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432화 (432/862)

7화. 아르티야 (2)

혈국의 수도, 캐슬 블러드.

“태자 전하, 이대로는……!”

“막아라. 어떻게든!”

“하, 하지만……! 이대로는 위험합니다. 지금이라도 피신하는 것이……!”

“막으래도!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이냐!”

“아, 아, 알겠습니다!”

상황이 급박하니 피신할 것을 당부하러 왔던 전령은 결국 고개를 숙이며 허겁지겁 되돌아가야만 했다.

언제나 4명의 공작과 36명의 후작의 주도로, 엄숙한 분위기 아래에서 회의가 벌어지던 장소였지만.

이미 홀은 너무 어수선하기만 했다.

곳곳에서 다급하게 쏟아지는 전령과 통신 마법들.

급박하게 움직이며 그들에게 각기 지시를 내리는 백작들.

현장으로 뛰어가는 자작들과 수도만큼은 지키겠다며 눈에 불을 켜고 단단히 선 남작과 준남작들.

도모태자는 그들을 보면서 옥좌에 반쯤 걸터앉아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야만 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벌써부터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피의 제전’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기 시작한 50층의 대참사 이후.

도모태자는 후작들의 희생으로 겨우 탈출로를 확보, 캐슬 블러드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탈출은 잠시간의 시간 벌이에 지나지 않을 뿐. 사실상 실패나 다름없었다.

아버지인 식탐황제는 죽었고, 혈국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네 명의 공작들도 전사했다. 그 외에 혈국을 경영할 만한 후작급의 인사들도 피의 제전에서 절반 이상 떼죽음을 당하고 말았으니.

사실상 하루아침에 반파(半破)된 것이나 다름없는 혈국을, 그가 홀로 이끌게 된 형국인 것이다.

문제는 단순히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니라.

늦을세라 적의 침공도 바로 뒤따라왔다는 점이었다.

‘독식자……. 그놈 때문에……!’

도모태자는 선망하던 대상이 원수로 돌변하던 그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용의 미궁이 열리면서 플레이어들이 각지로 뿔뿔이 흩어졌을 때. 신하들이 전부 독식자가 배신을 했다며 길길이 날뛸 때에도, 절대 그런 게 아닐 거라며, 뭔가 오해가 있을 거라며 두둔하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당시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딴 말을 지껄인 자신의 입을 전부 찢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쿵-

쿵, 쿠우웅!

때마침 캐슬 블러드가 다시 한 번 더 위아래로 크게 요동쳤다.

홀을 바쁘게 돌아다니던 신하들도 모두 걸음을 멈추고 두려움에 젖은 얼굴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외부에서 계속 전해지던 충격이 어느새 본성에 가깝게 다가왔다는 뜻.

쿠우우웅-

다시 캐슬 블러드가 흔들릴 때.

“태자 전하! 녀석들이 본성으로 들어왔습니다. 어서 피하셔야 합…… 컥!”

적의 도착을 알리기 위해, 나르빙거 후작이 다급하게 홀의 문을 열며 들어오다 말고, 피를 토하면서 제자리에 고꾸라졌다.

그의 뻥 뚫린 가슴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어느덧 카펫을 축축하게 적시기 시작하고.

터벅. 터벅-

검은 그림자로 둘러싸인 죽음의 군단이 물밀 듯이 들어왔다. 로얄 가드들이 그들을 어떻게든 막아 서려 했지만, 까만 창날에 줄줄이 죽어 나갔다.

“이것들이 감히 이곳이 어딘지 알…… 크윽!”

“으, 으아악!”

“마, 막아야 한…… 크헉!”

홀은 단번에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막아서는 백작이며 후작들이 잇달아 피를 뿌리며 쓰러지고, 기사와 병사들의 잘린 머리가 바닥을 뒹굴었다.

혈국이 탄생한 이래로, 세력의 부침을 겪을지언정 단 한 번도 적으로부터 함락을 허락하지 않았다던 블러드 캐슬이 점령되고 있었다.

그런 치욕의 순간순간을 지켜봐야만 하는 도모태자로서는. 정말이지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죽음의 군단, 디스 플루토는 완전하게 점령을 끝내겠다는 듯. 저항하는 자들은 모두 죽여 영혼을 컬렉션으로 흡수하고, 투항하는 자들은 무릎을 꿇게 해 제압했다.

찰박, 찰박-

그리고. 피웅덩이가 된 홀의 중심을 가로지르면서, 그림자로 된 투구와 갑옷을 입은 이가 천천히 안쪽으로 들어왔다.

푹 깊게 눌러쓴 투구 아래로 비치는 안광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심장을 떨리게 만들 정도로 살벌했다.

도모태자가 공작급 이상의 인사들에게서나 느낄 수 있었던 위압감이, 태풍처럼 휘몰아치며 단숨에 홀을 가득 메웠다.

도모태자는 어깨가 짜부라질 것 같은 기세를 맞이하면서도, 어떻게든 이를 악물면서 버텼다.

끝까지 옥좌에서 내려오지 않는 것. 그것만이 그에게 남은 마지막 자존심이자, 항거였다.

하지만.

「이야! 여기구만. 그 말 많던 혈국의 궁전이?」

그림자 기사는 살벌한 기세와 다르게, 언행이 다소 경망스러웠다. 호화로움으로 가득한 궐 내부를 둘러보면서 가볍게 휘파람까지 불 정도였다.

「여기 있는 거 몇 개 떼어다가 팔면 얼마나 하려나? 우리 영감님, 요새 돈 없어 죽겠다고 투덜거리시더니 한숨 좀 덜겠구만.」

그러다 그의 시선은 도모태자에게 단단히 고정되었다.

「괜찮은 아티팩트도 보이고.」

인페르노 사이트가 살짝 호선을 그리는 듯했지만, 정작 거기에 노출된 도모태자는 전신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이, 꼬마.」

죽음의 기사에게서 퍼지는 음산한 기운이, 도모태자에겐 마치 맹수의 하울링처럼 다가왔다.

아니, 그건 어찌 보면 경멸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작위를 받은 귀족들이 일반 백성들을 대할 때의 감정. 도모태자, 그가 혈국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모르고 자신들을 적대시하는 ‘야만인’들을 볼 때의 눈빛이었다.

「좋은 말 할 때 눈 깔고 거기서 내려오지?」

죽음의 기사, 샤논은 손에 들고 있던 소드 브레이커를 역으로 쥐면서 바닥을 내리찍었다.

쿵!

검은 그림자가 파문처럼 퍼져 나갔다.

「무릎 꿇고 고개 조아려. 제가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안 그러겠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싹싹 빌라고. 혈국은 앞으로 아르티야에 맹목적으로 충성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뭐 혹시 아냐? 내가 조금이라도 봐줄지?」

“…….”

아르티야.

그 단어가 도모태자의 심장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아주 오래전 아버지의 손에 갈가리 찢겨 나갔던 패배자들의 이름이, 여기 다시 돌아와 이제 그들을 찢어 놓고 있었다.

“……결국 클랜을 복구하려는 것이오?”

「그건 우리 위대하신 인성왕께서 결정하실 문제지? 하지만 돌아왔으니 재결성은 시간문제일 테고. 그쪽이 참견할 문제는 아니라고 보는데. 그보다. 안 꿇어?」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가득했지만. 그 속에 담긴 살의를 못 읽을 리가 없었다.

「내가 이래 봬도 제법 짬밥이 있는 몸이거든. 우리 인성왕이 성격이 좀 그렇긴 해도, 이 몸이 말하면 들어는 준다는 말씀. 어때?」

도모태자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홀을 둘러보았다.

이미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은 귀족과 기사들이 자신만을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안 됩니다, 전하! 본국을 적들에게 가져다 바친다니요! 저흰 끝까지 항전을 할…… 컥!”

“투항을 해서는 안 될…… 큽!”

개중에 비분강개한 귀족들이 들고일어나 따졌지만, 바로 뒤에 시립해 있던 디스 플루토들이 서슴 없이 그들의 명줄을 끊어 버렸다.

덜덜덜…….

다른 귀족과 기사들은 그걸 보면서 몸을 잘게 떨었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침이 튀도록 항전을 주장하던 이들도, 막상 죽음이 눈앞에 닥쳐오자 두려움에 젖는 듯했다.

그들은 애처로운 눈빛으로 도모태자를 바라보다, 슬쩍 시선을 옆으로 회피했다.

전선에서 용맹을 자랑한다는 저들이 저러할진대, 밖에서 여전히 힘겹게 싸우고 있을 일반 병사들은 어떠할 것인가.

「한 놈이라도 더 살려야지?」

도모태자는 다시 샤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매는 잔뜩 일그러져 있었지만, 동공은 위아래로 쉴 새 없이 요동쳤다.

“……무릎을 꿇으면, 살려 줄 텐가?”

「너 하는 짓 봐서.」

“…….”

「소중한 백성들이라며? 다 뒤져도 상관없어? 사실 우리는 상관없긴 한데.」

우리는 오히려 희생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즐겁거든. 영혼이 많아져서 말이야. 그렇게 덧붙여진 말에.

도모태자는 결국 천천히 옥좌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발걸음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황태자 전하!”

“으흑흑! 전하!”

귀족들은 그런 도모태자를 보면서 눈물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러지 말라고 애원하는 자들도 있었으나, 디스 플루토의 칼날이 더 가까워지면서 울음을 삼켜야만 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렇게 도모태자는 옥좌에서 홀까지 이어지는 계단도 천천히 내려오다, 샤논 앞에 섰다.

가까이서 보게 된 샤논은 그가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너무 컸다. 아니, 실제 크기 차이는 얼마 나지 않아도, 그 앞에 선 자신이 너무나 작게 느껴졌다.

일개 수하가 이 정도일진대, 아버지 식탐황제를 꺾었다는 독식자는 대체 얼마나 큰 걸까?

「무릎 꿇고.」

도모태자는 고개를 숙인 상태 그대로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이마도 피 터져라 땅에다 좀 세게 부딪쳐 주고.」

쿵!

쿵-

도모태자는 시키는 대로 이마를 바닥에다 찧기 시작했다. 얼마나 세게 부딪치는지 단번에 두개골이 깨지고, 살갗이 찢어지면서 얼굴이 피범벅이 될 정도였다.

「자, 그리고 할 말은?」

“죄송합니다.”

「잘 안 들리는데.」

“죄송합니다!”

기어들어 가던 목소리는 끝내 울분이 되고 말았다.

“노여우시더라도 여태 저희 혈국이 헤븐윙과 아르티야에 했던 모든 실수들…….”

「실수?」

“아니. 과오들에 대해서 사죄를 드릴 터이니…… 백 번 천 번, 몇만 번을 사죄드려도 모자랄 정도로 못난 짓들에 대해, 부디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용서해 주신다면 혈국은 그 은혜를 영원토록 잊지 않을 것이며, 아르티야의 하인이자 손발이 될 것입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한번 터지기 시작한 울음 섞인 목소리는 홀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쾅! 쾅!

도모태자는 다시 한 번 더 땅에 다 머리를 찧었다. 귀족들은 더 이상 그 광경을 지켜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샤논은 피가 고인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고개를 전혀 들 생각이 없는 녀석의 뒤통수를 보면서. 천천히 자세를 낮추고는 도모태자의 귓가에 대고 입술을 달싹였다.

「쯧쯧! 아니지. 아니야. 손발이 아니라, 개가 되어야 하는 거야. 개. 멍멍. 몰라? 자 따라해 봐. 뭐라고?」

“멍!”

「다시.」

“멍멍! 멍!”

「그렇지.」

“멍! 멍멍멍!”

「아하하! 그렇지. 이제야 좀 볼 맛이 나네.」

“멍멍!”

샤논은 크게 파안대소를 터뜨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럴수록 도모태자가 짖는 소리는 울음이 잔뜩 섞인 채 커져 갔다.

「어휴. 참 수하들 살리려고 하는 노력이 가상하네. 이만하면 됐다. 개새끼야, 이제 고개 들어 봐.」

이제야 겨우 끝난 걸까. 도모태자는 왈칵 쏟아지려는 눈물을 겨우 억누르면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번만. 이번만 어떻게든 치욕을 감수해 넘기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혈국의 유구한 역사가 지속되는 동안 항상 영광된 세월만 있었던 건 아니었고, 개중에는 지금보다 더한 누란의 위기에 빠질 때에도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선대왕들은 모두 지혜와 슬기로 위기를 빠져 나와 나라의 명맥을 유지하고, 후대에 부흥을 맡겼다.

그렇게 이어진 세월이 자그마치 천 년이 넘었다.

지금도 그때와 마찬가지였다. 당분간은, 아니, 자신의 통치가 지속되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아르티야의 개로 살아야겠지만. 그건 자신의 대에서만 감수하면 될 일이었다. 자식, 혹은, 손자의 대에 이르러서는 지금의 치욕을 어떻게든 되갚아 줄 수 있을 거라고 굳건하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샤논의 허락을 받아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나라는 유지할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을 때, 자신의 목으로 날아오는 섬광을 보면서. 어안이 벙벙한 나머지 아주 잠깐 동안 이해가 가질 않아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으이구, 병신.」

저 멀리서, 귀족과 기사들이 자신을 애처롭게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설마 그걸 진짜 믿었냐?」

촤아악-

* * *

“누가 누구더러 인성질을 한다고 하는지 모르겠군.”

연우는 샤논과 연결된 정신 감응을 통해 멍한 얼굴로 목이 잘려 나가는 도모태자를 보면서 혀를 찼다.

살려 줄 것처럼 굴면서, 굴욕이란 굴욕은 다 줘 놓고 마지막에 칼질이라니.

혈국은 샤논에게, 엘로힘은 한령에게 뒷정리를 맡기면서, 단 한 명도 남기지 말고 전부 척살하라고 단단히 일러두긴 했다지만.

그래도 저런 방식이라니. 참 악취미도 저런 악취미가 없었다.

남은 놈들도 전부 쓸어버려. 샤논은 휘하의 디스 플루토들에게 그렇게 명령을 하면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이런 걸 어디서 배웠겠어? 이게 다 우리 위대하신 인성왕님의 크나큰 가르침을 본 받…….」

연우는 또다시 쓸데없는 소리를 해 대는 샤논과의 통신을 끊어 버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저 하늘 위.

분명히 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던 부유성 라퓨타가 떠 있었다.

비록 반파가 되어 레어로서의 기능은 거의 상실되다시피 했지만.

그래도 저곳에는 연우가 반드시 찾아야 할 것이 있었다.

아르티야의 클랜 하우스.

동생이 엘릭서와 함께 남겼을 마지막 유품을 수습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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