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436화 (436/862)

11화. 아르티야 (6)

엘로힘의 중심 기관, 원로 의회.

“그것참. 때마침 제가 없었으면 큰 횡액을 치를 뻔했습니다그려.”

쑥대밭이 된 의회장을 가로지르는 한 사내를 보면서.

원로 의원들은 하나같이 이를 악물었다. 유구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그들의 유산이 근본도 모르는 잡종에게 능욕당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그들이 야만인이라면서 멸시하던 작자에게 구원의 손길을 바라야 하는 입장이 되었으니.

도무신의 영체로 보이는 언데드와 그림자 군단이 원로 의회를 습격한 것은 너무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독재관 마그누스와 7인대가 용의 미궁에 갇힌 채로, 스테이지가 단절되어 비상 회의를 하고 있던 도중에 이뤄진 습격은.

너무나 갑작스럽고 위협적이라, 원로 의원들도 어떻게 손을 쓸 겨를이 없을 정도였다.

-전부 처치해.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뒤로 빠지고.

엘로힘의 주축이라 할 수 있었던 명문가, 프로토게노이 족의 가주들이 대거 죽은 이때.

엘로힘의 전력은 이미 절반 이상이 깎여 나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상태였다.

물론, 엘로힘이 가진 전력이 프로토게노이 족만 있는 건 아니었다.

엘로힘은 탑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었고, 그동안 단 한 번도 큰 부침을 겪지 않고 항상 손꼽히는 세력으로 군림해 왔을 정도로 탄탄한 인재 집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권력을 중앙 집권화시켜 수뇌가 날아가면 기능이 정지해 모래성처럼 너무 쉽게 무너지고 마는 혈국과 다르게.

엘로힘은 권력을 고루 분산시키고, 개개인의 의무와 명예를 중시하는 공화정 체제를 지니고 있었다.

초월자로들로부터 이어져 온 뛰어난 유전자를 보존하고자 하는 오랜 노력 덕분에 구성원의 실력도 하나같이 뛰어난 편이었다.

반마족이나 타천, 하이 엘프 같은 후예들은 물론, 바니르 족 같은 옛 신족들도 있었으니.

그러니 설사 지금 새로운 전쟁이 벌어진다고 해도, 예전과 같은 위업은 달성하지 못할지언정 쉽게 당할 곳은 아니란 뜻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달랐다.

원로 회의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정확하게’ 그들의 머리 위로 포탈이 열리면서 기습이 이뤄졌으니.

원로 의원들로서는 절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엘로힘이 위치한 외우주는 좌표가 철저하게 비밀에 가려져 있었고, 그중에서도 의결 기관인 원로원의 위치는 더더욱 기밀에 부쳐져 있었다.

심지어 1선이나 2선에 불과한 초선 의원들에게는 접근조차 허용되지 않는 게 원로원의 좌표였다.

그리고 그마저도 접근에 3중, 4중으로 보안 체계가 구성되어 있었다.

이런 모든 보안 체계를 해제하고, 곧장 좌표를 열기 위해서는 그만한 비상 특별 권한이 필요한 바.

독재관 마그누스가 ‘직접’ 열어 준 것이 아니고서야 절대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때문에 원로 의원들은 평상시처럼 원로원의 규칙에 따라 모든 무장을 해제하고 토론에 임하고 있었고.

기습에 속수무책으로 큰 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외부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력이 다급하게 내부 건물로 침투를 시도했지만, 그림자 군단이 아주 용의주도하게 모든 출입 통로까지 통제하면서 접근이 쉽지 않았다.

결국 그렇게 부지불식간에 4할에 가까운 의원들이 단번에 쓸려 나가고 말았으니.

남은 의원들은 정신을 차리면서 어떻게든 반격을 시도하려 했지만, 무장이 빈약한 데다가 물밀 듯이 쏟아지는 군세에 계속 허물어졌다.

특히 선봉에 선 한령의 활약이 가장 눈부셨다.

눈치가 빠른 의원들은 그가 청화도의 도무신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챘을 정도로, 한령은 아홉 개의 칼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의원들 사이를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다.

죽었다고 알려질 당시보다 훨씬 더 날카로워진 칼춤은 너무나 매섭기만 했으니.

바로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베이럭이었다.

엘로힘은 오래전부터 숙원 사업이었던 ‘고대종 복원 계획’을 위해 연금술사 출신인 베이럭을 특별히 초빙한 상태였고.

때마침 의회장에 난리가 났다는 소식을 들은 베이럭이 압도적인 화력을 자랑하며 통로의 통제를 뚫으며 진입을 시도했으니.

과거에는 아르티야의 적대 세력이었지만 지금은 아르티야가 된 도무신과, 아르티야 출신이나 이제는 적대 세력이 된 안티 베놈의 충돌은 아주 거셌다.

가뜩이나 다 무너져 가던 의회장은 완전히 반파되었고, 눈먼 칼 바람과 맹독에 죽어 나가는 의원들의 수도 만만치 않았다.

베이럭은 왜 자신이 여러 플레이어들로부터 ‘반칙’이니 ‘재앙’이니 하는 소리를 듣는지를 증명하려는 듯, 여태 보도 못한 독극물을 잔뜩 사용했다.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그림자 군단이 녹아내리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때부터였다.

절대 죽을 수가 없는 것이 영체였지만, 베이럭의 맹독은 그런 영체마저도 녹여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서서히 의회장이 베이럭의 영역으로 변해 가자, 한령은 재빨리 퇴각을 시도했다. 패퇴(敗退)였다.

결국 그렇게 원로원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의원의 절반 이상이 죽고 마는 대참사만큼은 돌이킬 수가 없었다. 그들 하나하나가 엘로힘을 떠받치는 중요 가문 및 세력의 수장들이고 후예들이었으니.

결국.

원로원의 사건은 엘로힘의 소속원들 사이에 금세 퍼져 나갔고, 불같은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지금 임시로 구축한 의회장의 바깥에서는 연신 집회와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하나같이 ‘전쟁을 선포하라’, ‘아르티야에 죽음을’과 같은 선동적인 문구는 물론.

‘구원자인 베이럭에게 힘을 실어라’와 같은 구호도 이따금 들리는 중이었다.

여태 엘로힘의 명예를 먹칠하기만 한 팔푼이 같은 원로원은 물러나고, 영웅인 베이럭에게 당장 실권을 쥐여 주어 곧 닥쳐올 아르티야의 새로운 공세에 대비하라는 여론이 급속도로 고개를 들고 있었다.

가만히 있다가 권력을 빼앗기게 생긴 원로 의원들로서는 날벼락과 같은 구호인 셈이었다.

구원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자신들의 권력은 별개의 이야기였으니까.

그런데 이대로 주도권을 고스란히 빼앗기게 생긴 것이다.

역시나 근본도 모르는 외부 인사에게.

하물며 베이럭은 지금 그들을 위기로 몰아넣은 아르티야의 출신이기도 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런 여러 의원들의 생각과 다르게, 이미 여론은 원로원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는 중이었으니. 민심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가 막막한 상태였다.

더구나.

베이럭은 아주 영리하게 여론을 이용할 줄 아는 수완도 지니고 있었다. 정말 골방에 틀어박혀 실험만 일삼는 샌님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로.

그는 아주 영악했다.

의원들이 혼란을 수습하기에 바빠 겨우 정신을 차렸을 무렵. 이미 베이럭은 의원 자격이 없어도 자연스럽게 의회에 참석하고, 중요 발언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입지가 커진 상태였다.

그렇기에.

베이럭이 의회장의 중심을 가로질러 아무렇게나 빈자리에 착석하는 내내. 중진 의원들의 눈총은 따갑기만 했다.

하지만.

베이럭은 코웃음만 칠 뿐 그런 걸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투였다. 오히려 그의 주변을 눈치 빠른 젊은 의원들이나 초선 의원들이 보호하듯이 둘러싸고 있었으니. 그 숫자도 맹렬하게 불어나는 중이었다. 새로운 당파의 시작이었다.

폭풍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원로원을 통째로 집어삼킬지도 모를.

“무엇들 하십니까? 어서 본회의를 시작하시지 않고요. 지금 한시가 급박한 상황이지 않습니까.”

베이럭의 말투에 의원들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지금은 외적이 더 급한 상황이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지금부터 논의할 안건은.”

결국 안건 발의자가 고요한 분위기에서 눈치를 살피다가, 단상에 나와 발표를 하기 시작했다.

“아르티야에 대한 전쟁 선포 및 마군과의 동맹 제안에 대한 건입니다…….”

* * *

「못난 꼴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연우는 다 쓰러져 가면서도 어떻게든 자세를 갖추려는 한령을 보면서 눈을 예리하게 떴다.

이미 한령이 감염된 독은 영체의 구성 성분부터 잘게 부수고 있노라고,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위험하다고, 용신안이 말하고 있었다.

이미 한 차례 죽었던 녀석에게 또 다른 죽음이라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모순인지.

문제는 소울 컬렉션에서 제공되는 흑기도 중독 속도를 더디게만 할 뿐, 해독에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괴랄’을 주시고도 이렇게 되었으니. 면목이 없습니다.」

연우는 괴·력·난·신을 각각 한령, 샤논, 부, 레베카에게 나눠 준 상태였다. 괴랄이 아홉 개의 칼을 부리는 한령의 칼춤에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전력은 도무신 때보다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었지만. 베이럭에게는 패퇴하고 말았다.

“누구라고?”

「안티 베놈이었습니다.」

베이럭.

그놈이 엘로힘에 있었을 줄이야.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것도 무시 못 할 독을 갖고 있었다.

녀석에게 이런 성질의 독이 있었던가?

없었다.

그렇다는 건.

‘정우가 죽고 난 후에 만든 새로운 독이란 뜻.’

연우는 문득 28층에서 지나쳤던 베이럭의 섬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증발한 듯 자취를 감추고 휑하니 남아 있던 연구소. 그곳에서 갖가지 실험이 행해졌던 것은 분명했다.

거기서 연구하던 것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알아내지 못했지만. 그것과 연관이 있는 결과물은 아닐는지.

독은 지독해도 너무 지독했다. 데스 노블인 한령에게 중상을 입히고, 그와 같이 딸려 보냈던 그림자 군단 중 상당수가 폐기 처분되었다.

연우로서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쩌면 칠흑왕의 권능에 맞설 수 있는 무기가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르니.

“부.”

「하명. 하십시. 오.」

“해결법을 찾아라. 어떻게든.”

「명. 을 받듭. 니다.」

스르륵-

부가 표홀하게 자취를 감추고, 브라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개인적으로 한번 연구를 해 봄세. 이 독의 성질, 뭔가 수상쩍어.”

“부탁드리겠습니다.”

연우는 브라함에게 고개를 숙이고, 한령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한령의 영체는 색이 엷어지면서 서서히 흩어지려 하고 있었다.

「염치 불고하고, 주군께 간곡히 요청드릴 것이 있습니다.」

“…….”

연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한령은 연우가 반드시 자신의 유언을 들어 주리란 걸 아는 듯, 담담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여러모로 귀찮으시겠지만. 불필요하다고 여기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사라지고 난 후에도. 부디 못난 아들을 보살펴 주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까지 손을 꼭 붙잡으며 동생을 부탁한다고 간절히 말씀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언뜻 떠올랐다.

자신이 죽어 가는 와중에도.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은 똑같은 걸까.

「성정이 못나고, 한때 큰 잘못을 저지르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어미 없이 자라야만 했고, 부족한 제 손에서 커야만 했던 아이입니다. 부디 가련하게 여겨 주십시오. 많이 바라지는 않겠습니다.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만. 스스로 일어날 수 있을 때까지만 돌봐 주십시오.」

그렇기에.

“아니. 그럴 생각 없다.”

연우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

한령은 자신의 마지막 바람이 끊어졌다는 사실에 조용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런 그를 보면서. 연우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네가 직접 챙기란 뜻이다.”

「무슨……?」

“마셔라.”

연우는 다시 고개를 천천히 드는 한령에게 유리병을 던졌다.

「이게 무엇입니까?」

“엘릭서.”

「……!」

한령의 인페르노 사이트가 확 하고 커졌다. 연우에게 엘릭서가 어떤 의미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주군, 이것은……!」

“갖고 있는 전승이 전승이니만큼, 영체에도 큰 효과가 있을 것이다. 만약 효과가 부족하다면, 어떻게든 해결책을 마련할 테니 죽는다느니 하는 소리 따윈 절대 하지 마라.”

「하지만!」

“잊지 마라. 너는 나의 권속. 죽는 건 허락지 않아.”

「주군…….」

한령은 감격에 젖은 눈빛으로 연우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칼 한 자루를 바닥에다 꽂았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제 이 목숨이 다하는 한, 주군께서 걷고자 하시는 길, 바라시는 종착지까지 바로 곁에서 보필할 것입니다.」

충성 맹세를 한 이후, 엘릭서를 마시기 시작한 한령을 보면서.

연우는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

‘이거면 되겠지?’

『응. 이걸로 만족해. 고마워, 주인.』

‘고맙다는 말은 내가 해야겠지. 이해해 줘서 고맙다.’

연우는 가볍게 웃는 니케의 웃음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사실 그는 아주 잠깐 갈등을 했었다. 한령을 버릴지, 아니면 살릴지에 대해서.

사실 샤논과 다르게 한령은 그와 처음부터 원수로 만난 적. 니케의 어머니인 피닉스를 죽였던 자였고, 당시에는 그만한 재료가 없었기에 아들을 볼모로 삼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령에 버금가는, 아니, 잘하면 그 이상 되는 재료들도 있었다. 그러니 한령을 폐기 처분하고, 다른 녀석을 데스 노블로 만들어도 될 일이었지만.

-그러지 마, 주인. 살려 줘. 나랑 똑같은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아.

니케가 툭 하고 던진 말이 연우의 마음을 움직였다. 마지막까지 아들을 걱정하는 한령에게서, 니케는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이다.

‘어쩌면 네가 나보다 더 어른일지도 모르겠다.’

원수를 사랑으로 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아마 한령도 연결 고리를 통해 니케의 부탁을 알았을 테지.

『히히. 대신에 앞으로 한령은 내가 부려도 되지?』

니케의 농담을 그렇게 들으면서.

“샤논.”

스르륵-

연우는 조용히 그림자를 열고 나타난 샤논을 돌아보았다. 조용히 부복한 샤논 뒤쪽으로 디스 플루토가 조용히 시립해 있었다.

언제나 농담을 즐겨 하던 샤논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살벌한 기세를 띠고 있었다.

“라퓨타의 항행로를 돌려라.”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순간, 엘로힘의 외우주로 곧장 향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저들도 천치가 아니고서야 벌써 방비를 해 놨을 것이다. 지금 쳐들어가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공격 루트를 조금 선회할 필요가 있었다.

“탑 외 지역.”

연우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거기서 아르티야가 되돌아왔다는 사실을 공표할 것이다. 그리고 선전 포고도 함께. 첫 번째 대상은 엘로힘이다.”

탑에서 살아가는 거주민들은 이제 곧 선택해야만 할 것이다. 어디에 서야 할지를.

아르티야에 설 것인지.

아니면.

적의 편에 서서 그와 맞설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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