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아르티야 (3)
부유성 라퓨타는 본래 칼라투스의 레어로서, 미궁의 중심부에 설치된 심상 세계에 위치해 있었지만.
지금은 관리자였던 우발라가 사라지면서 50층 스테이지의 하늘을 배회하는 중이었다.
자체적인 스텔스 기능으로 모습을 감추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지만.
하지만 저마저도 내장된 마력이 모두 소모되고 나면 스텔스 기능이 사라지거나, 추락해 스테이지 한가운데에 처박힐 게 분명했다.
그래도 다행히 아직까지 다른 여러 기능들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지, 아무 이상이 없어 보였다.
[‘불의 날개’가 작동합니다.]
[‘파초선’의 바람이 부유와 비행을 돕습니다.]
연우는 불의 날개를 활짝 펼치면서 라퓨타가 있는 곳으로 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빠르게 비행할 수 있도록 도왔다.
바람은 브라함과 갈리어드, 에도라까지 부드럽게 안았다. 마희성은 아래에서 대기하라고 일러둔 상태였기에 따라오려 하지 않았지만, 그들도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브라함은 연우를 따라 무사히 라퓨타에 착지하면서 작게 탄성을 흘렸다.
“동주칠마왕의 맏이, 우마왕이 가진 신물이나 보패에 신기한 것들이 많다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으뜸이 파초선이라더니. 참으로 신비한 바람이로군. 대체 그건 어떻게 뜯어낸 건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사타왕의 도주를 막기 위해 하데스의 식령검을 사용하면서 뜯어낸 파초선은 어느새 연우와 완전히 동화(同化)가 되어 있었다.
[파초선(일부)]
분류: 양손 무기
등급: 신물
설명: 동주칠마왕의 맏이, 우마왕이 그의 아내 나찰녀에게 혼인 예물로 준 부채.
한 번 부치면 강풍이, 두 번 부치면 비바람이, 세 번 부치면 태풍이 불며, 계속 부칠수록 바람의 위력이 강화된다는 전승을 지닌 보패.
하지만 현재 이 파초선은 진본의 일부를 뜯은 가품에 가까워 위력이 현저히 약하다.
* 바람의 총애
자연 현상인 ‘바람’으로부터 깊은 총애를 받게 된다. 단지 소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바람이 따라붙어 이동 속도가 자연스럽게 증가하며, 숙련도가 높아지면 권능에 가까운 스킬들이 자연스럽게 개방된다.
* ???
진본이 아닌 관계로 확인이 불가능한 옵션입니다. 단, 숙련도에 따라 일부 개방이 가능합니다.
* ???
진본이 아닌 관계로 사용이 절대 불가능한 옵션입니다.
비록 연우가 가져온 건 진짜 파초선의 일부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이것만 해도 엄청난 성과라 할 수 있었다.
“식탐의 돌 덕분이었지? 식탐, 그놈이 그래도 도움은 좀 되었나 보이.”
브라함은 호기심 가득한 학자의 눈길로 유심히 바람을 살폈다. 바람을 끌어당기는 마력의 근원지가 연우의 심장 옆, 현자의 돌이라는 것을 금세 눈치챈 것이다.
그때.
「내 돌! 내 도오올! 내놔라! 내 놓으란 말…… 키아아악!」
갑자기 연우와 브라함의 머릿속으로 식탐황제의 절규가 들렸다.
비록 울부짖다가 도중에 고통에 쥐어짜여 비명을 지르긴 했지만, 녀석의 의식만큼은 여전히 또렷한 상태였다.
“그놈 참, 시끄럽기도 많이 시끄럽지. 다른 놈들도 그러더니만. 소울 컬렉션에 들어가고 나서도 저 정도라니. 하! 그래도 ‘왕’은 왕이라는 건가?”
브라함이 가볍게 헛웃음을 흘렸다.
사실 소울 컬렉션 내부는 식탐황제 말고도, 마그누스와 탐으로 인해 많이 시끄러운 상태였다.
「피조물이 되어, 필멸자가 되어, 어찌 이리도 극악무도한 짓을 벌이는가!」
「제발! 제발 풀어 줘! 하라는 건 무엇이든지 할 테니, 제발……!」
사실 연우에게 죽거나 흡수된 영혼들은 칠흑왕의 권능으로 인해 망령으로 영락하며 자아가 붕괴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하지만 브라함의 말마따나 이번에 죽은 왕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탑의 최정상으로 군림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 주려는 듯, 영락하고 나서도 좀처럼 자아를 잃지 않고 있었다.
도리어 생존에 대한 욕구를 활활 불태우면서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악착같이 버티고 있으니.
하지만 연우는 그런 녀석들을 볼 때마다 가당치도 않다는 듯 가볍게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이미 그들에 대한 예속권은 자신에게 있는 데다가, 도리어 버티면 버틸수록 고통스러운 건 녀석들 자신이었으니까.
「내 도오올……!」
특히 가장 끈질긴 건 식탐황제였다. 여태 영혼석을 보유하면서 영혼도 많이 성장했던 것인지, 쉽게 집착을 놓지 못했다.
“정신을 조금이라도 차렸으면 돌보다는 죽어 가는 제 백성들부터 챙길 것이지. 쯧!”
브라함의 눈에는 그런 녀석이 어이가 없을 따름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블러드 캐슬은 불에 타고, 혈국 플레이어들의 영혼은 속속들이 영괴에게 잡아 먹히는 중이었다.
녀석도 분명히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자식이나 백성에 대한 걱정은커녕, 앵무새처럼 계속 돌 타령만 해 대고 있으니.
“하지만 그래도 쓸 만한 것도 있지 않습니까?”
[사왕좌에 예속된 권능, ‘연옥로(煉獄爐)’가 발현되었습니다.]
「크아악! 아아아악!」
「제발, 그만! 그만하지 못할까! 으아아악!」
「까아아악! 살려 줘! 살려 줘어어! 아니면 차라리 죽여 줘!」
사왕좌는 죽음과 명계를 다스리는 신위.
당연히 개중에는 말을 듣지 않거나, 생전에 죄업을 많이 쌓은 영혼을 다스리는 권능도 있기 마련이었다.
[연옥로]
등급: 권능
설명: 지옥에서 끄집어 올린 겁화를 이용해 영혼의 업(業)을 불살라 원한과 원망, 원념을 뽑아 에너지원으로 사용한다.
원래는 마력이 바닥난 비상시, 소지한 영혼을 희생시켜 마력을 뽑아 올리는 마력 기관의 형태로 사용할 수 있을 테지만.
이미 영혼석을 두 개나 쟁취한 연우로서는 마력이 바닥날 일이 크게 없는 까닭에 다른 방향으로 쓰고 있었다.
이렇게 말을 듣지 않는 영혼들을 고문하는 형태로.
이렇게 하면 녀석들이 내뱉는 사념을 읽기 쉬워지니. 그 속에서 유용한 정보들만 쏙쏙 골라 사용할 수 있었다.
각 왕들이 갖고 있는 고급 정보들. 각 클랜 하우스가 위치한 외우주의 좌표나, 비밀 창고 등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다. 샤논과 한령이 각각 혈국과 엘로힘을 찾아 움직일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이 연옥로 덕분이었다.
더군다나 녀석들만이 알고 있는 히든 피스를 뽑아내는 데도 아주 효과적이었으니.
연우는 동생이 여러 특전을 통해 알아낸 히든 피스들과 통합해, 앞으로 몇 개 남지 않은 층계들의 공략법을 재검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영혼에 대한 신비가 풀린다는 거지.’
영혼을 이리저리 마구잡이로 난도질하다 보니, 역설적으로 영혼에 대한 이해도가 저절로 깊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연우는 칠흑왕의 권능을 갖고 있으면서도, 죽은 영혼들을 도구로 사용할 생각만 했을 뿐. 분석해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연옥로가 개방되면서 이야기는 달라졌다.
영혼을 자유롭게 다룬다는 것은 다양한 사용법에 대해서도 탐구할 수 있다는 뜻.
하물며 왕 급의 격이 높은 영혼들을 마음껏 다루다 보니, 다양한 실험이 가능했다.
영혼은 어떤 구조로 이뤄져 있는지, 영혼에 남아 있는 자아는 어떤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지, 인지 체계와 사고 체계는 어떤 패턴으로 작동하는지 등등.
여태 브라함에게 강의를 받고, 용의 지식으로 접하긴 했지만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던 신비들이 활짝 열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실험 재료로 이리저리 사용하다 자아가 완전히 붕괴해 버리고 나면, 샤논이나 한령에게 던져 주어 다시 성장을 도모할 수 있으니.
녀석들은 여러모로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유용한 자원이라 할 수 있었다.
“이따금 자네의 생각을 엿보면 왜 그토록 샤논이 인성, 인성, 노래를 불러 대는지 알 것 같단 말이지.”
브라함은 그런 연우의 생각을 슬쩍 읽고, 피식 웃으면서 소울 컬렉션과의 링크를 단절시켰다.
연우도 피식 웃고 말았다.
“유용하니까요.”
“그래. 유용하면 된 셈이지. 연구가가 저놈들의 사정까지 신경 쓸 필요야 없지 않나. 허허!”
브라함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말은 이렇게 해도, 그 역시 연우와 똑같은 세계관을 갖고 있었으니까. 그도 연우와 세샤에게나 마음을 열 뿐이지, 탐구를 위해서라면 타인의 희생 따윈 아무렇지 않게 여기지 않던가.
“한데.”
브라함은 웃음을 뚝 그치다, 가만히 눈을 좁혔다.
“칼라투스 놈은 여전히 별 반응 없나?”
연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무래도 영혼 자체의 손실이 큰 것 같습니다.”
“그게 제일 아쉽단 말이지.”
브라함은 입맛을 다셨다.
칼라투스가 쓰러진 뒤, 연우는 하데스의 식령검을 사용해서 칼라투스의 사체도 똑같이 흡수했다.
덕분에 육체는 또다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룰 수 있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칼라투스의 영혼만큼은 제대로 복구시킬 수가 없었다.
기어 다니는 혼돈에 예속된 지 오래라 이미 영혼은 영락해 버릴 대로 영락해 버린 상태였고, 흑기를 먹이면서 기억을 강제 복원하려 해도 금세 부서질 것처럼 위태로워져 중단해야만 했다.
“나중에 따로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겠지.”
칼라투스에게는 아직 알아낼 것이 많았기에. 연우는 어떻게든 칼라투스의 영혼을 복원시킬 생각이었다.
연옥로로 영혼들을 일일이 분석하고 깨우치다 보면 어떻게든 방법이 생기지 않을까. 그게 안 된다면, 칠흑왕의 권능을 더 깊게 깨우다 보면 뭔가 새로운 길이 열리지 않을까 하고 막연하게 기대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보다…….”
연우는 다시 한 번 더 웃다가, 주변을 쓱 훑었다.
폐허가 되다시피 한 라퓨타가 한눈에 들어왔다.
칼라투스가 강제 소환되고 난 뒤에 엉망이 된 곳. 아무래도 다시 제 형태로 복원하려면 꽤 많은 시간과 자원을 필요로 할 듯 싶었다.
‘기어 다니는 혼돈에게서 감염도 꽤 많이 진행된 듯하고.’
칼라투스의 기운보다도 기어 다니는 혼돈이 남긴 신력이 더 많이 남아 있으니. 이곳을 정말 용의 레어라고 해도 될지, 아니면 신을 기리는 신전이라고 해야 될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아마 조금이라도 더 늦었더라면 기어 다니는 혼돈의 수중에 완전히 떨어지지 않았을까.
‘복원보다는 정화가 먼저겠는걸.’
연우는 눈살을 가만히 좁혔다.
‘어쩔 수 없지.’
연우는 복원을 천천히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허공에다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새로운 사용자가 오퍼레이팅 시스템에 접속을 시도합니다.]
[시스템이 새로운 사용자를 인식합니다.]
[용근(우발라) 확인.]
[새로운 사용자가 등록되었습니다.]
[반갑습니다. ### 님.]
두둥-
라퓨타를 장악하고 있던 오퍼레이팅 시스템이 용근의 인식에 따라 연우의 통제하에 들어왔다. 이미 한차례 미궁의 새 주인으로 인식된 기록이 있기 때문에 사용자 등록은 아주 간단했다.
이제 부의 던전처럼, 라퓨타도 어느 위치에서나 손쉽게 다룰 수 있게 된 것이다.
레어의 새로운 주인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사용자의 권한으로, 아르티야의 클랜 하우스로 이어지는 통로가 개방됩니다.]
연우는 설정 권한을 사용해, 라퓨타 내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클랜 하우스로의 통로를 열었다.
포탈 안쪽으로 발을 들이자, 주변 정광이 바뀌었다.
제법 큰 평수와 규모를 자랑하는 가옥이 눈앞에 있었다.
* * *
아르티야의 클랜 하우스는 사실상 만들어지기 전부터, 클랜원들의 철저한 컨디션 관리와 복지를 위해 계획된 가옥이었다.
연구실, 보관소, 저장고, 무기고, 휴게실, 숙직실, 훈련장.
필요에 따라 각 구획이 구분되어 있으며, 그 안에서도 각 클랜원들을 위한 개인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원래는 라퓨타와 다른 좌표로 지정된 외우주였지만.
클랜원들이 전부 떠난 뒤, 정우는 칼라투스와의 추억이 남아 있던 라퓨타로 돌아오면서 클랜 하우스의 좌표를 이곳에다 지정해 두었고, 그것이 여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감염이 여기까지 진행되었었어.’
기어 다니는 혼돈의 감염은 이미 라퓨타의 중앙까지 침투를 했던 건지, 클랜 하우스마저도 대부분이 시커멓게 물들어 있는 상태였다.
기어 다니는 혼돈의 신력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면서 침입자의 접근을 철저하게 차단하고 있는 중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바로 잡아먹히겠는데.”
“이미 자체적인 영성(靈性)까지 띠고 있어요.”
브라함은 불길하게 꿈틀대는 신력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에도라도 〈혜안〉으로 신력을 살피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그때.
츠츠츠-
신력이 연우 등을 감지하고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따금 아가리를 열면서 이빨을 보이기도, 촉수를 뻗을 준비를 하기도 했다.
“빨리 치워 버리도록 하지.”
브라함이 화성의 서를, 갈리어드가 활을, 에도라는 신마도를 천천히 뽑으면서 앞으로 나섰다.
연우도 비그리드를 옆으로 휘둘렀다.
[사왕좌에 예속된 권능, ‘지옥겁화’가 발휘됩니다.]
[‘성화’의 속성이 더해집니다!]
화아악-
지옥의 불길이 대지를 따라 거칠게 일렁거렸다. 여기다 성화를 섞어 넣자, 검은 불길은 단숨에 신력을 불살랐다.
그렇게 정화가 이뤄지면서 기어 다니는 혼돈의 신력이 재가 되어 흩어지고.
찰칵, 찰칵-
끼아악!
[‘하데스의 식령검’이 기어 다니는 혼돈의 신력을 흡수합니다!]
연우가 왼손을 앞으로 내뻗어 신력의 잔재를 흡수하면서. 천천히 길을 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