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434화 (434/862)

9화. 아르티야 (4)

키키킥-

캬악! 캬아악!

클랜 하우스를 뒤덮고 있던 기어 다니는 혼돈의 신력이 모두 사라진 자리에는.

괴상한 괴물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링크가 끊어지면서 남은 신력들이 자체적인 영성을 띠면서 이런 저런 다양한 형태의 사념체를 구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진화론적인 관점에서는 절대 탄생할 수 없는 기이한 형태의 생명체들.

끈질기기도 얼마나 끈질긴지, 성화가 섞인 지옥겁화가 휘몰아쳐도 쉽게 타지 않을 정도였다.

화력을 높이려 해도, 자칫 잘못했다간 클랜 하우스가 날아갈 수도 있었으니.

“골치 아픈 놈들이로고.”

브라함도 그런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가볍게 혀를 차면서 마법을 영창했다. 그러자 바닥을 따라 화려한 이펙트가 터지면서 대규모 마방진이 설치되었다.

신력은 신을 구성하는 힘. 그것을 원점으로 회귀시키는 마법이었다.

화아악!

빛무리가 올라오면서 녀석들을 구성하고 있던 신력이 약화되기 시작하고.

투두둥-

뒤에서 조용히 시위에다 화살을 걸고 있던 갈리어드가 손을 놓았다.

그러자 화살이 단숨에 수십 개로 분리되어 궤적을 그리면서 떨어졌다.

괴물들의 머리가 폭죽처럼 연달아 터져 나갔다.

퍼퍼펑!

[하데스의 식령검이 기어 다니는 혼돈의 신력을 흡수합니다!]

[숙련도가 소폭 상승하였습니다. 3.2%]

[‘아트만 시스템’이 흡수된 신력을 판별하여 정제를 시도합니다.]

[정제율: 32.1%]

[죄악석(오만·식탐)이 반응하여 정제율을 대폭 증가시켰습니다.]

[최종 정제율: 42.9%]

[정제된 신력이 마력 저장고(드래곤 하트)에 귀속됩니다.]

지옥겁화로 괴물의 내구도를 약화시키고, 브라함의 마법으로 신력을 해체시킨 뒤 갈리어드와 에도라가 바쁘게 뛰어다니면서 뼈대만 남은 녀석들을 제거하길 여러 차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클랜 하우스에서 모든 신력을 거둘 수 있었다.

물론, 그 모든 재는 하데스의 식령검이 탐욕스럽게 먹어 치운 상태였다.

[작은 이벤트를 성취했습니다.]

[공적치가 50,000만큼 제공됩니다.]

그렇게 드러난 클랜 하우스는 연우가 일기장을 통해 봤던 모습 그대로였다.

“오랜만이로군. 여기도.”

브라함은 약간 향수에 젖은 얼굴이 되어 작게 중얼거렸다. 동생의 연금술 스승으로서 아르티야와 각별한 관계를 맺었던 그였으니. 그에게도 이곳은 추억의 장소였던 셈이었다.

특히 세샤를 돌보느라 동생의 곁을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기도 했기 때문에. 향수는 더 짙어질 수밖에 없었다.

평생 튜토리얼에서 벗어날 일이 없을 거라고 여겼던 갈리어드도 자신을 스승이라 부르며 쫄래쫄래 따라다니던 아이를 떠올리면서 묘한 표정이 되었고.

에도라는 말로만 듣던 아르티야의 본거지를 보게 되었다는 사실에 신기해하면서도, 혹여나 하는 마음에 힐끔힐끔 연우를 살폈다.

“…….”

연우는 멀거니 서서 클랜 하우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리를 비켜 주세나.”

브라함은 그런 연우를 슬쩍 보다가, 갈리어드와 에도라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연우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 * *

클랜 하우스의 구조는 길쭉한 중앙 건물을 중심으로, 3개의 작은 동이 별도로 연결되어 있는 형태였다. 전체적으로 ‘E’자 형태라고 보면 되었다.

물론, 그 외에 별도로 각 개인이 머무는 방이나, 개인 훈련장들도 갖추어져 있었지만 그건 메인 하우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연우는 느린 발걸음으로 클랜 하우스의 건물들을 일일이 살폈다.

자체적으로 내장된 클린 마법 덕분인지, 클랜 하우스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어제까지 사람이 머물고 있었던 것처럼 깨끗했다.

덕분에.

그런 곳에서.

-으하하! 저 꼴은 또 뭐야!

-하아. 저 새끼, 또 사고 치고 돌아왔네.

-하하! 그래! 그래야 우리 대장이지! 안 그래?

-하여간 저 인성…….

-사랑해요.

연우는 수많은 환상들을 보았다.

동생이 친구들과, 혹은 동료들과 보냈던 추억의 잔상들을.

-으아아! 야 이 미친 새끼야! 그거 건드리면 엿 된다고!

-응? 이렇게 하는 거 아녔어?

-모르면 제발 닥치고 가만히 있어! 좀!

연구실에서는 여러 시약에 손을 대면서 베이럭과 티격태격하던 추억이.

-이거 얼마나 할까?

-글쎄. 네가 입고 있는 천공갑주 정도 하지 않을까?

-……미친. 무슨 보석 하나가 그렇게 비싸?

-그걸 말이라고 하냐? ‘인어의 눈물’이라고 하면 다들 눈이 뒤집어지는데. 어째 클랜장이라는 놈이 경제적 개념이 없…….

-삥땅 좀 칠까?

-야! 그러다가 나중에 레온한테 걸리면 우리 둘 다 묵사발…….

-술 먹자.

-콜!

보관소에서는 다른 사람들 몰래 사 마실 술 생각을 하며 같이 키득거리던 리언트와의 추억이.

-대장, 약하다. 이걸로는 안 된다. 다시 일어나라.

-야! 너무한 거 아냐? 너랑 나랑 피지컬 차이 생각 안 하냐? 그리고 난 전투형이 아니라 마법사형…….

-시끄럽다. 일어나라.

-으아아!

공동 훈련장에서는 거인의 체술을 가르쳐 주겠답시고 귀찮게 계속 들들 볶아 대던 발데비히와의 추억이.

-더 자고 싶다.

-나도.

-그러자.

-그래.

휴게실에서는 같이 늘어져라 낮잠을 즐기던 바할과의 추억이.

-대장. 이번 달에 쓴 예산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나 있나? 제발…… 개념 좀 챙기면서 돈을 쓰게. 듣기로는 또 기분 낸답시고, 근처 술집에서 골든벨을 울렸다고 하던데? 계산서는 아이템 구입 명목으로 속이고?

-에이. 우리 총관 나리가 마누라도 아니고 왜 이렇게 의심이 많으실까.

-제보자가 있어서 말일세.

-하! 하하! 젠장……! 또 누구야!

-제발 좀! 돈 아끼라고, 이 깡통 놈아!

회의실에서는 돈 한 푼 아껴 쓰겠답시고 씨름을 해 대던 레온하르트와의 추억이.

-대장, 할 말이 있어요.

-뭔데?

-저희, 결혼하기로 했어요.

-응? 그게 뭔 강아지 풀 뜯어 먹는…….

-애도 가졌어요.

-뭐? 대체 언제?

늘 원수처럼 으르렁거리다가 갑자기 결혼을 하겠다고 폭탄선언을 하던 쿤 흐르, 잔느와의 추억이.

무기고에서는 사디와의 추억이.

뒷마당에서는 호스트와의 추억이…….

곳곳에 동생이 행복해했던 5년 간의 기억들이 모두 담겨 있었다.

그리고.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

동생의 개인 방에서는. 연인이었던 비에라 듄과의 애틋한 추억이 남아 있었다.

연우는 나타났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여러 잔상들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곳곳에 동생이 동료들과 함께 웃고, 떠들고, 화를 내고, 소리치고, 다짐하고, 뛰어다니던 모습들이 보였다.

그곳에서만큼은. 동생은 그래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언제나 눈물과 분노, 회한으로만 가득하던 일기장의 후반부와는 전혀 다른 모습.

물론, 잔상 속에는 동생이 상처만 입었던 여러 잔혹한 기억들도 더러 섞여 있었지만.

연우는 일부러 그런 곳에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지금은 동생을 위해 지난 과거를 곱씹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한데.

회중시계도 그런 연우의 마음을 아는 건지. 오늘따라 유달리 조용했다.

그러다.

“여긴가?”

연우는 중앙 건물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방문 앞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개인 집무실. 클랜장의 사무실이었다.

‘……정우가 마지막으로 눈을 감기도 했던 곳.’

연우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딸칵-

집무실도 다른 방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생전에 책을 좋아하던 성격답게 창문을 제외한 벽은 전부 책장으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고, 중앙에는 검은색 카펫이 깔려 있었다. 그 위로는 헤노바가 갈색 오크나무를 특별히 가공해 만들어 준 책상과 의자가 있었다.

책상에는 좀 전까지 사람이 앉아 있던 것처럼 깃펜과 서류 몇 가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작은 상자와 함께.

“…….”

연우는 동생이 서재 겸용으로도 쓰던 집무실을 훑어보다가, 조용히 중앙에 있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끼릭.

따로 윤활유를 바르지 않은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여기서…….’

연우는 책상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바로 자신이 앉아 있는 이 자리에서. 동생은 자신과 어머니를 그리면서 눈을 감았다. 일기장은 분명히 거기서 끝나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여기에 그 뒷이야기가 있을 테지.

메마른 잉크액과 제자리에 꽂힌 깃펜, 그리고 정리된 서류들은 일기장의 마지막 장면 그대로였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달랐다.

‘상자.’

연우는 천천히 상자 쪽으로 손을 가져가 뚜껑을 열었다.

순간, 연우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사진이었다. 동생이 여러 동료들과 같이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연우는 품을 뒤적여 다른 사진을 꺼냈다. 지구에 회중시계와 함께 딸려 왔던 사진.

‘똑같아.’

사진 속 내용물은 똑같았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상자 속에 든 사진의 뒷면에 글자가 적혀 있다는 것.

생탑력 6217년 7월 9일.

즐거운 하루.

아르티야의 클랜 하우스에서.

마치 갓 글자를 익힌 아이가 쓴 것처럼 비뚤비뚤 서툴게 적힌 글자.

크기도 조절하지 못해서 사진의 뒷면을 거의 다 꽉 채우고 있었다.

아르티야의 멤버 중에서 이런 글씨체를 가진 사람은 딱 한 명이었다.

‘발데비히.’

반거인이었던 발데비히는 거인족의 전통에 따라 어렸을 때부터 투사로서 자라야만 했고, 때문에 글자에 있어서는 문외한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 글을 배운 것도 동생을 통해서였다.

탑을 오르기 위해서는 신체적인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읽을 줄’ 알아야 선택 사항이 그만큼 많아졌다. 더군다나 발데비히는 구강 구조나 사고 체계도 일반인과 많이 달라, 어눌한 말투로 띄엄띄엄 말하기 일쑤였기에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의사소통이 쉽지 않았다. 이를 보완하고 사고 정리를 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글을 알아야만 했다.

때문에 동생은 그를 붙잡아 앉혀 놓고 틈틈이 글자를 가르쳤다. 그리고 덕분에 아르티야가 한창 성장했을 때 즈음에는. 발데비히도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해질 정도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래도 못생긴 글씨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리고 사진이 발데비히의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상자 속에 담긴 내용물들도 하나같이 녀석의 것들로 가득했다.

자그마한 단검부터 반지, 목걸이와 같은 아티팩트들. 전부 동생이 녀석에게 ‘선물’로 주었던 것들이었다.

칼라투스가 분명히 말했었다.

동생의 시체와 유품을 수습해 준 것은 자신이 아닌 발데비히였노라고.

이건 바로 그 흔적일까.

대체 녀석은 그동안 어디로 사라졌던 것이며, 왜 모든 게 끝난 뒤에야 나타났던 것일까. 같은 멤버들에게도 비밀로 했던 라퓨타의 위치는 또 어떻게 찾아냈으며, 바뀐 좌표는 어디서 찾아 들어왔을까.

지구로는 어떻게 보내었고?

너무나 많은 의문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부디 이곳에 그 비밀이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상자의 가장 밑바닥에는 편지가 하나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언젠가 이곳에 찾아올, 정우의 가족에게.

역시나 비뚤배뚤하지만, 그래도 많이 정갈해진 글씨체.

‘역시 내가 이곳으로 오리란 걸 예상하고 있었어.’

연우는 편지를 봉인한 밀랍을 조심히 뜯어, 내용물을 꺼내 펼쳤다.

그곳에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한 투사의 회고가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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