들은 하계에 거의 무관심하기로 유명할 텐데?

그런 이들의 생각을 뒤로하고.

어느새 대주교의 얼굴과 모습 위로, 사자 갈기를 한 덩치 큰 사내의 환영이 오버랩되고 있었다.

“후! 하! 후! 하! 으하하! 형님 명령으로 내려오긴 했지만, 정말이지 기분 한번 상쾌하구만! 역시 답답한 위쪽보단 아래쪽 공기가 훨씬 낫단 말이지. 올포원, 그 새끼 방해도 없고, 이게 웬 떡이냐.”

대주교의 모습을 한 사자 갈기의 사내는 어느새 손에 들고 있던 거대한 부채를 보며 포악하게 웃었다.

“‘파초선’도 제법 마음에 들고.”

그러다 주먹에 꽉 힘을 주었다.

“하지만 모름지기 사내라면 이깟 문물에 기대어서는 안 되는 법이지.”

파스스-

파초선이란 이름을 가진 부채가 잘게 흩어지면서 사라졌다. 원래 형체였던 ‘바람’으로 흩뜨린 것이다.

큰형님이 시켜서 갖고 왔을 뿐. 애당초 그는 신물이나 보패를 그닥 내켜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무기는 곧 신외지물. 사내라면 모름지기 두 주먹으로 맞부딪쳐야 하지 않겠는가.

대주교의 모습을 한 사내는 먹잇감을 찾아 하나같이 얼어붙은 군중을 쓱 훑어보다가, 연우에게 시선을 고정하고는 씩 웃으면서 발을 크게 굴렀다.

쿵!

“네놈이로구나. 이 아이가 말했던 ‘아이’가.”

연우는 자신을 보는 대주교의 모습을 한 사자 갈기의 사내를 보면서 표정을 굳혔다.

그가 정확하게 누군지 알진 못했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못해도…… 하데스나 티폰과 동급. 대체 저자는 뭐지?’

올림포스를 대표하는 12신좌 중에서도 최고위에 앉은 3주신에 버금가는 힘을 풍기는 영력이라니.

티탄-기가스의 왕인 티폰과도 견줄 만할 것 같았다.

비록 강신의 한계 때문에 힘을 풍기는 데 있어서는 제한선이 있지만.

그런데도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였다.

“한데…….”

그때.

사자 갈기의 사내가 말꼬리를 흐리더니 의문을 드러냈다.

“뭐지? 넌 대체 뭔데, 왜 우리 막내 놈을 품고 있는 거냐?”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