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아르티야 (1)
레온하르트를 만난 것은 본격적으로 탑에 오르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아직 모든 게 낯설기만 한 탑의 환경에 모두가 잔뜩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혼자서 개미 구경을 한답시고 쭈그려 앉아 개미가 지나다니는 것을 관찰하고 있던 플레이어.
첫 인상부터 특이해도 그렇게 특이할 수가 없었다.
아르티야의 모사.
혹은 아르티야의 최고 검술사.
흔히 레온하르트라고 하면 따라 붙는 수식어였다.
그래서 그에게 붙었던 별칭도 검략가(劍略家).
검과 지략, 문무를 겸비한 그가 있기 때문에 아르티야가 단숨에 그렇게 성장할 수 있었다고 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리고 그건 동생도 같은 생각이었다.
동생이 헤븐윙으로 아무리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지만. 랭커로서 입지를 다지는 것과 클랜을 이끄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런 면에서 동생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마음껏 앞으로 달릴 수 있었던 건 그만큼 레온하르트가 뒤에서 내정을 받쳐 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또한 레온하르트도 그만큼 자신을 신뢰해 주는 동생에게 고마워했기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열심히 실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두 사람 간의 관계는 아르티야 안팎의 사정으로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국 동생이 중독으로 신경이 예민해지자, 레온하르트는 그를 달래다 못해 포기하고 떠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르티야가 급속도로 붕괴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시점이었다.
지붕이 흔들리는 와중에 기둥이 되어야 할 사람이 빠지고 나니,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연우에게 레온하르트는 복잡한 심경을 가져다주는 존재였다.
웅, 우웅, 우우웅-
동생의 사념체가 들어있는 회중시계가 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 역시 마찬가지란 뜻이겠지.
직접적으로 등을 돌렸던 바할이나 리언트와 다르게 레온하르트는 동생에게 지쳐서 떠났던 것뿐이었으니.
사실 배신이라고 치부하기엔, 그리고 원한을 가지기엔 많은 무리가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떠나기 직전까지도 아르티야를 어떻게든 지탱하기 위해 노력을 했었고.
그가 아는 선에서, 떠난 뒤에도 절대 아르티야에 해가 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우가 그토록 외로워할 때 옆에 있어 줬던 것도 아니었지.’
원한만 가지지 않았을 뿐이지, 그를 원망하는 감정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이유가 있다 할지라도. 아무리 냉정하게 본다고 하더라도.
연우는 정우의 혈육으로서. 형으로서 드는 감정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레온하르트의 이런 등장을, 절대 반가워할 수 없는 것이다.
“……역시 많이 차가워졌군.”
레온하르트는 악수를 위해 내밀었지만, 여전히 맞잡아 주지 않아 외롭게 있는 자신의 손을 거두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도 많이 보고 싶었다네.”
연우는 여전히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의 바다에 투신했었다고 들었는데?”
“그랬었지. 하지만 얼마 있지 않아 금방 나왔었다네.”
정확하게는 자네가 죽었다고 알려진 뒤였지. 레온하르트는 그렇게 뒷말을 덧붙이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거긴 내 집이 아니지 않나.”
“…….”
“모든 게 잘못 돌아가고 있었지. 배신자들은 서로가 잘났다며 뛰어다니고…… 거대 클랜은 서로 반목하기만 하고. 자네에게 열광하던 것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세 잊어버리고.”
레온하르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얼굴에 살짝 분노가 어렸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어떻게든 바로잡고 싶었다네. 음지로 숨어서 동료들을 하나둘씩 모았지. 덕분에…… 자네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도 뒤늦게 깨달았고.”
연우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독식자가 나타났지.”
레온하르트의 눈가에 열의가 조금씩 돌아왔다.
“처음에는 슈퍼 루키가 나타났다는 생각에 포섭할 생각으로 찾아간 거였는데…… 멀리서 봤지만. 그 순간 알았지. 자네가 돌아왔다는 것을.”
“가면을 쓰고 있었을 텐데?”
“그래도 못 알아볼 리가 있는가. 자네의 체형이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을. 보다 날카로워지긴 했지만…… 그건 당연한 것이고.”
“…….”
“아직도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네. 그래서 찾아갈까도 싶었지만…… 어디 면목이 있어야지. 자네가 정체를 숨긴 이유도 알 것 같고. 해서.”
레온하르트는 설명을 쭉 내뱉다가, 한차례 숨을 고르고 천천히 말에다 힘을 실었다.
“자네가 위로 올라올 때까지 기다렸다네. 다시 모습을 드러낼 때, 그때 힘이 되어 주기 위해 더 크게 세력을 일궈야겠다고 생각했고.”
“…….”
연우는 잠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온하르트와 그의 뒤에 시립해 있는 크로이츠, 그리고 격전으로 상당히 지쳐 있지만 여전히 투기를 잃지 않는 환상연대의 여러 클랜원들을 쭉 훑어보았다.
환상연대는 결국 칼이었던 셈이다.
레온하르트가 지난날의 복수를 위해 갈아 왔던 칼.
그러다 동생이 되돌아왔다고 생각하고, 크게 기뻐하면서 칼을 더 단단하고 날카롭게 벼리기 위해 여태 두들겼던 것이다.
‘넌 어떻게 생각하지?’
레온하르트가 설명을 시작한 이후로, 회중시계는 더 이상 떨리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 녀석도 생각이 복잡하다는 뜻이겠지.
연우는 다시 레온하르트의 눈을 보았다. 여전히 뜨겁게 타오르고 있는 눈은 반가움과 슬픔이 교차하고 있는 중이었다.
원망은 하지만, 원한은 가질 수 없는 상대.
동생의 곁을 떠났으나, 동생을 기리며 살아 왔던 이.
“그런데 대체 병은 어떻게 나은 거야? 베이럭의 독은 어떻게 물리친 거고?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말해 주면…… 안 되나?”
녀석이 보이는 행동, 감정, 말투, 어디에도 거짓은 없노라고. 전부 진실이라고 용신안은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우는 우선 저 잘못된 기대와 착각부터 깨야겠다는 심통이 불쑥 들었다.
어떻다 하더라도. 결국 녀석이 마지막까지 동생의 옆에 있어 주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었으니.
사실 동생이 바라던 것은 이해나 복수 따위가 아니었다.
옆에 있어 주는 것.
단지 그것뿐이었는데…….
“정우 녀석은 가족 이야기나 지구 이야기를 탑에서 잘 안 하는 편이었다지?”
그래서 입을 여는 연우의 말투는 여전히 딱딱하기만 했다.
“무슨 말을……?”
레온하르트는 연우가 갑자기 ‘정우’를 3인칭으로 지칭하자 뭔가 깊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뒤늦게 그 말에 숨겨진 의미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너, 혹시?”
“정우는 죽었다.”
“……!”
레온하르트의 두 눈이 커졌다.
“착각한 것 같으니 다시 내 소개를 하지.”
연우는 격하게 흔들리는 레온하르트의 두 눈을 보면서 말했다.
“내 이름은 차연우.”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차가웠다.
“정우의 쌍둥이 형이다.”
“……!”
* * *
탑을 따라 소문이 금세 퍼져 나갔다.
50층에서 일어난 도무지 믿기지 않는 세 가지 일들.
그중 첫 번째가 단연 가장 큰 파란을 일으켰다.
-죽었던 헤븐윙이 돌아왔다!
한때, 탑을 오르는 플레이어들이 모두 선망하던 우상이었으며, 거대 클랜과 하이 랭커들의 횡포에 맞서는 구세주라 불리던 헤븐윙.
하지만 그들의 배척을 끝내 버티지 못하고, 날개가 꺾여 추락해야만 했다던 그가 돌아온 것이다.
특히 그가 최근 들어 슈퍼 루키라 불리던 독식자라는 사실까지 더해졌을 때는.
모두가 충격에 젖어 한동안 아무 말도 잇지 못할 정도였다.
특히 눈치가 빠른 플레이어들은 앞으로 다가올 먹구름을 예견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앞으로 큰 전쟁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예상이 무색하게 두 번째 소문이 곧장 탑을 강타했다.
식탐황제와 독재관 마그누스, 가을군주 탐의 죽음.
헤븐윙은 자신의 화려한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과거 아홉 왕 중 셋을 그 자리에서 죽이는 충격적인 신위를 선보였다.
그전에도 랭킹 6위에 빛난 적이 있었다지만.
그래도 당시에 그는 ‘왕’들을 직접 거꾸러뜨리거나 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야기가 전혀 달랐으니.
지난 복수의 칼날이 ‘왕’들에게도 예외가 없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특히 봄의 여왕 왈츠나 대주교가 각각 한쪽 날개와 팔이 뜯긴 채로 도망치기까지 했다는 말이 덧붙여지자,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몇몇은 두려워하기까지 했다.
지난날 헤븐윙은 언제나 빛나는 태양처럼 고고했으나, 지금의 헤븐윙은 달처럼 어둡고 살벌했으니.
그 칼날이 어떻게 불어닥칠지 도저히 짐작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세 번째 소문인 용의 신전 붕괴도 따지자면 아주 큰일이었지만.
헤븐윙이 던지는 충격이 너무 컸기에. 탑은 한동안 적막에 잠긴 채 숨을 죽여야만 했다.
그리고 예의주시하기 시작했다.
부활한 헤븐윙의 칼날이 이번에는 어디로 이어질지에 대해서.
* * *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나.”
연우와 일행들이 떠난 자리.
레온하르트는 멍하니 홀로 서서 눈을 감고 말았다.
아직도 연우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자신은 네가 찾던 차정우가 아니라는 말. 그동안 그를 지탱하던 믿음이 산산조각 나는 말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만큼 머리가 명석한 사람이 설마 부활을 정말 믿었을까.
정황상 당시에 정우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리고 돌아온 독식자는 ‘새롭게’ 기록을 갱신하면서 탑을 올랐다. 스테이지를 되돌아올 수는 있을지언정, 이미 한번 기록된 공적치는 절대 수정할 수가 없는 게 탑의 규칙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독식자는 절대 정우가 될 수 없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다.
자신이 모르는 기적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온갖 신비와 이적이 가득한 탑의 세계이니. 그중에 부활이나 소생도 있지 않을까 하고 막연하게 기대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주 잠깐 폐관 수련에 들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크로이츠가 독식자를 만나고 왔다는 소식에 갑자기 몸을 숨겨 버린 것도. 혹시 자신의 믿음이 깨지면 어쩌나 하는 일말의 두려움이 있어서였다.
하지만 이렇게 진실을 맞이한 순간.
그간의 희망은 산산조각 났다.
자신을 정우의 쌍둥이 형이라고 밝힌 연우는 그 뒤로 몇 마디 말만 남기고 훌쩍 자리를 떠났다.
-너에게 고맙다는 말은 절대 못 해. 당시에 정우의 잘못이 있었다고 할지언정. 결국 네가 정우의 곁을 떠났던 건 사실이니까. 이제 와서 뭔가를 해 본다 한들, 쏟아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어.
레온하르트는 손으로 얼굴을 덮고 말았다.
여전히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이제는 대체 뭘 하면 좋을지 머릿속으로 잡히는 바가 전혀 없었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레온하르트의 눈치를 보고 있던 여러 단장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연우를 도우리라 생각했던 출정에서, 정작 대상이 거부를 하니 따를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레온하르트의 입가에 씁쓸함이 어렸다.
“글쎄. 어디로 가야하는 걸까?”
“연대장…….”
“나도 도저히 모르겠구나. 길을.”
누가 나서서 가르쳐주었으면 좋겠건만.
누군가를 이끈다는 것은 이래서 어려웠다. 아무 생각 없이 내정에만 몰두할 때가 훨씬 편했다.
-그러니 날 도와줄 생각인들 마. 내가 먼저 널 칠지 모르니까.
연우의 뒤를 따라가고 싶어도 그럴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 서슬 퍼런 눈매는 정우의 얼굴을 하고 있어도 전혀 다른 인상이었다.
‘어쩔 수 없지.’
레온하르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얼굴을 쓸어내렸다.
머뭇거리는 건 잠시일 뿐.
바깥으로 나온 이상, 바퀴는 굴러가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멈출 수는 없었다.
‘끝을 보는 수밖에.’
식탐황제와 네 공작을 비롯해 중앙 수뇌부가 모두 떼죽음을 당한 혈국은 정치적 공황 상태에 빠질 게 분명하고, 사자 연맹도 전력 태반이 날아가면서 체계가 붕괴될 게 확실했다.
마그누스와 7인대가 죽은 엘로힘은 그나마 조직 체계가 단단해서 무너질 우려는 적었지만, 전력 상 열세에 놓일 운명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환상연대는 바로 이 시점을 노려야만 했다.
신생 클랜에서 그칠 게 아니라, 탑을 부술 거대 클랜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설사 연우가 그들을 거부한다고 할지라도.
레온하르트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칼날까지 무뎌지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인상을 굳히면서 움직이려는데.
“크로이츠?”
레온하르트는 자신을 따라오는 수하들과 다르게, 홀로 제자리에 서 있는 크로이츠를 돌아보았다.
“연대장. 죄송하지만…… 전 여기까지만 따르겠습니다.”
“부연대장! 그게 무슨!”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입니까?”
1연대의 대원들을 비롯해, 다른 단장들이 놀란 얼굴이 되어 크로이츠를 돌아보았다. 그를 따르는 환영기사단도 조금 놀란 얼굴이었지만, 곧 한 발 물러서면서 침묵을 지켰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크로이츠를 빤히 쳐다보았다.
은색으로 빛나는 투구 아래, 크로이츠의 눈빛엔 미안한 기색은 있어도, 후회는 일절 없이 단단했다.
피식.
레온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1년을 가까이 곁에 있더니. 그새 독식자 그 친구한테 빠졌나 보군.”
“……죄송합니다.”
“아니야. 잠깐 대화를 나눴을 뿐이지만, 나도 충분히 매력을 느꼈던 친구였으니까.”
만약 연우가 함께하자고 했다면. 자신도 그 옆에 있으려 하지 않았을까. 레온하르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만큼 연우의 사람을 잡아끄는 마력은 대단했다. 어쩌면 동생인 정우보다도 훨씬.
“그래도 아쉽군. 나와 자네가 같이 보낸 시간이 있는데, 그것을 빼앗겼으니까.”
레온하르트는 씩 웃으면서 크로이츠에게 다가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래도. 부연대장의 자리는 항상 비워 놓고 있지. 언제든지 돌아오게.”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크로이츠는 레온하르트의 손을 맞잡고, 고개를 숙였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아는가?”
“예.”
크로이츠는 연우가 떠나기 전에 브라함이 슬쩍 귀띔을 해 주었던 장소를 떠올렸다.
-부유도 라퓨타. 그곳으로 오게. 자네라면 찾을 수 있을 게야. 그곳에 아르티야의 옛 클랜 하우스가 있다 하니.
“그렇다면 다행이고. 하면 건승을 기원하겠네.”
“연대장께서도 원하시는 바를 이루셨으면 합니다. 가자.”
크로이츠의 명령에 따라, 환영기사단은 일제히 탈것인 와이번을 소환해 그 위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천히 비상해 연우가 움직인 방향으로 사라졌다.
레온하르트는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서서 떠나는 벗의 뒤를 배웅하다, 천천히 반대로 몸을 돌렸다.
“우리도 돌아가도록 하지. 그렇다고 서두르진 말고.”
레온하르트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어차피 오늘 밤은 아주 길어질 것 같으니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